〈 131화 〉봄개학
교정을 지나갈 때, 최아란과 몰래 들어왔던 날이 떠올랐다.
그때는 강당 뒤에서 따먹히는 줄 알았는데.
'학교에서 첫 경험은 누가 떼주려나.'
'오석준'으로서 급식일 때, 공부하느라 여자친구를 사귄 적이 없었다. 전액 장학금에 홀려서 지방대 간 다음부터 지방대의 분위기에 휩쓸려 공부도 안 하고 여자를 많이 사귀었다.
강의실이나 동아리방에서도 해보긴 했는데, 급식 때 교실에서 해본 적은 없어서 기대됐다.
김하늘과 함께 교실에 들어서자 수쌍의 눈이 우리 쪽을 쳐다봤다. 눈에 띄는 조합인 모양이었다. 그러다가 곧 시선이 떨어져나갔다.
"김하늘이, 또 남편이랑 같이 왔냐?"
"지랄."
김하늘에게 인사하는 것은 소희정이었다.
소희정은 슬렌더한 체형에 여자치고 큰 키...라지만 170cm 정도였다.
그리고 아버지가 박수무당이었다.
"어라? 너 누구야?"
소희정이 그렇게 말하자, 처음에는 나 뒤에 누군가한테 말한 줄 알았다.
그런데 소희정이 빤히 날 쳐다봤다.
"지금 나한테 물어본 거야?"
"어떻게 된 거지..."
소희정이 내 되물음에 대답 않고, 혼자 중얼거렸다. 그것에 나는 닭살이 올라왔다. 소희정, 얘 신기있어서 내 영혼이라도 본 건가?
김하늘이 소희정을 툭 쳤다.
"뭔 소리하는 겨."
"아... 아무것도 아니야."
소희정은 계속 내가 '이상하게' 보이는 것인지 힐끔거렸다.
'설마 무당이 귀신을 진짜로 보는 거였나... 아니, 일단 내가 '신재준'의 몸에 빙의했잖아. 영혼은 있긴 했던 거였네...'
나는 신을 믿지 않았다. 무당도 안 믿었고, 사주팔자나 타로점도 믿지 않았다.
21세기 과학 시대에 영혼이란 초자연적인 것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고 생각한 까닭이었다.
하지만 초자연적인 현상을 겪었다... 무당의 딸인 소희정이 내 영혼을 알아채는 것도 어쩌면 가능한 일이었다. 전혀 생각지도 못했는데...
'나중에 소희정한 물어봐야겠네...'
김하늘이 없을 때, 단 둘이.
만약 소희정이 신기가 있고, 내 '영혼'이 바뀐 것을 파악했다면 그때는...
'아무것도 안 할 거.'
아무것도 할 거였다. 뭔가 할 필요가 없었다. 소희정이 신기가 있고, 신안(神眼)이 있어서 내 영혼을 꿰뚫어봤다고 한들 상관없었다.
소희정의 남들에게 얘기하고 다닌다고 한들 '초자연적인 일'이므로, 절대다수가 헛소리로 취급할 것이기에.
'그래도 궁금하네. 내 짐작대로, 영혼이 뒤바뀐 내가 소희정 눈에는 '이상하게' 보이는 건지.'
김하늘과 소희정을 내버려두고, 나예성의 옆자리로 갔다. 그는 이어폰을 귀에 꽂은채 책상에 엎드리고 있었다.
'신재준'의 기억에 따르면 성연중 1~3학년일 때 봄개학 보충수업 때는, 자유롭게 앉도록 해줬다. 정규수업할 때 자리가 정해져있기 마련인 것과 다르게.
'성연고도 마찬가지겠지?'
슬슬 아침조례를 알리는 종이 울릴 때가 되었다.
내 옆자리에 앉은 나예성은 엎드려 잠만 잤다. 군데군데 자리가 비어있던 책상이 채워졌다.
"야. 그거 찐이냐?"
"어? 어..."
"내놔 봐. 한 번 입어보자."
"아, 안 되는데."
뒤쪽에서 뚱뚱한 여자애가 찐따 같은 여자애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바람막이를 빼앗으려고 굴었다.
"시발, 한 번만 입어보자고. 한 번 입는다고 닳냐?"
저 뚱뚱한 여자애는 '고혜미'라는 일진이 있었다. 초고도비만인데 미니스커트나 다름없는 교복 치마를 입어서 안구테러를 자행하는 여자였다.
'신재준'의 기억에 따르면 일진들의 서열에서 밑바닥인 여학생이었다. 같은 일진들한테도 장난을 당하는데, 언제 한 번은 그녀의 긴 머리카락으로 얼굴을 가려 작고 계란형이게 만들어 사진을 찍었다.
그 사진을 찍어서 복도에 지나다니는 학생들에게 보여줬는데 '신재준'도 그 사진을 본 적 있었다.
머리카락으로 얼굴의 살들을 감추자, 전형적인 계란형 미녀의 얼굴로 찍혀있었다.
'살 빼면 미녀가 될 복권.'
"오, 따뜻한데? 나 잠깐만 입을게."
"아..."
"왜? 꼽냐, 시발아?"
고혜미가 벌떡 일어서서 찐따를 위협했다.
"아, 아니야... 혜미야... 화내지 마."
그러자 찐따가 얼른 고혜미를 달래기 시작했다.
정색하던 고혜미는 위협을 풀고 자리에 앉았다.
찐따는 왜소한 어깨를 움츠렸다.
'왜 저렇게 당하고 살지.'
나 같으면 대들었을 건데. 체급 차이가 심해서 얻어터지는 한이 있더래도, 건드리면 반항을 한다는 걸 보여줘서 괴롭힘 받는 것을 끊어버렸을 것이었다.
'고혜미... 뚱보면서 미남은 엄청 밝히지.'
'신재준'에 기억에 따르면 맨날 잘 생겼다 싶은 남학생들에게 고백하고 차이길 반복했다. 당연하게도 '신재준'과 나예성도 고혜미에게 고백 받은 적이 있었다. 물론, 둘 다 고혜미의 고백을 거절했었다.
방송스피커로 종이 울렸다.
울리는 종소리는 태연고 시절의 그 종소리와는 다른 타입이었다.
그래도 학교에서 종소리라는 것을 듣자, 드디어 진짜 학교 생활 시작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예성이 일어났다.
"잘 잤냐?"
"...오랜만에 본다?"
"그러게 말이다."
나예성이 막 깬 터라 졸린 눈으로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좋았냐?"
밑도 끝도 없는 질문이었으나, 뭘 말하는지 짐작이 갔다.
"카톡으로 대답했잖아."
"킥킥."
최아란의 집에서 처음 따먹혔을 때, 나는 나예성의 집에 가겠다고 신재연과 신재희에게 말해뒀었다. 나예성에게는 혹시 그 둘에게 연락이 오면 내 알리바이 좀 만들어달라고 했고.
나예성은 내가 최아란과 잤다는 걸 알고 있었다. 카톡으로 나예성은 '좋았냐?'는 물음을 했고, 나는 좋았다고 대답했었다.
'이 놈, 입 가벼운 놈이 아니니까. 내가 최아란하고 잔 거 알리고 다니진 않겠지.'
나예성의 비밀을 내가 갖고 있기도 하니, 그 역시 내 비밀을 지키려고 노력할 것이었다.
남자 담임선생님에게 아침 조례를 했고, 10분 쉬는 시간 뒤에 첫 수업을 시작했다. 영어였다. 30대 후반의 남자 선생님이 들어왔다.
"옆에 자는 애들 깨어라. 뭔 아침부터 자고 있어."
"샘. 지금 원래 자고 있을 시간이라고요."
김하늘이 마치 학생들을 대표하듯 말했다. 교실에서 한두 명씩 있는 선생님과 문답을 주고 받는 애가, 이 교실에선 김하늘이었다.
"나도 그래. 빨리 교재 펴라."
오랜만에 듣는 고등학교 영어 수업은 재밌었다. 잊고 있었던 고등학교 영어가 새록새록 떠올랐다. '오석준' 때 열심히 공부했던 것들을 몇 년 지나면서 다 잊어버렸었는데, 수업을 받으니 떠오르기 시작했다.
나예성은 수업 받는 내내 눈을 감고 있었다. 세워둔 고개가 잠결에 책상을 박으려고 하자, 그는 깜짝 놀라서 고개를 퍼뜩 들었다.
그는 열심히 필기를 되어있는 내 영어 교재를 흘낏 보더니 주위를 둘러봤다.
나도 따라서 곁눈질로 둘러보니 대다수 학생이 책상 위에 엎드려있었다. 보충수업이라 그런지 잠을 자도 선생님은 깨우지 않았다. 대놓고 자도 된다는 걸 알게 된 학생들이 훅훅 책상 위로 쓰러졌다.
교실의 공기가 후덥지근해지도록 나오고 있는 히터도 학생들의 수면을 재촉했다.
대놓고 자도 되는 걸 깨달은 나예성도 그냥 엎드리고 잤다.
결국 영어 보충수업을 열심히 듣는 것은 나 빼고 몇 명 안 됐다.
3명 정도.
반의 정원이 30명이었는데, 나까지 4명 정도만 공부를 열심히 하는 얘기였다.
나야 다른 학생들이 공부를 안 할수록 내신 1등급을 노리기 쉬우니 잘 됐다 싶었다.
50분이 흐르고 보충수업이 종료됐다.
나는 수업시간 내내, 머리 한 켠으로 궁금했기에 소희정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엎드려서 자고 있었다. 소희정 옆에 앉은 김하늘 역시 마찬가지였다.
난 소희정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으응... 아."
소희정이 날 올려다봤는데, 눈의 초점이 잘 안잡혔는지 몇 번 감았다가 떴다.
그리고 내 얼굴을 보고 미간을 좁혔다.
내가 나가자고 턱짓 하자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날씨가 추워서 복도에 나오는 학생 숫자가 적었다. 다들 따뜻한 교실에 박혀있는 걸 선택했다. 보충수업 중인 지금은 매점도 닫혀있으니 더더욱 교실 밖으로 나오려고 하지 않았다.
"왜 보자고 한 거야...?"
"아침에 나보고 왜 그런 질문을 했는지 궁금해서."
"내, 내가 뭐라고 했더라...?"
소희정은 내 눈을 피하며 모르쇠로 나왔다. 아침에 대놓고 나한테 이상한 질문을 던졌을 때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아침에 나 한테 '어라? 너 누구야?' 이랬잖아. 그 다음에는 , '어떻게 된 거지...' 이랬고. 왜 그랬냐고."
"으... 사실은."
"사실은?"
소희정이 내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내가 신기가 있잖아... 집안도 무당이고."
소희정은 자신의 집이 무당인 걸 다른 친구들에겐 비밀로 하고 있었다.
그녀의 집이 무당인 것을 아는 건 나와 나예성, 김하늘 이렇게 셋 뿐이었다. 그녀의 집에 놀러간 건 나와 김하늘 둘 뿐이었고.
그걸 들키기 싫어, 누가 들을까봐 내 귀에 속삭이는 거였다.
"그래서?"
"지금 네 얼굴이 다른 사람 얼굴로 보여... 아, 근데 시각적으론 그대로야. 그... 육감적으로 느껴지기엔 다른 사람처럼 보인달까... 아씨. 갑자기 왜 이런지 모르겠네."
나는 왜 그런지 알 것 같았다.
"흐음... 다른 사람처럼 보인다고? 그 생김새 좀 말해봐."
"무, 무섭게 왜 그런 걸 물어보냐."
"흐흫... 야, 너한테 그런 말 듣는 내가 무서워야 하는 거 아니냐? 왜 네가 무서워해?"
소희정은 내가 '신재준'의 몸을 차지한 악귀 같은 것이라고 생각해 겁 먹은 듯했다.
만에 하나 내가 귀신이라고 쳐도, 나는 착한 귀신일 터였다.
내가 이 몸에 들어오지 않았다면, '신재준'은 신재연과 신재희한테 강간 당한 것 때문에 평생 불행했을 것이니.
"잘 생긴 남자로 보여. 지금 네 얼굴보다 더 남자답다고 해야 하나..."
"좀 더 디테일한 건?"
"아, 나 아직 신내림 받은 게 아니라 그런지 흐릿해서... 고집세보이는 인상인데."
'오석준'으로 살 때 많이 듣던 얘기였다. '너 고집 셀 것 같은 얼굴'이라고.
소희정은 정말 '오석준'의 얼굴을 보고 있는 걸까?
난 소희정의 두 눈을 들여다봤다. 혹시 그녀의 눈을 통해 '오석준'의 얼굴을 볼 수 있을까 호기심이 들어서.
그녀의 검은 자위에 비치는 내 얼굴은... 요 한 달 간 질리도록 거울을 통해 봐왔던 '신재준'의 그것이었다. 아쉽게도 볼 수는 없었다.
소희정은 얼굴을 붉히며 두 눈을 내리깔았다.
"기, 기분 나쁘지?"
지금의 소희정을 보고 깨달았다.
소희정이 내 영혼이 바뀐 걸 나불거리고 다닐 사람은 아닐 것이란 걸.
그녀도 알고 있는 듯했다. 자신이 그 '사실'을 얘기하고 다녀도 모두들 헛소리로 치부할 것이며, 자신만 이상한 사람이 될 것이란 걸.
"아, 다 농담이었어. 하하..."
소희정은 자신이 했던 말을 모두 날 놀리려고 했던 '농담'으로 만들려고 굴었다.
나는 그것을 받아주기로 했다.
"농담이었구나? 뭐, 기분 나쁜 건 없었어. 오싹했긴 했는데."
나중에 소희정이 무당되면 얘한테 점을 봐야겠다. 얘 용한 것 같았다.
/ / /
'와씨... 뭔 일이지.'
소희정은 신재준에게 화장실 가겠다고 말하고, 화장실로 들어왔다.
눈알이 빠질 것 같았다. 뜨겁게 달아올라 익을 것 같은 느낌. 아직 신내림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 귀신을 보면 눈이 지금처럼 아파왔다.
'재준이가 지금 귀신한테 씌인 건가? 아니, 그렇다기 보다는 융합된 것 같았는데...'
신재준이 더더욱 이상하게 여길까봐, 디테일하게 털어놓지 못했다.
그의 얼굴은 20대 중반 같은 준수하게 생긴 남성의 얼굴과 10대 후반의 귀여운 신재준의 얼굴이 뒤섞여보였다.
마치 매직따조를 다른 각도로 보면 두 가지 그림이 섞여보이는 것처럼 말이다.
신재준을 아버지한테 데려가야할까 망설여졌다.
초등학생 때, 뭣 모르고 달동네 꼭대기에 있는 자신의 집에 신재준과 김하늘을 데려간 적 있었다.
그때 신재준은 무당집을 무서워했었다.
'내가 지금 이상한 소리했잖아. 그런 상태에서 무당인 우리 아버지 보러 가자고 하면... 엄청 질색하겠지. 에휴... 그냥 나한테 정신병이 있는 거다, 생각하자...'
소희정은 여름방학 초기에는 김하늘과 놀았으나, 그 다음에는 영산에 올라가 작두 타는 법을 배우거나, 아버지가 출장 굿을 하는 걸 도왔다.
박수무당이 대부분인 무속계에서 여자의 몸으로 무당이 되는 게 싫었지만, 운명을 거부하면 신병이 들고 이순례 장군이 꿈에 나타나 괴롭혀서 힘들었다. 결국 받아들이기로 했다.
'빌어먹을 정신병... 사람을 평범하게 못 살게 해.'
그녀는 자신의 그런 현상을 정신에 병이 생긴 것이라고 여겼다.
어릴 적부터 박수무당인 아버지를 보고 자라면서 21세기에 무슨 귀신이 있나 생각하며, 내심 아버지를 거북해 했다.
그러다가 자신도 귀신을 보게 됐을 때부터는 자신에게 '정신병'이 걸린 거고, 아버지도 똑같은 정신병이 걸린 거라고 생각했다. 유전되는 정신병이라고 여겼다.
'하아... 근데...'
신재준에게 겹쳐진 남성의 얼굴을 떠올렸다.
가슴에 손을 올렸다. 두근거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