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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3화 〉누나 친구한테 따먹힘 (103/201)



〈 103화 〉누나 친구한테 따먹힘

월요일.

점심시간에 캠핑의 마지막으로 수제 탕수육과 짜장면을 해먹었다.

밀가루 반죽을 했던 그릇을 개수대에서 세척하고, 짜장면의 흔적이 남아있는 그릇들과 수저들을 설거지한 뒤, 텐트로 돌아갔다.

'이젠 돌아가겠네.'

텐트에서 뒷정리를 마치고, 쓰레기를 버리고, 챙길 것은 다 챙겼다. 전기릴선도 감아다가 텐트 안에 들여넣었다.


최아란이 텐트의 지퍼를 닫고 자물쇠로 문단속을 했다.


"자, 돌아갑시다."
"잘 놀다간다."
"재밌었어요, 언니."
"덕분에 가족 여행했네. 고마워, 누나."
"흐흫... 나도 혼자 왔으면 심심했을 거고, 맛 없는 식사했을 텐데. 덕분에 좋았어."


훈훈하구만.


어제 함박눈이 내린 뒤라서 그런지 날씨가 무척 추웠다. 얼른 주차장으로 이동, 나는 최아란의 차에 올라탔다.

신재연과 신재희는 렌트카에 올라탔고.


"짐은 뒷칸에 둬."
"응."


그간 갈아입은 옷을 넣어둔 숄더백을 뒤에 두었다.


올 때와는 다르게 SUV의 짐칸이 휑했다. 대부분의 캠핑 용품을 장박지에 두고 가기 때문이었다.

따듯한 히터가 불어왔다. 점차 열이 오르는 열선 시트에 몸을 편하게 기댔다.

"자려고?"
"응."
"그래..."

어제부터 최아란과 단둘이 남게 될 때, 최대한 말을 아끼고 있었다.


신재연과 신재희 앞에서는 최아란에게 잘 웃고, 말을  받아줬지만, 단둘이 있을 때는 일부러 쌀쌀 맞게 대했다.

"준아."
"응?"
"우리집에 놀러올래?"


'하루도 못 견뎌서 넘어와버리네.'

나와 최아란 둘 중에 아쉬운 쪽은 최아란이었다.

'임시' 딱지를 떼고 싶은 것도 최아란.

내가 헤어지자고 하면 눈물 흘리는 것도 최아란.

'그래. 내가 하고 싶은대로 다 해줘야지.'


"누나, 무서운 사람이라며?"

자신은 무서운 사람이니까 자신의 집에서 놀러오면 안 된다고 했었다.

"생각해봤는데... 잘 참아낼 수 있을  같아."


'잘 참지 않아도 되는데.'

"그래? 그럼 언제 놀러갈까?"
"오늘은 쉬어야겠지? 내일 올래?"
"누나, 내일  가잖아. 밤에 나 불러서 뭐하려고?"
"아... 그, 그럼 주말에 올래?"
"그냥 오늘 갈까? 누나 집에 도착해도 낮일 거잖아."
"그럴까. 그럼 재연이한테는 뭐라고 말하지?"
"커플끼리 데이트 간다고 하면 되지."
"아..."
"내가 누나한테 전화해서 말할까?"
"그렇게 해줄래."

'어쩌면 오늘 따먹힐 지도?'

나는 옆에 앉아있는 최아란의 옆모습을 살폈다.


외꺼풀의 커다란 눈. 오뚝한 코에 분홍빛 입술. 노메이크 상태인데 피부가 새하얬다.


두툼한 외투를 입고 있어서 오히려 가슴이 납작한 착각이 들지만 사실 벗으면 굉장한 가슴이었다.

다리는 길고 가늘었다. 엑셀 위로 올라가 있는 오른발. 신은 운동화가 작았다. 키가 큰  치고, 귀여운 발이었다.


나는 신재연에게 전화를 걸었다.

[왜?]
"나 아란이 누나랑 데이트 좀 하다 올게."
[그래. 그렇게 해. 외박은 하지 말고.]
"어? 누나가 나한테 외박 금지 먹이는 거 처음이네."
[다른 때에는 예성이랑 노는 거였잖아. 아란이랑 놀 때는 다르지.]
"알았어. 오늘 안에는 들어갈게."
[그래.]


전화를 끊었다.

"흐흫... 재연이가 외박하지 말래?"
"응."
"널 걱정해주는 거니까 너무 싫어하진 마."

최아란은 내가 외박 금지 당한 걸 싫어할 거라고 짐작했나 보다.

"내가 언제 싫댔나?"
"내가 괜한 걱정을 했나 보네."
"괜한 걱정 맞아. 누나야 말로 싫은 거 아니야? 내가 외박금지 당해서."
"준이, 너 또 그런 장난친다..."
"그런 장난이 어떤 장난인데?"
"그렇게 누나 놀리면 못 써."
"왜?"
"준아...  봐주라..."

최아란의 사정에 놀리던 것을 멈추기로 했다.


"근데 누나는 어디 살아?"
"태연시."
"수원에서 바로 태연시 가는  더 빠를 텐데.  보려고 맨날 우회를 했겠네?"


신재연과 최아란이 일하는 회사는 수원이 있었다. 최아란은  부탁에 퇴근할 때마다 신재연을 우리집에 바래다주고 있었다.

"흐흫... 들켰네."
"누나는 원래 태연시에서 살았어?"
"어. 부모님이 태연시에서 신혼집을 차리셔서. 태연시가 고향이지."

'신재준'에게 태연시는 가까우면서  곳이었다.

태연시는 딱히 놀러갈만한 테마파크가 있는 곳도 아니었고, '신재준'의 친척이 살지도 않았다.

오히려 태연시에 사는 학생들이 성연시를 놀러오는 편일 것이었다. 성연시에 놀이공원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나는 태연시에 대해  알고 있었다.


'원래 내 고향이니까.'


'오석준'이 살던 곳이 태연시였다. '오석준'은 그곳에서 태어났다.


'이 세계에는 동일인물들이 많은데... 남녀역전세계의 '오석준'도 있을 수 있지 않을까?'

내가 알던 남자 대통령을 찾아보니, 소수인 남성 정치가  하나가 되어서 당을 이끌고 있었다.

골프에 관심없는 나도 알고 있는 골프의 황제 '타이거 우즈'도 이 세계에서 남자 골프 세계에서 실력자였다.

이 세계에 떨어지고서 '오석준'도 태연시에서 지내고 있으려나 생각은 해봤다.

그런데 남녀역전세계에 살고 있는 '오석준'을 만날 이유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 찾아보지 않았다.

그런데 막상 '태연시 토박이'를 만나자 물어보고 싶어졌다.

"혹시 누나, 태연고 나왔어?"
"어? 응. 왜? 태연고에 아는 사람이라도 있어?"

태연시나 태연고는 딱히 부자도시이거나 부자가 다니는 학교는 아니었다.

그런데도 재벌 핏줄인 최아란이 평범한 도시에, 평범한 학교를 다닌 건 그녀의 모친이나 부친이 '회장의 막내'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었다.


"'오석준'이라는 사람 알아? 누나랑 동갑일 텐데."
"'오석준'...? 학교 다니면서 '석준아'이러면서 남이 부르는 거 몇 번 들어본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확실하진 않네. 왜? 아는 사람이야?"
"조금 안면있는 사이."


'그러고 보면 나도 태연고 다닐 때 '아란아!' 막 이러면서, 남이 부르는 거 들어본 것 같은데... 성씨와 얼굴을 모르니까, 그 '아란'이 최아란인지는 확신하지 못하겠네. 그래도 세상 좁네. 최아란도 태연고를 다녔을 줄이야.'


난 호기심에 SNS 어플을 실행하고 '오석준'을 검색해봤다.

여태까진 왠지 꺼려져서 검색하지 않았던 찾아보는 행위를 해봤다.

그러자 태연시에 거주하고 있고, 중소기업에 입사한 상태인 프로그래머 '오석준'을 금방 찾아냈다.


'이렇게 금방 찾을  있었네.'


오석준은 준수하게 생긴 얼굴은 그대로였고, SNS에 게시한 글이 많았다.

대부분 애인과 데이트하는 글들이었다.


'오... 내가 '오석준'으로서 마지막으로 관심 가졌던 여자랑 사귀고 있네?'


오석준은 카페 알바생과 사귀고 있었다. 키가 작고 귀여운 얼굴이었다.

'예전에는 귀여워서 관심이 갔는데... 지금 보니 영 별로네.'


비슷한 귀여운 스타일인 정수린보다 아쉬운 외모였다.

김하늘, 신재연, 신재희, 최아란. 이들 모두가 빼어난 미녀였던 터라  눈이 높아져버린 것도 없잖아 있으리라.


하여튼 이 세계의 '오석준'은  살고 있는 듯했다.


'만나지는 말아야지.'


 세계의 '오석준'도 '강간 당하고 싶은 성벽'이 있을 듯싶었다. 만약 그렇다면 나의 라이벌이 될 뿐이었다.


2시간 정도 지나 최아란의 차는 태연시에 접어들었다. 태연역을 지나자 강이 보이기 시작했다.

태연CGV가 입주한 거대한 복합상가 건물을 지났다.  복합상가 맞은편에는 나예성, 허현주 커플과 들렸던 한식 레스토랑이 입주한 고층 상가가 있었다.

"저기  중턱에 건물 보이지? 내가 다녔던 학교야. 아, 저 학교에 다녔던 애랑 안면 있다고 했었지? 혹시 가봤어?"
"아니, 안 가봤어. 그 안면있다는 사람하고 그렇게 친한  아니고. 혹시 '오석준'이란 형을 만나도 누나는 그냥 아는 척 하지 마."
"응? 알았어."


내가 다녔었던  중턱에 있는 학교를, 뭔가  다른 세계에서 바라봤다.


태연고는 등산하다시피하며 등교해야했다.

"흐흫... 태연고 등굣길 완전 빙판길 됐겠다. 겨울에 등굣길 빙판되면 어떻게 올라가는지 알아?"
"줄 잡고."
"오, 어떻게 알았어?"

등굣길이 얼면, 인도와 차도를 구분짓는 체인을 잡고 오를 수밖에 없었다.


나도 태연고 출신이기에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다.

"그냥 뭐라도 잡고 가야 되겠거니 해서."


태연고와 관련된 썰을 풀고 싶었다. 아는 척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선 내가 '어떻게 아는지' 이유를 거짓말로 말해야 했다. 그런 거짓말을 신경쓰기가 번거로웠다. 그냥 입을 다물었다.

최아란의 차는 태연시 공설운동장 쪽으로 꺾었다. 운동장 주위에 고급 아파트 단지가 세워져있었다.

성연시의 둘체도 아파트보단 급이 낮지만, 그래도 월급쟁이였던 '오석준'으로서는 입주를 꿈도  꿨던 아파트였다.

"이 아파트에 살아? 혼자?"
"응."


최아란은 그 아파트 단지에 입구로 향했다. 무인기가 최아란의 차량 번호판을 검사하자, 주차차단기 바가 올라갔다.

최아란은 주차하더니 내 짐과 자신의 짐을 들었다. 캠핑장 주차장에서 우리끼리 몰래 마셨던 와인이 숨겨진 상자까지 챙겼다.


"내리자."

 짐을 내가 들려고 하니까, 그녀가 괜찮다고 만류했다.

스마트키를 아파트현관에 갖다대자 닫혀있던 유리문이 열렸다.


엘리베이터에 오를 때까지 나와 최아란은 말이 없었다.


최아란의 집은 꼭대기층인 49층이었다.

초고층으로 급격히 치솟는 엘레베이터였다.


귀가 아파와 침을 꼴깍 삼켰다.

"아, 먹을 거라도 사갈  그랬나?"


침묵이 어색했는지 최아란이 말했다.


"집에 먹을 거 없어?"
"있긴 한데."
"집에 있는 건 비싼 거라 나 주기 싫어서 그래?"
"아, 아니... 술안주 뿐이라."
"우리집 꽐라돼서 왔던 거 생각나네."
"흐흫...  덕분에 우리가 이렇게 만났지."

최아란의 아파트는 둘체도 아파트처럼 1층을 1세대가 쓰진 않았다. 층마다 4개 세대가 있는데 최아란의 집은 그중 하나였다.


'오... 넓네.'


둘체도 아파트 만큼은 아니지만, 다 무너져가는  집에 비교하면 궁궐이나 다름없었다.


"방이 몇 개야?"
"4개."
"혼자 살면서  방이 그렇게 많아."
"흐흫... 준아, 하나 가질래?"
"주면 거절 안 함."
"...흐흫..."


이번에도 농담으로 한 건데, 순간 최아란의 사고에 버퍼링이 걸린 듯했다. 좀 늦게 대답이 돌아왔다.

거실로 가서 통유리 밖으로 보이는 뷰를 내다보았다.


태연시의 풍경이 아래 담겨있었다. 공설운동장, CGV를 품은 복합상가, 강, 저 멀리 산 중턱에 위치한 태연고까지.


'시발. 보육원도 보이네.'

'오석준'으로서 어린 시절을 보냈던 보육원도 어느  중턱에서 분홍색 외벽과 파란색 지붕을 드러내고 있었다.


"짐은 대충 내려놔. 외투 나 주고."


난 최아란이 시키는 대로 집을 내려놓고, 외투를 맡겼다.

"누나는 짐 정리 좀 하고, 옷 갈아입고 올게."
"그래."

잠시 뒤, 그녀가 간편한 복장으로 갈아입고 왔다.

집의 온도를 높여놨기에 반바지에 반팔 차림이었다.

하얀 셔츠 속으로 꽃문양이 들어간 자주색 브래지어가 비쳤다.

"준아.  좋아해?"
"회? 좋지."
"저녁에 방어회 뜨는 거 보여줄까?"
"오...  뜰 줄 알았어? 캠핑장에선   기술을 선보이지 않은 것이지?"
"흐흫... 네가 해준 음식을 먹고 싶어서."
"나 회 뜰 줄 모르는데. 한  가르쳐줘."
"아... 내 언니가 하는  어깨 너머로 보고 대충 따라하는 거라, 나한테 배우면  돼."
"누나의 쌍둥이 언니?"
"응. 정확하게는 첫째 언니."


언니들과 사이가 나쁘다고 말하는 것치고, 언니가 직접 떠준 회도 얻어먹는 모양이었다.

벽에는 심심하지 않게 초현실적인 그림이 잔뜩 걸려있었다.


뭉크의 절규 같은 느낌의 그림이나, 아니면 벽시계가 액체처럼 녹아서 의자 아래로 흘러내리는 중인 듯한 그림.


나는 최아란이 잠시 자리를 비운 동안,  그림들을 감상했었다.

최아란이 나타나자 그 그림들을 하나하나 대충 훑으며 지나쳤다.

"이 그림들 뭐야? 정신병 올 것 같은데."
"윽..."
"왜 '윽'소리를 내?"
"내가 취미삼아 그린 거라."
"캠핑도 해, 회도 떠, 그림도 그려. 도대체 취미가 몇 개야?"
"흐흫... 취미는 또 있는데. 아마 준이 너말고, 재희가 좋아할 것 같은 취미."


최아란은 그렇게 말하며 작은 방 하나를 열었다.

캄캄한 방에 전등을 켜자, 롤 챔피언들의 피규어가 벽이며 방 중앙의 전시대며 가득찬 방이 나타났다.

"피규어 수집하는 취미도 있어?"
"그리고 딴 것도."


최아란이 다른 방을 열어줬다.


 방은 아까 방보다 컸는데 각종 콘솔 기기들과 게임 디스크들, 그리고 VR 헤드셋도 보였고, 삼면으로 늘어선 PC모니터도 보였다. 건담 머리 같이 생긴 컴퓨터 본체가 화려한 LED를 뽐내며 반짝거렸다. 구석에 치워진 레이스 휠도 보였다.


'재희가 좋아하겠네...'


"누나, 좋아하는 거면 꼭 수집하는 스타일이지?"
"엇. 어떻게 알았지?"
"아까 방이랑 이 방을 보고 어떻게 몰라."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아까의 거실뷰도 그렇고, 취미에 돈을 왕창 쏟아붇는 재력도 그렇고.


'하늘이 말고, 아란이 하고 결혼할까...'


속물적이게도 그런 생각을 해버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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