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8화 〉누나 친구한테 따먹힘
'와우...'
몸매가 좋을 것을 예상했으나 이토록 운동으로 아름다운 근육을 갖춘 여자일 줄은 예상치 못했다.
"만져봐도 돼?"
"어? 마, 만져, 만져."
피부는 매끈했다. 누르면 복근이 돌처럼 단단했다. 11자를 그리고 있는 근육 경계를 그곳 역시 단단했다. 여자 복근을 만져본 것은 '오석준'일 때도 못해본 거라 신기했다.
근데 잠깐 사이 애교뱃살이 둥글게 튀어나왔다.
"누나, 지금 힘 주고 있지?"
"아, 그게... 고기랑 맥주를 너무 마셔가지고..."
"흐흫... 뱃살 보여줘 봐."
"아니... 준아."
"빨리. 귀여웠단 말이야."
"하아... 알았어."
그녀가 배에 힘을 풀자 11자 근육이 슬쩍 사라지고 뱃살이 튀어나왔다.
나는 손바닥 전체를 그 뱃살을 문질러봤다.
"임신 몇 개월이야?"
"준아, 나 원래 날씬해. 진짜야."
"흐흫... 믿어줄게."
"'믿어줄 일'이 아니라, 진짜로 그렇다니까 그러네... 아, 억울해."
처음에는 따뜻했던 그녀의 복부가 겨울 밤공기에 식어가기 시작했다.
"얼른 옷 입어. 춥겠다."
"더 만져보고 싶으면 만져."
"술배에 그렇게 자신 있어?"
"아..."
최아란이 원래 복부에 힘을 줘 근육을 그렸다.
"흐흫... 됐어. 다 만졌으니까. 그런데 허리디스크는 왜 걸린 거야?"
"집안 내력인가 봐. 내 가족들이랑 친척들이 허리디스크에 잘 걸려."
처음엔 최아란이 재벌이라서 돈의 힘이나 사회의 영향력으로 군면제 받는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다.
진짜 수술 받은 것이었다.
"준아."
"왜?"
"누나 립스틱 지웠는데... 키스하면 안 될까?"
"아까 말했잖아. 키스한 거 좀 후회한 것 같다고."
"여, 역시 안 되겠지?"
"하고 싶어?"
"아, 아니야. 하기 싫으면 하지 마..."
"그래, 그럼 하지 말자."
"어, 준아. 혹시 삐졌어?"
"어이없네. 내가 왜 삐져? '키스 안 해주니까 삐졌구나.' 뭐 이런 의심한 거야?"
"아, 아니야. 그런 의심 추호도 안 했어."
신재희 보지가 문제였다. 날 발정시켜놓고 자기 혼자 가버리고 끝이라니.
역시 샤워실에서 자위를 통해 성욕을 뽑았어야 했던 걸까.
강제로 키스해오지 않은 최아란 때문에 초조해졌다.
'참아야지. 어차피 신재연한테 풀면 돼. 아, 그런데 신재연 지금 생리하잖아.'
신재연이 생리 기간이라고 해서 날 안 따먹을 리는 없을 것 같고, 비위생적인 섹스를 하게 될 것 같았다.
"준아, 와인 마실래?"
"지금?"
"응, 차에 숨겨뒀어. 가져올까?"
"먹을래."
"오케이. 아, 바깥 춥잖아. 그냥 우리 차 안에 들어갈까?"
난 고개를 끄덕였다.
최아란이 주차되어있던 자신의 차에 다가가 스마트키를 조작해 잠금을 풀었다.
'산책 나오면서 차키를 가져나왔다고? 이렇게 될지도 모른다는 거 예상하고 챙긴 건가?'
아니면 귀중품이라고 생각해 지갑처럼 계속 차키를 가지고 다니는 것일 지도 모르겠다.
최아란은 운전석에, 나는 조수석에 탔다.
그녀는 뒤에 짐칸에 남겨두고 있었던 상자를 열었다. 레드와인과 와인잔, 와인오프너가 준비되어 있었다.
"근데 우리 술 먹고 들어간 거 눈치채지 않으려나?"
"들키지 않게 딱 한 잔만 마시자."
"그러면 되려나."
그녀가 와인 코르크 마개를 따고, 내게 와인잔을 주었다. 그녀가 와인 라벨이 보이도록 병을 쥐고, 내 잔의 볼록한 배 만큼 채워주었다.
"흐흫... 와인이라 두 손으로 안 받아도 될 텐데."
습관적으로 윗사람한테 받는 것처럼 두 손으로 와인잔을 쥐었다.
"누나, 내가 따라줄게."
"그래? 땡큐."
나예성이나 최아란이 했던 것처럼, 와인 라벨이 최아란에게 보이도록 쥐려고 했다. 그리고 따라주었다.
"흐흫... 와인 따르는 법은 어떻게 알았어? 방금 보고 배운 거야?"
"어."
나예성까지 언급하기 귀찮으니 대충 수긍했다.
내게 와인을 받은 최아란은 내게서 와인병을 가져갔다. 그리고 코르크 마개를 눌러 막았다. 짐칸 상자에 넣어 숨겼다.
나는 스월링인가 뭔가를 했다. 잔을 돌려 와인을 회오리치게 만들었다.
"오, 와인 먹을 줄 아네? 혹시 재연이한테 배웠어?"
인터넷으로 봤다고 구라칠까 하다가, 그녀를 자극하기로 했다.
'최아란에게 따먹힐 발판'으로 사귀는 것에 성공했으니, 슬슬 그녀한테 따먹힐 작업을 쳐야 했다.
"예진이한테."
실실 웃고 있던 최아란의 얼굴이 멈칫했다.
그랬다가 금방 태연함을 찾아 계속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예진이? 학교 친구야?"
"학교 친구는 아니고, 인터넷으로 만났어."
"인터넷으로? 혹시 여자야?"
"응."
난 즉석으로 강예진이라는 인물을 만들었다. '나예성'이 그 모티브였다.
처음엔 '김하늘'의 이름을 언급해 최아란을 자극해볼까도 했지만, 김하늘과 최아란이 서로 연락처까지 나눈 사이라 나 몰래 둘이 연락한다면 내 외도가 뽀록날 위험성이 있었다.
최아란이 김하늘이나 신재연, 신재희에게 '강예진'이 아냐고 물어볼 가능성도 있어서, 인터넷으로 사귄 친구라고 연막을 쳤다.
"인터넷에서 만난 사람은 조심해야할 텐데..."
"나도 조심하고, 또 조심하다가 만난 거야. 걱정하지 마."
"그런데 어쩌다가 그 예진이란 친구한테 와인을 배우게 됐어?"
"걔네 집에 놀러갔는데. 걔가 와인 있는데 먹고 싶냐고 해서, 호기심에 그렇다고 했어. 그때 예진이가 이렇게 잔을 흔들어 와인을 공기랑 만나게 하면 향이 풍부해진댔어."
"뭐? 인터넷으로 만난 여자의 집에 찾아간 거야? 위험하게."
"아니, 내가 애인가? 괜찮은 애 같아서 간 거야."
"준아. 하아..."
"왜 한숨 쉬어? 내가 뭐 잘못했어?"
"아니, 잘못 안 했... 그래, 너 잘못했어. 인터넷으로 만난 여자의 집에 가면 위험하단 말이야."
"나도 사람 볼 줄 알아."
"그게 문제가 아니라... 준아... 나는 널 믿어. 그런데, 다른 여자는 못 믿겠다."
나는 화난 척 와인을 원샷했다.
저번에 나예성의 집에서 마셨던 것보다 떫은 게 강했다. 그래도 과일향이 맛있었다.
"돌아갈게."
"준아, 화났니?"
"아니. 화 안 났어."
최아란은 차에서 내리는 손목을 붙잡았다.
"준아, 미안해. 난 그냥 네가 걱정돼서..."
"안 갈 테니까 손 놔."
최아란은 내 손목을 놓아주고, 자신도 와인을 원샷했다. 그리고 와인잔을 물티슈로 닦아낸 뒤, 와인병을 숨겨둔 상자에 도로 집어넣었다.
우리는 차에서 내렸다.
처음 우리 둘 사이에 흘렀던 훈훈한 공기는 사라졌다.
'단둘이 있을 때는 냉전 유지하면서, 신재연이나 재희가 볼 때는 평소처럼 친하게 지내는 모습 보여야지. 이러다가 며칠 후, '적절한 타이밍'에 '사귄 뒤에 곧 바로 사귄 것을 후회했었다'는 뉘앙스를 보여서 따먹히고...'
"..."
"주, 준아. 하늘 좀 볼래? 가로등 불빛 때문에 적지만 그래도 별 많다?"
"그러네."
냉전은 냉전인데, 보험은 걸어놔야했다.
"가로등 없는 곳으로 가면 더 많이 보일 거... 아! 어두운 곳 무서워한 댔지."
"아란이 누나."
"어, 어?"
"나 잘못한 거야? 예진이네 집 간 거."
"그렇다고... 생각해. 그 강예진이란 친구가 착해서 다행인데, 다른 인터넷에서 만난 사람들은 본색을 숨기고 있을 수도 있어."
"그럼 내가 '강예진' 만났고, 걔네 집에 놀러간 얘기. 우리 누나랑 재희, 하늘이한테 말하지 마. 알았지? 아란이 누나가 나 걱정하는 것처럼, 걱정끼치기 싫어서 그래."
"아, 알았어. 절대 안 말할게."
"누나, 나 졸려. 텐트로 돌아가자."
"응..."
최아란은 '괜히 혼냈나?' 싶은 후회하는 낯으로 내 옆을 걸었다.
신재연은 텐트 밖으로 나와있었다. 외투도 입지 않은 채였다.
그녀 앞에 있는 화로는 불이 꺼져있었다. 장작과 숯이 회색 재가 되어있었다.
그녀는 몸이 뜨겁다 보니 난로의 열기로 후끈한 텐트 내부가 더웠을 것이었다.
비닐로 된 창을 통해 텐트 안을 들여다보니, 신재희는 노트북에 마우스와 키보드, 이어폰을 모두 연결해 진지한 표정으로 게임을 하고 있었다.
신재연이 우릴 돌아봤다.
"산책은 다 했냐?"
"어, 준이가 이젠 졸렵대."
"아, 그래?"
신재연이 파쇄석 몇 개를 주워들어, 손 안에서 으깨려는 듯 힘을 주었다. 손 안에 파쇄석끼리 마찰이 일어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 재연이 화났네.'
이젠 자신이 날 독차지할 차례라고 생각한 모양인데, 내가 잔다니까 빡친 게 아닐까 싶었다. 내가 최아란과 데이트 다녀온 게 불쾌한 것도 있을 것 같고.
나와 신재연의 관계를 예상치도 못할 최아란의 경우, 신재연의 모습이 그저 돌 갖고 장난치는 모습으로만 보일 것이었다.
"계속 밖에 있을 거냐?"
"어, 좀 더워서."
"아. 너 몸 뜨겁다고 했지. 많이 덥냐?"
"걱정마. 못 잘 정도는 아니야."
"그래...?"
최아란과 나는 텐트 안으로 들어갔다. 신재희가 우릴 힐끗 봤다가 랭겜이라도 하는 건지, 곧장 모니터를 주시했다.
"준아, 잘 자. 아. 불은 나중에 끌 것 같은데 안대라도 줄까?"
"아니, 그냥 나 조금 있다가 잘래."
"그래? 그럼 우리 영화나 볼까?"
"영화?"
"스크린 설치해서 빔으로 볼 수 있거든."
수납상자를 열고 소형 빔프로젝트가 꺼냈다.
수납상자 사이에 있던 화구통 같은 것을 열었다.
나는 저걸 보고 최아란이 그림에 취미라도 있나 궁금했는데, 사실 화구통이 아니었다. 그 통에서는 빔스크린이 나왔다.
"준아, 영화 볼래?"
거실 텐트에 스크린을 걸어두고, 침실 텐트에서 관람했다.
전형적인 한국 멜로 영화로 시한부 남성과 화가 여성이 주인공이었다.
처음에는 악연으로 만났지만 두 주인공은 운명처럼 서로 사랑에 빠진다.
그렇지만 남주는 시한부라서 일부러 여주로부터 멀어지려고 한다.
여주는 헤어지고 싶어하는 남주를 위해서 가슴 아파도 헤어진다. 그러다가 우연히 남주가 실은 시한부임을 알게 된다. 남주가 왜 멀어지려고 했는지 깨닫게 된다.
여주의 열렬한 고백에 남주는 결국 사랑을 나누기로 한다. 시한부 인생이 끝날 때까지 사랑을 나눈다.
화가 여주는 남주와 행복했던 시절을 떠올리며, 그 시절을 그림을 그린다. 그것으로 영화는 끝이 난다.
영화를 보는 내내 최아란이 손을 잡고 있었다.
신재희는 멜로 영화가 재미없는지, 아님 생전 안 하던 공부를 한 뒤라서인지, 아님 처녀 딱지를 떼고 나른해진 건지 안대를 끼고 잠을 잤다.
신재연도 최아란처럼 내 옆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녀는 소주병을 빨면서 내 몸은 건들지 않았다.
"잘 자, 준아."
"아란이 누나도. 누나."
영화가 끝나자 잘 준비를 했다. 최아란의 인사에 대답한 뒤, 나는 신재연을 불렀다.
신재연이 내 부름에 올려다봤다.
"누나, 잘 자."
"재준이, 너도. 좋은 꿈 꿔."
해먹 위에 누웠다.
"준아, 이불."
최아란이 이불을 내 위에 덮어주었다.
"땡큐."
나는 난로의 화염이 뿜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눈을 감았다.
거실의 환했던 랜턴이 꺼지고, 무드등만 남았다.
* * *
내 몸을 흔드는 손길이 있었다.
눈을 떠보니 몽롱했던 시야에 한 여자의 모습이 보였다. 초점이 뚜렷해지면서 신재연임을 확인했다.
그녀의 눈은 욕정으로 이글거리고 있었다.
'하아... 이럴 줄 알았다니까...'
나도 신재희의 보지를 자지로 맛만 보고, 최아란의 복부 근육을 맛본 뒤였기에 흥분한 상태이기도 했다.
거실 텐트는 은은한 조명등 하나만 켜져있었다.
내가 내려가려고, 다리부터 해먹 밖으로 뻗자, 신재연이 내 양겨드랑에 손을 넣어 번쩍 들어올렸다.
그녀는 내가 바닥에 놓인 신발을 신을 수 있도록 높이를 낮춘채 기다렸다.
내가 신발을 다 신자 신재연의 손이 떨어졌다.
그녀는 해먹 거치대에 걸어둔 외투를 내게 입혔다.
침실 텐트 쪽을 보니 최아란과 신재희가 규칙적으로 숨을 고르고 있었다.
신재연이 텐트 지퍼를 천천히 열었다. 벌레 소리 하나 나지 않고, 강물 흐르는 소리가 들려오던 이 텐트 안에선 천둥처럼 큰 소리였다.
나와 신재연은 몽유병 환자처럼 텐트 밖으로 나섰다.
신재연이 내 손을 붙잡고 걸었다. 가로등이 있는 관리사무소 쪽으로 향하고 있기에 '어둠 공포증'은 발현되지 않았다.
"'재연아'... 걸음 너무 빨라..."
사실 그렇게 빠른 발걸음이었지만, 잠결에 걷는 와중이라 균형을 쉽게 잃을 것 같았다. 그 위기감에 그렇게 말했다.
내 말에 신재연이 발걸음을 늦췄고, 우린 다소 느릿한 발걸음으로 주차장에 도착했다.
렌트카를 스마트키로 열었다.
"차에서 하려고?"
차에 올라타니 신재연이 시동을 걸었다.
적막했던 캠핑장에 엔진음이 메아리처럼 퍼졌다.
"어디 가려고?"
"..."
신재연은 말없이 운전했다.
10분 정도 운전하고 도착한 곳은 또 다른 '으슥한 곳'이었다.
폐가가 되어버린 어느 캠핑장 사무소 앞.
신재연이 전조등을 끄자 어둠 속에 갇혀버린 기분이 들었다. '어둠 공포증' 때문에 불쾌감이 치밀었다.
"재준아, 불 켜고 할까?"
"지랄하지 마... 누가 보면 어쩌려고."
"너 어두운 곳 무서워하잖아."
"손 잡아줘. 그럼 괜찮을 거야."
신재연이 내 손을 꽉 잡아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