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2화 〉누나 친구한테 따먹힘 *
화장실에 다녀온 신재연은 텐트 안으로 들어오면서, 바깥에 일부러 내다두었던 닭강정과 캔맥주, 캔콜라를 들고 들어왔다.
"밥 먹자. 배고프다."
최아란과 신재희가 음료와 닭강정 상자를 건네 받아 테이블에 세팅했다.
"텐트 설치하고 정리하는데 2시간이나 걸렸네. 미안. 점심부터 먹고 할 걸."
나는 슬쩍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오후 2시 30분이 되어가는 중이었다.
"됐어, 인마. 힘들게 일하고, 배도 고픈 지금 먹는 게 더 맛있겠지."
우리는 거실 텐트에서 테이블에 둘러 앉았다. 의자는 접이식 캠핑용 의자였다.
캠핑장으로 오는 중에 시내에서 구매한 닭강정 상자를 펼쳤다.
단 맛과 매운맛 두 종류였는데 네 사람이 먹을 거라고 수북하게 쌓여있었다.
"경치 좋네. 아란이 누나, 자리 잘 잡았다."
"흐흫... 그렇지?"
침실 텐트 쪽은 창을 다 막아뒀지만, 거실 텐트 쪽의 출입구 쪽은 창이 전부 투명한 비닐로 되어있었다.
그 비닐 너머로 강이 보였고, 쓸쓸하게 존재한 나루터와 산장이 보였다.
닭강정은 차가워야 맛있었다. 맥주와 콜라 역시 마찬가지였다.
나는 캔콜라를 땄는데 2시간 넘게 추운 날씨에 있었다고 살얼음이 씹혔다.
"흐음, 얘 좀 녹여서 먹어야겠는데?"
그런데 닭강정은 너무 차가운 것이 문제였다. 추운 바깥에 오래 방치되어있다보니 닭강정의 양념이 단단해져버렸다.
아예 언 것은 아니라 나무젓가락으로 힘을 주어 떼면 떨어지긴 했다. 그런데 씹을 때 튀김이 이가 아플 정도로 딱딱했다.
"데워야겠다. 미안. 그냥 차에 둘 걸."
"언니, 이런 실수도 하는 게 캠핑하는 재미 아닐까요?"
"재희가 맞는 소리를 하네."
"맞아, 아란이 누나가 미안해할 건 없지.
할 수 없이 식사 시간을 좀 더 뒤로 미뤄야했다.
최아란은 종이상자에 포장돼있던 닭강정을 코펠 냄비 중 큰 냄비에 쏟아부으려고 했다.
"잠깐. 아란이 누나, 그 냄비 새 거 같은데. 세척 잘 했지?"
"응, 했지. 입에 들어가는 거니까."
"잘 했어."
"흐흫... 그랭."
그녀가 닭강정을 냄비에 부었다.
가스 스토브의 냄비 받침 날개와 몸체 받침 다리를 펼쳤다. 그리고 스토브의 호스를 이소 가스에 연결했다.
"아, 아란이 누나. 내가 할게."
"이거 사용법은 알아?"
"아니."
"한 번 보여줄게."
"응."
내가 넋 놓고 지켜보다가 말하자 최아란은 가스 스토브의 밸브를 열었다. 가스가 치익 새어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스토브의 점화 장치를 누르자 새어나왔던 가스에 한순간 불이 붙어 불이 위로 피어올랐다가, 적절한 화력으로 내려갔다.
곧 닭강정이 치익 거리는 소리를 내며 데워지기 시작했다.
나는 밀크박스에서 주걱을 찾아와, 닭강정이 골고루 열을 받도록 뒤적거렸다.
텐트 안에 매콤한 치킨 양념이 강하게 퍼지기 시작했다.
굳었던 양념이 슬슬 녹아서 고기끼리 잘 떨어졌다. 딱딱했던 튀김도 눌러보니 부드럽게 눌렸다.
신재희가 배고팠는지 닭강정 하나를 젓가락으로 찍어서 입에 가져갔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좀만 더 맛있게 먹자."
나는 거실 텐트 바닥에 있던 아이스쿨러를 열어서 체다치즈를 꺼냈다.
부재찌개 먹을 때 쓰려고 한 건데. 어차피 양 많아서 지금 써도 됐따.
슬라이스 치즈의 비닐 포장을 뜯어 4장 투하했다. 그리고 냄비 뚜껑을 닫아서 뜸을 들였다.
"아란이 누나, 파슬리 가루 있나?"
"어? 어."
캠핑용 조미료통 파우치를 열어서 파슬리 가루를 소분해놓은 통을 내게 건넸다.
나는 치즈로 덮어진 닭강정 위로 파슬리 가루를 뿌렸다.
냄비 뚜껑을 닫고서 2분 정도 더 데웠다.
"아란이 누나. 이거 밸브 돌리면 불 꺼져?"
"어. 그렇게 끄면 돼."
불을 끄고 뚜껑을 열었다. 파슬리의 감칠맛 도는 향과 고소한 치즈향, 매운면서도 달달한 닭강정 향이 수증기가 되어 뿜어져나왔다.
"먹읍시다."
나는 말하면서 나무젓가락으로 닭강정 하나를 잡아올렸다.
파슬리 가루가 박힌 녹은 치즈가 길게 이어지며 따라올라왔다.
잘 끊기지 않아 젓가락으로 돌돌 말았다. 그제야 끊겼다.
나무젓가락에 엉켜서 두툼해진 치즈와 함께 뜨거워진 닭강정을 입에 넣었다.
치즈는 쫄깃쫄깃하다가 녹고, 닭강정 튀김은 이빨이 잘 끊겼다.
튀김 옷 속에 닭고기는 육즙을 품고 있어 미뢰를 즐겁게 했다.
"오오, 맛있다. 준이 대단해."
"차가워져서 다행이었네."
"오빠, 치즈랑 파슬리 가루 넣으니까 훨씬 나은데?"
'재료가 다한 건데.'
그래도 분위기가 좋아졌으니, 그 호평 일색에 초를 치진 않았다.
우리는 치즈 닭강정을 하나도 남김 없이 먹어치웠다.
다 먹었으니 치워야했다.
"쓰레기는 여기 버려."
최아란이 대용량의 일반용 쓰레기봉투를 벌렸다. 봉투에 제천시 이름이 쓰여있는 걸 보니, 관리사무소나 캠핑장 매점에서 구매한 것인 듯했다.
나무젓가락과 종이포장지, 치즈 포장지 등을 버렸다.
"그리고 다들 양치해야지. 씻기도 해야할 거고."
최아란이 치약, 칫솔, 샴푸, 클렌징폼 등이 들어가있는 워시백과 각자 쓸 수건를 나눠주었다. 같은 모양이었는데 각각 색이 달라서 구분이 쉽게 가능했다.
나는 조리할 때 사용한 냄비를 들고 일어났다.
"준아, 수세미는 이거면 될 거야."
최아란이 물티슈처럼 생긴 일회용 식기 수세미 상품을 내밀었다.
난 갑자기 정색해서 물었다.
"뭐야. 정말 내가 설거지하라고?"
"어, 어? 아, 아니. 내가 할..."
"흐흫... 농담이야. 쉬고 있어. 누나들이랑 재희랑 텐트 치느라 고생했잖아."
최아란에게 무관심하게 굴어야하는데, 내 눈치를 살피는 최아란이 귀여워서 자꾸만 무의식적으로 장난을 걸고 말았다.
'이젠 하지 말아야지...'
양치할 우리들은 워시백에서 칫솔을 꺼내, 치약을 묻히고 텐트를 나섰다.
가는 도중에 양치를 하며 울퉁불퉁해서 걷는 느낌이 나쁜 파쇄석 지대를 지나, 개수대 건물에 도착했다.
여러 개의 싱크대가 놓인 개수대.
개수대의 양옆 끝에는 각각 남자화장실과 여자화장실의 입구가 있었다. 또 각각 화장실 안쪽에 샤워실이 있는지 샤워 표시가 그려져있었다.
여자들은 개수대에서 양치한 입을 가글한 뒤, 나를 기다리려고 했다.
"먼저 돌아가."
내가 그렇게 말하자 텐트로 돌아갔다.
개수대에서 일회용 수세미로 냄비를 세척했다.
'뭔가 냄비 하나 닦고 말기엔 아깝네.'
수세미 자체에 세제가 포함되어있는 제품이었는데, 냄비 하나 설거지 하고도 세제가 많이 남았다.
'됐어. 최아란이 어차피 박스째로 사뒀던데. 2박 3일 동안 바닥날 리 없어.'
그리고 우리집 물건도 아니니 아낄 필요없었다.
냄비에 묻은 거품을 물로 잘 헹군 뒤, 궁금해서 남자화장실에 들어갔다. 화장실 안쪽에 마련된 샤워실을 살펴보았다. 세 사람이 동시에 쓸 수 있도록 샤워기 3대가 마련되어있었다. 평소 관리를 잘 하는지 깨끗했다.
핸드드라이기로 손을 말렸다. 손을 적신 상태로 바깥에 나갔다간 엄청 시려울 게 뻔하니까.
텐트로 돌아갔다.
텐트 안에는 찐내와 포도향이 뒤섞여 나고 있었다.
신재연과 최아란이 의자에 앉아, 강을 구경하며 전자담배를 피고 있었다.
신재희는 해먹 위에 매트리스를 깔고, 그 위에 누워서 눈을 감고 있었다.
나는 식기가 쌓여있는 밀크박스에 냄비를 넣고, 워시백에 칫솔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담배 피는 여자들한테 말했다.
"캠핑장 및 텐트 내 금연이라고 쓰여 있던데."
캠핑장 입구에서부터 개수대 건물 등. 사방에 금연 표시가 박혀있었다.
"하하... 준아, 미안. 얼른 끌게."
"아니야, 됐어. 그냥 펴."
'갑자기 일반 담배피다가 왜 전자담배로 바꿨는지 알겠네.'
"아란아, DDR5 DRAM은 언제 출시할 것 같냐?"
"글쎄. 올해 10월에는 하지 않을까."
두 사람은 CY전자 사람 아니랄까봐 반도체 업황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두 사람의 손에는 캔맥주가 하나씩 들려있었다.
지금 두 사람은 캠핑을 즐기고 있는 것이었다.
'캠핑장에서 할 게 없긴 하겠지. 기껏해야 자연구경, 산책로 걷기, 수다, 불멍...'
보통 캠핑을 하는 이유가 놀기 위해서가 아닌, 자연에서 지내보고 싶어서 하는 것이 컸다.
굳이 캠핑에서 재미를 찾자면... '캠핑 식사'였다.
그 식사가 3분 요리든, 전투식량이든, 화로를 사용한 직화구이든. '야영'하며 먹는 음식은 뭔가 달랐다.
난 '취미적인 캠핑'이 이번이 처음이지만, '오석준'일 때 군대에서 '야영 취식'을 많이 해봤기에 알고 있었다.
"재희야."
할 거 없으니 신재희를 공부시킬 생각이었다.
"어? 오빠, 해먹 쓰게? 내려갈까?"
"공부하자."
내 말에 반도체 업황 얘기를 주고 받던 신재연과 최아란이 돌아봤다.
"아! 그럴까!"
신재희의 신난 대답에 최아란이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오... 여동생도 공부 좋아하나 보네?"
캠핑까지 와서 공부시키려는 오빠와 공부 받으려는 여동생이 신기한 모양이었다.
신재연이 묘한 눈으로 신재희를 쳐다봤다.
그런 친언니의 눈빛이 마음에 안 든 건지, 뜨끔한 건지 신재희가 목소리를 높였다.
"언니. 왜 그런 눈으로 봐?"
"아니, 공부 열심히 하려는 모습이 보기 좋아서."
나와 신재희는 침실 텐트로 들어갔다.
매트가 잔뜩 깔리고 카페트까지 깔려서 그런지 푹신했다.
사이트에 배정된 전원을 전기릴선으로 끌어왔기에, 전기장판이 잘 작동됐다. 전기장판에서 올라오는 열로 따뜻했다.
'여기서 자는 게 해먹보단 편하긴 하겠다.'
침실 텐트에 휴지나 물티슈, 읽을만한 책, 전자기기 등이 담긴 수납상자가 있었다.
그 수납상자 위에는 테이블 상판을 올려져 있었는데, 책상으로써 쓸만해 보였다.
난 백팩에서 필기구와 인쇄한 시험지를 꺼냈다. 마주 앉은 신재희가 똑바로 볼 수 있도록, 시험지를 거꾸로 돌려 올려놨다.
"재희야. 이거 작년도 고1 3월 모의고사 시험지인데. 아는 것만 풀고, 모르면 그냥 지나가. 알았지?"
"오빠. 설마 벌써 '시험'이야?"
시험.
100점이면 나한테 맞으면서 섹스하기.
85점이면 섹스하기.
70점이면 키스하기.
점수별로 상품이 주워져있었다.
신재희는 내가 대뜸 고1 문제를 풀어보라고 '시험지'를 건네니, 이게 '상품 걸린 시험'인 줄 알고 불평불만이 가득한 얼굴이 됐다.
"아니, 네 실력 보려고. 그거에 맞춰서 공부시킬 거야. 그리고 내 공부를 잘 따라왔다면 무조건 100점 맞을 수 있게 해줄게."
"알겠어. 100점 맞아줄게."
신재희가 내 얼굴을 지그시 노려봤다.
그녀의 뜨거운 시선에, 가족끼리 이러면 안 되는 걸 알면서도 자지가 움찔해버렸다.
"그래, 노력해봐."
신재희는 고개를 숙이고 시험 문제를 풀기 시작했다.
첫 시험지는 국어였다.
지문을 뚫어져라 읽기 시작했다.
나는 고개를 돌렸다. 최아란과 신재연이 강 구경은 안 하고, 나와 신재희의 과외 수업 장면을 돌아보고 있었다.
"구경났어?"
내가 한 마디 하자 그녀들은 다시 앞을 쳐다봤다.
신재희는 최선을 다해서 풀었다. 국어는 72점. 수학은 17점. 영어는 12점. 국사는 4점. 사회는 18점. 과학 23점.
'0점대가 넘쳐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준수하네.'
특히 국어 점수가 70점대나 되는 것이 놀라웠다.
'암기 과목이나 훈련해야하는 과목은 아직 공부하지 않아서 못하는 것이고. 독해를 잘 하는 걸 보면 공부머리는 된다는 거겠지.'
"나랑 누나 동생이라 공부 머리는 좋네."
"그래? 고평가해주네. 그렇다고 시험 문제 어렵게 내지 마라."
"휴식하자."
"아, 오빠. 휴식하지 마. 공부해야지."
신재희가 공부에 열의를 갖자 신재연이 툭 내뱉었다.
"캠핑 맨날 와야겠다."
"흐흫..."
신재연이 한 말에 옆에 앉아있던 최아란이 웃음을 흘렸다.
신재희는 자신이 농담의 대상이 됐고, 최아란이 자신과 관련된 농담을 이해해 웃었다고 생각했는지 최아란의 뒤통수를 노려봤다.
신재연은 무섭고 최아란이 만만한 모양이었다.
"너 말고 나도 시간이 필요해. 너한테 어떤 걸 공부 시키고, 어떤 걸 시험 문제로 만들지 고민해봐야 돼. 휴식하자."
"오빠. 오늘 공부하고 '시험'까지 전부 다 하는 거지?"
신재희는 다급해보였다.
'시험' 상품을 받기를 원했는데, 그것을 오늘 받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날짜가 넘어갈까봐.
"어, 할 수 있어. 맞다. 아란이 누나, 나랑 산책 좀 갈까?"
"어?! 좋지."
최아란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난 최아란 뒤쪽, 강 건너편에 위치한 산장을 쳐다봤다.
'으슥한 곳'으로서 제격인지 확인해보고 싶었다.
"근데 아란이 누나. 난로 언제 키려고?"
바닥으로부터 올라오는 냉기가 차단돼있고, 전기장판도 틀어져있던 침실 텐트는 따듯했다. 그런데 신발을 신고 거실 텐트로 나오자마자 추위가 느껴졌다.
"밤에 키려고. 왜? 추워? 지금 킬까?"
펠렛 연료를 아끼려고 그나마 덜 추운 낮 시간인 지금은 냅두고 있는 듯했다.
텐트가 바람을 막아주고 있으니, 바깥보다야 거실 텐트 안이 훨씬 따듯하긴 했다.
"아니, 저 안은 전기장판 덕분에 따듯해서 상관없어. 누나. 나는 아란이 누나랑 산책 좀 할 테니까 재희랑 놀고 있어줘."
신재연은 고개만 까딱이고 전자담배에 담배잎스틱을 꽂았다.
겉으로 보면 그저 무심한 듯한 대답이었으나, 난 그녀의 마음이 지금 불편할 것임을 짐작했다. 나와 최아란이 단둘이 데이트 나가는 게, 마음 속으로 불쾌할 것이리라.
나는 뜨거운 시선에 고개를 돌렸다.
신재희가 책상에 팔을 올려 턱을 괴고, 뚱한 표정으로 날 노려보고 있었다.
누나와 여동생이 쌍으로 난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