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0화 〉누나 친구한테 따먹힘 *
신재희는 날 몇 년 전부터 좋아한다고 했다. 그런데 '신재준'과 신재희의 사이는 견원지간이나 다름 없었다.
'신재준'은 신재희를 무시하기 일쑤였고, 신재희는 말도 안 되는 시비를 걸거나 대놓고 잘못된 일을 저질러서 '신재준'의 체벌을 유발했었다.
"왜, 왜 그랬던 걸까..."
"설마 그거야? 초딩처럼 좋아하는 애 괴롭히는 거."
"그, 그거지. 그거였다. 오빠, 나 나간다. 웜네 놀러."
신재희가 나보다 일찍 집을 나서려고 했다.
나는 현관문까지 배웅 나갔다.
오늘도 열심히 아르바이트를 할 여동생이었다. 배웅 정도는 해줄만 했다.
"재희야, 수고해."
"나 지금 놀러나가는 건데?"
"놀다가 일하러 갈 거잖아."
"응, 오빠가 배웅 나와주니까 좋다."
"내가 누나만 배웅 나가서 싫었어?"
"어..."
"그러게. 나한테 평소에 잘 하지 그랬어."
"너랑 평범한 남매 관계이기 싫었으니까."
"그러냐..."
"응..."
신재희가 바라는 대로 '평범한 남매 관계'는 사라져버렸다.
더러워진 농구화를 신은 신재희는 현관문을 열고 나갔다.
그녀가 닫으려는 문을 난 막았다.
"왜?"
"가는 거 보려고."
"추운데 그냥 문 닫지, 뭘 그렇게까지."
그렇게 말하면서도 신재희는 좋았는지 히죽 웃었다.
사실 내가 현관문을 못 닫게 한 것은 이유가 있었다.
집주인 딸이 집 앞 나무의자에 앉아 담배를 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고시 준비나 하지. 맨날 밖에 나와서 담배 피네. 그런데... 나와 재희의 대화가 저기까지 들리진 않았겠지?'
걱정됐다.
집주인 딸이 신재희한테 뭐라고 말할까 봐도 걱정됐고.
신재희는 집주인 딸을 아는데도 무시한 건지, 아니면 자주 못 봐서 모르는 사람이라고 여긴 것인지 그냥 지나쳤다.
집주인 딸도 그런 신재희를 붙잡진 않았다.
그녀가 고개를 돌려 날 쳐다봤다. 나보고 와보라는 듯 손을 까딱였다.
'뭔데? 어제 신재연이랑 내가 떡친 소리 다 들어서 저러나? 뭔가 협박이라도 하려고?'
나는 부적처럼 주머니 속 핸드폰을 쥐었다. 이 핸드폰에는 집주인 딸을 컨트롤 할 수 있는 카드가 들어있었다.
'그래도 일단 뭔 개소리를 하나 들어보기나 하자.'
궁금하니까.
난 신재희를 가리켰다. 신재희의 모습이 멀어져 보이지 않게 되면 나가겠다는 신호였다. 잘 알아들었으려나.
저 멀리까지 걸어간 신재희가 뒤돌아봤다. 내게 손을 흔들었다.
나도 마주 흔들어주었다.
제3자가 본다면 우리 둘을 사이 좋은 남매로만 여길 것이었다. 사실 좀 더 더러운 관계가 되었는데.
'혹시 모르니까 켜두자.'
핸드폰 음성녹음을 켰다.
신재희가 사라지자 깔깔이 하나만 믿고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후회했다.
'후우... 춥네, 시발.'
"뭐예요."
"걱정 돼서."
"걱정요? 누나랑 제가 서로를 걱정해줄 사이던가요."
"어제 너 신재연한테 당했잖아. 괜찮아?"
역시 신재연과 섹스한 소리가 이웃집까지 다 들렸을 줄 알았다.
"뭔 개소리야."
난 정색하며 부정했다.
신음소리를 퍼뜨렸다고 해도 그게 나와 신재연이 섹스했다는 증거는 못 되었다.
"내 방이 저기야."
신축주택 1층. 남향으로 나있는 창문. 우리집 앞이 훤히 보일 위치였다.
"나는 내 방에서 공부해. 밤에 네 누나와 그 친구가 차를 대는 게 보였어. 1시간 정도 지나서 네 누나친구가 떠났고."
집주인 딸은 담배를 빨고 연기를 뱉었다.
담배 연기가 싫었던 나는 얼굴을 찡그렸다.
"그러고 몇 분 안 있어서 신재연의 신음소리가 들리더라. 그 다음에 몇 시간 조용해지다 싶더니, 화장실에서 샤워기 물소리와 함께 신음소리가 들려오고. 어젯밤에 그랬었지."
난 핸드폰을 꺼내 보란 듯이 흔들었다.
"그만 말해요. 또 말도 안 되는 소리로 성추행하면 신고할 테니까."
"재준아, 나는 그냥 네가 걱정돼서..."
"지랄하지 마. 나랑 섹스하고 싶어서 그 지랄하는 거잖아."
"하아... 시발... 알았어. 걱정 안 할게. 야 근데. 너 여동생하고도 떡칠 거냐?"
"야... 그만 하랬지..."
"나한테도 좀 대줘라."
"본색을 드러내네. 시발년."
"소문낸다? 근친 섹스하는 세 남매가 사는 집이라고."
"내던가, 시발년아. 그럼 너도 같이 죽어. 우린 이사 가면 그만이고."
"네 누나 친구한테 말하는 건? 왠지 너랑 특별한 사이 같던데. 아니야?"
"아, 시발... 너 지금 뭐하자는 거야?"
집주인 딸은 담배를 신발로 비벼 끄며, 비틀린 웃음을 지었다.
"나도 껴주라, 응? 나도 네 섹스파트너에 껴줘."
"하아... 다 말해. 난 상관없어. 근데 알아둬. 가장 크게 다칠 건 너야."
집주인 딸의 미소가 사라지고, 눈썹이 팔자로 기울어져 불쌍한 표정이 되었다.
"재준아... 닳는 것도 아니잖아. 응?"
그녀는 내 팔을 더듬었다. 파충류가 더듬는 것처럼 소름이 끼쳤다.
"아, 미친."
난 팔을 거칠게 털고 뒤로 물러났다.
집주인 딸은 말이 길었다. 어떻게든 '리스크 없이' 날 따먹고 싶어하는 눈치였다.
그런 모습을 보면, 집주인 딸이 절대로 '동반 자폭'을 택할 것 같지는 않았다.
'이 여자의 요구를 무시해야지, 냉전이 이어지는 거고. 이 여자한테 따먹혀버리면 나 혼자만 자폭이야.'
집주인 딸만 신나서 내 몸을 맛볼 것이고, 나는 집주인 딸이 내 가족을 괴롭게 할 진실을 불어버릴까봐 그녀가 시키는대로 해야할 것이었다.
나는 그런 확신을 갖고 몸을 돌렸다.
집주인 딸은 날 붙잡지 않았다.
내 심기가 더러워졌음을 알라고, 현관문을 쾅 닫았다.
집주인 딸이 미녀이긴 했지만, 이미 신재연과 신재희, 최아란, 김하늘이 더 뛰어난 미녀였다. 그런 여자들이 날 위해 다리를 벌려주는니, 집주인 딸 하나 놓친다고 아쉽지 않았다.
"아, 염병. 빨리 이사를 가든가 해야지."
그리고 이 집에는 또 한 명에 변태가 붙어있었다. 왼쪽 눈 아래 눈물점이 박힌 엿보기범.
'터가 안 좋나?'
난 핸드폰을 켰다.
새로 만든 단톡방에 새로운 톡이 올라와있었다.
(나) [먹고 싶은 거 남겨두십시오.]
최아란 [유튜브 링크]
최아란 [내가 이 사람 유튜브 보고 캠핑에 꽂힌 거야]
최아란 [ㅎㅎ 이 사람이 캠핑에서 만든 요리 참고하면 될 듯!]
신재연 [난 재준이가 해준 건 다 좋아]
최아란 [아]
최아란 [나도 그래 ㅎㅎ]
신재희 [고기]
최아란 [재희야 안녕!]
최아란 [난 최아란이라고 하는데 ㅎㅎ]
최아란 [아직 한 번도 못 봤넹]
신재희 [네 안녕하세요]
신재희 [캠핑 할 때 봬요]
최아란 [그래!]
단톡방은 훈훈했다. 그 훈훈한 덕분에 기분이 나아졌다.
물론, 이 단톡방도 불운한 기운이 맴돌고 있었다.
신재연, 날 따먹은 누나년.
신재희, 날 따먹을 예정인 동생년.
어떻게 된 게 불길한 오오라가 느껴지는 여자들이 모두 내 친누이였다.
이중에 가장 멀쩡한 여자는 최아란뿐이었다. 아직은 말이다.
'최아란한테 '막상 사귀어보니 별로' 컨셉 잡기로 했으니 오늘부턴 부르지 말아야지.'
난 그 단톡에 톡을 날렸다.
(나) [아란이 누나]
(나) [미안한데 오늘 오지 마]
(나) [나 친구네서 저녁 먹을 듯]
김하늘이 보내온 톡에도 답톡을 보냈다.
김하늘 [예성이네 언제 갈 거?]
(나) [예성이한테 너도 같이 간다고 말 좀 하겟음]
김하늘 [ㅇㅋ]
'신재준'에 기억에 따르면, 김하늘도 나예성의 집에 곧잘 놀러갔었다.
단톡방에 최아란이 톡을 올렸다.
최아란 [앗 ㅠㅠ]
최아란 [ㅇㅋ 친구랑 맛있게 먹어!]
난 그런 최아란의 톡에 일일이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나예성과의 톡방에 들어가 톡을 보냈다.
(나) [너희 집 간다]
(나) [하늘이랑]
나는 큰방으로 돌아가려다가, 부엌 옆 방에서 신재희 때문에 미처 정리 마무리를 못한 가계부를 발견했다.
가계부 정리를 마무리할 즈음, 나예성으로부터 답톡이 날아왔다.
나예성 [ㅇㅇ]
나는 김하늘한테 전화했다.
[모시모시.]
"예성이네 가자."
[얍스. 일단 만날 장소는?]
"CGV."
[오키.]
CGV에는 나 먼저 도착했다. 김하늘이 두 손을 크게 흔들며 나타났다.
"오래 기다렸냐?"
"나도 방금 왔어. 가자."
"고고."
CGV를 중심으로 한 시장이 성연시의 핫플레이스였다.
방학철이다 보니 중고생들이나 대학생 커플이 많이 보였다.
그 커플들이 팔짱을 낀 것처럼, 김하늘이 내 팔을 가져가 자신의 옆구리에 끼었다.
난 김하늘의 옆구리에서 팔을 빼냈다.
"맞다. 우리 사이, 수린이한테 설명이 더 필요하지 않을까? 네가 알아서 하겠지만 걱정돼서."
어제. 정수린에게 나와 김하늘이 떡치는 사이란 걸 들키고 말았다.
나는 김하늘한테 어제 말했다. 수린이는 너랑 내가 사귀는 사이인 줄 안다고. 그래서 너랑 내가 섹스까지 하는 사이라고 여긴다고. 그렇게 넘어가면 된다고.
"음, 그게. 재희는 네가 그분이랑 사귀는 거 알아?"
"알아."
"그럼 큰일 아니야? 수린이랑 재희가 개학할 때부터 붙어다닐 거잖아. 수린이는 너와 내가 사귀는 줄 알고 있고, 재희는 너와 그분하고 사귀는 줄 알고 있으면... 그걸 서로한테 말해버리면 어떻게 하려고?"
"걱정 마.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하아... 그래."
어차피 그 즈음이면, 나와 최아란의 관계는 끝나있을 거였다. 연인 관계가 아닌 스폰서 비슷한 상태로 교류하고 있겠지. 신재희는 내가 다시 솔로가 됐다고 생각할 타이밍이었다.
'개학하기 전에 정수린한테도 말해놔야지. '김하늘과 헤어졌다'고.'
그러면 정수린도 그 타이밍에 가서는 내가 솔로인 줄 알 것이었다.
"예성이한테는 뭐라고 말할 거야. 우리 관계?"
"그냥 평소처럼 지낸 것처럼 해."
평소에 '친구 이상, 애인 미만'이었던 것처럼 말이다.
"알았어."
나예성은 오래된 빌라의 반지하에 살고 있었다. 낮이라서 그런지 계단 천장에 부착된 동작인식센서 전등이 켜지질 않았다.
그런데 빛이 잘 안 드는 지하라서 좀 어두침침했다.
초인종을 누르자 180의 키에 시원시원한 미남이 문을 열어줬다.
스웨터에 면바지를 입고 있었다. 길쭉길쭉한 키와 다부진 체형. 방금 깨어난 듯한 까치집이 된 머리카락인데도 잘 생긴 느낌이 헤쳐지지 않았다.
연예인도 할 법한 놈이 20살이나 많은 뚱보 아줌마랑 사귄다는 게 신기했다.
"왔냐."
"예성쓰. 유럽 잘 다녀왔는감?"
"예성아, 유럽 재밌었어?"
"그럭저럭."
그는 우리가 들어올 수 있도록 비켜주었다.
그의 집에는 방향제 냄새가 감돌고 있었다.
내가 물었다.
"너희 부모님은?"
나예성의 부모님은 나예성이 '신재준'과 갔다고 알고 있을 거였다. 20살 많은 애인과 단둘이 데이트 갔다올 것이라고 할 수 없으니 말이다.
만약 그의 부모님이 나한테 말을 유럽 여행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 나도 나예성과 유럽 여행 다녀온 척 해야했다.
"일 나갔지. 하암..."
그의 부모님이 없기에 다행히 그런 연기는 할 필요 없는 듯했다.
내 질문에 답하고 크게 하품한 그는 모차르트 초상화가 그려진 초코통을 건넸다.
"뭐야?"
"오스트리아에서 산 모차르트 초콜릿."
"땡큐, 잘 먹을게."
"오냐."
"예성아. 내 꺼는?"
"아..."
잊고 있었다는 듯 탄성을 내었다.
"내 선물은 없냐..."
"넌 네 남친한테나 받아."
"재준이한테?"
"어."
나예성은 물론 장난을 친 거였다. 그는 '신재준'과 김하늘을 곧잘 연인처럼 엮어서 놀리는 걸 즐겼었다.
그러면 '신재준'은 짜증을 냈고.
"그러지 마, 좀."
"야. 김하늘. 너 나 없는 동안 재준이 독점했을 거면서 뭐했냐?"
"윽... 재준이 가드가 너무 세단 말이야."
김하늘은 나예성의 말에 가슴 아픈 것처럼 목 아래를 우겨쥐었다. 오버 연기 떠는 거였다.
"한심한 놈, 쯧쯧."
"나예성, 너야말로 혼자 여행하면서 썸은 없었냐?"
"없었어."
"킥킥, 너야말로 뭐한 거냐?"
"지랄. 여자 사귀려고 간 것도 아니었어, 새끼야."
김하늘은 나예성에게 20살 연상의 애인이 있다는 걸 몰랐다. 나예성이 혼자 배낭여행을 떠난 것인 줄로만 알았다.
"사진은 없냐?"
"안 찍음."
"여행에서 남는 게 사진뿐인데. 그걸 안 찍네."
나예성은 사진 찍은 게 많을 테지만, 대부분 애인과 찍은 것일 터라 김하늘한테 보여줄 수 없었다.
나예성이 풀어주는 여행 얘기를 들었다.
얘기를 하는 동안 먹나예성이 유럽에서 사온 외국 과자와 젤리, 음료수를 먹었다.
유럽 국가들이 환상을 품었던 것보다 더럽더라. 그래도 자연경관은 좋았다. 루브르 박물관에서 본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작품을 실제로 보니 굉장하더라 등등.
그는 이야기를 하느라 목이 말랐는지 물을 마셨다.
잠시 목을 쉬고 싶었는지 나와 김하늘을 번갈아보더니 말했다.
"둘이 섹스했냐?"
마침 영국 탄산 음료수를 마시고 있던 김하늘이 뿜어버렸다.
방바닥에 펼쳐둔 과자 위로 김하늘이 머금었던 음료수가 쏟아졌다.
콜록콜록!
사레까지 걸렸는지 기침했다.
나는 마침 내 근처에 있던 두루마리 휴지를 뜯어다가 김하늘에게 건넸다.
나도 내심 놀랐는데, 나예성이 '떠보는 것'이라고 생각해 부정할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