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9화 〉누나 친구한테 따먹힘 *
이제 신재희와 하고 싶은 얘기가 없었다.
자리에서 일어나려니까 손목이 붙잡혔다.
난 깜짝 놀랐다.
"가슴 마사지, 왜 하다 말아."
"하아..."
"싫어? 싫으면 말고..."
신재희는 자신이 잘못한 걸 알긴 하는지, 내 기분을 살폈다.
"밥 해줄게."
"아, 냄비에 제육볶음 쌓였더라. 어제도 네 여친 왔냐?"
"'최아란 언니'."
"그래... '최아란 언니'가 밥 먹으러 왔었냐?"
"응."
"그때 고백 받은 거고?"
"그래."
"우리 언니도 아냐?"
"응."
"언니는 무슨 반응이었냐?"
날 강간했다.
"알잖아."
신재희는 내 말 뜻을 알아챘다.
"미쳤네."
나는 신재희를 노려봤다.
신재연을 욕한 것 때문에. 그리고 신재희가 그렇게 욕할 처지가 되는가 싶은 것 때문에.
"음. 아, 배고파. 고기 줘."
신재희도 늦게 자신의 말실수를 알았는지 더 이상 가슴 마사지를 요구하지 않았다.
신재희는 주섬주섬 박스티를 걸쳤다.
나는 부엌으로 와서 제육볶음을 데우기 시작했다.
옆방에서 상을 펼치는 소리가 들리더니, 그 상 위로 반찬을 놓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내빼 옆방을 보니까 신재희가 상을 차리고 있었다.
'평생 안 하던 짓을 하네.'
'신재준'에 기억에 의하면 신재희가 자진해서 상차림 준비를 한 적이 없었다. 신재준이 짜증내면서 시켜도 일부러 말을 씹었다.
'몸 대준다니까 저러네. 나참...'
그러고 보니 신재희가 아르바이트를 하기 시작한 것도 내가 '성적인 봉사'인 '가슴 마사지'를 대가로 걸었기에 한 것이었다.
'재희를 사람 만들려면, 결국 내가 대줘야하나 보네.'
몸 대주는 건 내 장기였다. 근친이란 게 꺼림칙했지만 이미 엎지른 거, 신재희를 위해 대주자.
"야. 밥상 방으로 옮겨?"
"이불 갰어?"
"어."
"밥부터 푸고, 수저 세팅 먼저 해주고."
"그래."
신재희가 변했다. 내 말에도 고분고분하게 따르고.
'아.'
그런데 신재희가 내 옆을 지나며 내 엉덩이를 더듬었다.
"야..."
"뭐? 왜?"
"하아... 아니, 됐다."
어차피 빠른 시일 내에 서로 물고 빨고 할 사이였다. 엉덩이 희롱하는 것을 제지하는 것도 우스웠다.
신재희가 밥과 수저를 세팅했고, 나는 데워진 제육볶음을 담은 접시를 내려놓았다. 신재희가 상을 큰방으로 옮겼다.
그냥 밥 먹기가 심심하니 VOD로 예능 프로그램을 틀어두었다.
마주 앉아있던 신재희가 내 입술을 빤히 쳐다봤다.
"야. 밥 먹어."
"그... 아까는 그냥 뽀뽀한 거 아니냐? 키스 아닌데."
신재희가 키스해달라고 해서 입술 도장을 찍어줬다. 그런데 혀까지 사용해주지 않아 아쉬웠던 모양이었다.
"뽀뽀가 영어로 키스야."
"아놔. 내가 그것도 모르는 병신일까봐? 내가 말하는 건 혀도 사용하는 키스 말하는 거잖아."
"뭐 어쩌라고."
"해줘."
"섹스는 85점. 키스는 70점."
"아씨... 밥 먹고 바로 시험 봐."
"내가 무슨 시험 문제를 낼 줄 알고."
"몰라. 네가 내 수준에 맞추고 내겠다며. 사칙연산 수준으로 내라. 나 초딩 수준으로 빡대가리니까."
"지수법칙 알아?"
"지수가 누군데?"
난 눈앞이 깜깜해졌다.
"진짜 초딩 수준으로 내야 되는 건가..."
신재희는 잠자코 밥을 먹기 시작했다. 의외였다. 신재희가 정수린, 김하늘, 신재연 보다도 더 인내심이 있다는 게.
일진이었던 만큼, 나를 더 강하고 억압적으로 할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몇 년 동안 일진 선배들 눈치 보고 살고, 맞고 지내서 그런가.'
이걸 일진회의 순작용이라고 봐야 하는 걸까.
"오빠."
"응?"
"고기 맛있네. 간이 잘 뱄어."
"그래, 맛있게 먹어."
"오늘도 오빠 여친 온대?"
"응. 아, 맞다. 단톡방 만들기로 했는데."
"가족방에 그 여자 초대하지 마라."
"안 그래. 따로 방 팔 거야. 그리고 '최아란 언니'."
"아씨. 그 여자가 옆에 있는 것도 아니잖아. 그때는 제대로 부를게."
그러라고 하고 넘어가기로 했다.
초대한 인원을 선택해 단톡방을 하나 만들었다.
[신재준 님이 신재연 님을 초대했습니다.]
[신재준 님이 신재희 님을 초대했습니다.]
[신재준 님이 최아란 님을 초대했습니다.]
(나) [먹고 싶은 거 남겨두십시오.]
"오빠, 밥 먹고 시험 볼 거지?"
"네 실력을 알아야 문제를 만들든 하지."
"나 중학교 때부터 공부 안 해서 중1 수준? 그렇게 생각하면 돼"
"자랑이다... 나 오늘 예성이네 놀러갈 거야. 내일은 또 수린이 과외하러 가야 하고. 너 공부랑 시험은 주말에 하자."
"아씨, 나보고 주말까지 참으라고?"
"재희야. 나 언제부터 좋아했어?"
"몰라."
"혹시 몇 년 됐어? 최근부터가 아니라?"
"응..."
"그래...?"
'그럼 내가 재희 꼬신 건 아니었네.'
그러나 그 사실이 내 마음을 편하게 해주진 않았다.
'누나와 여동생을 잃었지만 두 명의 아내를 얻었다고 생각하자... 그래도 '가족'이잖아?'
난 그렇게 정신승리를 시전했다.
"그렇게 오래 참았다면, 며칠 더 참을 수 있잖아. 참아."
"그동안은 불가능할 거라고 생각해서 그러려니 했어. 근데 가능할 거라고 생각이 드니까... 참기가 힘들어."
"그래도 참아."
"씹..."
신재희가 내 말에 따라주지 않으면 곤란했다. 컨트롤 실패라는 의미니까.
난 할 수 없이 신재연을 팔아먹기로 했다.
"누나에 이어서 여동생한테까지 하루 만에 따먹혀야겠어?"
"아..."
우린 밥맛이 없는 사람처럼 식사를 했다.
"내가 치울게."
"그럴래?"
신재희가 나서서 상을 치웠다.
신재연이나 신재희나. 둘 다 내가 밥 차려주고, 내가 밥상도 치우는 걸 당연시하게 여기고 있었다.
신재연도 아니고, 신재희가 나 대신 치워주니까 신선한 기분이 들었다.
상을 다 치운 신재희가 큰방으로 돌아왔다.
"야. 그런데 예성이 오빠, 유럽 여행 갔다며. 벌써 돌아온 거야?"
나는 저번 금요일에 김하늘의 집에서 외박하면서, 두 누이에게는 나예성의 집에서 잔다고 거짓말했었다.
그랬다가 방심해서 신재희에게 '나예성은 유럽여행 갔다'고 말해버렸고. 새로운 거짓말로 그가 토요일에 유럽여행 갔다고 말했다.
'어디 보자... 토, 일, 월, 화, 수, 목.'
"어. 5박 6일."
"흐응... 나라 몇 개 안 돌아다녔나 보네."
"오, '유럽'이 나라가 아니란 것도 알았어?"
"야... 내가 빡대가리여도 상식은 있어."
"영국은 섬이게 아니게?"
"섬이잖아, 아놔."
아예 상식이 없는 아이는 아니었구나. 신재희가 진성 빡대가리는 아니었다는 것에 나는 안도했다.
이 정도로 상식이 있는 걸 보면, 공부 학습력이 있을 것이며, 공부를 하여 좋은 대학에 가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것 같았다.
'그런데 내가 너무 '좋은 대학'만 생각하나?'
신재희가 예체능에 관심 있거나, 특정 기술에 관심이 있거나 할 수 있었다.
"넌 커서 뭐 될래?"
"지금 시비거는 거?"
"아니. 네가 나중에 하고 싶은 게 뭔지 궁금해서."
"어... 프로게이머?"
"님. 티어가?"
"골드..."
"마스터는 가야지 프로게이머 할만 한 거 아니었어?"
"뭐야? 오빠가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
"그냥 어디서 들었어. 프로게이머는 재능이 중요하다는데, 넌 재능 없는 거 아니야?"
"씨... 야. 내가 너 따먹는 건 참는데, 나보고 게임 못한다고 말하는 건 못 참겠거든?"
'못 참으면 네가 어쩔건데?'하고 되물었다간 그걸 '도발'로 받아들여 날 따먹으려고 굴까봐 말을 아꼈다. 가정의 평화를 위해 컨트롤을 잘 해야만 했다.
"프로게이머 말고는?"
"으음... 그냥 엄지혜랑 같이 돈 벌까 했는데..."
'공동창업?'
친구랑 공동창업이라니. 불안감이 들었다.
공동창업자 중 한 쪽이 모든 자본금을 들고 튀어버렸다는 케이스가 쉽사리 들려오기도 했고.
잘 되면 서로 이익 분할 때문에 서로 다퉈서 찢어지고, 못 되도 서로 탓하다가 찢어지고. 그런 케이스도 많이 들려오기도 했고.
심지어 엄지혜는 '신재준'의 기억에 따르면 도벽 기질을 갖고 있는 듯했다. 엄지혜가 놀러올 때마다 신재준의 물건이 사라졌던 것이다.
그래서 둘이 같이 일한다는 것에 불안감이 들었다.
그래도 신재희가 뭔가 성인이 돼서 직장을 가질 생각을 하고 있으니 뿌듯했다.
초치지 않기 위해 왜 공동창업의 불안감을 말로 표현하지 않고 속에 삼켰다.
"무슨 사업?"
"사업처럼 거창한 건 아니고... 이것도 게임 관련인데. 모바일 게임 관련된."
"프로그래머?"
프로그래밍 쪽이면 내가 도와줄 수 있었다. '오석준'일 때 직업이 '코딩 노예'였던 나였다.
"아니. 게임 만드는 쪽은 아니고..."
"그럼 일러스트나 스토리 쪽?"
"아니. 그런 쪽이 아니라. 아씨, 오빠가 알아들으려나. '리세계'를 팔겠대."
"리세계? 그게 뭐야?"
"어... 모바일 게임 계정을 수없이 많이 만든 다음에, 가끔 공짜로 뿌려지는 유료재화를 이용해 뽑기 같은 거 여러 번 하고, 좋은 유닛 많은 계정을 만들어내서. 그걸 유저들한테 파는 거라는데... 자기 혼자 하긴 힘들다고 나랑 같이 하자네."
'신재준'의 몸에 빙의한 뒤로 모바일 게임에 손대지 않았지만, '오석준'일 때는 모바일 게임을 자주 했다. 회사가 IT업체다 보니, 사내에서 모바일 게임을 즐기는 하는 사원이 많았고, 간부들도 했다. 회사 클랜을 만들어서 놀기도 했었다.
모바일 게임을 해봤기에 엄지혜가 노리는 바가 뭔지는 알 것 같았다.
"그게 돈이 돼?"
그런데 정말 그게 돈이 될지는 잘 모르겠다.
"엄지혜가 그걸로 벌써 몇 백 벌었다는데?"
"정말? 너희 한 달 전까지만 해도 중3이었잖아."
"나한테 통장도 보여줌. 대박 게임 하나 오픈할 때마다 리세마라 돌려서 계정 팔면 며칠 동안 몇 십만원 씩 번다는데? 아니면 레어 아이디 선점해서 그거 팔거나."
"그럼 반짝 돈 버는 거네."
"그래도 꾸준히 리세계 만들어두고, 그걸 관리하고 있으면 사려는 사람들이 꾸준히 나타나나봐. 한국 뿐만 아니라 전세계에서."
"그래도 재희야. 좀 정상적인 직업을 갖는 건 어떨까?"
나도 '오석준'일 때, 온라인게임의 아이템을 팔아서 돈 벌어볼까 했던 적은 있었다.
신재희를 보니 그랬던 시절의 내가 떠올랐다.
"게임을 좋아하면, 차라리 게임 프로그래밍이라도 해볼래? 오빠가 알려줄게."
"어? 오빠 프로그래밍 할 줄 알아?"
"조금? 관심있어서."
"근데 난 게임 만드는 건 관심없어. 아, 오빠가 사이트 좀 하나 만들어줄래? 엄지혜가 리세계 판매 사이트 못 만들어서, 맨날 엑셀로 수작업하면서 사이트 만드는 거 외주주려고 하더라고."
"흐음... 그래?"
나는 신재연을 따라서 CY전자 입사 노려볼 때, 프로그래밍 할 줄, 내 기술을 활용해볼까 생각 중이었다.
고등학교 졸업하면 대학교도 컴퓨터 관련학과 들어갈 생각이었고.
'아, 그런데 완전 여초겠네.'
'오석준'일 때는 경영학과 들어갔는데, 어찌어찌 하다가 '코딩 노예'가 된 케이스였다. 경영학과는 성비가 6:4 정도였는데, 컴퓨터공학이나 컴퓨터소프트웨어공학과 쪽은 남초였다. 남녀역전세계이니 여기선 반대이지 않을까 싶었다.
'기술을 잊지 않게 연습 좀 해야 돼.'
프로그래밍을 쉬고 있으면 내가 알던 기술을 써먹지 못하게 될 것이었다. 기름칠을 해줄 필요가 있었다.
"내가 사이트 공짜로 만들어줄 수 있어. 퀄리티가 꾸져도 좋다면."
"오, 웜이 볼라 좋아하겠다. 걔도 많은 건 안 바란대."
"웜?"
"엄지혜 별명. '벌레'가 영어로 '웜'이잖아."
"좋은 별명은 아니네."
'신재준'의 기억을 보면 엄지혜는 꽤나 예뻤다. '신재준' 앞에선 수줍음을 많이 탔고, 가슴은 꽤나 거유였다. 최아란의 비견될 정도. 성장기니까 가슴이 더 커질 가능성이 있었다.
"김하늘은 어쩔 거야?"
"하늘이는 왜."
"너 여친 생겼다고 김하늘한테 알리면, 김하늘이 빡쳐서 너 강간할 지도 몰라. 그년은 너한테 집착 심한 년이야. 조심해. 김하늘하고 놀아도, 단둘이 있게 되는 공간에는 절대 가지 마."
신재희가 놀라운 통찰력을 선보였다.
하지만 신재희의 경고는 늦었다. 신재연보다도 일찍이 따먹혀버린 상태였으니.
"그런 일이 있을 것 같지는 않지만... 알았어. 조심할게. 맞다. 너 개학하면 수린이랑 한동안 같이 다녀."
"걔랑? 왜?"
"하늘이가 기미정을 만났대. 기미정이 너 일진회 나간다고 밟아버리겠다고 했나 봐."
"아, 그 시발년..."
"수린이도 너처럼 위험하다며?"
"걔가 주제도 모르고 기미정한테 깝치긴 했지. 그래도 깡은 있더라고, 걔가."
의외였다. 신재희가 오히려 정수린을 호평가하다니.
'영화관에서 같이 일하면서 진짜 친해졌나보네.'
정수린이 나를 강제로 따먹었고, 심지어 그것이 내 동정이었다는 걸 모르니 이럴 수 있는 거였다.
"수린이가 심부름센터 직원 고용하겠대. 등하교할 때, 수린이랑 같이 해. 수린이가 그렇게 해주겠대."
"막상 그렇게 하려니까 쪽팔린데... 그냥 한 번 밝히지 뭐. 깔끔하게."
"야... 너 다치고 돌아오면 나랑 누나의 마음이 어떻겠어."
"아, 알았어... 한동안 같이 다닐게, 정수린이랑."
"잘 생각했어. 그런데 재희야."
"응?"
"그동안 왜 나한테 그렇게 시비를 걸었던 거야? 나 좋아했다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