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1화 〉겨울방학 *
최아란은 신재연과 함께 퇴근했다. 둘은 차에 올라탔다. 신재연은 뒷칸을 바라봤다가 말했다.
"뒤에 공간 없는데 내 동생들 어떻게 타냐?"
"아, 그러네. 캠핑지에서 어케 할까만 생각했지. 가는 길 걱정은 안 했었네."
"내가 렌트하지, 뭐."
"장롱 면허라며. 연수라도 받아야하는 거 아니야?"
"운전하다 보면 떠오르겠지."
"1종?"
"어."
"1종 따도 쓸데없지 않냐. 오토 탈 건데."
"여자는 수동이지."
"흐흫... 그렇긴 해."
신재연이 1종 보통 면허를 따려고 한 건, 나중에 택배나 화물용달 등 화물차를 운전할 경우를 대비한 것이랬다. 스무살, 아직 군대가기 전에 땄다.
세상 일은 모르니 나중에 구입할 차도 수동으로 구매할 생각이었다.
물론, 이번에 렌트할 때는 자동 기어 차를 렌트할 것이었다.
렌트카 업체에는 수동 기어 차가 거의 없을 것이기도 하고, 조작 미숙으로 시동을 꺼뜨리며 어버버 거리는 모습을 동생한테 보여주기 싫은 것도 있었다.
"재준이는 내가 태울 거다?"
최아란이 신재준을 태운다면, 신재연은 신재희를 태우게 될 것이었다.
"...그래."
"대답 느린 거 보소. 왜? 네 남동생하고 내가 단 둘이 차 타고 가는 게 마음에 안 드냐? 아니면 '가족여행'인데 내가 이산 가족으로 만들어버려서 별로야?"
"아니, 그냥 딴 생각하다가 늦게 말한 거야. 전담 핀다?"
"어. 펴."
신재연은 전담을 피기 시작했다. 최아란 역시 옆에서 니코틴이 유혹해오니 담배를 물었다.
"재연아. 너 전담, 집에서 대놓고 피잖냐."
"어."
월요일에 놀러갔을 때. 최아란은 신재준이 돌솥 비빔밥을 해주는 동안 시간을 죽일 겸 롤을 했다. 신재연이 뒤에서 구경하다가 자연스럽게 전자담배를 피길래, 담배 펴도 되냐고 물었고, 신재연이 그러라고 하길래 담배를 폈었다.
그랬다가 방으로 돌아온 신재준이 정색하길래 얼른 집밖으로 나갔었다.
"재준이가 일반담배는 안 봐주고, 전자담배는 봐줘?"
"어."
"캠핑 가기 전에 사둬야겠다. 텐트 들락날락하기 귀찮을 건데."
"이참에 사든지. 내가 자주 가는 가게 지금도 열려있을 걸."
"그럴까?"
신재연은 전자담배를 고르느라 30분 정도 늦게 도착할지 모르다고 신재준에게 미리 말해놓았다.
전자담배가 돈이 되는 것인지 회사에서 신재연의 집으로 가는 길게 전자담배 가게를 여러개 지나쳤다. 신재연이 단골이라는 가게에 잠깐 들려 전자담배를 구매했다.
최아란은 흥미 겸 신재준 앞에서만 피는 것이기에, 일반 담배와 비슷한 궐련형 말고 액상형을 선택했다.
"맛있당."
과일향, 그중에서도 청포도향이 나는 것을 선택했다. 니코틴이 없어 목을 때리는 느낌이 없었지만, 맛과 연기가 풍부한 게 피는 재미가 있었다.
* * *
신재연의 집에 도착했다.
최아란은 자신의 심장이 두근거리는 크게 들려와, 신재연한테까지도 들리지 않을까 걱정이 들었다.
"왔어?"
현관문을 열자 마자 반기는 신재준의 얼굴에 최아란은 그저 웃음만 나왔다. 업무 스트레스와 집안 사정 때문에 쌓였던 나쁜 감정도 사르르 녹아내렸다. 자신이 여태껏 살아온 것이 신재준을 만나기 위해서 아니었을까 생각까지 들었다.
'나 진짜 재준이 좋아하는구나...'
치이익. 프라이팬에서 제육볶음이 구워지고 있었다. 매콤한 향에 군침이 돌았다.
"아란이 누나, 전자담배 샀어?"
"응."
최아란은 신재연처럼 목걸이에 전자담배를 걸고 있었다. 그녀는 신재준의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나도 재연이처럼 집에서 펴도 될까? 이거 니코틴 없어."
"아, 그래? 펴."
"흐흫..."
신재준은 약간 떨떠름한 표정이었지만, 저번에 일반 담배를 큰방에서 폈을 때처럼 정색하진 않았다.
"밥만 푸면 되니까 안에서 기다려."
"그랭."
"아란아, 난 옷 갈아입고 들어갈 거. 넌 컴퓨터하든지."
"오케이."
신재연은 부엌 옆 방에서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최아란은 큰방에 들어와 컴퓨터 앞에 앉았다. 컴퓨터 부팅은 했으나 정작 키보드와 마우스는 건들지 않고 무릎만 떨었다.
'오늘 말해야겠지. 좋아한다고...'
바지 주머니에서 작은 병 하나를 꺼냈다.
보라색 수국 생화가 특수 용액에 잠겨있었다. 병의 흔들림에 따라 꽃잎을 흔들거렸다.
이것은 하바리움이라고 하는데, 생화와 하바리움 용액을 투명한 병에 넣은 관상용 아이템이었다.
처음엔 꽃다발을 살까하다가 이 생화가 영원히 죽지 않을 거란 꽂집 점원의 말에, 고백하면서 건넬 선물로 괜찮다 싶어서 구매했다.
'보라색 수국의 꽃말은 '진심'...'
신재준이 자신의 고백을 '진심'이라 생각해줬으면 했다.
'오늘은 김하늘이 없네.'
어젯밤에 만났던 김하늘은 분명히 신재준을 좋아했다. 신재준이 맥주를 따라주려고 하자, 김하늘이 얼른 가져가 자기가 따르는 행동에 좀 괘씸함을 느꼈었다.
그래도 어차피 신재준을 쟁취해낼 여자는 자신이라는 생각에 그깟 행동 즈음은 귀엽게 봐줄 수 있었다.
'근데 그때 나도 많이 유치했지.'
김하늘 앞에서 신재준네 남매들과 캠핑갈 것을 자랑질했다.
'으... 쪽 팔리네. 7살이나 어린 애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그런 모습에 신재준이 실망할 수도 있었을 거란 생각에, 괜히 그런 짓했다고 후회가 들었다.
방문이 열리는 소리에 하바리움을 주머니에 도로 넣었다. 신재준에게 고백하면서 줄 것인데, 미리 들키면 감동이 덜할 테니까.
"너 뭐 훔쳤냐?"
방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신재연이었다. 정장에서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상태였다.
"훔치긴."
신재연에겐 보여줘도 되겠다 여겨 하바리움을 보여줬다.
"예쁘네. 재준이 주려고?"
"야. 쉿."
방음이 잘 안 되는 집이란 걸 잘 알았다. 부엌에 있는 화장실에서 일 보는 소리도 여기까지 다 들렸다.
지금은 신재준이 부엌 옆 방에서 테이블 위로 반찬통을 내려놓는 소리가 아까 전부터 들려왔다.
'어? 잠깐... 그럼 신재연, 이 년. 자기 남동생이 상차리는 앞에서 옷 갈아입은 거야?'
이게 지금 무슨 상황이지 싶다가. 허물없이 자란 친남매면 그럴 수 있겠다 싶었다.
신재연이 신재준을 업어키웠을 테니, 신재준에겐 신재연이 어머니 같을 테고.
"밥 먹어."
신재준이 상을 들어 큰방으로 대령했다. 최아란은 먹음직스러운 제육고기를 보고 군침이 돌았다.
"오... 냄새 대박. 그리고 이렇게 고기 많이 주는 집은 처음이네."
"리필도 되니까 더 먹고 싶으면 말해."
"흐흫... 잘 먹을게."
"재준아, 잘 먹을게..."
"응, 맛있게 먹어."
최아란이 웃으며 말하자, 신재준도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최아란은 신재연의 대답이 뭔가 힘이 없게 들렸지만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최아란은 신재준의 미소를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성인이 되기 전까지 몸을 섞지 않아도 될 거라고 생각했다.
플라토닉 러브, 즉 정신적인 사랑을 하는 이들이 이해가 가지 않았는데. 지금 이 순간 이해가 갔다.
'재연이와 한 약속도 있고, 재준이도 아직 어리니까. 아껴줘야 돼.'
어제 신재연이 그랬다. 신재준이 성인되기 전에 건들면 죽이겠다고. 그때 최아란은 당연히 그러겠노라 대답했었다.
'어제, 술취한 재준이한테 유혹당할 때는 식겁하긴 했지만...'
이상형 얘기를 하다가, 나 정도로 가슴 큰 여자 좋아하냐고 물어보니까. 신재준은 직접 최아란의 가슴을 만져보면서 이 정도 크기면 이상형에 들어간다고 말했었다.
최아란은 상황이 민망해지고, 술취한 남자애를 가지고 노는 것 같은 죄책감에, 소년을 떨어지게 만들었다.
그러자 다음엔 소년의 발기한 자지가 바지춤을 뚫고도, 셔츠를 밀어낸 꼴을 목격하게 됐었다.
그땐 최아란도 술기운에 성욕이 오른 상태였다. 안 그래도 귀여웠던 신재준이 더더욱 매력적으로 보인 상태였다. 그런 아이의 발기한 자지라니... 그걸 홀린 듯이 쳐다보고 말자, 신재준이 한 언행은 깜찍했다. '변태'라고 놀리 듯 말하면서, 손으로 가렸었다.
'재준이, 술 먹이면 안 되겠다. 그리고 엄청 컸지... 미국 포르노 봐도 그 정도로 대물인 남자는 희소한데... 그러고 보니 신재연의 할아버지가 미국인이랬지.'
6.25전쟁 때 미국으로 건너간 이민자가 증조할머니.
그 증조할머니와 결혼한 남자, 즉 신재연의 할아버지가 미국인이랬다.
이민 2세로 미국에서 성공한 신재연의 할머니가 한국인 DNA를 많이 물려받은 자식이었다.
이민 3세인 신재연의 아버지도 한국인처럼 생겼는데, 미국인 DNA 중 폭유와 대물 DNA가 신재연 세 남매에게 발현된 듯했다. 최아란의 뇌피셜에 따르면 말이다.
'음? 뭐지?'
최아란은 제육덮밥을 맛있게 먹다가 신재준의 눈치를 살폈다.
그는 표정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 계속 자신의 친누나를 흘낏거렸다.
'신재연도 오늘 통 회사일에 집중 못하는 것 같던데. 퇴근할 때 집 올 때도 자꾸 딴 생각 빠지고.'
혹시 어제 자신이 집으로 돌아간 다음에 둘이 싸우기라도 한 걸까?
'아, 오늘은 뭔가 고백하기 좋지 않은 날인 것 같다?'
그냥 하지 말아야 할까?
그런데 신재연이 식사를 다 끝마칠 즈음 말했다.
"나 편의점 갈 건데. 뭐 필요한 거나, 먹고 싶은 거라도 있어?"
"카카오72 ?"
"너 먹으려고?"
"사놨다가 누나 먹으라고. 이제 곧 시작이잖아. 생리."
최아란은 물을 마시다가 뿜을 뻔했다.
이 친남매는 남동생이 누나의 생리도 챙겨주는 모양이었다.
'얼마나 허물 없는 거야...'
"아란아, 너는 뭐 없어?"
"난 됐어."
"그래."
'자식, 날 위해서 자리 피해주네. 고맙다.'
신재연이 현관문을 닫고 나갔다.
이제 이 집에 신재준과 단둘이 있게 됐다.
"다 먹었지? 상 치울게, 누나."
"내, 내가 도와줄게."
"됐어, 누나는 그냥 앉아있어."
신재준이 상을 들고서 방을 나갔다.
혼자 전기장판 위에 남은 최아란은 심장이 벌렁거리기 시작했다.
입술이 바싹바싹 말라오는데, 반대로 손바닥에선 자꾸 땀이 났다.
정장 바지에 손을 문지르며, 신재준이 상차림을 정리하는 소리를 들었다.
설거지거리에 물을 담아두는 소리. 반창통을 냉장고에 집어넣는 소리. 행주로 상을 닦는 소리. 상의 다리를 접고 가구 틈에 끼어두는 소리.
꿀꺽.
신재준이 방으로 들어왔다.
소년은 눈웃음을 치면서 최아란의 앞에 앉았다.
"나한테 할 말 있지 않아?"
"어? 어..."
"말해 봐."
최아란은 고백해본 적이 없었다.
가끔 로맨스 드라마나 영화 같은 걸 볼 때마다, 주인공들이 어째서 사랑 고백을 망설이는지 이해가 안 됐다.
고백했다가 받아주면 사귀는 거고, 아니면 아닌 것일까. 왜 저렇게 비효율적으로 고민과 고뇌를 해대는 것일까.
하지만 막상 고백해야할 순간이 찾아오니 두려웠다.
'나는 사귈 수 있는 거 확실하잖아.'
그러니 두려워할 필요없다고 자기최면을 걸며 용기를 냈다.
최아란은 주머니에서 하바리움을 꺼냈다.
"그거 뭐야? 예쁘네?"
"수국인데. 진짜 꽃이야. 이 안에서 시들지 않는대."
"오."
"선물로 주려고 사왔어."
"고마워, 누나."
신재준이 받아갔다. 병을 흔들어 흔들어 물속에서 흔들리는 보라색 수국을 신기한 듯 쳐다봤다.
"보라색 수국 꽃말, 알아?"
"뭔데?"
"'진심'."
"오."
"너 어제 나한테 했던 말, 기억해?"
"어? 내가 뭐라고 했더라?"
"얄밉네... 톡으로 말하지 말고, 직접 말하라며."
"내가? 뭐를?"
최아란은 순간 위기감이 들었다. 고작 맥주 한 잔 마시고 필름이 끊긴 걸까? 그리고 그런 요망한 애교를 부렸던 걸까?
고백하지 말아야하는 걸까?
나이 차이도 컸고, 상대방은 아직 미성년자, 고등학생이었다.
최아란이 다시 용기를 잃고 고개를 숙이는데. 신재준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 기억났다. 누나, 나 좋아해?"
최아란은 숙여졌던 고개를 벌떡 세웠다.
"어. 진짜, 진심으로 좋아해."
"흐흫... 그래?"
"응..."
최아란은 심장이 쿵쾅거렸다.
신재준은 고백 받기 전 선물로 받은 하바리움을 바라봤다.
"이거 식물 표본이네."
"뭐?"
"'진심'으로 날 이렇게 표본으로 만들어고 싶은 거야?"
"그게 무슨..."
그러고 보니 신재준의 말이 맞았다. 자신의 말은 틀렸고.
저 생화가 어떻게 영원히 살아있겠나?
표본 용액에 담가진 채로, 살아생전의 모습을 억지로 유지하는 것뿐이었다.
"그, 그런 뜻이 절대 아니었거든?!"
"와, 무섭다. 영원히 속박 당하는 연애."
"아, 아니. 나는 꽂집 점원이 그 꽃이 영원히 살아있다고 해서, 낭만적이라고 생각해 산 건데..."
억울했다.
그래서 울상을 짓는데, 소년이 웃으면서 안쪽 방으로 하바리움을 들고 갔다.
최아란은 뭐하는 건가, 그리고 저 안쪽 방은 무슨 방인가 궁금해서 따라갔다.
그 방은 추웠다. 다른 방들과 달리 보일러가 안 통하게 해놓았는지 바닥과 공기가 서늘했다.
책상 위에 공부한 흔적이 남겨져 있고, 책상 옆에 이동식 난로가 있었는데 공부할 때마다 켜는 듯했다.
신재준은 그 책상 위에 잘 보이는 곳에 하바리움을 세워두었다. 최아란을 올려보았다.
"누나가 나한테 바라는 건, 사귀어주는 거겠지?"
"어? 어..."
사람 놀리는 얄미운 웃음으로 말하는데, 감히 때릴 수도 없었다.
"이거 완전 도둑년 아니야? 나 누나한테 7살이나 어린데."
"윽... 너무 팩트폭력이라 아프다..."
"게다가 미성년자."
"...할 말이 없다."
"내가 나이 먹으면, 또 어린 놈으로 갈아타려나?"
"절대! 그럴 일 없어. 절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