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8화 〉겨울방학 *
30층에서 내려 초인종을 눌렀다.
"오빠!"
현관문을 열어준 소녀는 곧장 내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내 가슴에 고개를 비볐다.
이 정도야 애교로 봐줄 수 있으니 내버려뒀다.
"들어가자."
"넵."
정수린은 뒷짐을 진채 나보다 세 걸음 정도 앞서 걸었다. 날 돌아보며 물었다.
"저희 아빠 방금 내려갔는데. 만났어요?"
"응. 영화관 지을 부지 둘러보신다던데."
"히힣... 맞아요. 영화관 4개째."
소녀는 자랑하듯 말했다.
"대단하네."
"그렇죠? 아. 오빠, 저 떠난 다음에 김하늘하고 키스 몇 번 했어요?"
'어제 저녁 뭐 드셨어요?'하고 묻듯 태연하게 물어왔다. 그런데 그 질문 내용은 참 이질적이었다.
"네? 몇 번 했냐고."
"수린아. 우리 과외 그만할까?"
"...네? 왜요?"
"너 때문에 힘들어서."
"아..."
'아'는 무슨 '아'인지.
우린 거실에 멈춰 서서 대치했다.
내가 여태껏 정수린에게 '반항'하는 모습을 보였던 건 핸드폰 톡에서 뿐이었다. 나는 늘 정수린 앞에서 겁쟁이처럼 굴었다.
정수린은 내가 면전에서 '반항'할 것이라곤 생각지 못했는지, 뭐라 말하지 못하고 어버버거렸다.
"오, 오빠가 그러면 신재희 고소해서..."
신재희를 언급하자 짜증났다.
"단체고소 시도해봐. 내가 피해자들 찾아가서 다 몸 대줄 거야."
"뭐, 뭐라고요?"
"재희의 친오빠인 내가, 재희 대신 진심으로 사과한다면 다들 고소 취하하지 않겠어? 넌 혼자 끝까지 고소해봐. 이 롱패딩 팔아서 농구화 값도 갚을게. 재희가 너 괴롭혔던 거? 고작 몇 대 툭툭 친 것뿐일 거 아니야? 그 정도는 학교에서도 반성문 정도로 봐주겠지."
"시발... 그딴 짓 하지 마요... 그딴 이유로 몸 막 굴리지 말라고요."
만에 하나 신재희가 단체 고소를 당하는 상황이 오면 몸을 대줄 생각이 있었다. 그렇게라도 신재희를 지킬 생각이었다.
'이 정도만 해도, 재희를 고소하겠다는 둥 협박은 안 할테지만... 그래도 쐐기까지 박아놓을까.'
난 핸드폰을 조작했다. 음성 녹음본 파일을 불러와, 재생바를 대충 중간지점으로 당겨서 재생시켰다.
[하아... 시발, 자지 보여줘요.]
[흐흑... 제발 그만해...]
[손 치우랬지. 오빠, 맞을래요? ...시발, 자지 진짜 개 꼴리네.]
'으, 닭살 돋아.'
눈물 연기한 것을 녹음본으로 들으니 오글거렸다.
재생을 정지시켰다.
"언제 녹음한 건줄 알겠지? 하늘이네 손님방에서 강간당했을 때야."
정수린은 내 핸드폰을 노려봤다.
빼앗을 생각이라도 든 걸까? 하지만 빼앗겨도 걱정 없었다. 백업해뒀으니까.
정수린은 핸드폰 갈취를 시도하지 않고, 땅바닥을 내려다봤다.
"이 녹음 6시간짜리야. 너 나 강간한 거 빼도 박도 못 해. 그리고. 네가 미성년자라서 강간 저질렀어도 처벌이 약할 거라고?"
정수린은 날 협박했을 당시 그런 말을 했었다.
"요새 2D 남자에도 교복만 입으면 인권 부여하는 시대인 거 몰라? 재희가 일진 짓했던 것보다 네가 더 심할 벌 받을걸?"
정수린이 고개를 들었다.
안 그래도 화장을 해서 창백함을 감췄던 얼굴이, 지금은 시퍼래졌다.
"시, 신고하지 말아주세요."
"그럼 앞으로 내 말 들어."
"네, 네. 오, 오빠가 하는 말. 전부 따를게요..."
역시 어린애였다. 협박을 좀 하니까 바로 굴복했다.
'후우... 정수린 관리할 수 있겠네. 아, 그래도 시험 한 번 해볼까.'
나는 핸드폰의 비밀번호 설정을 풀었다.
그리고 정수린에게 내밀었다.
"받아. 절대 녹음본 삭제하지 마."
정수린이 만약 삭제해도 괜찮았다. 백업해뒀으니.
소녀는 벌벌 떨리는 손으로 핸드폰을 건네받았다. 내 핸드폰을 켜보지도 않고 그저 들고만 있을 뿐이었다.
"핸드폰 켜."
"네?"
"키라고."
내 명령에 일단 전원버튼을 눌렀다.
"어플 중에서 '음악' 어플 찾아서 실행해."
"왜, 왜요?"
"야... 시키면, 그냥 시키는 대로 해."
내가 목소리를 낮게 깔고 말하자 정수린은 어깨를 움츠리며 따랐다.
"날짜 보이지? 토요일 새벽에 녹음된 파일. 꾹 눌러봐."
정수린은 내가 시키는 대로 따랐다.
그러자 '파일 체크 모드'가 됨과 동시에, 해당 파일 하나만 체크되었다.
하단에는 '재생', '앨범에 추가', '편집', '삭제'의 메뉴가 나타났다.
"그거 네가 나 강간했을 때 녹취한 파일이야."
"..."
"삭제하고 싶어?"
"아, 아뇨..."
"왜? 그 파일, 백업본 없어. 그것만 삭제하면 나 강간한 증거도 사라지는데?"
"오, 오빠가 명령했잖아요... 핸드폰 주면서, 삭제하지 말라고..."
기특했다.
어깨를 움츠리고, 커다란 안경알 너머로 내 눈치를 보는 정수린이 새삼 귀엽게 보였다.
원래도 귀여웠지만, 코인노래방에서 나와 김하늘의 키스를 손가락으로 카운팅하던 그 모습 때문에 좀 섬뜻해졌었다.
하지만 지금은 내 말에 곧이곧대로 따르는 애라고 생각하니 다시 귀엽게 보였다.
"내가 김하늘하고 있을 때, 함부로 내 신체 터치하지 마."
"네..."
"아. 그냥 다른 사람하고 있을 때, 함부로 내 몸 건들지 마."
"네... 저, 그런데 오빠."
"왜."
"그럼 다른 사람들 없고, 우리 단 둘만 있을 때는요?"
"...이상한 부위만 만지지 마."
"히힣... 네. 하아... 다행이다..."
정수린이 내 품 속에 들어왔다. 내 가슴에 볼을 댔지만 비비진 않았다.
정수린은 슬슬 아이에서 여자가 되어갔다. 꾸민 머리도 그렇고, 옅은 화장도 그렇고, 몸에 뿌려서 나는 향기 냄새도 그렇고. 놀랍게도 정수린도 여자가 되었다.
"이 정도 스킨십은 해도 되죠?"
"그래..."
"히힣.. 어라? 오빠? 왜 발기해요?"
내 발기하기 시작한 자지가 정수린의 복부를 찔렀다.
예쁜 여자가 신체 밀착을 해오면, 발기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내가 성욕이 역전된 원래 세계에서 왔기에 그런 게 아니었다. 이 세계 남자들도 예쁜 여자들의 스킨십에 쉽게 발기하곤 했다.
"까불지 마."
"명령이에요?"
"어."
"넵."
"그리고 너 내 몸 찍었던 사진들 있지? 다 삭제해."
"저만 볼 거예요. 보관하면 안 될까요...?"
"네가 어디 인터넷에 올릴 애라고 생각은 안 해. 그래도 네가 핸드폰을 잃어버려서 습득한 사람이 인터넷에 올리거나, 핸드폰을 해킹 당하거나. 그럴 가능성도 있잖아."
사실 컨트롤에서 벗어난 정수린이 내 사진을 퍼뜨릴까봐 걱정돼서 그런 거였다.
"그럼 오빠, 생으로 보여주세요."
"네가 나한테 조건을 말할 처지야? 나 집에 간다?"
"죄, 죄송해요!"
"내 눈 앞에서 삭제해."
"네..."
정수린은 내 품에서 떨어졌다. 쥐고 있던 내 핸드폰을 돌려주고, 이젠 자신의 핸드폰을 조작했다.
앨범 어플에 내 알몸사진이 잔뜩 찍혀있었다. 동영상도 몇 개 있었다. 대부분 김하늘네 손님방에서 따먹힐 때 찍힌 것들이었다.
정수린은 그것들을 싸그리 체크해 삭제해버렸다.
"백업해둔 거 없어?"
"없어요."
나는 정수린이 거짓말하지 보기 위해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러자 얼굴을 붉히며 시선을 피했다.
"거짓말이지?"
"진짠데요."
"근데 눈을 왜 피해."
"오빠가 빤히 보니까 쑥스러워서..."
"진짜 다 지웠지?"
"네. 진짜, 진짜진짜 다 지웠어요."
"하아... 슬슬 과외시간이네. 네 방에 가자."
"히힣... 오빠, 오늘 숙제도 다 했어요."
정수린은 이상한 언행을 하더라도 내가 시킨 숙제나, 과외 수업을 착실히 따라왔다. 선생 입장에선 좋은 학생이었다.
소녀의 방에 들어가 숙제한 걸 채점하고, 칭찬으로 이젠 습관이 된 머리 쓰다듬기를 해주었다.
"잘 했어."
"히힣..."
* * *
착실히 과외 수업을 받다가, 과외 시간이 10분 정도 남자 정수린이 통 수업에 집중을 못하고 다리를 떨었다.
"집중 안 돼? 오늘은 이만할까?"
"아... 아니요."
나는 떨고 있던 정수린의 다리를 꾹 눌렀다.
'어? 살 좀 찐 듯?'
젓가락처럼 빼빼 말랐던 허벅지가 지금은 제법 살집이 느껴졌다.
뼈 부딪칠 때 아프니까 살 좀 찌라는 내 요구를 잘 따르는 중인 듯했다.
정수린이 자신의 허벅지를 누른 내 손목을 붙잡았다.
'손목'은 '이상한 부위'가 아니니, 내버려뒀다.
나는 왜 그러냐고 듯 쳐다봤다.
정수린은 우물쭈물 거리며, 내 눈치만 살폈다.
"왜? 할 말 있으면 해."
"오빠... 섹스해주시면 안 돼요?"
"뭐?"
"오늘 아빠 나가서 엄청 기대했단 말이에요. 제 집에선 한 적 없으니까."
"안 돼."
"아, 제발요."
"내 말 무조건 따르기로 했잖아. 거짓말이었어?"
"오, 오빠도 섹스 좋아졌지 않았어요? 그래서 저한테 벗어날 수 있게 됐음에도, 이렇게 저한테 과외해주는 거 아니냐고요."
"허..."
"오빠도 섹스하고 싶잖아요. 그쵸? 참지 마요. 저랑 기분 좋아져요, 네?"
내 명령 때문인지 차마 '이상한 부위'를 건들진 못하고, 내가 처음에 허락했던 스킨십을 해왔다.
앉아있던 내 다리 사이에 무릎을 올리고, 날 끌어안은 것이다.
은은하게 맡아지던 여자의 향수가 확 끼쳐왔다.
"오빠도 제 보지 좋아하잖아요. 다 알아요. 싫으면 그냥 집에 돌아가세... 꺅!"
난 그녀의 젖가슴을 꽉 쥐었다. 앞으로 쥔 것이라 정수린은 비명을 내질렀다.
자신이 포옹하고 있기에, 내가 공격하는줄은 아는지 얼른 일어났다.
"아, 아프다고요!"
"집 돌아간다. 네 보지 싫으니까."
"예? 어, 어째서요?"
"이유를 꼭 말로 해야 돼?"
사실 살집 오른 정수린은 어떤 맛일까 궁금해서 꼴리긴 하는데, 지금 해주면 그녀가 기세등등해질까봐 참았다.
"내가 왜 과외 그만 안 두냐고? 너희 아버지한테 받은 게 많아서 그렇다. 내가 너하고의 섹스를 좋아하게 돼서, 과외를 계속 해주고 있는 거 아니냐고? 너 미쳤냐? 내가 당하면서 우는 거 못 봤어? 계속 싫다고 했잖아. 싫은데 억지로 덮친 거잖아."
사실 좋았다.
내 말에 그녀는 입을 다물고 고개를 숙였다.
뒤로 넘어가있던 긴 머리카락이 앞으로 쏟아지면서, 귀신 꼴이 되었다.
'설마 얘, 또 폭주하는 건 아니겠지?'
그런 걱정을 하며 지켜보는데, 물방울이 뚝뚝 방바닥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너 설마 울어?"
"흐흑... 미, 미안해요... 오빠를 좋아해서 그런 거였어요. 죄송해요... 흐흑... 진짜진짜 미안해요..."
"진짜 울고 싶은 사람은 나 아닐까?"
"죄송해요... 진짜 죄송해요... 제가 미쳤었나봐요... 시, 신재희가 오빠 여동생만 아니었으면... 흐흑, 이, 이런 일은 없었을 텐데..."
"허..."
난 헛웃음이 터져나왔다.
정수린의 찐따력이 놀라웠다.
논리적으로 따지자면 정수린의 말이 맞긴 했다. 정수린이 날 따먹기 위해 써먹은 수단이 '신재희'의 일진 경력이었다. 그 수단이 나한테 먹힌 까닭(내가 당해준 까닭)은 내가 그 '신재희'의 친오빠인 것 때문이었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수린이 날 강간하는 게 정당방위가 될 수는 없는 것 아니지 않은가.
정수린은 지금 더 이상 날 멋대로 컨트롤 할 수 없게 되고, 반대로 나한테 협박을 당하는 처지에 놓였다.
자신의 망상이 현실화된 것에 신나게 날 따먹다가, 내가 일깨어주니 정신이 번쩍 든 상태였다.
정수린은 날 좋아했다. 내가 자신을 떠나는 걸 싫어했다. 정신이 현실로 돌아오니까, 자신이 한 짓이 너무나 나빴고 내가 떠나버릴 것도 같고 나한테 미안함이 든 것 같기는 한 모양이었다. 그래서 질질 짜기 시작한 것이고.
그 우는 모습은 그러려니 했는데.. 자신이 나쁜 짓을 한 행위의 탓을 '신재희'한테 돌리다니. 그 모습이 너무 찌질했고, 신재희의 오빠가 된 입장에서 심하게 마음에 안 들었다.
"야. 엎드려뻗쳐."
"예, 예?"
정수린이 고개를 들었다. 울어버려 눈화장이 번지고 말았다. 번지기 전까진 몰랐는데, 눈화장도 연하게 하긴 했었구나.
"네가 잘못한 것을 재희 탓을 해? 빨리 엎드려뻗쳐."
이렇게 말하면서 양심이 찔리긴 했다.
내가 정수린의 어수룩한 협박에 '당해주지' 않았다면, 정수린이 이런 애가 되진 않았을 거였다.
'제3자가 봤을 때, 난 아무 죄 없으니 됐어.'
정수린은 엉거주춤 엎드려뻗쳐 자세를 취했다.
그렇게 벌 받은 자세가 된 정수린의 등 위로 앉았다.
"윽...!"
정수린은 운동을 잘 안 했나보다. 곧바로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원래 세계에서 자신보다 어린 여자를 엎드리게 하고, 그 위에 앉으면 개새끼 소리를 듣겠지만. 이 세계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팔굽혀펴기도 시키려고 했는데. 팔 내리는 도중 무너지겠네.'
난 그녀의 뒷머리를 붙잡고 이리저리 흔들었다. 살짝.
"야. 재희 잘못 아니고, 온전히 네 잘못이야. 알았어?"
"네, 네."
"그럼 다시 빌어 봐. 누구 잘못이라고?"
"제, 제가 잘못했어요..."
"아까는 왜 남탓을 했어, 응?"
"죄, 죄송해요... 흐흑..."
"이유를 물었잖아. 죄송한 건 이유가 못 돼. 너 내 수업도 잘 따라올 정도로 똑똑하잖아. 그 똑똑한 머리로 제대로 설명해보라고."
"제, 제가... 흐흑..."
"응? 목소리가 너무 작아서 안 들리는데?"
"찌, 찐따라서... 흐흑... 그랬어요."
아, 웃음이 터질 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