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4화 〉겨울방학 *
'그런데 저 신재연 직장동료는 뭔데 집에 데려온 거지? 설마 저 여자도 재준이랑 관계있는 건 아니겠지?'
막장드라마는 언제나 아저씨들 사이에서 인기였다.
바로 지금, 저 흉물 안에서 그 막장드라마가 현실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게 아닐까 싶었다.
설마 신재준의 어린 섹스파트너와 소꿉친구, 그리고 누나의 직장 동료. 이 3명 모두가 신재준과 몸을 섞는 사이인 것일까?
한지유는 귀를 쫑긋 세웠다.
"뭐야. 오지 말랬는데 결국 왔어요?"
"재, 재준아. 난 안 간다고 했는데, 재연이가 갑자기 나보고 집까지 차 태워달랬어."
"야. 너도 얼른 집에 가보자며. 하늘이랑 단둘이 있을 게 걱정된다고."
부엌에서 떠드는 신재준과 신재연, 신재연의 직장동료 목소리였다.
'딱 들어보면 신재연의 직장동료는 재준이한테 관심있으면서, 아직 재준이랑 떡 못 쳤나보네. 하늘? 그게 재준이 소꿉친구 이름인가 보지? 그 하늘하고 재준이하고 떡치는 사이인데, 신재연하고 신재연 직장동료는 꿈에도 모르는 있는 것 같고.'
신재준이 대단했다. 아주 옴므파탈이 따로 없었다.
최소 떡치는 사이인 여자가 2명에, 친누나의 직장동료까지 어장관리하고 있는 듯했다. 어제오늘 발견한 것만해도 3명이었다.
사실 신재준에게 몇 배 더 많은 섹파가 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거였다.
'나도 재준이 섹파 될 수 있는 거 아니야?'
그런 생각을 하며, 피고 있던 마지막 담배를 신발로 비비고 집으로 돌아갔다.
신재준을 옳은 길로 이어주어야 한다는 도덕심은 물에 빠진 솜사탕처럼 자취를 감춰버렸다.
누구한테나 다 대주는 미소년에게 자신도 간택되어서, 그의 자지를 이용해 아다를 따이고 싶은 욕망이 생겨났다.
한지유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처녀를 줄 것이라며 입대 직전에도 업소 가는 걸 참았지만... 10년 가까이 그 성장과정을 지켜본 그 고고한 연꽃이, 사실 쉽게 따이는 꽃인 걸 깨닫자 음심이 타올랐다.
* * *
최아란은 신재연이 든 장바구니에 아이스크림을 집어넣었다.
"이쁘대."
"누가? 김하늘?"
"응."
"못 생겼을 줄 알았냐?"
"못 생겼으면 좋겠다, 하고 바라고는 있었지. 씁... 예의도 바르고. 재준이랑 동갑이기도 하고. 소꿉친구였고. 하아... 승산이 있는 거냐?"
"세상 망했냐? 겁나 한숨 쉬네."
"네가 내 입장되어봐라. 평생 남자한테 관심없다가, 갑자기 남자 만나고 싶은 마음이 터졌어. 그러던 와중에 진짜 사귀어보고 싶은 애를 만난다? 근데 걔한테 이미 거의 사귀기 직전인 상대가 있다? 얼마나 절망적이냐."
신재연은 속으로 코웃음 쳤다. 그 절망적인 상황을 겪는 건 사실 자신이었다.
'사실 너 지금 연애 순항 중이야, 인마.'
술이 먹고 시간이 흐른 뒤라서 그런가. 신재연은 자신이 어떤 유치한 짓을 했는지 깨닫고 수치스러워졌다.
'이제라도 말해줘야 하나... 재준이가 너한테 호감있는 것 같아서, 너랑 좀 만나보고 싶어한다고. 네 도끼병이 사실 진짜라고.'
친구한테 미안했다.
하지만 이실직고하기 미안했다.
'아, 모르겠다. 어차피 캠핑 가면 정해질 거, 내버려두자.'
신재준이 캠핑가자고 하는 건, 가족여행을 하고 싶은 것도 있겠지만 최아란이 어떤 여자인지 헤아려보려는 것도 있을 거였다.
신재연에게도 좋은 기회였다. 최아란과 2박 3일짜리 캠핑 생활을 지내다보면, 무의식적으로 드러낼 '본모습'을 포착할 수 있을지 몰랐다.
'그렇게 며칠 함께 지내보니 별로인 년이면, 재벌이든 뭐든 재준이하고 못 사귀게 막아야지.'
"흐흫... 이거 맞지? 재준이가 말한 어묵탕."
"넣어."
"오키. 근데 몇 개 넣냐?"
"꽤 크네. 그래도 4개 집어라. 일단 2개 해먹고 부족하면 더 돌리면 되겠지. 남으면 나중에 먹고."
"오키."
최아란은 신재연이 든 장바구니에 어묵탕을 집어넣었다.
"재준이 먹으라고 과자 몇 개 사가야지."
"그러다가 재준이 돼지되면 어쩌려고."
"재준이는 돼지 돼도 귀여울 걸."
"과연 그럴까."
봉지과자 4종류, 콜라, 술은 소주 1병과 맥주 1병만 사고, 아이스크림은 4개를 구매했다.
"내가 계산했으니까 네가 들고 가라."
"그래."
자신의 집에서 먹을 것들이기에 신재연이 계산하고, 최아란이 봉지를 들었다.
두 사람은 입가심으로 아이스크림부터 1개씩 뜯었다. 신재연은 애초에 추위를 안 탔고, 최아란을 보니 술기운에 겨울추위가 안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꽁꽁 언 아이스크림을 맛있게 빨아먹었다.
"재연아. 둘이 키스했으려나?"
"친구 사이끼리 했겠냐?"
신재연은 대답하면서도 뜨끔했다. 친남매 사이끼리 키스해버렸다. 물론, 그 키스 당한 당사자인 신재준은 모를 것이었다.
"그럼 다행이고. 근데 너랑 재준이 사이 특이하다. 보통 남매끼리는 원수지간이잖아."
"내가 잘 기른 거지."
'먹음직스럽게... 아니, 지금 뭔 생각하는 거야.'
아직 술기운이 남아있는 게 분명했다.
신재연은 고개짓으로 잡생각을 털었다.
/ / /
"나 외롭다~"
"기다려. 곧 갈거니까."
나는 세척한 새 돌솥에 식용유를 먹여두었다. 10분 뒤에 닦고 나서 조리하는데 쓸 생각이었다. 비빔밥에 투입할 재료를 미리 썰어둔 뒤 큰방에 갔다.
김하늘이 내 몫의 비빔밥을 비벼준 상태였다.
앉아서 몇 스푼 먹었다.
김하늘이 먹던 비빔밥을 꿀꺽 삼키고 물었다.
"반찬 먹어도 되냐?"
"뭔 반찬? 먹어."
"그럼 잘 먹을게."
마주 앉아있던 나한테 고개를 내밀더니, 내 입술을 살짝 물고 갔다.
"장난하냐?"
"킥킥. 아, 맛있다."
난 김하늘이 앉아있는 꼴을 살폈다. 그녀는 무릎을 꿇고서 식사 중이었다.
양반다리하고 있었으면 편의점에서 무슨 팬티를 사왔는지 구경할 수 있었을 텐데 아쉬웠다.
신재연과 최아란이 편의점에서 돌아왔다.
최아란은 장난스럽게 말을 걸었다
"치사하게 둘이서 먼저 먹고 있었어?"
"지금 화내는 거예요?"
"아, 아니..."
내 한마디에 화들짝 놀랐다.
그 모습이 귀여워서 내가 먹던 비빔밥을 한 스푼 퍼서 내밀었다. 그러자 최아란은 헤벌쭉 웃다가 입을 벌렸다. 숟가락은 입 안에 넣어주자 얼른 받아먹었다.
"우움... 맛있다."
'아.'
김하늘 앞에서, 김하늘을 자극할 만한 짓은 하지 않기로 했는데 무심코 해버렸다.
김하늘의 눈치를 살피니, 김하늘은 방긋 웃어보였다.
마치 '네가 그래도 난 신경 안 써. 안심해.' 이런 느낌의 웃음이었다.
'신경 안 쓸 리가. 얘 지금 속에서 열불나겠구만...'
"재준아. 나도."
"누나도?"
"아~"
신재연의 입에서 강한 소주향이 확 불어왔다.
"술을 얼마나 마신겨."
난 찡그리면서 밥을 크게 떠서 그 작은 입에 쑤셔넣었다.
"어묵탕은?"
"에워올에."
신재연은 음식물로 가득 찬 입을 손으로 가린채 '데워올게'라고 말하고 일어났다.
나는 지금 밥을 먹고 있던 터라, 그냥 그녀가 가도록 내버려뒀다.
"아, 재준아. 콜라."
"고마워요, 누나."
"흐흫... 재연이가 산 거니까 나한테 고마워할 거 없어."
최아란이 편의점 봉투에서 콜라를 꺼냈다. 나는 컵에 따라서 김하늘과 나눠마셨다.
최아란은 자기 친구가 떠나자 어색해졌는지 괜히 핸드폰을 보기 시작했다.
김하늘도 최아란이 있자 어색했는지 묵묵히 수저만 움직였다.
나는 어색함을 못 참고 두 사람의 공통점이 될만한 걸 언급했다.
"아란 누나도 롤 하죠?"
"어!? 재준아. 너도 롤 하니?"
최아란은 갑자기 되게 기뻐했다. 미안하지만 그 기대감을 부러뜨릴 수밖에 없었다.
"아뇨. 전 안 하고 재희랑 하늘이가 해요."
최아란이 김하늘을 바라봤다.
김하늘도 최아란을 바라보며 먹던 음식물을 꿀꺽 삼켰다.
"하늘아. 너 티어 뭐야?"
"다야 4요."
"오. 난 다야 2. 올해 안에 마스터 갈 듯."
나는 롤을 제대로 해본 적 없었다. '오석준'일 때, 친구들하고 PC방 가서 몇 판 해보고 재미를 못 느껴 바로 껐었다. 그래도 다이아2니 4니 마스터니. 저 등급이 얼마나 잘하는 것인지는 알고 있었다.
"예, 금방 올라갈 겁니다. 지금은 친구 다이아로 올려준다고, 일부러 안 올리고 있었어요."
김하늘의 친구면 아마 소희정 얘기 같았다.
"주챔은 뭐야?"
"아페랑 카이사요. 언니는요?"
"난 아칼리, 모데."
"탑이요?"
"응."
"언제 같이 듀오하실래요?"
"좋지. 신재연은 롤 안 한대서 심심했는데 잘 됐다."
내가 롤에 관심이 없어서 그런지, 둘의 대화에 썩 재미를 못 느꼈다.
어쨌든 어색함은 풀렸으니 됐다.
나는 두 여자가 게임으로 친목을 다지는 사운드를 들으며 밥을 깨작였다. 이거 다 먹을 즈음이면 새 돌솥도 세척 다 됐을 거고, 그럼 쓱싹 헹구고. 비빔밥 세팅한 뒤 돌솥을 데우면 되었다.
"재준아. 너도 우리랑 롤 해볼래?"
"서포터할래? 너는 내가 하라는 대로만 하면 되는데."
최아란이 나보고 하자고 했고, 김하늘은 자신이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된다며 꼬드김을 보조했다.
"난 게임 별로 관심없어서 됐어."
김하늘과 최아란은 동시에 아쉬운 표정이 됐다.
신재연이 어묵탕 2개를 데워왔다.
"고마워, 누나."
"뜨거우니까 조심해서 먹어. 하늘이, 너도."
"잘 먹을게요, 언니."
"누나. 근데 이거 양 많아서 1인 1탕은 못하겠는데?"
"그럼 이 2개 4명이서 먹지, 뭐."
난 테이블 위를 살폈다가 아직 신재연과 최아란을 위한 수저를 안 놓았음을 깨달았다.
내가 밥 먹고 있는 와중이라 또 신재연한테 시키기로 했다.
"누나. 미안한데 누나 꺼랑 아란 누나 꺼 수저 좀."
"내가 갈게."
최아란이 벌떡 일어나 부엌으로 향했다.
신재연이 그런 최아란의 등에 대고 말했다.
"소주잔하고, 너 먹을 맥주잔도 가져와."
"오케이."
난 어묵탕 국물을 숟갈로 떠먹어봤다가, 내가 원했던 그 어묵국물이라 만족했다. 비빔밥에는 역시 어묵국물이었다.
신재연이 내 숟가락을 빤히 쳐다보길래, 국물을 떠다가 내밀어보았다. 그러자 신재연이 입가에 붙으려는 긴 머리카락을 붙잡으며 고개를 내밀었다.
"쮸룹..."
아씨. 국물 빨아마시는 소리가, 뭐 빠는 소리 같아서 살짝 꼴렸다.
최아란이 수저 2세트와 소주잔, 컵을 가져왔다.
최아란과 김하늘은 최근 올라왔다는 롤 패치노트에 대해 떠들었따. 겜창 같은 이야기로 죽이 잘 맞고 있었다. 뭘 버프했고, 너프했는데 이건 잘했고, 이건 왜 했는지 모르겠네. 패치로 인해서 앞으로 메타가 이럴 것이네, 저럴 것이네.
신재연은 그런 둘을 쳐다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신재연은 저 두 사람 모두가 날 좋아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런 두 사람이 나한테 점수 따려고 노력하기는커녕, 게임에 관심없는 날 내팽겨두고 게임 얘기 삼매경에 빠져있는 게 한심해보였나 보다.
신재연이 사왔던 소주를 땄다.
"누나, 내가 따라줄까?"
"됐어."
"아니, 이리 줘."
자작하려고 드는 그녀한테서 소주병을 빼앗았다. 신재연이 잔을 들자 난 두 손으로 소주를 따라줬다.
"생각해보니 누나한테 술 처음 따라주네."
"그러게."
신재연이 회식 등으로 술 먹고 들어온 적은 많아도, 집에서, '신재준' 앞에서 먹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다 따라주니, 그 한 잔을 한 번에 목 뒤로 넘겼다.
나는 안주로서 챙겨준다고 비빔밥 한 숟갈 떠서 내밀었다. 신재연은 잘 받아먹었다.
내가 다시 빈 소주잔을 채워주려고 하자, 신재연은 잔을 살짝 들어 따르기 편하게 해주었다.
"나도 따야지."
최아란이 나보고 들으라는 듯 말하고 맥주병 뚜껑을 땄다.
"누나, 주세요. 따라드릴게요."
"흐흫... 그래."
나는 소주병 내려놓고, 최아란이 내미는 맥주병을 받아가려고 했다.
"언니, 제가 한 잔 따라드릴게요."
그러자 김하늘이 그 맥주병을 가로채갔다.
"어, 그래..."
표정이 일순 굳어졌던 최아란이 얼른 억지미소를 띄웠다. 김하늘은 두 손을 맥주병을 기울였다.
최아란이 거품이 발생되지 않게끔 잔을 기울이자, 김하늘은 맥주가 그 기울기를 타고 내리도록 따랐다.
"땡큐. 흐흫... 재연아, 하늘이 봐봐. 완전 잘 따른다?"
"어머님한테 배웠나보지."
"하늘아. 솔직히 말해. 몰래 마셨지?"
"어머니가 맥주 좋아해서, 가끔 술에 취하면 저 마시라고 주세요. 킥킥... 근데 솔직히 몰래 마시기도 했죠."
"거봐. 아, 물론 혼내려는 건 아니고. 나도 고딩 때 몰래 마시곤 했었어. 흐흫... 아, 재준아. 우리 캠핑 가서 어떤 거 먹을까? 슬슬 식단표 짜놔야, 음식 재료 구비할 텐데."
'이 여자, 일부러 김하늘 자극하려고 이러는 거네.'
나는 돌솥 내부를 싹싹 긁어다가, 비빔밥 마지막 큰 한 숟가락을 신재연에게 내밀었다.
신재연은 잠깐 눈이 커졌다가 잔에 담긴 소주를 마시고, 내가 내민 비빔밥을 안주로 먹었다.
"단톡방 하나 만들어서, 캠핑 가는 인원들 각자 먹고 싶은 거 취합하죠. 그러고 나서 결정하는 게 나을 것 같아요. 전 누나들 꺼 비빔밥 만들고 올게요."
"그렇게 하는 게 좋겠네... 그리고 재준아, 오늘 이렇게 갑자기 찾아와서 미안해."
"미안하면 내일 오지 마요."
"헉. 진짜?"
"농담이에요. 오세요. 근데 드시고 싶은 메뉴 있으면 최대한 빨리 말해주시고요. 장봐야할지도 모르니까요."
"흐흫... 그래."
방한이 안 좋은 집이라 방문을 닫고 다녔다.
방문을 닫자 밀폐된 듯한 느낌의 좁은 부엌.
식용유 먹은 새 돌솥을 헹구고, 두 개의 돌솥을 가스렌지에 올려 김치비빔밥 세팅에 들어가려고 했다.
큰방 문이 여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곧 부엌 문이 열리며 김하늘이 모습을 드러냈다.
"화장실 가게?"
내가 묻자 김하늘이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그렇게 말하긴 했어."
입에서 나온 바람 들어오자 귓속이 간지러워, 머리를 떨게 되었다.
김하늘이 내 뒤에 달라붙었다. 내 허리를 두 팔이 감싸오고, 내 등으로 꾹 눌리는 탄력있는 젖가슴이 느껴졌다.
이번에도 내 귓가에 속삭였다.
"저 분, 입은 거 명품이더라? 돈 많은 여자가 좋아?"
나는 또 귓속이 간지러워 또 머리를 떨어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