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4화 〉소꿉친구한테 따먹힘
"뭐 마실래? 내가 사줄게."
"나는 땡큐. 아메리카노."
"저는 바닐라 라떼요."
김하늘이 자리를 떴다. 정수린은 구두에서 아픈 발을 빼내, 대각선 맞은편에 앉은 신재준의 가랑이 사이로 발을 집어넣으려 했다.
신재준은 그 발이 무릎에 닿자 얼른 밀어냈다.
"테이블 밑에 훤하게 보이거든?"
"그, 그래요?"
정수린은 힐끔힐끔 계산대 앞에 선 김하늘을 염탐했다. 돌아보지 않을 것 같았다.
고개를 앞으로 내밀어 오빠의 입술을 덮쳤다.
"아씨, 야."
"히힣..."
오빠가 자기 입술을 만지작거렸다.
"내 입술에 안 묻었어?"
"네, 틴트라서 안 묻었어요."
김하늘 몰래 오빠와 야한 짓하는 게 꼴릿했다.
김하늘은 평생 자격지심을 느끼게 만들었다. 학교에서 은근히 따돌림 당하는 자신과 달리, 김하늘은 언제나 무리를 이끌고 다녔다. 자신과 다른 인종인 것 같았다.
무엇보다 김하늘은 신재준을 독점했다. 그게 너무나 부러웠다. 나중에 성인이 되면 결국 두 사람이 사귀고, 결혼까지 하겠지, 하며 절망적인 미래를 상상하고 받아들이고 있었다.
포기가 편했다. 정수린은 남들과 친해지려고 노력하기 싫었고, 좋아하는 남자한테 다가갈 용기도 없었다.
그런데 김하늘 머저리 같이 자신한테 신재준과 단둘이 있게 만들어줬고, 정수린은 그 기회를 이용해 신재준과 결국 섹스를 하는 사이로까지 발전하게 됐다. '협박'이라는 옳지 않은 수단을 사용했지만 말이다.
'오빠랑 단둘이 데이트하는 게 아니라서 짜증났는데... 이렇게 재미 볼 수도 있으니까 좋네.'
오빠한테 예뻐보이고 싶어서 머리도 하고, 화장도 하고, 옷도 샀다.
오늘 데이트 때, 변한 자신의 모습의 반하는 신재준을 기대했다.
그런데 김하늘도 그 데이트를 함께 한다는 소식을 듣고 열불이 났다.
'그래도 이번 데이트 때 보여줘야지. 나랑 데이트할 때 김하늘을 부르면 어떻게 되는지.'
/ / /
김하늘이 진동벨을 받고 돌아왔다. 정수린의 옆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점심은 속 뜨끈뜨끈한 거 먹을까? 국밥 같은 거."
"푸드코트 가서 순대국 먹을까? 수린아, 돈까스 말고 순대국 괜찮아?"
"아. 전 그것도 좋아요, 오빠."
난 이제야 카페 들어온 게 잘못됐음을 알았다.
"순서가 잘못됐었네. 점심 먼저 먹고 커피 먹어야 되는데."
"커피 들고 가서 밥 먹은 뒤에 마시지 뭐. 커피야 식겠지만. 아, 맞다. 수린아. 너 재희랑 같이 일하잖아?"
"네? 네."
"혹시 재희한테 해꼬지 하려는 일진년들 찾아오고 그런 적 있어?"
신재희와 일진. 걱정되는 조합이 나오자 난 긴장했다.
"기미정이라고... 저번주 화요일에 왔었어요. 히힣..."
'얘는 웃어야할 타이밍도 아닌데 왜 웃어?'
"신재희가 일진회 그만두고 싶어하는데, 기미정한테 그 말을 잘 못 하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대신 말해줬어요, 기미정한테. 신재희, 일진회 그만 둘거라고요."
"올. 그새 재희랑 많이 친해졌나보네. 말 못하는 친구 대신 말하기까지 하고."
"히힣... 네."
'친해진 거 맞나?'
정수린은 아이패드를 신재희한테 빼앗겼다며 나한테 징징거렸다. 저번주 금요일에 말이다.
'그래도 어제 정수린하고 재희가 대화 나눴던 거 생각하면... 좀 친해진 것 같기도 하네.'
<에혀. 여자인데 왜 그러냐. 네가 강하게 '내 아이패드 내놔!'하고 정색했을 때, 내가 돌려줬어, 안 돌려줬어?>
<도, 돌려줬어...>
<그래, 새끼야. 네 꺼면 네 꺼라고 당당하게 말하라고. 그럼 돌려받잖아.>
지금 생각해보니 나름 친해졌다고 신재희가 정수린한테 조언해준 느낌이었다.
내가 물었다.
"수린아, 그뒤로 어떻게 됐어?"
"아, 기미정이 난동부리려고 했는데 매니저님이 쫓아냈어요. 그 다음부턴 기미정이나 다른 일진이 신재희 찾으러온 적은 없네요."
"재준아. 기미정 기억나?"
"초등학생 때 너랑 친해서, 나도 가끔 놀았던 걸로 기억하는데."
'신재준'의 기억에 의하면 그랬다.
그리고 끼리끼리 논다고, 기미정도 어렸을 때부터 반반했다.
기미정이 일진이 된 이후엔 김하늘과 멀어진 걸로 알았다.
나도 그 이후에 기미정을 학교에서 멀찍이서 본 게 전부였다. 일진이라서 품행이 불량했던 것으로 기억했다.
"와, 언니랑 오빠. 기미정이랑 친구였어요?"
"지금은 아니지."
김하늘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진동벨이 진동했다.
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갔다올게."
"수린아. 네가 갔다 와라. 오빠 시킬 거야? 새끼, 센스가 없네."
"아, 히힣... 제, 제가 갈게요, 오빠."
"됐어. 너 구두 때문에 걷는 거 힘들잖아."
"아, 네..."
나는 진동벨을 들고 카운터로 갔다.
/ / /
"됐어. 너 구두 때문에 걷는 거 힘들잖아."
"아, 네..."
신재준은 진동벨을 들고 카운터로 갔다.
"나 같으면 발 아파도 가겠다고 했겠다."
"네?"
김하늘의 말에 정수린은 되물었다.
"너 재준이 좋아하잖아. 힘든 거 무릅 쓰고 대신 해주는 모습 보여줘야, 남자애가 가슴 설레어한단 말이지."
"하하... 재, 재준이 오빠 안 좋아하는데요..."
정수린은 자신의 마음이 김하늘한테까지 들켰을 줄은 몰랐다.
만약 들킨다면, '라이벌'이 생겼다고 여긴 김하늘이 더욱 적극적으로 신재준한테 대시할까봐 부정했다.
"흐응. 그러냐? 너 분명 재준이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히힣... 아니에요..."
'네가 오빠 첫 키스 가져가버렸지만. 난 첫경험 가져갔어, 시발년아.'
정수린은 억지로 웃음소리를 내며, 히죽히죽 걸릴 것만 같은 입을 참았다.
정수린은 치맥을 먹은 토요일 새벽 때가 인생에서 가장 좋았다. 오빠의 처음을 가져간 날이었으니까.
하지만 인생에서 가장 후회하는 날이기도 했다. 오빠의 키스도 처음으로 가져갔을 수 있었는데. 두 눈 크게 뜬 앞에서 김하늘이 가져가버렸다.
'네가 그때 키스 어떻게 한 건 줄 알아? 나한테 첫키스 따일까봐, 재준이 오빠가 조급증 나서 허락해줬던 거라고. 나한테 감사해 하라고, 시발.'
"재준이 안 좋아하면 그만 자리 좀 피해줄래?"
"예?"
"언니, 재준이랑 단둘이 데이트 좀 하자. 넌 재준이랑은 주3회씩 단둘이 데이트하잖아."
'무슨 개소리야. 꺼지려면 네가 꺼져야지.'
"과외잖아요, 그건. 그리고 사실 저 재준이 오빠 좋아해요. 네, 맞아요."
김하늘한테 말려드는 기분이었지만 결국 말해버렸다.
신재준을 따먹기 전이었다면 소심해서 말하지 못했을 것이었으나, 이미 신재준이 자신의 것이나 다름없으니 당당하게 말할 수 있었다.
김하늘이 의외라는 표정으로 쳐다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너나 나나 힘들겠구만."
"네?"
"아냐, 아무것도."
"둘이 무슨 얘기를 그렇게 해?"
오빠가 커피가 든 쟁반을 들고 왔다.
"고마워요, 오빠."
신재준이 내민 바닐라 라떼를 받아들면서 김하늘의 말뜻을 생각했다.
'아하. 오빠가 자기나 나하고는 못 사귈 거라고 여기는 모양이지? 히힣... 그런데 이걸 어쩌나. 나랑 오빠는 떡치는 사이인데?'
정수린은 이 무리에서 자신이 가장 서열이 높다고 느껴졌다.
말만하면 몸을 대주는 신재준.
그 신재준에게 구애해대는 김하늘.
"커피도 받았으니 밥 먹으러 가죠."
정수린은 이 무리의 리더라도 된 양 말했으나, 아무도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수린아, 밥은 좀 있다가. 신재희하고 일진회 얘기는 왜 꺼낸 건데?"
정수린은 뻘쭘해졌다. 얼굴이 붉어지려고 했다.
"어제 시내에서 기미정하고 만났었는데. 재희가 일진회 나간다고 린치할 거라더라."
'잠깐. 린치? 이거 나도 위험한 얘기 같은데...'
그때 정수린도 기미정에게 깝쳤었다. 지금이 방학이라 괜찮지, 나중에 등교를 하게 되면 위험해질 것이었다.
오빠가 중얼거렸다.
"시발년."
"일이 벌어지기 전에 뭔가 조치를 해야겠더라."
"우리 누나는 재희한테 심부름센터 직원 붙이자던데. 세보이는 여자들하고 같이 등하교 시키거나 해서 재희 보호하자고."
"그거 괜찮네. 학교 내에서는 재희가 알아서 일진들 피해다니게 하고. 사람 많은 곳만 다니면 되겠지."
정수린은 자신도 심부름센터 직원을 알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기가 막힌 생각을 했다.
"제가 고용할게요."
"수린아, 네가 해줄 필요는 없어."
"아, 그게요, 오빠. 사실 저도 그때 기미정한테 얼굴 팔려서요... 저도 위험한 상황이거든요. 이왕 그렇게 된 거, 제가 고용하고, 저랑 재희랑 같이 다니는 게 낫지 않을까요?"
자연스럽게 오빠한테 걱정을 덜어 점수를 딸 기회였다.
"아... 재희 때문에 너도 엮였구나? 미안."
"괜찮아요."
오빠한테 마음의 빚 하나를 만들었다. 그럼 오빠가 더 고분고분하게 섹스를 당해주겠지? 그 생각을 하니 아랫배가 두근거렸다.
"재희 일은 그렇게 하기로 하고. 그럼 밥 먹으러 갈까?"
김하늘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신재준도 따라 일어났다.
자신이 일어나자고 했을 땐 안 그랬던 오빠가, 김하늘의 말에는 바로 일어나니 배알이 꼴렸다.
정수린은 일부러 느릿하게 일어났다.
* * *
"꺼억. 아, 잘 먹었다."
김하늘은 국물까지 다 마시고 트림을 했다. 이젠 식어버린 아메리카노로 입가심을 했다.
"애들아. 그럼 이젠 어디 갈까? 영화? 볼링장? 아님 코인노래방?"
"구두 신고 볼링칠 수 있어요?"
김하늘의 물음에 정수린이 되물었다.
그러자 김하늘이 헛 웃었다.
정수린은 저 년이 왜 비웃지? 싶었다.
신재준이 그 이유를 설명해줬다.
"볼링화 대여해줘."
"아..."
'모를 수도 있지, 시발...'
정수린은 창피해서 얼굴이 뜨거워졌다.
볼링장도 영화관 건물에 있었다. 푸드코트에서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이동해 볼링장을 찾았다. 2게임을 쳤다.
정수린은 자꾸만 볼이 거터로 빠져서 재미를 붙이지 못했다.
김하늘과 신재준이 스트라이크를 몇 번씩이나 성공했다. 그럴 때마다 서로 하이파이브를 했다. 3명이서 1vs1vs1 게임을 하는 것인데도 말이다.
정수린은 평소 '친구'들과 놀 때가 떠올랐다. 그 '친구'들과 놀 때도 지금처럼 겉도는 느낌이었다.
'나 농구랑 야구배팅 잘 하는데.'
정수린이 친구들과 평소하는 것은 농구와 야구배팅이었다.
대여했던 볼링화를 반납하자, 김하늘이 물었다.
"이번엔 어디갈까?"
"야구 배팅 어때요?"
정수린이 기다렸다는 듯 되묻자 신재준이 말했다.
"야구배팅장 가려면 좀 걸어야되잖아. 수린아, 너 발 아프잖아. 그냥 여기 건물 안에서 놀자. 거긴 나중에 놀러가고."
"넵..."
배팅 실력을 보여주고 싶었는데. 오빠 말대로 구두 신고 걸을 생각에 벌써부터 아파왔고, 오빠가 자신의 발을 걱정해주는 마음도 기분 좋아 받아들이기로 했다.
'실력은 나중에 보여주면 되겠지.'
신재준이 물었다.
"코노 갈까?"
"좋지 못한 추억이 있는 곳 아니냐?"
"가서 털어내자고."
"좋지."
"두, 둘이 무슨 얘기하시는 거예요?"
정수린이 묻자 신재준이 대답했다.
"있어, 그런 일."
'뭔데. 왜 자기들끼리만 아는 얘기하는 건데? 오빠는 또 왜 안 말해주고.'
심통이 났다.
'오빠... 혼 좀 나야겠어.'
영화관 건물에 있던 코인노래방에 갔다.
'나 노래 못 부르는데.'
김하늘은 노래를 일반인 치고 실력자급으로 잘 했다. 중학교 축제 때도 노래로 장기자랑으로 나가기도 했던 김하늘이었다.
무슨 노래를 불렀었는지는 까먹었지만, 노래가 끝마친 다음에 상황은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이 노래를 우리 재준이한테 바칩니다.>
<재준이? 남자친군가요? 누구죠?! 손 흔들어주세요!>
사회 보던 방송부원이 외치자, 신재준이 손을 들었다.
<무대 위로 올라오세요!>
그러자 신재준이 격렬히 고개를 저으며, 무대 위로 올라가길 거부했다.
<아, 뭐냐. 쟤. 분위기 다운되게. 좀 올라가지.>
<올라가! 올라가!>
<키스해! 키스해!>
분위기가 나쁘게 돌아가자 김하늘이 얼른 진화에 나섰다.
<재준이가 무대 위에 올라오면 죽는 병이 있어갖고 못 올라옵니다.>
<아하! 그런 안타까운 일이!>
김하늘의 말에 다들 웃었고, 떨어졌던 분위기는 다소 올라갔다. 신재준을 욕하던 소리도 잦아들었고.
그 기억이 인상적이어서 정수린의 뇌리에 남아있었다.
"정수린. 노래 안 부르냐? 재준이 봐라, 킥킥. 노래 못 부르는데도 꾸역꾸역 부르잖아."
"아, 넵..."
"쟤 어제부터 왜 이러지. 창법 억지로 바꾸려고 해서 그런가?"
'뭐야... 나도 모르게 둘이 어제 데이트 했었어?'
두 사람이 자신도 모르는 기억을 공유했다. 정확히 말하면 '자신의 남자'가 딴 여자랑 놀았다. 불쾌감이 치솟았다.
"수린쓰. 빨랑 노래 골라."
"아, 넵."
정수린은 노래방에 온 기억이 별로 없었다. 그녀의 친구들도 노래방 보단 몸을 움직이는 걸 선호했기 때문이었다.
노래방 리모컨을 어색하게 조작해 인기차트를 띄워보았다.
'다 모르겠는데... 아, 나 랩 하나 할까. 제목이 뭐더라.'
오랫동안 추가 입력이 없자 인기차트 목록이 자동으로 내려갔다.
그때 김하늘이 정수린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놀기 싫으면 그냥 집에 가."
"예...?"
신재준의 노래가 끝났고, 김하늘이 마이크를 잡았다.
정수린의 되물음은 무시당했다.
방금 김하늘의 말을 두 글자로 말하자면 '꺼져'였다.
모욕을 당했다.
정수린은 이를 악물었다. 분노가 치솟았다.
"아. 또 그 노래야?"
[아, 왜? 좋잖아.]
신재준이 묻자 김하늘이 마이크에 입을 대고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