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2화 〉소꿉친구한테 따먹힘
(나) [오늘은 수린이랑 놀기로 했는데]
(나) [셋이 놀자]
김하늘에게 답톡을 보냈다.
나는 아예 단톡방을 새로 만들었다. 김하늘과 정수린을 초대했다.
[신재준 님이 김하늘 님을 초대했습니다.]
[신재준 님이 정수린 님을 초대했습니다.]
(나) [오늘 노는 건 이렇게 세 사람이 함께 합니다]
공지하는 것 같은 말투로 톡을 올렸다. 그리고 청소기를 돌리기 시작했다.
신재희가 시끄러운 소리에 깨어나 눈을 떠서 날 올려다봤다. 그러더니 다시 눈을 감았다. 이불을 머리 끝까지 뒤집어썼다.
청소기를 다 민 다음에 걸레를 빨고, 그 걸레와 세트인 장대에 붙여서 바닥을 닦기 시작했다.
신재희는 계속 잠만 잤다. 새벽까지 일하다가 온 신재희는 미안하지만 집청소를 미리 해두지 않으면 하루 온종일 찝찝했다. 빠르면 점심 전에, 늦어도 점심 이후에 셋이서 시내에서 놀게 될 거였다. 그러니 집청소할 시간은 지금뿐이었다.
'버릇이 이렇게 무섭다니까.'
'오석준'일 때는 일주일에 한 번꼴로 청소했는데.
물청소도 끝내고, 어젯밤에 하지 못했던 설거지를 실시했다. 돌솥에 붙었던 누룽지가 밤새 물에 불려져서 잘 떨어졌다. 세제는 사용하지 않고 수세미로만 닦아냈다. 그리고 다른 식기들은 세제를 펑펑 사용해 설거지를 마쳤다.
'음식쓰레기만 버리면 되겠네.'
쓰레기 분리수거와 쓰레기 내다버리는 걸 어제 했기에, 가득 차 뚱뚱해진 음식쓰레기 봉투를 버리러 나갔다.
그러다가 집 앞 가득한 화분 가운데에 놓인 나무 의자에 앉았있던 여자를 발견했다.
집주인 아저씨의 딸이었다. 우리집에서 지금 사용하는 컴퓨터의 원 주인은 바로 이 여자였다.
이 여자가 새로 조립컴퓨터를 마련했다고, 전에 쓰던 PC를 버리려던 걸 집주인 아저씨가 우리한테 쓰라고 줬던 거였다.
"안녕하세요, 누나."
"오, 재준이구나. 안녕."
'신재준'에겐 몇 번 면식이 있고, 나는 처음 보는 여성이었다.
별로 친하진 않기에 '신재준'은 그녀의 이름도 몰랐다. 집주인 아저씨가 자기 딸 이름을 몇 번 언급했던 '기억'이 있긴 했는데, 신재준한테 인상적이지 못한 기억이라 나도 알아채진 못했다.
그녀는 노란 깔깔이와 잠옷바지를 입은 채였다. 입에는 담배를 물고 있었다.
'정수린의 성인 버전이라고 해야 되나.'
살이 마른 건 아니었다. 오히려 살짝 통통했다.
예쁜 얼굴인데 자기관리를 안 하는 점이 정수린과 비슷한 느낌을 주었다.
겨울 공기에 하얗게 튼 피부. 눈 아래 다크서클이 늘어져있었고, 긴 머리카락은 고무줄로 대충 동여매고 있었다.
그녀는 군필 공시생이라고 '기억'하고 있었다.
2층짜리 신축 주택과 내가 사는 허물어가는 집을 물려받을 것이라 노후에 돈 부족으로 허덕이진 않을 거였다.
"겨울방학이지?"
"네."
"아침부터 집안일 해?"
"예..."
"기특하네."
"하하..."
'신재준'은 이 여자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
여름 때 몇 번 마주칠 때마다, 그녀는 반바지 입은 신재준의 맨다리를 은근슬쩍 훔쳐보곤 했다.
신재준은 그 시선을 싫어했지만, 친절한 집주인 아저씨의 친딸이었기에 그냥 참고 넘어갔다.
'애한테도 따먹힐 수도 있으려나.'
"나랑 커플룩이네?"
"아... 그러게요."
나는 신재연의 깔깔이를 입고 있었다. 어젯밤에는 최아란이 방문하는 동안에만 벗었던 것이었다.
추운 집에서 활동하기엔 이게 편했다. '오석준'일 때도 그랬고.
음식쓰레기를 버리고 왔다. 담배를 다 피웠는지 집주인 딸이 운동화로 담배불을 비벼 꺼뜨리고 있었다.
"재준아, 공부 열심히 하고."
"아, 네. 누나도 열심히 하세요."
그녀는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더니 자기 집으로 들어갔다. '신재준'은 함부로 자신의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그녀의 손버릇도 싫어했다.
나는 딱히 불쾌감은 없었다. 손갈퀴로 머리를 정리하며 나도 집에 들어갔다.
'근데 쟤하고는 접점도 별로 없기도 하고... 지금 노리고 있는 여자들이나 신경 쓰자.'
김하늘과 최아란에게 신경쓰기도 바빴다.
마침 핸드폰이 울려댔다. 단톡방은 내버려두고, 김하늘과 정수린이 개인톡을 보내왔다.
김하늘 [뭐임 ㅋㅋㅋ]
김하늘 [같이 놀러다닐 정도로 친해졌냐?]
정수린 [아니 오빠 ㅡㅡ]
정수린 [제가 김하늘 싫어하는 거 알지 않아요?]
난 단톡방에 가서 두 명에게 보내는 답톡을 남겼다.
(나) [놀 시간 둘이서 정해]
(나) [아님 오늘 그냥 쉬는 걸로]
'아, 세탁기 돌리는 거 깜빡했네.'
세탁기를 작동시켰다. 핸드폰 진동에 톡을 확인했다. 이제야 두 사람은 단톡방에 톡을 올렸다.
김하늘 [점심 같이 먹자. 12시 성연CGV ㄱㄱ]
정수린 [ㅎㅎ 돈까스집 갈까요?]
세탁기는 물을 쏟아내고 있었다.
세탁기가 모두 돌아가는 시간과 빨래를 널 시간을 고려하면, 12시에나 다 할 것 같았다. 그동안 세탁기 돌리는 동안 미리 씻고 옷을 갈아입는다고 쳐도, 약속시간에 못 맞출 게 분명했다.
'흐음. 재희한테 부탁해도, 재희는 까먹었다며 빨래 안 널 것 같은데.'
(나) [12시 30분]
김하늘 [ㅇㅋㅇㅋ]
정수린 [넵]
세탁기가 돌아가는 소리를 들으며 샤워를 했다.
'오늘은 안 엿보나.'
난 힐끔힐끔 화장실 쪽창문을 감시했다. 오늘은 날이 아닌지 엿보기범이 찾아오지 않았다.
'아. 갈아입을 옷 깜빡했네.'
수건만 가져왔다.
'재희, 자고 있겠지?'
몸으로 젖은 몸을 닦아내고, 혹시 몰라 하반신만 수건으로 가린채 큰방 문을 살짝 열었다.
신재희는 깨어나서 졸린 눈을 비비며, 컴퓨터를 부팅시키고 있었다.
"재희야."
"어..."
"오빠가 갈아입을 옷 안 가져가서 그런데, 뒤 좀 돌아봐."
"아, 귀찮게... 됐어?"
신재희는 의자를 빙글 돌려, 자신의 상체와 시선을 공부방쪽으로 향하게 했다.
나는 큰방으로 들어가 서랍을 열었다.
신재희의 옆으로 오니 생리의 비린내가 났다.
나는 바깥에 나가 입을 만한 깔끔한 옷을 골라 부엌 옆 방으로 돌아갔다.
"됐어."
"어."
옷을 다 입고 큰방에 들어섰다.
신재희는 큰방에 있던 서랍장에서 생리대 하나를 뽑았다. 박스티 안으로 손으로 넣어 긁적이며, 날 지나쳐 화장실에 들어갔다.
일어나자 마자 생리대 교체를 하고 싶었는데, 내가 샤워하고 있어서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목, 금, 토, 일, 월, 화... 6일차. 이번엔 좀 오래하네. 그래도 곧 끝나겠지? 나가는 김에 재희 먹으라고 다크초콜릿도 사와야겠다. 신재연도 슬슬 생리시작할 텐데... 생리대 여유분이 있던가.'
화장실에는 찬장이 따로 없었다. 그래서 큰방의 서랍장 하나를 생리대 보관용으로 쓰고 있었다.
신재연과 신재희 둘 다 생리혈이 조금 나오는 편이라 소형을 주로 사용했다. 오버나이트(대형) 4, 소형 4, 팬티라이너 1.5, 울트라 오버나이트 0.5 비율로 구비해두면 되었다.
서랍장 안을 보니 새 제품으로 가득 채워져있었다. 신재희가 사용 중인 터라 사이즈마다 1팩씩 뜯겨져 있었다.
'딱히 사야할 정도는 아니네.'
이 세계에는 보통 아빠가 어린 딸의 생리대 챙겨주다가, 딸이 사춘기가 와서 아빠가 생리대 챙겨주는 게 민망해지면 알아서 생리대를 챙기게 되었다.
그런데 이 집은 두 누이가 버릇을 잘못 들었다.
'신재준'이 아빠 노릇, 즉 집 안의 내조를 책임지다보니 생리대를 챙겨줬는데, 두 누이는 그걸 민망해 하기는커녕 당연시 여겨 좀처럼 자신들이 챙기질 않는 거였다.
그러다 보니 신재준이 계속 챙기고, 두 누이는 또 당연시 여기고. 그런 악순환이 지끔껏 이어지고 있었다.
'에휴. 민망하긴 해도 힘든 건 아니니까...'
내가 성인이 돼서 대학을 멀리 간다거나, 동거하거나, 대뜸 신혼집을 차리는 등 별거를 하기 전까지. 그 전까지만 챙겨주기로 했다.
신재희가 화장실에서 돌아왔다. 생리대를 교체했는지 아까처럼 비린내가 안 났다.
신재희는 눈을 감고 하품을 크게 하면서, 롤을 실행한 뒤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입력, 로그인했다.
눈을 감고도 하는 걸 게임에 접속하는 묘기를 보니까, 신재희가 얼마나 게임에 중독됐는지 알 수 있었다.
신재희는 박스티 안에 손을 넣고 자신의 밑가슴과 가슴 사이를 긁적였다.
"오빠. 밥 먹자."
"뭐 먹을래?"
"라면?"
"냉장고에 맛있는 거 많은데."
"아, 고기 없잖아."
신재희는 반청 투정을 많이 부렸다. 이 여동생은 '신재준'이 만들어둔 집밥을 선호하지 않았다.
배달음식을 시켜먹거나, 신재준이 찬장에 채워둔 레트로트 식품을 데워먹거나 참치와 고추장을 비며먹거나, 간장 계란밥을 해먹거나 했다.
그렇게 편식하면 영양분 밸런스가 무너질까 봐 걱정됐다.
'냉장고 고기가 있긴 한데.'
채썬 소 불고기가 있었다.
"돌솥비빔밥 해줄까?"
"아. 안 그래도 싱크대에 돌솥들 있어서 궁금했는데. 어제 샀어?"
"응."
"돌솥비빔밥...? 어, 해줘. 근데 싱크대에 쌓여있던 거 3개더라? 너랑 언니 말고, 또 누구랑 먹었어? 정수린? 그년이랑 밤 10시까지 같이 있던 거?"
신재희는 어제 낮에 집에 들렸다가, 정수린이 집에 와있는 걸 목격했었다.
"수린이는 과외 시간 끝나고 집 갔고. 누나랑 누나 친구 찾아왔어. 이젠 누나 6시에 정시 퇴근해."
"아, 그래? 별일이네. 누나가 친구도 데려오고."
"그러게. 아, 맞다. 재희, 너 겨울캠핑 갈래?"
"엥? 웬 캠핑?"
"누나 친구의 취미가 캠핑이래. 그래서 그 분 텐트 빌려서 가족여행 가자. 이번주 토, 일, 월인데. 다음주 월요일 쉴 수 있어?"
"윽. 여행 싫은데."
"나 가족여행 가고 싶었는데... 너 안 가면 가족여행 아닌데..."
"아씨. 나도 간다, 가. 근데 언니 친구, 돈 좀 많은가봐? 텐트 같은 거 사려면 돈 많이 들 텐데. 그걸 또 친구한테 막 빌려주네."
'최아란은 재벌집 막내딸이래.'
신재희는 모르고, 나는 아는 정보라서 그런지 자꾸 아는 척하고 싶었다.
"돈 많은 집안 사람일 수도 있고. 대기업 사원이니까, 할부로 막 긁지 않았을까? 그리고 그 누나 친구분도 같이 가는 거야."
"아씨. 가족여행이라며. 외부인은 왜 따라 와."
"그분 가는 거에 우리가 따라가는 거야."
"갑자기 가기 싫어지는데."
"재희 없으면 허전할 것 같은데... 여행 못 즐길 것 같은데..."
"아, 알았다고. 갈게."
"흐흫... 그래. 잘 생각했어."
"야. 비빔밥 다 하는데 얼마나 걸리냐?"
게임하는 도중에 끊길까봐 걱정되는지, 게임 시작을 못하고 있었다.
"금방? 10분 정도?"
"아, 애매한데. 알았어."
신재희는 게임을 최소화시키고, 유튜브 롤 영상을 보기 시작했다.
어제 사용하지 않은 새 돌솥을 최초 세척하려면, 또 시간을 잡아먹으니 어제 썼다가 닦았던 돌솥을 이용하기로 했다.
냉장고에 넣어둬서 차가워진 채썬 채소와 버섯도 한 번 프라이팬에서 익혔다. 소불고기도 구웠다.
돌솥에 식용유를 바르고, 밥을 푼 뒤, 양념장과 재료를 위에 얹었다. 그리고 센 불을 켰다.
"재희야. 계란후라이? 아니면 날계란 노른자?"
"뭐? 아. 날계란 노른자."
헤드셋을 끼고 영상을 보고 있어 잘 못 들은 신재희였다. 그래도 다소 들렸긴 했는지 대답해내긴 했다.
자기 언니랑 식성이 비슷했다.
따닥따닥. 누룽지가 만들어진 소리가 들렸다.
집게로 잡아 올려 원목받침대에 올려뒀다.
"재희야. 이불 개."
"나 그냥 책상 위에서 먹을래."
신재희는 컴퓨터하면서 먹는 걸 선호했다. '신재준'은 그꼴을 탐탁지 않게 여겼으나 최근에 사이가 나빠졌었기에 그러라고 하고 책상 위에 식사를 올려줬었다. 그렇게 신재희한테 나쁜 버릇이 생겼다.
'지금은 어차피 신재희 혼자 먹을 거니까.'
나중에 나랑 같이 먹을 때는 같이 먹자고 할 생각이었다. 가족끼리 같이 먹어야지, 따로 먹는 건 아닌 것 같았다.
"뜨거우니까 조심해."
"와. 식당에서 파는 퀄리티인데?"
"식당에서 쓰는 돌솥이니까 그럴 걸."
"잘 먹을게, 오빠. 어? 오빠는 안 먹어?"
"응. 나가서 먹으려고."
"설마 김하늘이랑?"
신재희가 떨떠름한 얼굴로 물었다. 그러면서 계란 노른자를 숟가락으로 찌르고, 빨간 양념장에 비빔밥 재료들을 비비기 시작했다.
"하늘이랑 수린이랑."
"흐응. 예성이 오빠는? 보통 김하늘하고 같이 놀 때, 예성이 오빠도 꼈잖아."
"걔는 유럽여행 가서. 아마 내일모레 즈음 도착할 걸?"
"그래?"
'아, 말실수 했다.'
나는 말하고 나서 신재희의 눈치를 살폈다.
신재희는 무표정해진 얼굴로 밥을 섞다가 '아.'하고 탄성을 내더니, 날 올려다봤다.
"야. 너 금요일에 예성이 오빠네서 잤다며. 근데 예성이 오빠가 유럽여행 갔다고?"
"토요일에 출발했어."
"지랄할래? 너 토요일 밤에도 예성이 오빠네서 잘 거라고 톡 보냈었잖아."
"...내가 착각했던 거야. 예성이가 토요일 밤에 출발해서, 걔네 집에서 못 잤어. 누나한테 물어봐. 나 토요일밤에 누나랑 집에서 잤어."
신재희는 내가 거짓말하는지 아닌지 알아보듯 내 눈을 빤히 쳐다봤다.
난 거짓말을 들키지 않기 위해 눈을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거짓말하는 사람이 눈을 안 피한다던데? 눈 피하면 거짓말을 시인하는 꼴이 되니까. 오히려 버티는 거지. 야, 너 지금 나한테 거짓말하는 거지? ...너 설마 김하늘 하고 잤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