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50화 〉소꿉친구한테 따먹힘 (50/201)



〈 50화 〉소꿉친구한테 따먹힘

(나) [이대로 얼굴 안 보고  거야?]
(나) [보고 있나 보네] 1
(나) [대답 좀 ㅡㅡ] 1

뒤이어 보낸 것들은 '1'이 사라지지 않았다.


아예 전부 다 '1'이 사라졌다면, 실수로 나와의 톡방을 켜놓은 것일 수도 있었다.


근데 첫번째 것만 '1'이 사라지고, 나머진 안 사라진 걸 보면 부랴부랴 톡 어플을 내린 것이 분명했다.


'또 무시하네. 그래도  톡방을 보고 있을 정도로 나한테 정 떨어진 건 아닌가 보네.'

식후땡을 끝냈는지 두 여자가 담배 냄새와 겨울밤 냄새를 풍기며 집으로 돌아왔다.


"커피 드실래요?"
"어, 좋지."
"아, 또 내 동생 시키네."
"재, 재준아. 누나가 타올게."
"누나. 왜 손님한테 그래? 아란 누나는 그냥 앉아계세요."
"응. 아, 재연아. 네 컴퓨터로 나 김 과장이 시킨 것  할게."
"그래."

난 부엌으로  주전자로 물을 끓였다.

'커피포트 하나 정도 살만한데. 여태 안 샀네.'

나중에 커피포트 하나 마련해야겠다.

"시발. 그냥 폰트 그 까짓거 지가 바꾸면 되는 건데, 나한테 바꾸래."
"킥킥,   아니라 됐잖냐."
"그래도 어이가 없잖아."

큰방에서 들려오는 대화 소리가 부엌에까지 들렸다.

믹스 커피를 세 잔 타고 방으로 돌아갔다.


컴퓨터 책상 위에 2잔을 올리자 두 여자가 알아서 집어갔다.

"잘 마실게, 재준아. 근데 나랑 하고 싶은 얘기가 있다고?"

최아란은 헤벌쭉 웃으며 물었다.


"아란 누나는 취미가 뭐예요?"
"나? 으음, 게임? 롤 다이아인데, 엄청 잘 하는 거다?"

모태솔로가 맞긴 한가 보다.  세계의 남자들은 여자의 게임실력에  관심이 없을 건데, 그걸 자랑하고 있었다.

신재연도 '저걸 왜 내 동생한테 자랑하지?' 이런 표정을 짓고 있었다.

"집에서 할 수 있는 거 말고는요? 낚시라든가, 등산이라든가."
"아, 나 캠핑에 관심있어. 겨울 캠핑하려고 이것저것 사는 중이야."
"오, 겨울캠핑이요?"
"흐흫... 왜? 관심있어?"
"우리 누나 말고 친구 없었으니까, 혼자 갈 생각이었겠네요?"
"그, 그랬지?"
"누나랑 저랑 재희도 데려가요. 혼자 가면 심심하잖아요."
"어?"
"아. 너무 폐가 되려나요?"
"아, 아니야! 캠핑  같이 가서 즐기면 좋지. 원래 식사도 대충 가조리된 식품 가져가서 데워먹을 생각이었는데, 재준이, 네가 와주면 맛있는 거 해줄 것 같고. 오히려 좋은데?"
"어... 그냥 놀러갈 생각이었는데 밥해야 돼요?"
"아, 아니... 그, 그냥 몸만 와도 돼..."
"아니에요. 힘내볼게요. 나중에 캠핑가게 되면 연락주세요. 누나,  거지?"

나는 신재연에게 물었다.


고민하는 눈초리더니 최아란에게 물었다.

"텐트? 아님 캠핑카 빌리나?"
"텐트 사뒀고, 텐트 2개를 커넥터로 이어붙일 거라, 하나는 여자들 자고, 하나는 재준이 자면 될 듯."
"그럼 가지 뭐. 아란아, 연차 남았냐?"
"엉."
"와. 아란 누나 덕분에 가족여행 한  하겠네?"
"그러게."


둘체도 아파트에 살던 어린시절엔 매 휴가철마다 해외여행도 가고 그랬다. 요리사가 꿈이던 세 남매의 아버지가 각국 음식을 먹기 위해 온갖 곳을 다 놀러다녔다.

부모한테 버려지고, 가난해진 이후로는 제대로 가족여행을 떠나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신재준'의 기억을 보면, 신재희는 그런 여행을 싫어했다.

"아. 재희도 가려나?"
"나중에 집 오면 물어봐."
"응. 아란 누나, 캠핑은 언제로 계획 중이에요?"
"웬만한 캠핑용품은 다 사둬서, 자잘한 것만 사면 돼. 가는 거야 날짜만 잡으면 갈 수 있어."
"그럼 이번 토요일에 돼요?"


최아란이 신재연을 바라봤다.

"재연아. 다음주 월요일, 연차 올릴까?"
"2박 3일?"
"응."
"그러지 뭐."

토일월, 2박 3일 겨울캠핑이 계획됐다.

'그때 최아란, 꼬셔서 나한테 고백하게 만들어야지.'


"귀찮아서 밀려뒀던 것들 죄다 주문해야겠다."
"아란 누나, 고마워요."
"뭘. 나도 혼자 캠핑하면 심심할 것 같았어."

'정수린한테 말해둬야겠네.'


다음주 월요일은 과외 못하니까 시간을 옮겨야했다.


"재준이는 취미가 뭐야?"
"어... 집안일이요?"
"그, 그래?"

막상 생각해보니 없었다.

'신재준'이 한식조리사 자격증을 딴 건, 나중에 식당 주방에서 일해볼까해서 딴 것이었다. 요리가 취미라기 보단 생계벌이 수단 중 하나였다.


공부가 취미라고 하면 뭔가 재수 없는 느낌이고.

여자한테 따먹히는 게 취미라고 말하는 건, 절대 해선 안 되고.


"재준이한테 시집가는 여자는 좋겠네."
"어? 남자는  집안일 해야 돼요?"
"그, 그렇진 않지. CY전자에서도 일 잘 하시는 남자분들 많아."
"근데 저는 집안일 좋아하긴 해요."
"그, 그래?"

우린 잡담을 하며 커피를 마셨다.


"그만 샤워하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쉬시고 싶으시겠다. 오늘 저랑 우리 누나한테 어울려줘서 고마워요."
"아, 맛있는 식사 대접해줘서 고마워."
"내일 또 오세요."
"으음... 가능하면 그렇게 할게."

나한테 부담을 준다고 생각하는 걸까. 왠지 내일은 안  것 같았다.

최아란이 벗어뒀던 자신의 정장 재킷을 입었다.

"들어가라."
"엉. 재준이도 안녕."
"아, 마중 나갈게요."
"나오진 마. 추우니까."
"네. 원래부터 문까지만 마중할 생각이었는데요."
"그, 그래..."

최아란은 뾰족한 코의 갈색 구두를 신었다.

"아, 용돈 준다고 했었지."
"됐어요. 농담이었거든요."
"그래도 이걸로 옷 사입고 그래. 나 남동생 갖고 싶었는데, 막내였거든. 네가 남동생 같아서 주는 거야."


최아란은 고급스러워 보이는 지갑에서 5만원 4장을 꺼내 내밀었다.

내가 그걸 받길 망설이자 최아란이 중얼거렸다.


"여, 역시 너무 적지? 이걸론 옷 한 벌 못 사지?"

그러면서 지갑에서 돈을 더 꺼내려고 했다. 난 얼른 그녀의 손에서 20만 원을 가져갔다.


"너무 많이 주셔서 그런 건데요. 매일 저녁 드시러오세요. 누나한테 용돈 매일 받으면 부자되겠다."
"흐흫... 가능하면 내일도 올게."
"오시려는 날에는 원하시는 메뉴 말씀해주세요. 장 봐야할 수도 있으니까 낮에 말씀해주시고요."
"응,  가볼게. 돌솥비빔밥, 진짜 맛있게 먹었어."

난 손을 흔들어 보였다. 최아란이 외꺼풀의 눈을 초승달처럼 휘며 웃어보였다.

현관문이 열리고 닫히는 동안 겨울 찬 바람이 안쪽으로 들어왔다.

닫힌 문 너머로 또각또각거리는 구두 소리가 이어지다가 자동차 시동이 걸리는 소리가 났다.


난 핸드폰을 꺼내서 김하늘에게 답톡이 왔나 확인했다.


(나) [이대로 얼굴 안 보고 살 거야?]
(나) [보고 있나 보네] 1
(나) [대답 좀 ㅡㅡ] 1

나한테 톡방을 보고 있단 사실을 들킨 이후로, 이젠 안  생각인지 숫자 '1'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나는 톡을 하나 더 날렸다.


(나) [나 무시하지 마] 1
(나) [하늘아] 1
(나) [대답 좀 해줘] 1





/ / /



김하늘은 코인노래장을 뛰쳐나오고 후회했다.


'시발. 찌질하게 이게 뭐하는 짓이냐.'

신재준이 <윤지 - Go Back>을 선곡해서 불렀을 때, 드디어 자신과 사귈 마음이 생긴 것이구나 제멋대로 기대감을 품었다.


<재준아. 나랑 사귀자.>
<지금은 사귈 마음 없다니까.>

하지만 그 기대감이 박살났을 때, 심술을 부리고 말았다.


<그럼 그 노래 부르지를 말았어야지. 사람 가지고 노는 것도 아니고, 뭐냐... 야. 나 먼저 간다.>

마지막으로  당황한 신재준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아흐... 젠장."


'재준이 얼굴, 어떻게 다시 보지...'


겨우 노래 1곡에 의미를 부여하고, 신재준 앞에서 추태를 보였다. 쪽팔려서 당분간은 신재준 앞에 나서지 못할 것 같았다.

'근데 재준이도 잘못했어. 날 괴롭힐 작정이 전혀 없었겠지만, 결국 내 마음에 스크래치를 입혔다고.'


생각없이 던진 돌에 개구리가 맞아 죽은 꼴이었다.


'하아... 재준아...'

무방비하게 속살을 보여주는 신재준.

무방비하게 키스를 허락하는 신재준.

김하늘은 속으로 발을 동동 굴렸다. 순진해빠진 신재준이 못된 심보를 지닌 여자한테 사로잡혀, 타락해가는 미래가 저절로 상상이 되었다.


'마치 저런 년한테.'


김하늘은 마침 정비소의 옆을 지나가고 있었다.


멀리서 봐도 기름 냄새가 나는  같은 작업복을 입은 여자를 발견했다.

이동식 공구함 위에 핸드폰에서 힙합 노래가 흘러나왔다. 여자는 차량 보닛을 열어두고 엔진오일을 주입하는 작업 중이었다.


작업복을 입었음에도 미색을 잃지 않은 미녀였다.


지름이  귀걸이를 작용하고 있었다.

"야, 기미정. 열심히 일한다?"
"누구냐?"

기미정은 슬쩍 고개를 돌려 자신을 부른 김하늘의 얼굴을 확인했다.


"김하늘, 시발년아. 구경하려면 구경비 내라."
"친구한테 너무하네."
"친구는 무슨. 지랄하네."

김하늘과 기미정은 초등학교 때 단짝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기미정이 일진회에 들어가면서 같이 노는 일이 없어졌다. 같은 반이 된 적도 없었다.

가끔 학교나 시내에서 마주쳐도 인사도 하지 않고, 서로 모르는 척 지나가는 사이가 되어버렸다.

기미정의 말대로 이제는 친구라고 부르기엔 적합하지 못한 사이였다.

그런데도 말을 건 것은 2가지 이유가 있었다.


하나는 김하늘이 신재준과의 일 때문에 심란했다는 점.

또 하나는...


"학교 사이트 공지사항에 반 배정 떴는데 봤냐?"
"그딴 거 왜 봐."
"너 나랑 같은 반 됐더라?"
"니미. 시발. 그래서? 다시 친구 먹자고? 말로 할 때 꺼져라. 일하는 중 아니었으면  뒈졌어."


기미정은 엔진오일을 다 붓고, 깔때기를 치운 뒤, 엔진오일 주입구에 캡을 씌었다. 그녀는 운전석에 앉아서 시동을 틀었다. 우렁차게 엔진음이 나며, 보닛에 있던 부품들이 떨다가 안정을 찾았다.

김하늘은 그 광경이 신기했다.


사람의 은밀한 부위처럼, 열린 차체 보닛 속에서 일어나나는 활동도 그렇고. 일진으로 악명을 떨치고 있는 기미정이 성실하게 일하는 모습도 그렇고.


'내가 기미정이 하는 일을 방해하고 있는 거 맞지.'


제정신이었으면, 정비소에서 일하는 기미정을 봤어도 그냥 지나쳤을 거였다.


이게 다 신재준이 문제였다.

김하늘은 등을 보이고 정비소를 떠나려고 했다.

"어? 하늘이 아니냐?"
"아. 안녕하세요, 아주머니."

기미정을 닮은 40대 여성. 그녀 또한 작업복을 입고 있었다.


김하늘은 초등학생 때, 몇 번 기미정에 집에 놀러갔었기에 기미정의 모친과 안면이 있었다.


'날 아직도 기억하시네.'


"미정아. 친구 왔으면 잠깐 쉬어도 돼."
"알았어. 아, 엄마. 이거 오일 정량 들어갔는지 체크해주고, 엔진 에어필터도 교체해줘."
"알았다."


운전석에서 나온 기미정은 끼고 있던 기름 묻은 코팅장갑을 이동식 공구함에 넣고, 자신의 핸드폰을 꺼냈다. 시끄러웠던 음악을 정지시키고, 김하늘에게 턱짓해서 정비소 뒤로 가자고 했다.

김하늘은 갑자기 벌어진 떨떠름한 상황이었으나, 일단 기미정을 뒤따라갔다.

정비소 뒤에 도차가하자 마자 기미정은 주머니에서 담배와 라이터를 꺼냈다.

김하늘에게 담배갑을 내밀어 권유를 했다. 김하늘이 고개를 젓자  담배갑을 도로 주머니에 넣었다.

기미정은 능숙하게 불을 붙이고 담배를 피었다.


"너희 아주머니가 뭐라고 안 하냐?"
"카악. 퉤! 뭐가? 담배 피는 거?"
"어."
"자동차정비기능사 따서 허락 받았다. 엄마랑 맞담배도 피는데."

김하늘은 담배를 안 펴서 예절을 자세히는 모르지만, 어머니와 맞담배가 금기시 된다는 건 알고 있었다.


'신기한 모녀네.'


"시발. 내가 일하는 게 그렇게 신기해보였냐, 십년아?"

몇 년 만에 인사하고, 대화를 튼 것이었다.

김하늘은 기미정에게 뭐라 변명하려다가 말았다.


"그게 그렇게 기분 나빴냐?"
"어. 기분 개 봊 같은데."
"그래도 내 덕에 쉬게 됐잖아."
"지랄. 저 길로 가면 골목 나온다. 꺼져."

정비소 뒷편은 누군가 관리하는 티가 나는 텃밭이었다. 겨울이라서 검은 비닐로 싸여있었다. 그 텃밭을 가로 지르는 흙길이 있었다.


김하늘은 기미정이 자신과 대화를 꺼리고 있는 걸 눈치챘고, 그건 자신도 마찬가지여서 떠날 작정이었다.


몇 걸음 안 걸었을 기미정의 목소리가 들렸다.


"맞다. 신재희, 일진회 그만둔다는데. 네가 수작 부린 거냐?"
"재희는 내 말  들어."
"후우... 그럼 신재준인가. 아니, 신재준하고 신재희는 견원지간이지. 그럼 그년 언니 때문에 탈퇴한다고 지랄하는 건가?"
"재희, 어쩔 거냐?"
"볼라 짓밟아야지. 일진회 나가면 어떻게 되는지 보여줘야지."

기미정이 히죽 웃으며, 자신 앞을 지나던 이를 모를 벌레를 작업화로 짓밟았다.

"흐흐흫... 볼라 기대되네."


'미친년...'

기미정은 진심으로 신재희를 짓밟을 미래에 기뻐하고 있었다.


"하지 마라, 그런 짓. 요즘 세상이 어떤데 린치 하려고 하냐. 인터넷에 뜨고 개 난리나잖아."
"시발년아. 그냥 꺼지시라고요. 아님 뒈지게 맞고 꺼질래?"
"재희, 내 여동생 같은 애거든? 시발, 네가 짓밟겠다는데 그걸 어떻게  들은 척하냐."
"그럼 맞짱 함 뜰까? 시발년, 너  봐줬다고 밑도 끝도 없이 깝친다?"


김하늘은 싸움에 자신없었다.

"김하늘, 너 킥복싱 배웠다며, 시발. 어디 한 번 보여줘 봐."

김하늘이 킥복싱을 배우긴 했다. 중학교 때, 무에타이 영화를 본 신재준이 굉장하다고 연발해대서, 신재준한테 점수를 따고자 배웠었다.

그런데 막상 신재준이 킥복싱을 배우는 자신한테 관심을 가져주지 않자 1년 만에 때려쳤다.


반면에, 기미정은 싸움을 잘 한다고 악명 높은 미친년이었다.

'다치겠는데...'

김하늘은 오른발을 뒤로 뺐다. 명치를 약간 말아넣고,  주먹을 광대뼈 앞에 삼각형을 그리듯 들었다.


그리고 좌우에 체중을 50:50으로 두고, 발을 떼었다가 내리기를 반복했다.

"호오. 뭔가 배운 티가 나는데? 나도 킥복싱하는 년들이 하는 거  적 있거든?"

기미정은 피고 있던 자신의 담배를 쓰레기와 먼지로 더러운 테이블 위에 걸쳐두었다.


기미정도 오른발을 뒤로 빼고, 두 주먹을 광대뼈 앞에 들었다. 김하늘을 따라한 것이었다.

"초딩 때부터 너 볼라 패고 싶었어, 샹년아."

기미정이 니킥을 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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