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9화 〉소꿉친구한테 따먹힘
반찬은 냉장고에 있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고, 찌개는 마침 재료가 다 준비되어있던 된장찌개를 끓이기로 했다.
신재연 [사진을 보냈습니다.]
신재연이 주방용품점에서 돌솥 상품을 사진으로 찍어 보내왔다.
신재연 [이거면 되겠어?]
(나) [좀 큰 것 같은데? 1인분 돌솥 사야함]
(나) [직원한테 물어봐요]
'신재준'은 신재연과 톡을 나눌 때, 평대와 존대를 왔다갔다 해서 사용했다.
신재연 [사진을 보냈습니다.]
신재연 [이건?]
(나) [딱 좋은 듯]
(나) [아, 돌솥 짚는 집게도 사줘요]
(나) [받침대도 따로 사야돼]
신재연 [알았어]
지금의 톡은 최아란과 주고 받았어야할 톡인데, 신재연이 인터셉트 해간 것이었다.
나쁜 기분이 드는 건 아닌데, 뭔가 좀 찝찝함이 들었다.
신재연 [뭐 또 필요한 거 없어?]
(나) [ㄴㄴ 없는 듯]
신재연 [이걸로 4개 산다?]
(나) [ㅇㅋㅇㅋ]
난 거울을 통해 얼굴과 옷을 확인했다. 모난 거 없이 깔끔한 간편복 차림이었다.
딱히 꾸미지도 않고, 더럽지도 않은 중간.
10여 분 뒤, 자동차 엔진음이 집 앞에서 멈춰졌다. 현관문이 열리기도 전에 난 그 앞까지 마중 나갔다.
신재연은 들고 있던 박스를 내려놓았다. 그 안에 돌솥과 원목 받침대, 집게가 들어있었다. 안 그래도 비좁은 부엌이 훨씬 더 좁아져버렸다.
최아란은 브라운색의 정장차림을 입었는데, 보는 재미가 없게도 정장 치마가 아닌 정장 바지였다.
외꺼풀의 미녀이고, 가슴도 크고, 키도 신재연과 비슷한 170 정도 되어보여 다리가 길쭉길쭉했다. 바지 차림인데도 예뻤다.
"안녕하세요, 아란 누나. 그리고 누나도 오늘 일하느라 수고 했어."
"안녕, 재준아~"
최아란은 날 보자마자 헤벌쭉 웃었다.
깐깐한 커리어우먼 같은 인상인 것에 반해, 속이 뻔히 보이는 여자였다.
'나 좋아하는 거 분명하네.'
신재연이 물었다.
"이걸 다 준비 한 거야?"
"응, 누나."
비좁은 싱크대였다. 설거지통 위에 도마까지 얹어 놓아 그 위에 접시마다, 비빔밥 재료들을 따로 모아두었다.
가스렌지 위에서는 된장찌개가 끓고 있었다. 최아란이 코를 킁킁거리더니 가식 없이 말했다.
"와. 된장찌개 향 좋다."
"방에 들어가서 쉬고 계세요. 재료들 데치고, 돌솥 세척해야 돼서 시간 좀 걸릴 거예요."
"야. 최아란. 우리 동생한테 왜 이렇게 손 가는 거 시켜?"
"아니, 딱 먹고 싶은 게 이게 생각나서... 재준아, 미안. 용돈 줄게. 좀만 힘내줘."
"예? 용돈 받으려고 한 일은 아닌데... 용돈 주신다면 더 맛있게 해볼게요."
"흐흫... 그래줄래?"
"야 들어와. 내 동생 방해하지 말고."
남동생을 아끼는 신재연이었다. 남동생이 관심을 갖게 된 여자가 별로였다면, 오늘 우리 집에 오려는 최아란을 막아섰을 거였다.
데려온 걸 보니 남동생과 교제를 나눠도 괜찮은 친구라고 판단한 것 같았다.
싱크대 위에 도마를 부엌 옆 방에 테이블 위로 옮겨놨다. 싱크대를 사용해야했다.
돌솥 3개의 포장지를 뜯고 싱크대에서 세척한 뒤, 식용유를 발라뒀다. 10분 정도 기다린 다음에 닦고 이용할 생각이었다.
그 10분 동안 프라이팬에 채 썬 채소와 버섯들을 익혔고, 양념에 재워두었던 소불고기도 구웠다.
마침 타이밍 좋게 전기압력밥솥이 수증기를 뿜었다.
'계란후라이할까, 아니면 계란 노른자 올릴까.'
비빔밥의 중앙에 놓이는 것은 바로 계란이었다.
내가 고민하기 것보다는, 역시 먹을 사람들한테 물어보는 게 나을 것 같았다.
큰방으로 갔다. 방 안은 담배 연기가 떠돌고 있었다.
신재연은 반팔 박스티와 반바지로 갈아입은 채 전자담배를 피고 있었고, 최아란은 재킷만 벗어 흰 목티 차림인채로 일반 담배를 피고 있었다.
최아란이 컴퓨터 앞에 앉아 롤을 하고 있었는데, 신재연은 심드렁하게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최아란이 재떨이는 뭘 사용하나 봤더니, 고급스러워보이는 디자인의 휴대용 재떨이를 사용하고 있었다.
전자담배는 참을만 했는데, 일반 담배는 냄새가 심했다.
"아란 누나. 담배 펴도 괜찮은데 환기 좀요."
"아, 미, 미안."
최아란은 얼른 일어나 앞에 있던 창문을 열었다.
신재연이 한 마디 했다.
"네 캐릭 죽었다."
"앗..."
최아란은 얼른 컴퓨터 모니터를 보았다. 회색빛으로 물들어졌고, 부활 때까지의 카운터가 시작한 상태였다.
"계란후라이? 아니면 생 노른자? 어떤 게 좋아요?"
"계란후라이..."
"생 노른자."
"아란 누나는 후라이. 누나는 생. 알았어요."
"아, 재준아. 나 반숙 좋아해."
"네, 아란 누나."
"자꾸 내 동생한테 귀찮은 거 시킬래?"
신재연이 최아란의 어깨를 꽉 지압했다.
"히이익?! 아, 아파! 아프다고!"
'최아란도 어깨 안마가 필요해 보이네.'
동갑내기, 입사 동기가 안마를 주고 받는 훈훈한 모습을 뒤로 한채 부엌으로 돌아왔다.
프라이팬으로 반숙 계란후라이 하나를 만들었다.
식용유를 먹여뒀던 돌솥을 물로 헹구고, 새롭게 식용유를 발랐다. 밥을 펼친 뒤, 중앙에 양념장을 털어넣었다. 채썬 채소와 버섯을 색상 배열과 위치 배열을 생각해 얹었다.
가스렌지의 화구가 2개 뿐이라 일단 신재연과 최아란의 것을 할 생각이었다.
2개를 똑같은 상태로 만들고, 마지막은 다르게했다. 하나는 반숙 계란후라이, 또 하나는 날계란 노른자를 올렸다.
그리고 센불로 돌솥들을 데우기 시작했다.
비빔밥 위로 참기름과 참깨를 끼얹어주었다.
"누나. 큰방 이불 좀 개줘."
"어."
타닥타닥, 하고 누룽지가 만들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슬슬 탈 것 같아 불을 껐다. 부엌 옆 방에 펼쳐둔 테이블 위에 돌솥 원목받침대를 올려두고, 집게로 돌솥을 잡아 받침대 위에 내려놓았다.
반찬을 꺼내고, 수저도 놓고, 된장찌개도 국그릇에 떠서 세팅했다.
그렇게 세팅한 테이블을 큰방으로 옮기려고 들려고 해보니...
'어? 개무겁네. 억지로 들고 가다가 쏟을 것 같은데.'
남녀역전세계라 남자인 '신재준'의 힘이 약했던 것도 있고, 돌솥과 받침대 무게가 꽤 나갔던 것이다.
"누나. 테이블 무거워. 들고 가."
"그래."
신재연은 별로 힘도 안 준 것 같은데 테이블을 번쩍 들어 옮겼다.
나는 보리차 물과 컵을 들고 큰방에 들어갔다.
최아란과 신재연이 테이블을 가운데 두고 앉아있었다.
신재연이 물었다.
"재준아. 네 꺼는?"
"이제 만드려고. 먼저 드세요. 타겠다."
"그래."
"잘 먹을게, 재준아!"
두 여자는 열심히 비비기 시작했다.
나는 내 몫의 돌솥비빔밤을 만들어낸 뒤, 큰방으로 돌아갔다.
몇 분 사이에 두 사람은 벌써 절반을 먹어치운 상태였다.
"맛있어요?"
신재연은 그 조그마한 입술에 큰 한숟가락 집어넣은 참이라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최아란은 국그릇째로 된장찌개를 마시고 있다가, 내려놓고 말했다.
"크... 어, 완전 식당에서 먹는 것 같은데?"
"10점 만점에 몇 점인데요?"
신재연은 아직도 햄스터처럼 볼을 부푼 상태로, 손가락 10개를 모두 펼쳐보였다. 여자답게 귀엽고 조그마한 손이었다.
"11점? 날 위해서 노력해준 거 아니까, 너무 맛있다."
"딱히 아란 누나를 위해서 한 건 아닌데요."
"아, 그, 그래...?"
"우리 누나랑 친하신 것 같아서 챙겨드리는 거니까, 혹시 이상한 오해는 하지 마시고요."
"어? 으, 으응..."
최아란이 나한테 철벽을 쳤다면 육탄공세라도 했을 거였다. 사귀기 위해서 말이다.
하지만 최아란은 날 좋아하는 티를 팍팍 내고 있었다. 그러니 지금은 내 취향대로 갖고 놀 여유가 있었다.
'오석준'이었다면 최아란 같은 미녀, 심지어 재벌 회장의 손녀를 이렇게 막 대하진 못 했을 텐데... 이 기회에 팍팍 최아란을 마구 갖고 놀다가 사귀어줄 생각이었다.
최아란은 소심해져서 수저로 밥을 깨작였고, 신재연은 반대로 통쾌하다는 표정을 다시 한 스푼 크게 떠서 햄스터처럼 볼을 크게 해 우물거렸다.
다 큰 여자가 저러니...
'생긴 게 예뻐서 귀엽긴 하네.'
"아란 누나가 처음일 걸요. 우리 누나가 이 집에 데려온 친구."
"뭐? 진짜?"
신재연은 씹던 걸 뱉을 뻔했는지 입을 가렸다.
나는 물을 한 컵 따라서 신재연에게 내밀었다. 그녀는 얼른 씹어삼키고, 답답해진 식도를 내가 준 물로 뚫었다.
'신재준'의 기억을 살펴보면 신재연은 이 집에 동성친구나 이성친구를 한 번도 안 데려왔다.
"야... 뭘 그런 걸 다 말해."
난 신재연의 투덜거림을 무시한채 최아란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아란 누나랑 얼마나 친하면 데려왔을까 싶더라고요. 우리 누나가 친구 사귄 적이 없어서, 친구로서 좀 답답할 일이 생길지도 모르겠는데요. 그때마다 많은 이해 바라고, 용서해주시고, 계속 친구해주세요."
"아... 응! 나도 한국에 돌아온지 얼마 안 돼서 재연이 말고 친구 없어. 싫어도 쟤랑 식당도 같이 가야 되는 처지야."
"그런데 아란 누나."
"응?"
난 어제 새벽에 그녀를 처음 봤을 때부터 계속 궁금했다. 어제 아침에는 별로 안 친해서 못 물어봤지만, 지금은 '누나를 부탁해요, 나한테 맡겨' 이러고 주고 받은 관계니까 물어볼만 하다고 생각해 물었다.
"엊그제 밤에 클럽 같은데서 노셨나봐요?"
"뭐, 뭐?!"
"어제 새벽에 저희 집 오셨을 때. 차림이 엄청 남자 꼬시는 차림이셨는데요."
오픈숄더 튜브탑 미니원피스. 조금만 잘못 움직여도 빨간 팬티가 드러났고, 원피스 어깨끈만 내려가도 누드톤 브래지어가 드러나는 차림이었다.
"크, 클럽은 아니고... 헌팅포차 갈 생각이었다가... 대기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술집 갔어, 진짜로."
"응? 왜 죄 지은 같은 사람 같은 표정 짓고 있어요? 가고 싶으면 갈 수도 있지."
"나도 그렇고, 재연이도 그렇고. 우리 둘 다 모태솔로야. 그때는 잠깐 정신이 나가서 아무 남자나 꼬셔보고 싶었었어... 그, 근데 이젠 안 그럴 거야..."
"야. 넌 또 그 얘기를 왜 자세하게 하는데."
신재연이 모태솔로였다고? 의외였다. 집 바깥에서 일하면서 두 동생 몰래 남자친구도 사귀고, 스트레스를 섹스로 풀기도 하고 그랬을 것 같았는데.
최아란도 예쁜데다가 재벌이라서, 또래 여자 상속자들끼리 모여서, 돈과 마약으로 남자 아이돌 연습생 같은 애들 꼬셔서 별장에서 난교도 하고, 막 그럴 것 같은 이미지였는데...
사실 둘 다 순둥이였던 모양이었다.
내 질문 때문에 어색해진 분위기에서 식사를 끝마쳤다.
가만히 있으라니까 최아란은 반찬뚜껑을 닫아주고, 테이블도 부엌 옆 방까지 옮겨주었다.
신재연은 그런 최아란을 아니꼽게 쳐다봤다.
내가 부엌에서 그릇과 돌솥 안을 물로 채워두자 최아란이 팔을 걷으며 말했다.
"내가 설거지할게."
"됐어요. 돌솥 닦는 법은 아세요?"
"어...? 그냥 주방세제로 씻기면 되는 거 아니야...?"
"아니거든요. 그럼 돌솥이 세제 먹을 건데요."
"그, 그래?"
"손님으로 오셨으니까 그냥 편하게 쉬다가 가세요."
신재연이 부엌 옆 방에서 전자담배에 담배잎스틱을 꽂았다.
"아란아. 담배 피러 가자."
"어? 그래. 아, 재준아. 나 슬슬 가볼게."
담배피러 나갈 겸, 아예 우리 집에서 떠날 생각인가 보다.
"네? 벌써 가시게요?"
"어? 나 더 있다 갈까?"
"얘기 좀만 더 하고 가요, 저랑."
"흐흫... 그, 그래. 그럼 담배 한 대만 피고 올게."
"그냥 집에서 펴도 되는데요."
"아니야. 바깥에서 피고 싶어서 그래."
신재연은 반팔, 반바지 차림으로 겨울 밤 속으로 들어가고, 최아란은 추우니 정장 재킷을 걸치고 나갔다.
멀리는 안 나가고 바로 집 앞에서 담배를 피기 시작하는 두 사람이었다.
방음이 안 되는 집이라 두 사람의 대화소리가 다 들렸다.
"후우... 재준이, 요리 잘 하네. 진짜 식당해도 되겠더라?"
"그런 힘든 일 안 시킬 거."
"아, 그러냐. 아, 시발. 김 과장 새끼. 퇴근 했는데 왜 톡하고 지랄이지."
"뭐라는데?"
"메일 확인하고 답장 보내라는데."
"어쩔거냐?"
"어쩌긴. 일개 사원인데. 까라면 까야지."
"네가 무슨 일개 사원이야. 힘숨찐 새끼가."
혹시 나와 관련된 이야기를 하려나 싶었는데, 상사 뒷담을 하기 시작했다.
엿듣는 재미가 별로 없어서 큰방으로 돌아갔다. 설거지는 내일 할 생각이었다.
'최아란이 담배 다 피고 돌아오면 취미 물어봐야지.'
야구 직관이든, 낚시든, 영화 관람이든 뭐든. 야외에서 즐기는 게 하나 정도는 있을 것이다. 그것을 함께 하고 싶다고 말해서 데이트 비슷한 걸 작정이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최아란과 사귀어서 김하늘한테 질투심을 유발시킬 생각이었는데, 그 김하늘이 완전 삐쳐서 연락을 끊어버린 거였다.
'하늘이 애는 아직도 읽씹이네.'
(나) [하늘아, 미안해]
(나) [나 그 노래, 아무 생각없이 부른 거였어]
(나) [전화 좀 받아]
(나) [응?]
내가 전에 보냈던 지난 톡 메시지를 노려보다가 하나 더 적어서 보냈다.
(나) [이대로 얼굴 안 보고 살 거야?]
'응?'
마침 김하늘도 나와의 톡방을 보고 있던 걸까? 내가 올리자 마자 메시지 옆에 숫자 '1'이 사라져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