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48화 〉소꿉친구한테 따먹힘 (48/201)



〈 48화 〉소꿉친구한테 따먹힘




'후... 춥다.'


샤워하는 동안 추위를 느꼈다. 몸을 꼼꼼하게 닦고 난 뒤에 뒤를 돌아봤다가 눈살을 찌푸리게 됐다.

'어? 창문 분명 닫아놨을 텐데.'

왜인지 화장실 쪽창문이 열려있었다. 샤워 전에 쪽창문이 닫혀있는가 분명히 확인했었다.


'뭐지? 밖에서 누가 열었나?'

정수린의 짓일까? 날 따먹는 것으로도 모자라 샤워하는 모습도 엿보고 싶었던 걸까?


화장실 바로 앞에 현관문이 있었다. 그것을 여닫는 소리는 못 들었다. 샤워기 물줄기 소리에 못 들을 수도 있긴 했다만...

'그러고 보니 이 집에 살면서 이런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긴 했지.'

내가 겪은 건 아니고, '신재준'이 겪은 것인데 가끔 화장실에서 씻다가 돌아보면 창문이 열려있곤 했다.

'신재준'은 씻는 걸 몰래 엿보는 년이 있는 거라고 의심은 했지만, 겨우 '의심'하는  때문에 경찰이 움직이지도 않을 것이며  누이한테 말해둔다고 해도 범인을 잡기도 어려울 것이고, 두 누이를 심란하게 할 뿐이라고 여겨서 입을 다물고 있었다.

'흐음... 엿보기범. 실존한다면 미녀였으면 좋겠는데.'

하지만 미녀가 굳이 엿볼 필요가 있을까? 남자 꼬셔서 알몸 구경을 하면  텐데 말이다.


'못 생겼고, 나한테 걸렸다면... 귀찮게  신고야. 그냥 도망치라고 냅둬야지. 화장실 쪽창문 고쳐서 잠글 수 있게 만들고.'


지금 쪽창문의 잠금쇠는 어느 해 겨울날에 얼어붙었다가, 녹았다를 반복하더니 녹이 슬어 굳어버렸다. 그래서 잠글 수가 없었다.

'그런데 만에 하나, 엿보기범이 미녀라면...'

따먹히고 싶었다.

난 화장실 문을 열어서 그 앞에 두었던 수건에 손을 뻗었다.


'어? 옷 어디 갔어?'


화장실  앞에 수건과 함께 새로 입을 옷을 준비해뒀는데, 수건만 빼고 사라져있었다. 이건 확실히 정수린의 장난질 같았다.

난 젖은 몸을 수건으로 닦은 뒤, 큰방으로 향했다.


정수린은 전기장판이 틀어진 이불 속에 누워서 핸드폰 게임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방 한 가운데 내 옷이 놓여있었다.


"야. 이런 장난 치지 마."
"히힣... 미안해요. 다신 안 그럴게요."

정수린은 핸드폰을 내려놓고 감상 모드가 되어 나한테 시선을 집중했다.

 소녀한테서 등을 보이곤 팬티부터 바지와 셔츠를 걸쳐입었다. 입는 와중에 물었다.

"야. 너 방금 집 밖에 나갔다 왔어?"
"네...? 추운데 왜 나가요?"


거짓말인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럼 엿보기범은 정수린이 아닌 것 같았다.


내 등 뒤에서 소녀가 껴안아왔다.


"오빠... 진짜진짜 마지막으로 한 번 만 더..."
"야. 나가. 과외 시간 끝났어."
"아, 정말이네."
"나 집안일 할 거야. 돕기 싫으면 나가."


집안일이야 정수린이 오기 전에 다 했지만, 떠나보낼 생각으로 언급했다.


"아... 그건 귀찮은데. 알겠어요. 저 갈게요, 오빠. 아, 이건 오늘 과외비."


정수린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정해져있던 3만 원을 내밀었다.

"과외비는 됐어. 오늘 가르쳐준 것도 없었잖아."


섹스만 해댔다.


"그래도 오빠 시간 썼잖아요. 받아요. 안 받으면 저 안 가요?"

난 낚아채듯 정수린의 손에서 지폐를 가져갔다.


"그럼  갑니다."
"가."
"마지막으로 존댓말 한 번만 해줘요."
"가세요, 좀."
"히힣... 네. 내일 데이트한 거 잊지 말아요, 오빠. 아, 그리고 영화관 오시면 저 찾아와요. 영화 무료로 보여드릴 거니까요. 어차피 상영관 빈 좌석 남아돌아서 부담 가지실 필요 1도 없어요."
"하아... 알았어."

마중은 나가지 않았다. 현관문이 여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질펀한 섹스파트너가 되어준 정수린이 떠났다.

나는 바지춤을 잡아당겨 힘없이 늘어진 자지를 바라봤다. 오늘 대낮부터 고생이 많았다.


컴퓨터 책상 위에 두었던 핸드폰을 들어 톡을 확인해봤다.

김하늘에게 온 것이 없나 봤는데, 있었다.


김하늘 [과외하는가?]
김하늘 [강화도 갔다온 엄빠가 새우젓 마니 사옴 ㅋㅋ]
김하늘 [너보고 좀 퍼가래]
김하늘 [ㅋㅋ 강화도 여행 갔다온 동안 너 우리 집에 놀러왔었다니까, 아빠가 왜 자기 없을  너 왔다갔냐고 성화심]
김하늘 [집에 울아빠 잇는데  가는 길에  들령]

 답톡을 보냈다.

(나) [나 지금 과외 끝남. 근데 과외를 울집에서 함]
(나) [나중에 수린이네서 과외하면 들릴게]


그리고 이불 속에 기어들어갔다.

<오빠, 나 왔어. 킁킁. 근데 이게 뭔 냄새지.>


혹시나 싶어서 이불 안쪽 냄새를 맡아봤다.

"킁킁."

정사 이후의 꼬숩한 냄새가 배어있었다. 환기 좀 시켜야겠다.

창문을 활짝 열자 허리 높이 만큼 오는 낮은 우리집의 담벼락과 맞은  집의 높은 담벼락이 보였다. 그리고 가로등도 보였다.

'장을 봐야 겠네.'


최아란이 먹고 싶다는 돌솥비빔밥을 위해 장을 볼 필요가 있었다.


컴퓨터를 켰다. 돌솥비빔밥을 검색했다.

한식조리사 자격증을 딴 '신재준'이었다. 그의 기억을 통해 '정형적인 비빔밥' 조리법은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더 맛있게 하는 비법이 있을까 해서 레시피를 알아봤다.


괜찮아 보이는 레시피를 찾아냈다. 핸드폰에 필요한 재료들을 메모해둔 뒤, 외투를 입었다. 바로 장보러 나갈 것은 아니고, 환기를 위해 창문을 열어두니 추워서 그랬다.


핸드폰이 진동했다. 김하늘의 답톡이 왔다.


김하늘 [오키]
김하늘 [그럼 집에서 뭐함?]
(나) [곧 장보러 나가려고]
김하늘 [어 ㅋㅋ 나도 시내 나갈 생각이었는데]
김하늘 [만나쉴?]

김하늘은 나랑 데이트를 하고 싶은 생각으로 가득찬 모양이었다.

'잘 됐네.'


같이 장을 보고 저녁식사도 초대하는 거다. 기다리다보면 신재연과 최아란이 올 테고. 그렇게 만난 김하늘과 최아란은 서로 자극을 받을 거였다.

(나) [ㅇㅇ 시내에서 만나자]



* * *



정수린과 커플룩인  롱패딩을 입고 나와서 그런지, 김하늘은 이마를 살짝 찌푸렸다.


얼른 표정관리를 하고 날 향해 방긋 미소를 지었다.

"하이!"
"이제 멀미는 괜찮냐?"
"엉. 다음에 놀이공원 갈 때는 키미테 붙인다, 내가."
"장보는 거 재미없을 건데. 따라올 거?"
"놀 시간은 없어?"
"응?"
"장 바로 봐야 하냐고. 아니면 좀 놀다가 장 보지?"
"음. 6시 전에만 집에 돌아가면 될  같은데."
"2시간 정도 남았네. 장 보는데 오래걸려?"
"한 30분?"
"흐음, 그럼 1시간 30분... 영화 보기엔 빠듯한 시간이구만."


'신재준'은 김하늘과 시내에서 놀 때, 끌려다니는 편이었다.


나는 말없이 김하늘의 선택을 기다렸다.

"그럼 일단 코노 고?"
"고."


'신재준'의 몸에 빙의하고 노래방을 찾은 적이 없었다. 트렌드야 원래 세계나 이곳이나 비슷비슷한  같은데, 내가 아는 노래가 없었다.

지폐를 동전으로 교환하고 빈 방에 들어갔다.

"나 음료 뽑아올게. 먼저 예약해.  사이다?"
"어."

김하늘이 음료 뽑으러 나갔을 때, 대충 '신재준'의 기억을 떠올리며 '신재준'의 애창곡을 예약했다. 따로 검색하지 않고 외우고 있던 번호만 입력했다.

<송재호 - 벚꽃 만남>

남자 포크 록 계열 곡이었다. 산뜻한 멜로디로 봄에 만난 인연에 대해 노래하는 곡.


"아직 봄도 안 왔는데?"
"딴 거 불러?"
"그런 뜻은 아니고. 우리 재준이 부르고 싶은 거  불러. 자."


김하늘이 건넨 캔 사이다를 받았다.

"잘 마실게."
"노래 스타트."


마음의 준비도  됐는데, 김하늘이 대뜸 리모컨을 조작했다.


음악이 흘러나왔고, 가사 위로 마치 리듬게임처럼 음높낮이가 그려졌다.

나는 기교 따윈 없이, 기억나는 대로 가사를 읊기 바빴다.


[벚꽂 아래. 넘쳐나는 인연들. 우리는 그곳에서 만났죠.]

가사 쫓기 바빴다는 얘기는 음정, 박자가 죄다 어긋났다는 얘기였다.

겨우 60점이 나왔다.

아니, 무려 60점이 나왔다고 해야 되나.


'신재준'의 기억을 기반으로 한 조리 같은 경우, 실패할 때마다 재시도를 할 수 있어 그럴 듯한 조리를 그럴 듯하게 완성할 수 있었다.

하지만 노래는 완전히 실시간이다 보니 이 모양 이 꼴이었다.

"큭큭큭! 너 원래 그거 엄청  불렀잖아? 너  웃기려고 그런 거지?"
"어, 맞아. 실컷 웃어라."
"누나는 이거 불러주지."


<윤지 - Go Back>


순수한 감상의 발라드였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고백하려는데 용기가  안 나서 왔다갔다 망설이는 모습을 표현한 수줍은 소녀 감성의 가사였다.

이 세계나 원래 세계나 사랑 고백은 남자든 여자든, 엄청난 용기가 필요한 일인 것이었다.


[박차는 심장이 튀어나올 것 같아. 사랑한단 말을 꼭 오늘은 말할래.]

김하늘은 일반인 중에 수준급으로 노래를 잘 했다. 노래방기계에 요구한 음높이에서 벗어날 때가 간간이 있었지만, 원곡 가수 본인이 와도 기계가 정한대로 음높이를 완벽히 맞출 수는 없을 거였다.


그래도 김하늘은 올림음, 내림음, 바이브레이션까지. 노래방기계가 요구한 기교를  해냈고, 끝내 93점이라는 고득점을 얻어냈다.

"후... 어때, 누나 노래 실력이?"
"들을 만하네."
"뭐야. 좀  찬양하라고!"
"어, 우리 하늘이. 노래 잘 부른다. 아주 최고야. 가수해도 되겠어."
"영혼이 없잖아, 영혼이."

곧 내가 예약해둔 노래가 나왔다. '신재준'은 김하늘을 따라서 노래방에 곧잘 다녔기에 고음이 잘 올라가는 편이었다.

'오석준'일 때는 고음불가의 목이었다. 이제는 가능해진 고음이라, 신나서 고음위주의 노래만 골라서 불러댔다.


"아! 킥킥킥!"


물론, 가사도 뭉개지고, 박자도 틀리고, 고음을 시도하다가 삑사리도 터지고 그랬다. 그럴 때마다 김하늘은 자신의 배를 잡고 날 비웃기 바빴다.

"신재준.  오늘 무슨 컨셉 잡았어? 하는 노래마다 다 처음 부르는 것처럼 부른다?"
"됐고. 너 아까부터 안 부른다? 너도 불러."
"내가 부르면, 네가 부르는  못 듣잖아. 아, 웃겨. 킥킥킥."

나는 처음 그녀가 불렀던 <윤지 - Go Back>을 선곡했다.

시작하자 마자 남자 키로 내렸다.


"올. 나의 93점에 도전해보시겠다?"

노래가 좋기도 했거니와, 제법 김하늘을 자극할 만한 가사였기에 선곡했다.

[오늘 아침에 유난히 네 얼굴이 밝아보여.]
[십 년 넘게 보아온 네 얼굴이 오늘 따라 멋져 보이는 거야.]
[여태 숨겨왔던 내 마음을 주체할 수 없게 돼버린 것 같아.]

이 소녀의 고백 노래는 특히나 '소꿉친구'에게 고백하려는 가사였던 것이다.


'신재준'은  노래를 들으며 김하늘의 마음을 추측해왔다.


'신재준'은 이 노래를 김하늘 앞에서 불러준 적이 없었다.

여자 노래기도 하거니와, 괜히 김하늘한테 쓸데없는 생각을 심어줄까봐.


하지만 난 대놓고 불렀다. 박자와 음정을 틀리고, 몇몇 가사도 뭉개가면서. 시선을 가사가 출력되는 모니터에 고정한 채로.


내가 노래하는 내내,  옆에서 배꼽을 잡고 웃던 김하늘이었는데 지금은 조용했다. 내 옆얼굴이 따가운 게, 김하늘이 빤히 쳐다보고 있는 듯했다.

[박차는 심장이 튀어나올  같아. 사랑한단 말을  오늘은 말할래.]

하이라이트 고음 부분에서 목소리를 높였다.

노래가 끝났다.


점수는 70점.

다음 예약곡이 시작됐다. 김하늘이 예약한 곡이었는데, 그녀는 노래를 부르지 않고 나만 쳐다봤다.


"왜 안 불러?"


돌아보니 김하늘이 뜨겁게 쳐다보고 있었다.

"재준아. 나랑 사귀자."
"지금은 사귈 마음 없다니까."

고백을 거부하자 김하늘의 비틀리게 웃었다.


"그럼 그 노래 부르지를 말았어야지. 사람 가지고 노는 것도 아니고, 뭐냐... 야. 나 먼저 간다."

김하늘은 화가 난 듯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나갔다.


'정수린하고는 다르네.'

김하늘은 내가 자기 마음을 갖고 논다는  알아차렸다.

김하늘이 어린 나이이고, 왕성한 성욕을 가지고 있음을 알았기에, 쉽게 분노하고 날 덮치리라 여겼다. 그런데 그 결과가 이거였다.


'그래도 지금 박차고 나갔어도, 결국엔 나한테 돌아오긴 하겠지.'


십 년 넘게 순애보를 지녀왔다. 겨우 이번 한 번, 감정 상한 것 가지고 그 순애보를 내다버리진 않을  같았다.

'일단 최아란이나 신경쓰자.'




* * *



신재연 [재준아. 아란이, 네가 집에 초대했어?]
(나) [응]
신재연 [돌솥도 사게 했고?]
(나) [(찐만두가 OK를 외치는 이모티콘)]

지금은 6시를 조금 넘기는 시각이었다. 이제야 최아란에게 최아란의  방문 소식을 전해받은 모양이었다.


신재연에게 최아란을 초대했음을 말해야한다는 걸 잊고 있었다.

신재연 [돌솥은 내가 사갈게]

신재연은 자기 친구한테 집에서 반평생 쓸 식기를 사게 하는  마음에 걸린 모양이었다.


(나) [먹고 싶어하는 사람이 사야지]
신재연 [그래도 우리가 두고두고  거니까]

신재연의 말이 정론이긴 했다. 그런데 자꾸만 최아란한테 '질투'해서, 최아란이 사는 걸 막으려는 듯한 행동으로 보였다. 내 착각일까.


'새벽에 나한테 왜 그런 짓해서, 사람 심란하게 만드냐.'


(나) [알았어. 그럼 누나가 사]
신재연 [알았다]
(나) [오늘은 아란 누나랑 같이 퇴근할 거지?]
신재연 [그래]


나는 소고기를 시판하는 불고기 양념에 재워두고, 비빔밥 재료를 손질하기 시작했다. 무, 애호박, 양파, 당근, 표고버섯, 느타리버섯을 채 썰고 콩나물과 고사리도 손질 했다.

비빔밥 양념장도 만들었다. 고추장, 참기름, 통깨, 설탕, 다진마늘, 매실청을 넣어 섞었다.

'오늘 재희가 마감조 근무라니까, 3인분만 하면 되겠네.'

처음에 최아란에게 사달라고한 돌솥의 갯수는 4개였다.

신재희까지 생각한 갯수였는데, 신재희가 마감조 근무라고 해서 김하늘을 초대하려고 했다. 그런데 김하늘이 삐쳐 떠나가버려서 부르지 못하게 됐다.


김하늘은 아직도  연락을 안 받고 있었다.

(나) [하늘아, 미안해]
(나) [나 그 노래, 아무 생각없이 부른 거였어]
(나) [전화 좀 받아]
(나) [응?]

내가 보낸 톡메시지 옆에 숫자 '1'은 사라져있었다. 읽었는데도 답을 안 해줬다. 읽씹을 당한 거였다.


'얘, 지금 삐진 거... 오래 가진 않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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