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화 〉소꿉친구한테 따먹힘
신재연이 편의점에서 돌아왔는지 현관문이 여닫는 소리가 났다.
"누나, 잠깐. 들어오지 마. 나 옷 갈아입고 있어."
신재준의 목소리도 들렸다.
부엌과 큰방 사이의 방에서 옷을 갈아입던 신재준이었다.
자기 누나한테 환복하는 모습을 보일까봐 걱정드는 건 당연한 것이긴 한데, 막상 그 꼴을 옆에서 들으니 귀엽고... 좀 꼴리게 느껴졌다.
"누나, 이제 들어와도 돼."
"그래."
부엌 옆 방을 지나쳐, 큰방에 들어선 신재연. 최아란에게 컨디션과 숙취해소제를 내밀었다.
"술 다 깼냐?"
"아니. 아직도 머리 아파. 땡큐. 얼마냐?"
"어제 술값, 네 카드로 긁었다. 됐어."
"...내 껄로 했다고?"
"네가 긁으라고 했어, 새끼야."
"진짜?"
"아, 씨. 그것도 기억 안 나?"
최아란은 핸드폰을 꺼내려고 했다.
"카드 내역 문자 온 것도 없던데..."
"사실 내가 긁었어. 계좌번호랑 술값 반띵에다가 약값 더 해서 얼만지 합산해서 톡으로 보낼 테니까. 바로 입금해라."
"아씨. 표정 하나 안 바뀌고 농담을 하네, 새끼. 알았어."
"밥 먹어요."
"알았어, 재준아. 이불 치울까?"
"아니, 여기서 먹어."
"응? 오늘은 거기서 먹으려고?"
"큰방은 손님 쉬시잖아."
"원래 큰방에서 먹어? 나 신경 쓰지 말고 여기서 먹지?"
"됐어. 여기서도 자주 먹으니까 미안할 거 없어."
부엌 옆 방으로 향했다. 테이블에 셋이 둘러앉았다.
최아란은 그러지 않으려고 했는데, 전기장판 하나만 깔리자 꽉 차버린 비좁은 부엌 옆방을 둘러보고 말았다.
소리내며 돌아가는 냉장고와 옷이 가득 걸린 옷걸이. 그 옷걸이에는 유명 브랜드의 값비싼 롱패딩이 걸려있어 특별히 눈에 띄었다.
"왜요? 신기해요?"
신재준의 질문에 최아란은 자신이 보인 좋지 못한 행태를 자각하고 얼른 사과했다.
"미, 미안..."
새벽부터 이 소년한테 사과를 몇 번이나 하게 되는 걸까.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직장에서도, 자신이 잘못을 저지른 일이 적어서 사과의 말을 입에 담을 일이 드물었는데.
하지만 이 소년에게 만큼은 자꾸만 사과하게 됐다.
"아니,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건데요. 미안할 거 없는데요."
"아, 그, 그래?"
최아란은 왜 자신이 계속 소년의 눈치를 보고 있는지, 스스로가 잘 이해 안 갔다.
"그리고 양반다리하시면 팬티 보이는데요."
"아, 미안."
또 사과의 말을 입에 올리고 말았다.
더군다나 최아란은 얼른 무릎을 꿇고 앉기 까지 했다. 최아란은 자신의 어머니 앞에서도 무릎 꿇어본 적 없었다.
신재준은 담요 하나를 가져와서 최아란의 다리에 덮어주었다.
"이러면 양반다리해도 되겠네요."
"그, 고맙다."
그제야 상차림을 살피게 되었다. 콩나물해장국이 메인이고, 계란을 입힌 분홍색 햄에, 멸치볶음, 김치, 오이소박이 등. 보통의 한국 가정식이었다.
최아란은 원래 한식을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는데, 미국에서 유학 생활을 하다보니, 한식이 유별나게 땡기기 시작했다.
"잘 먹을게. 재준아."
"근데 누나 이름은 뭐예요?"
"아, 나는 최아란 이라고 해."
"그렇구나."
최아란은 소년이 자신에 대해 더 궁금해 했으면 좋겠다고 바랐다.
어제 술자리에서 신재연에게 자신이 누군지 설명했을 때처럼, 이 소년한테도 자신이 누군지 알려주고 싶어 입이 근질거렸다.
신재연과는 '친구'가 되고 싶어서 그랬던 거였다.
그럼... 신재준한테는 왜 자신에 대해 알려주고 싶은 것일까?
'음... 맛있네. 재준이가 직접 한 거 같은데...'
콩나물해장국은 뜨겁고 칼칼했다. 뒤집어진 속을 달래기 좋았다.
옆에서 자랑하듯 신재연이 말했다.
"반찬도 재준이가 다 한 거다."
"오, 대단한데."
"고1 때 한식 조리사 자격증도 땄어."
"아, 누나. 뭘 그런 걸 다 말해."
요리도 하는 가정적인 남자라니. 신재연이 자랑할만하다고 생각했다. 또한 신재준에게 호감이 더 올랐다.
"누나, 물 따라줄까?"
"응. 고맙다."
"아란 누나도 물 줘요?"
"어, 어. 땡큐..."
아쉽게도 식사를 하는 동안 소년이 자신에 대해 질문을 해오는 일은 없었다.
소년은 밥을 먹는 중간중간 핸드폰을 내려다보며, 웃음을 멈추질 않았다.
최아란은 그게 자꾸 신경이 쓰였다.
'뭐지... 애인하고 톡하는 건가? ...아니, 애한테 애인이 있든, 말든 그게 나랑 뭔 상관인데.'
최아란은 이제야 슬슬 감이 잡혔다.
이 소년한테 갖게 된 감정이 뭔지.
'아니, 시발. 정신 차리자. 얘는 나랑 7살이나 차이난다고.'
자신이 초등학교 1학년일 때, 신재준이 태어난 것이었다.
'게다가 민짜...'
처음으로 이성에게 '제대로 된' 호감이 생긴 모양인데... 그게 하필 민짜라니.
최아란의 간지러운 구석을 긁듯, 신재연이 마침 질문을 던졌다.
"뭐냐. 애인이라도 생겼어? 되게 좋아하네."
"아닌데. 그냥 하늘이랑 톡하는 거임."
"하늘이하고 뭔 얘기를 하는데 그렇게 좋아해?"
'하늘? 남자인가, 여자인가...'
최아란은 관심없는 척, 콩나물해장국을 수저로 떠먹으며 귀를 열었다.
"별 건 아니고. 그냥 놀이공원 가자고 해서."
"그럼 데이트 신청이네?"
'신재연이 '데이트'를 언급한 걸 보면, 여자인가 보네.'
질투심이 피어올랐다.
다른 남자를 좋아해본 적이 없었던 최아란에게 있어서... 질투 역시 생소한 경험이었다.
"아, 그런 거 아니고. 마침 이벤트 당첨돼서 자유이용권 생겼는데, 같이 가줄만한 사람이 없다네. 나보고 같이 가자는데?"
'하늘인지, 뭔지. 수작질 부리네. 재연아, 막아라.'
"흠, 하늘이면... 그래, 재밌게 놀다 와."
최아란은 이마를 찌푸렸다.
/ / /
"아란 누나, 조심히 들어가세요."
"어, 재준아. 잘 있어. 나중에 기회있으면 또 보자."
"네."
"재준아, 나 없는 동안 나가게 되면 문단속 잘 하고 나가."
"응, 누나."
신재연은 이 주변 지리를 모르는 최아란을 위해 버스정류장까지 안내해주기로 했다.
두 사람이 떠나고 혼자 남게 된 나는 설거지부터 했다.
쌓이면 귀찮다.
청소기도 밀고, 걸레질을 한 뒤, 분리수거 및 쓰레기 내다버리는 것도 다 했다.
'이젠 집안일을 안 하면 오히려 찝찝하단 말이지. 아, 어젯밤이랑 엊그제 밤에 가계부는 갱신 안 했구나.'
가계부도 펼쳐다가 정리를 마쳤다.
그 즈음, 김하늘의 목소리가 현관문 앞에서 들려왔다.
"재준아, 노올자으~"
현관문을 열어보니 패딩에 바지를 입은 단발머리 소녀가 서있었다. 그녀는 날 보자 미소를 지었고, 나 역시 덩달아 미소가 지어졌다.
"집안 일 다 했어?"
"어. 기다려봐. 외투 걸치고 올 테니까."
"롱패딩은 말고. 놀이기구 탈 때 불편할 걸?"
"그게 아니라, 수린이 꺼랑 똑같은 롱패딩이 싫은 건 아니고?"
"...어, 싫어."
"솔직하구만."
시장에서 샀던 외투를 걸쳤다. 오랜만에 싸구려 외투를 입어보니 내감이 별로였다.
문단속을 하고 나왔다.
값비싼 롱패딩을 입다가 싸구려 외투를 입으니 너무 추웠다.
마치 김하늘네 아파트는 따뜻한데, 신재준이 사는 집은 방한이 잘 안 되는 것처럼.
"으, 춥네. 새벽에 눈 왔었나? 엄청 쌓였네."
"추워도, 눈이 와도 놀이기구는 돌아가지."
"알바생들도 일하고 있을 거고."
"정직원들도."
"사장들도."
"아니, 재준아. 사장들은 주말에 쉬고 있을 것 같은데."
"아, 그러네."
쓸데없는 잡담을 하며 버스정류장으로 향했다.
버스정류장 쪽에서 집으로 돌아오던 신재연과 만났다. 최아란을 떠나보냈는지 혼자였다.
"안녕하세요, 언니."
"어, 하늘아. 오랜만이다. 재준이랑 놀이공원 간다고?"
신재연은 목에 걸린 전자담배를 만지작거렸다.
"넵."
"재밌게 놀아라."
"넵."
"누나, 들어가."
"오냐."
신재연과 헤어지고 다시 걸었다.
"너랑 신재희, 너랑 재연이 언니. 둘 사이가 달라도, 어떻게 그렇게 다르냐."
"신기하냐? 나도 신기하다. 그래도 재희, 요즘 착해졌어. 알바도 꼬박꼬박 나가고. 요즘엔 억지스러운 시비도 안 걸고."
"역시 유방빵이 결정적이었던 같습니다, 선생님."
"아니라고. 나 때리게 한 게 결정적이었어."
"크윽. 우리 재준이가 마조라니."
"뭔 개소리여. 맞다. 그런데 자유이용권, 이벤트에 당첨된 거 맞아?"
"어, 맞아. 아마도."
"아마도는 뭐냐..."
"다 알면서."
"구라였다고?"
"당연하지."
난 걸음을 멈췄다.
"나 그냥 집으로 돌아간다."
그러자 김하늘이 '아아아!' 작은 비명을 지르며 내 손을 잡아끌었다.
"이벤트에 당첨된 거 맞아."
"그래? 신기하네. 마침 이 타이밍에."
"그, 그러게."
지금 이 순간, 우리 둘 사이에는 암묵적인 규칙이 생겼다.
[속아줄게, 알아서 거짓부렁이를 입에 담아라.]
나는 김하늘의 손을 떼려고 했다. 아까 은근슬쩍 잡아채고, 놓치 않고 있는 손.
"어허. 우리 뽀뽀까지 한 사이잖냐. 어딜 놓으려고."
"내가 그때 왜 키스를 허락했지. 술 먹어서 그런가. 실수였다, 진짜."
"야... 그렇게 말하면 내 맘이 너무 아픈데."
"희망고문하는 것보단 나을 것 같은데."
"...그럼 놀이공원도 같이 가주지 말지 그랬냐."
"아, 그러네. 나 집 간다. 놀이공원에는 혼자 잘 가."
김하늘이 자신의 입술을 탁탁탁탁 손가락으로 쳤다.
"요, 요, 요! 요 입이 잘못 말했어. 자, 갑시다. 환상의 나라에!"
김하늘은 내 손을 놓고, 그 손으로 하늘 어딘가를 가리켰다.
'귀엽네.'
일요일 버스는 여유로웠다. 비어있던 2인석에 나란히 앉았다.
김하늘이 블루투스 이어폰 한 짝을 내밀었다.
"들을래?"
난 말대답 대신, 그것을 받아다가 귀에 꽂았다. 발라드 노래가 흘러나왔다. 당연히 노래 주제는 '사랑'.
다리가 불편해졌다. 김하늘이 쩍벌을 하며 내 다리에 자기 다리를 붙여왔기 때문이었다.
난 10분 정도 내버려뒀다가, 김하늘의 허벅지를 툭툭 밀었다.
"아, 미안."
김하늘이 허벅지를 모았다. 다리가 편해졌다.
어제 최아란의 뒤치닥거리를 해서 그런지 졸려웠다. 아침부터 콩나물해장국을 준비하기 했고.
나는 김하늘의 어깨에 고개를 기댔다.
똑바로 고개를 서있을 때는 잠이 쏟아졌는데, 막상 김하늘의 어깨에 기대니까 잠이 잘 안 왔다.
10분 정도 기대고 있었을까.
[나랑 키스해줄래♪]
마침 그런 가사가 이어폰을 통해 들려왔다.
김하늘의 고개가 움직였다. 그녀의 머리카락이 내 볼을 간지럽혔고, 곧 내 입술에 입술 도장이 찍혔다.
* * *
트위스터, 토네이도, 바이킹, 더블스핀을 잇따라탔다. 내가 흔들리고 뒤섞이는 걸 좋아해서 골랐던 거였는데...
"멀미 심해?"
"미, 미안... 내가 흔들리는 놀이기구에 약한지 몰랐다..."
김하늘은 벤치 위에 누워있었다. 이마에는 자기 손등을 올려놓고, 얼굴은 창백해져있었다.
"휴식 취하거나 중간중간에 약한 거 섞어타야 됐는데... 오늘 따라 손님이 없어서 신났네. 미안하다."
날씨가 쌀쌀해서 그런지, 다들 리조트 같은데 놀러가서 그런지 사람이 적었다. 신나서 막 탄 게 화근이었다.
"정말 미안해?"
"어? 어..."
"그럼 무릎 베개 해줘."
"너 노린 거냐?"
"아니... 진짜 아파... 아고, 머리야. 나 죽는다~"
아픈 게 분명한 주제에, 거기서 또 아픈 시늉을 또 했다. 그 모습이 귀엽고도 가엾기도 해서 무릎 베개를 해주기로 했다.
벤치 끝에 앉자, 내 허벅지 위로 김하늘의 뒤통수가 올라왔다.
"아, 좋다."
"아픈데 좋냐?"
"아프니까 좋아지네."
앞머리카락을 치우고, 그녀의 이마에 손바닥을 올려뒀다.
멀미로 인해 이마가 뜨끈뜨끈했다.
반면에 내 손은 겨울바람에 차가워진 상태였다.
김하늘은 눈을 감고 내 손의 냉기를 즐겼다.
"아, 좋다. 진짜로."
"시원하냐?"
"네, 아빠."
"왜 내가 네 아빠냐."
"아빠가 싫으면, 파팡..."
"지랄을 해요."
"킥킥..."
내 손바닥이 미지근해졌다 싶으면 손등으로, 김하늘의 이마 열을 식히고. 손등까지 미지근해지면 다른 손을 동원했다.
"나 이대로 자도 되냐?"
"얼어뒈질 걸?"
"그냥 세상이 이대로 멈춰도 될 것 같다."
"앞으로 살 날도 볼라게 많은 년이."
"하긴, 그렇긴 해. 한 50년 뒤에 또 이 벤치에 와보자고. 그때 가서 내가 말하는 거지. '아이고, 영감. 그때 기억나우? 내가 그렇게 좋다고 매달렸는데, 튕기긴 엄청 튕기고 말이야. 탱탱볼인 줄.'. 그럼 네가 말하는 거지. '사실 그때, 나도 많이 좋아했는데, 부끄러워서 튕긴 거였다오.'. 어떠냐? 그럴 듯하냐?"
김하늘이 눈을 치켜뜨고 날 올려다봤다.
"세 가지 선택지가 있는데."
"네, 파팡?"
"'파팡'은 하지 말자. 오글거린다."
"죄송."
"첫번째는 '듣기 좋은 거짓말'이고, 두번째는 '듣기 싫은 진실'이고, 세번째는 '듣기 좋은 진실'이야. 어떤 걸로 대답해줄까?"
"전부 알려주면 안 되냐?"
"당연히 안 되지."
"3번은 왜 그렇게 함정 선택지 같냐... 너무 좋잖아. '듣기 좋은 진실'이라니... 아, 몰라. 3번 하련다. 3번, 대답해보시오."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내가 아무하고도 안 사귀면. 제법 그럴 듯한 얘기가 될지도."
"...너무한데. 앞으로 2년을 더 희망 고문할 작정이냐... 역시 3번은 함정이었어. 흙흙..."
"미안."
"미안하면 뽀뽀해줘."
"그건 싫고."
"아놔."
'나도 2년은 못 기다리지. 얘는 어떻게 자극해야 넘어오려나... 빨리 따먹히고 싶은데.'
내 바지 주머니에 있던 핸드폰이 진동했다.
패스워드 잠금을 걸어뒀기에, 미리 톡 내용이 상단 팝업으로도 안 보였다.
패스워드를 입력하고서야 톡 내용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정수린 [오빠 뭐해요?]
"누구야?"
정수린을 이용해 김하늘을 자극하는 건 위험했다.
나도 모르는 사이 김하늘이 정수린한테 따로 접근할 수도 있었다.
내 컨트롤이 닿지 않는 상태에서 정수린이 폭발하면, 김하늘도 연쇄 폭발할 여지가 컸다.
'다른 쓸만한 여자 없나... 아.'
오늘 새벽과 아침에 시간을 함께 보낸 낯선 미녀가 떠올랐다.
'최아란... 꽤 반반했지. 입고 다니는 옷도 비싸보였고. 신재연과 동기, 동갑내기인 CY전자 사원.'
새벽에 최아란을 처음 보자마자 그녀한테 따먹히고 싶었다.
하지만 다른 소녀들과 다르게 직장인이자, 타지에 사는 최아란은 공략하기가 힘든 대상이었다.
그런 그녀에게 따먹히기 위해서는 '사귀는 과정'이 필수적으로 보였다.
'최아란하고 사귀고, 그걸로 하늘이 자극하고. 하늘이한테 따먹히고. 이후에 사귀다가 최아란한테도 따먹히고... 그러면 되겠다.'
"저기요? 누구냐니까요?"
"김민수 대리님."
"아, 대출 광고?"
"어. 아직도 어지러워?"
"응..."
난 사랑스러운 여자아이의 이마를 계속 식혀주었다.
"아, 네 손 좋다... 진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