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화 〉겨울방학
신재연은 외투를 걸치지 않고 그대로 나갔다. 약속 장소에 도착해보니 핑크색 트렌치코트를 입은 최아란을 발견했다.
롱부츠 위로는 맨다리였고, 열린 코트의 앞섬을 보니 안쪽엔 검은 원피스를 입고 있는 듯했다. 금발로 염색된 머리카락은 느슨하게 포니테일로 묶여있었다.
"신재연, 왔냐. 와, 너 안 추워?"
"추위 잘 안 타서. 너야말로 안 춥냐? 맨다리잖아."
"흐흐... 개춥다, 쓰벌."
최아란은 제자리 걸음을 하며 몸에서 열을 내려고 했다. 그녀가 신은 롱부츠가 또깍또깍 소리를 내었다.
그녀는 외꺼풀의 미녀에, 아름다운 기럭지의 소유자라서 그동안 지나다니는 뭇 남성들의 시선을 사로 잡았다.
그러나 신재연이 등장하자 시선은 나뉘어졌다. 넉넉한 품의 박스티임에도 존재감을 과시하는 폭유. 그것에 언밸런스한 귀여운 외모. 풍만한 엉덩이가 남자들의 발걸음을 늦추게 만들었다.
"외모에 자신 있다 이거냐? 옷 볼라 대충 입었네."
"옷이 없어서."
"엥. 대학 다닐 때 막 남자 꼬시고 다녔을 것 같았는데. 의외네."
"놀 시간 없이 바빴거든."
"흠. 그럼 헌팅포차도 처음?"
"어."
"나도 헌포는 첨인데... 뭐 어떻게든 되겠지. 가자."
헌팅포차 앞에 도착했다가 최아란은 질색했다.
"와, 미친. 이게 웨이팅이야? 8시도 빨리 나온 건줄 알았는데. 오늘 안에 못 들어가는 거 아니야?"
100명에 넘어보이는 인원이 추위에 제자리걸음을 뛰면서, 안에 들어서려고 대기 중이었다.
신재연은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사람이 많다는 핑계로, 일반 호프집으로 술자리가 변경되지 않을까 싶었다.
때마침 눈도 내리기 시작했다. 결정 하나하나가 솜털처럼 굵은 눈이었다.
최아란은 벌써부터 젖는 자신의 머리 위를 툭툭 털며 말했다.
"기다리다가 머리 위에 쌓이겠는데."
"아란아. 그냥 생맥이나 먹으러 갈까?"
"에이씨... 남자랑 놀아보고 싶었는데. 그럼 호프집 가자. 멋진 남자 있으면 합석하고."
신재연은 안도하면서, 재차 그 안도의 원인이 깨닫고 움찔했다.
근처 술집에 들어섰다. 빈 테이블이 많았다. 헌팅포차에 손님을 쭉 빨린 듯한 느낌이었다.
최아란은 핸드백과 코트를 옆좌석에 올려뒀다. 그녀는 노출도가 높은 튜브탑 미니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술집 주황빛 조명에 의해 본래 하얬을 어깨가 주황색으로 물들었다.
짧은 스커트였다. 그녀가 다리를 꼬는 찰나 벌어진 다리로, 빨간 팬티가 신재연의 눈에 보였다.
신재연은 영 좋지 못한 것을 본 것이기에 미간을 찌푸렸다.
"에잉... 텼네, 텼어."
최아란은 3개 정도 있던 남성 팀을 둘러보았다가, 그들의 외모가 마음에 차지 않은지 혀를 찼다.
"그냥 기다릴 걸. 야. 지금이라도 나갈까?"
"들어왔는데 그냥 여기서 마시자."
"쯧."
치즈콘과 수제 소시지 모듬, 생맥주를 시켰다.
"너는 뭔가, 남자를 맞선으로만 만나고 그럴 줄 알았는데."
"왜? 내가 일만 해대서?"
최아란은 강냉이를 한 웅큼 집어서 입에 쏟아부으며 물었다.
"어."
"나도 평생 남자 생각 안 들고, 그럴 줄 알았다. 나 좋다고 매달리는 서양 미남들 보고도 전혀 안 젖더라고. 그런데 오랜만에 한국에 들어와서 그런가. 스트레스 때문에 사람이 변하데. 아, 섹스 마렵다."
"스트레스?"
"미국에서 지낼 때는 그냥 공부만 잘 하고, 좋은 성적으로 졸업만 하면 됐거든. 근데 여기에 와서는 가족들끼리 정치질을 해대서... 음, 너 내가 어떤 년인줄 알지? 부모 잘 만난 년인 거."
최아란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신재연은 조금 심란해졌다.
최아란의 정체를 알고 있단 걸 티낸 적 없었다. 그저 동기, 동갑내기이 인연인 사림끼리 식당에 같이 밥 먹고, 쉬는 시간에 사내 헬스도 같이 하고 그랬을 뿐. 최아란이 미국 유학파라는 건 서로 신변잡기를 하다가 알게 된 것이었다.
"아, 혹시 이상한 오해할까봐 미리 말해두는데, 나 막내야. 내 어머니도 회장님의 막내 딸이고. 재벌집 막내 손녀라서, 지금이든 나중이든 중요한 위치는 못 돼. 이런 거 내세우면서, 너한테 갑질하겠다거나 그러려는 건 아니야."
남자 알바생이 생맥주부터 내려놓고 떠났다.
최아란이 고개를 숙이며, 비밀 얘기처럼 속삭였다.
"저 알바생은 귀엽다. 이 술집에서 제일 잘 생겼는데?"
'재준이보단 안 귀엽던데.'
최아란이 맥주잔을 들었다. 신재연도 맥주잔을 들어 부딪치고, 한 모금 넘겼다. 시원한 맥주가 뜨거운 목과 위장을 칠하며, 내장 해부도가 느껴지는 듯했다.
"나 재벌쪽 사람인 거 몰랐어?"
"알긴 했는데."
"역시. 맨날 네가 싫다, 좋다 표현 안 하고, 무조건 내 말에 따라줘서 이상했거든. 야, 그러지 마라. 나 혼자만 친구 생긴줄 알았는데, 아니었던 거잖아."
'뭐지... 시험인가? 아님 진심인가?'
최아란이 마음만 먹으면 자신의 회사 생활을 고달프게 만들 수 있었다.
만약 최아란이 밑도 끝도 없이 편안하게 굴라고 한대도, 신재연은 선을 지킬 생각이었다.
"나도 싫으면 네가 시켜도 안 하지. 앞으로도 그럴 거고. 친구인가 아닌가는, 글쎄. 일단 밥 친구는 맞지. 너 없었으면 나이 많은 선배님들하고 불편하게 먹었어야 했을 건데, 차라리 너랑 밥 먹는 게 편하지."
"그러냐. 그럼 다행이고."
최아란은 강냉이를 또 퍼먹었다.
그릇의 바닥을 보이자 신재연이 리필해오려고 했다.
"내가 갔다올게."
최아란은 직접 강냉이를 퍼왔다.
"뭐 사실, 헌팅포차 가자고 한 것도 다 너랑 친해져보려고 한 거야."
"나랑 친해져서 뭐 이득 볼 게 있나?"
"친구 사귀는데 뭐 이득, 손해 따지면 사귀냐? 마음 맞으면 그게 친구지."
신재연은 자신의 친구를 돌이켜봤다.
마땅히 친구라고 할만한 사람이 없었다.
어울려 놀아야 친구가 되는데, 신재연은 그럴 여유가 없는 청춘을 보냈다.
"생각해보니. 이렇게 말한 나도 사실 따져보면, '신재연'은 친해질 만하다고 여겨서, 너하고 술자리를 갖고 싶은 거긴 하네. 나는 돈 걱정 안 하고, 그냥 공부만 하다가 졸업장 따고, 시험 없이 특채로 들어왔거든. 그런데 너는 초대졸인데도 CY전자 사장님 마음에 들어서 기획팀 들어왔다며? 일하는 것도 신입인데 빠르게 배우고. 얘는 뭘 해도 성공하겠구나 싶어서 친해지고 싶었던 거지."
CY전자의 사장은 최종면접 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보고 뵌 적이 없었다.
최아란의 말에서 자기랑 친구 사이가 되고 싶어한다는 마음은 느껴졌다.
그렇긴 한데... 지금이야 대등한 친구 사이를 원할 수 있어도, 나중에 우정에 금이 가거나 트러블이 생긴데도 그럴 수 있을까?
힘들게 살아오면서 온갖 사람을 만나봤다. 믿었던 사장한테 배신도 당해봤고, 자신이 챙겨주던 동생이 자신에 대한 뒷담하는 것도 들어봤다.
신재연은 그런 생각을 일단 뒤통수 한 켠으로 밀어버렸다.
확실히 최아란과 친해져서 나쁠 건 없다.
오히려 사이가 소원해졌다간 골치 아픈 건 자신이었다.
'친해지자. 이 주말에 기어나온 것도 그걸 위해서였잖아.'
"같이 남자 꼬시면서?"
"엉. 너도 모태솔로라며, 새끼야. 나처럼 남자 고플 줄 알았지."
회사 식당에서 밥을 먹다가, 서로 지금 애인이 있느니 없느니 얘기를 한 적 있었다. 그때 서로가 모태솔로 임을 알게 됐다.
"내 취향인 남자를 네가 고르면 양보해줄 생각도 있었어, 인마."
신재연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막상 그런 상황이 오면 절대 양보 못 해줬을 걸."
"어쭈. 경험해본 것처럼 말한다?"
"너 남자 보고 젖어본 적 없다며."
"그랬지. 아, 시발. 근데 오해하지 마라. 나 이성애자야. 노멀. 남녀가 떡치는 야동 보면 젖긴 젖어."
"누가 뭐랬냐. 하여튼, 난생 처음으로 딱 네 취향의 남자를 만나버렸어. 눈만 마주친 것뿐인데 젖어버렸어. 그런 남자를 나한테 양보해줄 수 있었겠냐? 내가 그 남자 꼬시고 모텔 갈 수도 있는데?"
"어? 봊 같네... 그럼 확실히 양보는 못 했겠다."
"그치?"
"근데 이 년, 자신감 보소. 모텔 갈 거 확정이냐? 모태솔로 주제에."
"얼굴이 되니까. 특히 내 가슴 봐라."
"와, 씨. 재수없는 년. 너 이런 성격이었구나?"
두 여자는 웃음을 흘리며 잔을 비웠다.
속물적이지만, 신재연도 사실 재능이 있고 혈연도 뛰어난 최아란과 가까워지고 싶었다.
자신에게 도움이 될 것 같아서.
그것은 결국 두 동생을 위한 일일 것 같아서.
둘은 각자 살아온 이야기를 하며 소맥을 말아마셨다.
그게 화근이었다.
"야 정신차려."
"...어."
"아, 이 새끼가. 가자."
"...그래..."
최아란은 자꾸 눈이 감기고, 고개를 숙이려고 굴었다. 꽐라가 된 것이었다.
일에 중독된 모습만 보여줬던 최아란이었다. 미국 유학시절 때는 공부만 했다고 했고.
'설마 자기 주량도 모르고 막 마신 건가? 나 참.'
최아란에게 코트를 걸쳐 입히고, 그녀의 핸드백도 챙겼다. 그녀의 팔을 자신의 목에 걸게 만들고 호프집에서 나왔다.
다행히 최아란은 걷긴 걸었다.
처음에는 찜찔방에 갈까 생각했다.
하지만 그곳은 잠자리가 불편했다. 최아란을 버려놓고 자신은 집으로 떠나는 건 경우가 아니었고.
'재희는 여자라서 상관없고. 재준이도 예성이네서 자고 하룻밤 더 자고 온댔고... 그냥 집으로 가자.'
하루만 자고 온다던 남동생은 또 하룻밤 더 자고 오겠다며 톡을 보내왔었다.
택시를 타고 집에 도착하니 새벽 1시였다. 불은 꺼져있는데 보일러는 쿠우웅 소리를 내며 돌아가고 있었다.
'재희가 있나 보네.'
문고리를 돌려보니 현관문은 잠겨져있었다. 잠을 잘 때는 문을 잠가두고 잤다.
안에 사람이 있으니 열쇠도 집 안에 있었다. 보일러실에 열쇠는 없을 거였다.
'미안하네.'
신재연은 자고 있을지 모를 신재희를 깨울 작정으로 현관문을 두들겼다.
얼마 후, 부엌 불이 켜지면서 안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세요?"
"어? 재준아?"
"아, 누나야?"
현관문에 잠금이 풀렸다.
사랑하는 남동생이 졸린 얼굴로 서있었다.
낯선 사람을 데려온 것에 놀랐는지 눈이 크게 뜨였다.
귀여웠다.
그리고 술을 마셔서 성욕이 올라 그런가... 남동생을 마주한 것만으로도 아랫배가 오싹오싹했다.
그런 자신의 몸에 역겨움을 느꼈다.
"예성이네서 하룻밤 더 자고 온다고 하지 않았어?"
"..."
"재준아?"
"아, 그러려다가 그냥 왔어. 근데 누구셔?"
"회사 동기."
최아란은 정신이 없는지 신재준을 보고도 눈만 껌뻑거릴뿐, 인사를 하지 못했다.
"들어와, 누나."
"미안. 너 없는 줄 알고 데려왔는데."
"난 괜찮아. 상관없어."
"저, 미안한데 재준아. 애 신발 좀 벗겨줄래?"
"알았어."
남동생이 바닥에 앉아, 회사 동기의 다리에 손을 뻗었다. 무릎 아래에서부터 롱부츠 지퍼를 내렸다.
지퍼는 발바닥까지 내려갔고, 그 안에 있던 최아란의 맨발을 잡아서 뺐다.
'롱부츠면, 발냄새 심하게 날 텐데... 재준이한테 괜히 시켰다.'
"이 분은 내가 자던 이불에 눕히면 되겠다."
신재준은 큰방에서 자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전기장판 바깥쪽에 이불이 하나 더 깔아둔 상태였다. 더운 걸 싫어하는 자신을 위해 미리 깔아둔 모양이었다.
남동생은 부엌 옆 방에 전기장판과 이불을 깔기 시작했다.
남동생을 새벽에 깨어버리고, 수고하게 만든 것에 자책스러웠다.
'그냥 찜질방에 갈 걸.'
후회가 막심했다.
/ / /
새벽에 깼다. 현관문 문 두드리는 소리.
'신재연인가...?'
신재연은 내가 오늘 안 올 줄 알았는지, 무슨 용무로 집을 비웠는가 알려오지 않았다.
나도 친구네서 하룻밤 더 자기로 한 게 캔슬됐다고 말하지 않았다.
혹시 '남자애 혼자' 집에 있는 게 걱정돼, 신재연이 자기 볼 일 안 보고 빨리 돌아올까봐 그랬다.
난 부엌의 불을 켰다.
이상하게도 반투명한 현관문 유리 너머는 두 사람 분의 실루엣이 잡혀있었다.
"누구세요?"
"어? 재준아?"
"아, 누나야?"
역시 신재연이었다.
"예성이네서 하룻밤 더 자고 온다고 하지 않았어?"
'아...'
문을 열어보니 신재연은 데려온 것은 20대 초중반의 미녀였다. 머리는 금발로 염색했고, 뒤에서 하나로 묶은채였다. 눈썹은 염색하지 않아 검은색인데 짙었다. 외꺼풀의 눈이 껌뻑이며 날 쳐다보려고 노력했다.
잠기지 않은 분홍색 트렌치코트 안에, 검정색 튜브탑 미니원피스를 입은 여성이었다. 무릎 아래까지 덮는 롱부츠를 신고 있었다.
하얀 어깨와 거유의 가슴골이 다 보였고, 스커트는 잘못하면 팬티가 보일듯 짧았다.
꽐라가 됐는지, 신재연에게 몸을 맡긴채 고개를 축 늘어뜨렸다.
신재연도 얼큰하게 마셨는지 얼굴과 목이 새빨갰다. 둘에게서 술냄새가 확 끼쳐왔다.
'이 여자한테 따먹히고 싶다...'
"재준아?"
"아, 그러려다가 그냥 왔어. 근데 누구셔?"
"회사 동기."
"들어와, 누나."
"미안. 너 없는 줄 알고 데려왔는데."
"난 괜찮아. 상관없어."
"저, 미안한데 재준아. 애 신발 좀 벗겨줄래."
"알았어."
나는 바닥에 무릎을 대고 앉았다.
침을 꼴깍 삼켰다. 아래에서 위를 슬쩍 보니 검은 스커트 속 빨간 팬티가 보였다. 아랫도리에 피가 쏠렸다.
난 애써 발기 되려는 것을 막으며, 그녀의 롱부츠 지퍼를 찾아냈다. 그것을 아래로 내리자 땀에 젖은 맨다리부터 맨발까지 드러났다.
그 내부에서 고이고 고인 땀이 짙은 냄새를 풍겼다. 본래라면 역겨워했을 터지만, 미녀의 발냄새라서 오히려 꼴릿했다.
조심스럽게 여자의 발을 쥐고, 롱부츠에서 빼내 장판을 딛게 만들었다.
"이 분은 내가 자던 이불에 눕히면 되겠다."
마음 같았으면 신재연과 이 정신 못차리는 미녀를 양손에 끼고 자고 싶었다.
하지만 그건 부자연스러운 그림이라서, 내 희망사항을 포기하기로 했다.
신재연은 내가 자고 있던 이불 위에 그녀를 눕혔다.
"우웅..."
그녀는 뜻 모를 영어로 뭐라 웅얼거리며, 양팔과 양다리를 다빈치코드의 인체비례도처럼 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