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화 〉과외 학생한테 따먹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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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수린은 신재준이 미워졌다.
신재준이 못된 여자를 만나서 불행해졌으면 하고 바랐다. 자신을 선택하지 않은 것을 땅을 치고 후회했으면 소원했다.
정수린은 강약약강의 마인드를 갖고 있었다.
무서운 신재희 앞에서는 아이패드를 되돌려 달라고 강하게 말하지 못했지만, 만만한 신재준 앞에서는 화를 내며 돌려달라고 주장할 생각이었다.
3일 전에 아이패드를 빌려간 신재희.
어제 출근했을 때, 돌려달라고 했지만 또 '하루만 더 빌려줘'를 시전하며 돌려주지 않았다.
그것은 오늘도 마찬가지리라.
신재희한테 화가 났고, 신재희 앞에서 말하지 못한 자신이 한심했다.
"안녕, 수린아."
"네."
막상 오빠가 오니 분노를 뿜을 의지가 싹 사라졌다.
오빠한테 무슨 잘못이 있다고, 오빠한테 화를 낸단 말인가.
물론, 아이패드는 오빠한테 말해서 신재희로부터 돌려받을 생각이었다. 신재희도 자기 오빠 말은 들을 테니까.
다만... 저번 과외 때, 차인 뒤라서 오빠의 얼굴을 보기가 쑥쓰러웠다.
"숙제 한 거 볼까."
"아, 저 머리가 아파서 못했어요."
고백을 거부당하고 울었다. 그리고 하루 종일 잠을 잤다. 잠을 자는 것으로 현실에서 도피하고자 한 것이다. 컨디션이 깨져서 그런지 두통이 심하게 났다.
그래서 숙제를 하지 못했다. 두통이 나지 않았더래도 할 의욕도 안 났을 거지만.
오빠가 미워졌지만, 지금 또 곁에 있으니 행복감이 차올랐다. 정수린은 자신이 여전히 오빠를 좋아하고 있음을 자각했다.
"수린이가 준 가방 너무 좋다."
"...저도 좋아해주시면 안 돼요?"
"미안."
과외하는 동안 오빠를 보지 못했다. 창피하기도 했고 자신을 안 받아주는 오빠가 믿기도 했다. 자신이 삐졌다는 걸 눈치챈 오빠가 달래주길 바랐다.
하지만 오빠는 달래주지 않았다.
다만, 무시할 수 없는 이야기를 꺼냈다.
"오늘 저녁에, 하늘이네 가서 치맥 먹을래?"
"치맥요?"
'하늘이 언니네서 술을 먹겠다고?'
"어떻게 할래? 하늘이네 부모님 없대. 치킨은 내가 쏠 거야. 맥주는 하늘이네 있는 거 먹을 건데, 하늘이가 너도 불렀어. 같이 갈래?"
"갈래요."
무조건 갈 거다.
김하늘이 술에 취한 오빠한테 엉뚱한 짓을 못하도록 감시해야 했다.
"아! 맞다. 오늘까지 근무인데..."
"응? 그럼 같이 치맥 못 먹는 거 아니야? 저녁에 먹기로 했는데."
"새벽에 드시면 안 돼요? 내일 토요일이라 저 쉬고, 과외도 쉬잖아요."
"그럼 아예 하늘이네서 자는 게 낫겠네."
"저, 저도 하늘이 언니네서 자려고요."
'밤새도록 오빠랑 같이 있을 수 있는 건가?'
그럼 오빠는 잠에 들 것이었다.
'하늘이 언니... 김하늘이 자는 오빠한테 허튼 짓 못하도록 내가 막아야 돼.'
오빠는 김하늘과 톡을 나누어, 치맥을 먹을 시간을 새벽시간으로 결정했다.
그 톡 내용은 애인이 아닌 친구끼리 나누는 것처럼 담백했다.
하지만...
'뭐가 그리 좋다고 웃어.'
김하늘과 톡을 나누는 오빠는, 그동안 시종일관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 미소는 정수린한테도 지어준 적 없었던 것이었다.
한 가지 믿기 싫은 가설이 떠올랐다.
김하늘과 신재준은 서로 좋아하고 있다고.
"하늘이 언니랑은 진짜 사귀는 거 아닌가 보네요."
"뭐?"
"그런데. 저 말고 좋아한다는 사람이 하늘이 언니인가요?"
"응. 맞아."
"역시 그렇구나..."
가설이 맞아떨어지자, 정수린은 상상이 되었다.
김하늘과 신재준은 지금, 단둘이 있게 될 집에서 술의 힘을 빌려서 서로의 마음을 털어놓아 사귀고 싶어한다고.
그런 장소에 '정수린'을 부르는 것은...
술자리를 자연스럽게 만드려는 '핑계거리'일 거라고.
'내가... 눈치없이 그 자리에 끼는 걸 좋아하겠지. 그런데 내가 오랫동안 그 자리를 지키면, 날 '눈치없는 새끼'로 여기고 싫어할 거야.'
정수린은 몇 안 되는 친구들과도 제대로 놀지 못했다. 그래서 방학인 지금도 그 '친구들'에게 같이 놀자는 전화 한 통, 톡 하나 받아본 적없었다.
'친구들'과 놀 때, 정수린은 노는 방법도 모르고, 분위기를 맞추는 법도 몰랐다. 그래서 '친구들'이 눈치를 주곤 했다. 정수린은 눈치를 받을 때마다 그냥 집에서 놀 걸, 하고 후회했다.
'이번에도 난 노는 자리에서 필요없는 존재가 되겠지...'
까득.
정수린은 이를 갈았다.
'시발... 김하늘은 날 이용했어. 신재준한테 과외 알바 자리를 주선해줘서 점수를 따려고. 신재준도 날 지금 이용했어. 김하늘한테 고백받으려고, 그 술자리로 끌어들인 거야. 시발... 내가 병신인 줄 알아?'
정수린은 신재준의 얼굴과 가슴, 가랑이 사이를 노골적으로 쳐다봤다.
신재준은 두 손으로 가랑이 사이를 가렸다.
'넌 내 꺼야. 마음은 못 가져도, 몸은 내가 가질 거야.'
신재준을 바라보니, 그는 겁먹은 얼굴이었다.
정수린의 강약약강의 마인드를 가졌다. 자신보다 약한 신재준을 목격한 순간, 정수린은 그를 깔아뭉개고, 몸과 마음을 전부 망가뜨리고 싶어졌다.
"기대되네요. 치맥. 맛있겠죠?"
'오빠 자지도 분명 맛있겠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과외를 시작했다.
정수린은 과외하는 동안 집중하지 않고, 대충대충 오빠의 말에 대답했다.
머릿속에선 어떻게 하면 오빠를 겁박하여 따먹을 수 있을까, 에 대한 계획이 맴돌았다.
'가능하겠는데.'
'그럴 듯한 계획'이 수립되자, 정수린은 자신의 밑에 깔린 신음내는 오빠가 그려졌다. 아랫배가 두근거리며 손발 끝이 오싹오싹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오빠를 따먹을 수 있겠어.'
마침 아빠가 과일이 담긴 쟁반을 가져다주었다.
신재준은 과외 도중에 과일을 잘 먹지 않는 편이었다.
'시발. 우리 아빠가 손수 준비해준 건데 왜 맨날 남겨?'
포크로 딸기를 찍은 뒤, 그의 입가에 내밀었다.
"드세요."
"어, 고마..."
"아, 꼭지가 안 떼어졌구나."
이 상태면 신재준이 손으로 받아서 꼭지를 뜯어내 먹을 것이다.
정수린은 직접 뜯어다가 다시 신재준의 입가로 내밀었다.
신재준은 그것을 잘 받아먹었다.
'그래, 잘 했어.'
정수린은 고분고분 자신을 따르는 신재준의 모습이 기꺼웠다. 손을 뻗어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부드러운 머리카락은 몇 시간을 쓰다듬어도 질리지 않을 것 같았다.
오랫동안 머리를 쓰다듬으니 신재준도 이상함을 느꼈는지 의문을 품은채 쳐다봤다.
"오빠, 혹시 제 아이패드 못 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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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패드...?"
떠오르는 게 있었다. 엊그제부터 신재희가 집으로 가져온 아이패드. 신재희는 그것을 리듬게임을 해댔다. 누구 꺼냐고 물어보니 엄지혜의 것이라고 했었다.
'신재희... 이 년... 구라였구만.'
"재희가 아이패드 가져노는 거 봤어... 혹시 수린이, 네 꺼였어?"
"네. 신재희가 빌려갔죠. 일방적으로."
"미안."
난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정수린은 계속 내 머리 위에 손을 올린채 쓰다듬었다.
"내가 돌려달라고 하고, 사과도 하라고 할..."
"오빠."
"응?"
난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정수린은 내 머리 위에서 손을 내리고, 비릿하게 웃으며 말했다.
"저도 사람이라서 화가 나요."
"그렇겠지..."
"아이패드는 뭐 오빠가 돌려주는데 협력해주면 되겠지만요. 그전에 신재희가 훔쳐갔던 제 농구화요. 그거 얼마였더라 550이었나? 주고 샀거든요?"
내가 알아봤을 땐 시세가 600~700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정수린은 그보다 더 싼 550에 구입했나보다.
"근데 지금 구하려면 800인가? 그 정도는 줘야 하는 것 같더라고요."
"800...?"
신재희를 바로 잡지 못했던 '신재준'의 업보가 다시 돌아온다.
나는 어깨를 움츠리며, 불쌍한 표정을 짓도록 노력했다.
"예전에 내 얼굴 봐서 없었던 일로 해주겠다고 했잖아..."
"그러려고 했는데요. 오빠, 저도 제가 찌질한 거 아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돌려 받아야겠거든요? 지금 신재희가 신는 농구화는 다 상품성이 떨어졌으니까, 제가 그거 샀을 때 금액, 딱 550만 원은 돌려받고 싶거든요? 그러니까 오빠가 신재희의 가족으로서 책임져요."
"수린아..."
"아, 오빠는 '기생수'지. 그럼 현금으로 말고, 다른 방식으로 갚을래요?"
"다른 방식이라니?"
정수린은 손을 뻗더니 내 뺨을 부드럽게 쓸었다. 고된 일 하나 해보지 않은 소녀의 손은 굳은 살이 하나도 없었다.
"..."
"..."
아...
나는 눈을 감고서 소녀가 욕정을 품고 내 살결을 건드리는 감촉을 만끽했다.
정수린의 엄지가 내 입술을 매만지기 시작할 때는, 온몸의 전류가 흐르는 듯했다.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정수린의 엄지는 슬쩍 입술 사이를 파고 들더니 입꼬리를 들어올렸다.
입술이 비대칭으로 벌어지며 내 치아가 공기에 노출됐다.
난 뭐하는 짓이냐는 눈으로 쳐다봤다.
정수린은 내 입술에 슬쩍 넣었던 엄지를 제 입으로 가져가서 쪽 빨았다.
난 눈살을 찌푸리며, 경멸스럽다는 표정을 연기해봤다.
그러자 정수린은 기분 더러워지게끔 내 뺨을 툭툭 쳤다.
"표정관리해요, 오빠. 아니면 돈으로 내놓을래요?"
"나한테 원하는 게 뭔데...?"
"방금 행동으로도 모르겠어요? '오빠 몸'이요."
난 눈을 꾹 감았다.
드디어 평생의 소원을 이루게 되겠구나 싶자 감동이 밀려들었다.
뜻밖에도 아직 발기는 일어나지 않고 있었다. 쿠퍼액만 질질 흘리는지 팬티가 축축해질 뿐이었다.
내가 거부하지 않으니 수락으로 알아들었는지, 내 가슴에 손바닥을 대었다.
그리고 왼쪽 가슴을 빙글빙글 더듬고, 오른쪽 가슴으로 넘어가 역시 빙글빙글 더듬었다.
스킨십이 있고서야 아랫도리에 피가 쏠리기 시작했다. 나도 모르게 허벅지를 모았다.
이 세계는 남자가 여자의 젖가슴을 함부로 만져도 성추행이 잘 성립되지 않았다. 오히려 '좋아겠네, 부럽다.'라는 소리를 들을 일이었다.
반대로 여자가 남자 가슴을 더듬는 건 명백한 성범죄 행위였다.
"이, 이러지 마..."
한 번은 튕겨줘야 할 것 같아 말했다. 내 목소리는 감격과 기쁨, 기대감으로 떨리고 있었다.
"계속하면 신고할 건가요? 저 미성년잔데? 벌 받아봤자 금방 풀려날 건데요? 그보다... 신재희를 걱정하는 게 어때요? 제가 우리 어머니한테 도와달라고 하면, 화가 나셔서 인맥을 총 동원할 걸요? 신재희를 무조건 소녀원에 박으려고 노력할 텐데요. 신재희, 그동안 나쁜 짓 많이 했으니, 저뿐만 아니라 피해자들 엄청 많을 거거든요? 충분히 소녀원 들어갈 수 있을 걸요?"
신재희가 가끔 꺼내들었던 색색의 지폐뭉치가 떠올랐다. 분명 수많은 학생들로부터 야금야금 갈취해낸 돈일 터였다. 그만큼 피해자도 많을 거였다. 돈 많은 정수린의 어머니가 고소를 진행하면 소녀원에 갈 확률이 높았다.
정수린은 지금 '그럴 듯한 협박'을 해오고 있었다.
신재희의 농구화 값 뿐만 아니라, 신재희의 인생을 가지고 하는 협박.
난 그 협박에 당해줄 생각이었다.
난 슬펐던 일을 떠올렸다.
원래의 나, '오석준'의 기억을 보니 슬픔보다는 억울했던 일이 많았다. 보육원장이 자기 기분 더러울 때마다 보육원생들을 폭행하곤 했는데, 그 피해자 중에 나 역시 있었다.
그때 기억이 생생하게 떠오르니 억울하고, 분해서 눈물이 분비되었다.
"시키는 대로 할게... 그러지 마..."
쥐어짜낸 눈물. 눈망울에서 넘쳐흐를 정도는 아니었다. 눈꺼풀을 깜빡여서야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울지 마요, 오빠."
정수린은 얼굴을 들이대며 분홍색 혀를 낼름 꺼냈다. 내 눈물을 핥았다. 턱부터 시작된 혀가 볼을 타고 올라와, 눈꺼풀 위까지 핥았다.
간지러워서 웃음이 터질 뻔했다. 분위기 깰라, 나는 이를 악물며 참아냈다.
아, 그러고 보니 '슬픈 기억'이라면 '신재준'의 기억 쪽에 있었다.
어렸을 적 부모님한테 버려진 기억.
세 남매의 부친은 미국 이민자 3세였다. 이민 2세인 모친이 사업에서 크게 성공해 금수저였다.
요리사라는 꿈이 있던 그는 자신의 핏줄이 '한국'이라는 것에 한식에 관심이 많았고, 한국에 넘어왔다. 그러다가 사진작가인 여자를 만났다. 둘을 열렬히 사랑했고, 한국에서 3명의 자식을 낳았다.
세 남매의 부친은 사랑이 식자 결별을 선언하고, 꿈을 이루기 위해 미국으로 돌아갔다.
어린 신재준이 가지 말라고 말렸지만, 그는 '3000번의 잠을 자면 돌아오겠다'고 말하며 떨어뜨렸다. 어린 신재준은 그 말을 믿고 맨날 잤다. 자주 잤다.
어린 신재연은 맨날 자려고 구는 어린 신재준에게 '그런다고 아빠는 돌아오지 않는다'면서 혼냈다.
'잔인한 부친이네.'
'신재준'의 강렬한 기억에는 감정까지 스며들어 있었다. 나는 최루성 영화를 본 것처럼 흐느껴 울고 싶어졌다.
"흐흑..."
원래의 나라면 이를 악물고 흐느낌을 참겠지만, 지금은 터뜨릴 만하니 그대로 슬픔을 토해냈다.
"오빠..."
정수린이 내 몸에서 떨어졌다.
이런. 갑자기 '남자의 눈물'을 보고 마음이 약해진 건 아니겠지? 설마 끝은 아니겠지?
눈물 때문에 흐릿해진 시야로 정수린이 핸드폰을 드는 꼴이 보였다.
촬칵.
내 모습을 사진으로 저장했다.
"우는 모습도 귀엽네요. 정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