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화 〉과외 학생한테 따먹힘
오후 2시가 되기 10분 전. 오빠가 왔다. 정수린은 신발장 앞까지 마중 나갔다.
"오, 오빠. 오셨어요."
"응, 숙제 다 해놨어?"
"예... 히힣..."
오빠는 보자마자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그러다가 머리띠도 잠깐 매만지고 떠났다.
'내가 자기가 준 머리띠를 계속 쓰는 걸 보고 기뻐하겠지?'
정수린이 앞 머리카락을 늘어뜨리는 까닭은 어릴 적 별명 때문이었다. 이마가 너무 넓어서 '태평양'이라고 놀림 받았다. 그 별명이 싫었다.
하지만 아빠나 오빠는 앞 머리카락을 까는 게 훨씬 예쁘다고 해줬다.
'생각해 보니 신재희도 나보고 까라고 했지.'
둘이 남매라서 그런가. 하는 얘기가 똑같다.
물론, 오빠는 '까는 게 예뻐서'고, 신재희는 '답답하니까 까라'여서 그 방향성이 완전히 달랐다.
"아저씨는?"
거실에 들어온 오빠가 물었다.
"갤러리 관람한다고 나갔어요."
"그래?"
'단 둘이 있게 되었는데... 오빠는 별로 안 떨린가?'
방으로 향했다.
"오, 향수 뿌렸어?"
"예... 한 번, 뿌려봤어요..."
정수린은 화장과 향수를 배우고 있었다. 평소 대충 스킨과 로션, 비비크림으로 대충 하고 말았는데, 요새는 메이크업 세트도 결제해뒀고 뷰티 유튜버들을 통해서 배우고 있었다.
여고생들에게 후기가 좋았던 향수도 구입했다. 상큼하고 달달한 게 은은하게 퍼지는 향이었다.
"좋네."
"히힣..."
오빠가 등을 돌려 외투를 벗기 시작했다.
과외할 때마다 오빠는 아빠가 선물해준 롱패딩을 오빠는 입고 왔다.
아빠가 그걸 보고 '내가 했던 말을 신경 쓰고 있나... 맨날 같은 거 입네. 외투 하나 선물해줘야 하나.' 이런 말을 한 적 있었다.
정수린은 학생들이 비싼 외투 하나 사고, 그거 하나만 겨울 내내 입고 다닌다는 걸 설명하며 아빠를 말렸다. 오빠가 선물 때문에 부담스러워 할까봐.
롱패딩 안쪽은 스웨터를 입었는데, 또 그 스웨터 밑에 얇은 셔츠가 삐져나와있었다.
정수린의 암캐 본능이 행동을 지시했다.
'더우면 스웨터를 벗겠지?'
"오빠... 저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어, 그래."
오빠는 헤진 가방에서 교재나 공책, 필통 등을 꺼내고 있었다.
정수린의 집은 방마다 온도조절기가 있었다.
방을 나가는 척하면서, 방문 바로 옆에 있던 온도조절기를 건드려 방 온도를 5도 정도 상승시켰다.
화장실에 갔다. 화장실에 온 김에 속옷을 확인해보기로 했다. 원피스를 목 아래까지 들췄다.
거울로 비치는 모습.
마른 허벅지. 검은 레이스 팬티. 쏙 들어간 배. 앙상한 갈비뼈. 패드가 들어가 빈약한 가슴을 예쁘게 만들어준 검은색 레이스 브래지어.
'너무 마르긴 했네. 그래도 살이 뒤룩뒤룩 찐 안여돼 들보단 낫지.'
원피스 자락을 내리고 정리한 뒤 방으로 돌아갔다.
과외를 시작했다.
오빠는 연습문제를 풀라고 내준 뒤, 저번에 내준 숙제를 확인했다.
방이 무더웠다. 원피스 안에 속옷만 입었을 뿐인 정수린도 땀이 났다.
오빠는 벗을 것인가, 아니면 온도 좀 낮추라고 할 것인가. 정수린은 그런 걱정을 했다.
그래서 오빠가 내준 게 쉬운 문제인데도 잘 풀리지 않았다.
"후... 덥네..."
'나이스!'
오빠가 숙제 내용을 확인하다가 말고 스웨터를 벗었다.
반팔 티셔츠였는데 넥부분이 누래지고, 늘어난 상태였다. 그래서 쇄골과 평평한 가슴의 속살까지 엿보였다.
여름용인지 너무나 얇아서 유두의 분홍빛 색깔까지 다 비쳤다.
'시발... 미쳤다...'
정수린은 과외 받는 동안 정신 집중이 안 됐다. 계속 오빠의 유두를 힐끔거렸다.
"이 문제는 함정 문제인데... 수린아?"
"앗. 네... 하, 함정 문제군요. 네..."
오빠의 유두를 대놓고 빤히 쳐다보다가 깜짝 놀라서 얼른 눈을 떼었다.
그렇게 45분이 지나 쉬는 시간.
"오빠, 쥬스 드실래요?"
"좋지."
보통 때 같으면 아빠가 가져다줬을 테지만, 오늘은 아빠가 집에 없었다.
정수린은 주방 붙박이 냉장고에서 쥬스를 꺼내 컵에 따랐다.
슬쩍 어머니의 서재 쪽을 쳐다봤다. 서재에는 와인셀러가 있을 거였다.
'건들면 엄마한테 뒤지겠지.'
오빠한테 술을 먹여보고 싶었다. 오빠의 술주정은 어떨까. 막 애교부리고 그런 거면 좋겠다. 엄청 귀여울 텐데.
'아씨. 그럼 좋기는 한데, 딴 여자들하고 술 못 먹게 해야겠네.'
자신이 없을 때 오빠가 술주정으로 김하늘 같은, 자신의 여사친한테 애교를 부릴 걸 떠올리니 가슴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손님 대접용 과자도 몇 개 집어서 쟁반에 담아갔다.
"오빠."
"오, 땡큐."
오빠는 목이 말랐었는지 쥬스가 든 컵을 바로 마셨다. 아담스 애플이 위아래로 움직였다. 섹시했다.
'지, 지금 고백할까?'
과외시간이 완전히 끝난 다음에 고백할 생각이었는데, 몸이 바짝 달아올라 참기가 힘들었다.
'아. 맞다. 선물.'
정수린은 방구석에 놓아둔 가방을 가져왔다.
"오빠. 이거 선물이에요."
"응? 선물? 나한테?"
"네... 오빠도 저한테 머리띠 선물해주셨잖아요. 그 보답이에요."
"오올."
오빠한테 싫은 기색이나 부담스러워하는 기색은 없었다. 기쁜 얼굴로 가방을 받아 이리저리 살폈다.
"응? 뭐가 안에 든 것 같은데?"
"넵. 그 안에 든 것도 선물이에요."
오빠는 지퍼를 열고 아이패드를 확인했다.
정수린은 아이패드를 받은 오빠가 크게 기뻐하며, 자신을 껴안아주거나 혹은 볼에 뽀뽀해주는 상상까지 했다.
"이건 좀... 너무 비싼 거라..."
"저한테는 별로 안 비싸요. 그냥 오빠, 쓰세요. 과외할 때 준비도 그걸로 하시면 좋을 것 같은데..."
하지만 오빠는 부담스러워했다.
'그냥 받지.'
"정 부담스러우시면, 저한테 빌려서 사용하세요."
"굳이... 필요가 없어서. 가방만 고맙게 받을게."
"넵."
"고마워."
오빠가 손을 뻗어왔다.
오빠는 앉아있었고 정수린은 일어서 있었다.
정수린은 고개를 숙였다. 오빠의 손길이 머리카락을 보듬어주자, 이 손길을 독점하고 싶다는 욕심이 났다.
"오빠, 좋아해요."
'시발... 말했다...'
정수린은 계속 고개를 숙인 채였다. 그 상태로 눈을 꾹 감았다.
분명 오빠도 자신을 좋아할 테니, 이 고백은 받아드려질 것 같긴 했으나...
만에 하나 뭔가 사정이 있어서 오빠가 거절할 지도 모르니 두려웠다.
머리를 쓰다듬던 오빠의 머리는 멈췄다가 천천히 떨어져나갔다.
고개는 들지 않고, 슬쩍 눈을 치켜떴다. 오빠가 면바지 위로 자신의 손을 내려둔 게 보였다.
"미안해."
"예?"
정수린은 지옥의 나락으로 처 박히는 기분이었다. 머리와 심장이 서늘해졌다. 분명 방 안이 더운데도 그랬다.
정수린은 고개를 들어 오빠의 표정을 살폈다. 잔뜩 미안해하는 얼굴이었다.
"호, 혹시 저희 집이 엄청 좋아서 부담되시는 거예요?"
가방 선물은 좋아했지만, 아이패드는 부담스러워하던 오빠였다.
자신과의 연애가 '기생수'인 그의 입장에서는 부담스러운 것일 거다.
분명 그래서 거절한 것일 터였다.
전혀 부담스럽지 않다는 걸 오빠한테 납득만 시킨다면...
그렇다면 사귈 수 있을 거였다.
그렇게 믿었다.
"괘, 괜찮아요. 부담스러워 하시지 않아도 돼요. 저희 아빠도 오빠 엄청 마음에 들어하셔서..."
"수린아. 네 마음은 고마운데. 난 좋아하는 사람이 따로 있어."
"아, 그, 그러셨구나..."
냉수라도 뒤집어쓴 기분이었다.
땀에 흠뻑 젖은 원피스가 착 달라붙었다. 올라간 체온이다. 땀이 기화하면서 서늘함을 느꼈다.
오빠는 자신을 좋아해서 김하늘을 징검다리 삼아 과외하려고 했던 게 아니었나?
오빠는 자신을 꼬시기 위해 단 둘 만이 있는 과외시간에 야한 옷차림을 하는 게 아니었나?
그동안 머리 쓰다듬어준 건 뭔데?
팔을 꼭 붙여오는 스킨십을 허용해준 이유는 또 뭔데?
'날 좋아했던 게 아니었다고...?'
"과외... 시작할까."
"예..."
오빠에게 '정수린'이란 그저 과외 학생에 불과했다. 그 진실을 알게 되자 여태껏 혼자서 온갖 핑크빛 상상을 해온 자신이 병신 같았다.
어떻게 과외시간을 보낸 건지 모르겠다.
"선생님은 가볼게."
"네... 조심히 들어가세요."
"가방 고맙고... 음, 수린이는 예쁘고 착하니까 분명 나보다 좋은 남자 만날 수 있을 거야."
"네, 오빠..."
오늘은 마중 나가지 않았다. 맨날 거실이나 신발장 앞까지 마중 나갔는데. 정수린은 계속 자신의 방에 앉아있었다.
혹시 오빠가 방으로 되돌아와서, '사실은 널 좋아해. 네 말처럼 집안 차이가 너무 커서, 그게 부담스러워서 거절했었어. 미안해.'라고 말하면서 끌어안아줄지 몰랐다.
그럴 게 분명했다.
정수린은 확신을 갖고 기다렸다.
5분이 흘렀다.
또 5분이 흘렀다.
방에서 나왔다.
신발장에 가보았다.
오빠의 운동화가 보이질 않았다. 오빠는. 떠났다.
"흐흑..."
눈물이 쏟아졌다.
"뭐냐고, 시발..."
서러움이 복 받쳤다.
정말로 운명이라고 생각했는데.
어렸을 때, 첫 사랑이 이루어질 줄만 알았는데.
어차피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라고 여겼던, 과외 전 시절이 훨씬 나았다.
제멋대로 다가와서, 온갖 오해를 유발하더니 다른 여자가 좋다면서 교제를 거부했다.
"흐윽, 시발놈. 시발새끼."
정수린은 방으로 돌아와, 오빠가 앉아있었던 의자 쿠션에 볼을 부비며 한동안 울어댔다.
여자가 남자한테 차였다고 울다니. 엄청 찐따 같은 건 알지만, 자신은 원래 찐따였다.
* * *
정수린은 실연 당한 날, 알바 결근했다.
다음날에는 제대로 출근했다.
"야. 너 뭔일 있었냐? 어제 아팠다며?"
알바하다가 쉬는 시간. 스태프 휴게실에서 신재희가 정수린의 어깨를 툭 치더니 물었다.
"아... 다 나았어."
신재희는 일진이지만 귀엽게 생겼다. 신재준을 떠올리게 하는 외모였다.
신재준에게 갖고 있던 호감은, 오빠한테 고백을 거부당하자 증오로 서서히 변했다.
신재준을 닮은 신재희의 얼굴이 보자 괜히 짜증났다.
"야. 너 지금 나 꼴아보는 거냐? 뒈질래?"
"아, 아닌데... 내가 널 왜 꼴아봐..."
신재희가 일진 포스를 뿜자, 정수린은 화들짝 쭈그리가 됐다.
'시발. 남자가 신재준 뿐이야? '기생수' 주제에 날 놓친 걸 평생 후회할 거다.'
마음을 거절당했다는 이유로, 어제까지 좋아하던 사람을 증오하게 되었다.
정수린은 최대한 빨리 자신을 감히 거부한 신재준을 잊고, 다른 남자를 좋아히고 마음 먹었다.
정수린은 신재희를 곁눈질 했다. 신재희는 책상 위에 핸드폰을 둔채 리듬게임을 하기 시작했다.
정수린은 아이패드를 꺼내 쓰기로 했다. 어제 오빠한테 선물해주려다가 거부당했던 그것이었다.
'흐음... 뺏지는 않겠지?'
정수린은 일진 앞에서 고가의 제품을 사용하지 않으려고 굴었다. 일진들이 '빌려간다'해놓고 가져가서 돌려주지 않은 적이 몇 번 있었기 때문이었다.
신재희도 정수린의 농구화를 '빌려간다'고 한 뒤, 강탈한 전적이 있었다.
'그래도 나랑 친해졌으니까.'
함께 기미정에게 찍힌 동병상련의 정이 있었다.
신재희가 말하기 힘들어한 '일진회 탈퇴'선언도 자신이 대신 해줬으니, 나름 자신은 신재희에게 은인인 셈이었다.
그 친구이자 은인의 아이패드를 뺏지는 않겠지.
정수린은 자신의 사물함에서 최신형 아이패드를 꺼냈다.
그리고 그것으로 롤 영상을 보기 시작했다.
리듬게임을 한 판 마친 신재희가 정수린의 아이패드를 발견했다.
"야 거기 리듬게임 깔렸냐?"
"아니."
정수린은 해봤다가 너무 어려워서 바로 지웠던 적이 있었다.
"핸드폰으로 하니까 재미없다. 네 아이패드로 해봐도 되냐?"
"그, 그냥 핸드폰으로 해..."
"야 너도 핸드폰있잖아. 그걸로 롤 영상 보면 안 되냐? 쉬는 시간 때만 아이패드 빌리자."
그놈의 '빌린다'는 말이 나왔다. 정수린은 신재희 앞에서 아이패드를 꺼낸 걸 후회했다.
정수린은 보고 있던 롤 영상을 끄고, 짜증난 걸 보여주기 위해 아이패드를 툭 신재희 앞에 내려두었다.
신재희가 편해진 것 같자 짜증을 드러낸 것이었다.
"시발... 야. 너 지금 생리질하냐?"
"아, 아닌데..."
"아니라고 하기 전에 표정 관리부터 하든가, 찐따년아."
정수린은 정색한 신재희를 보며 화가 나기도 전에, 무서움이 덜컥 들었다.
"미, 미안해. 화내지 마."
얼른 신재희를 다독였다. 그러자 신재희는 분을 삭혔다. 앱스토어에 들어가 리듬게임을 다운 받았다.
정수린은 안전한 상태가 되어서야, 자신이 찐따처럼 굴었던 게 한심스러웠고 신재희한테 분노를 품게 되었다.
정수린은 쉬는 시간이 끝나기 전에, 아이패드를 돌려받고 싶었다.
"쉬는 시간 끝나면 줘야 돼... 알았지?"
"야. 나 오늘 하루만 쉬는 시간 때마다 가지고 놀게. 좀 빌려줘."
"아, 안 되는데..."
"왜. 영상 같은 건 네 핸드폰으로도 볼 수 있잖아."
"그, 그럼 일 끝나기 전에 돌려줘."
"엉. 핸드폰으로 하니까 보스곡 풀콤할 것 같은데, 자꾸 아쉽게 1미스 떠서 그래. 풀콤 성공하면 바로 돌려줌. 아, 충전기 없냐?"
"있어..."
신재희는 정수린한테 아이패드 충전기까지 받아냈다.
쉬는 시간이 끝났다.
신재희는 자신의 사물함에 아이패드를 대충 집어넣었다.
'저러면 기스 생기는데...'
정수린도 아이패드를 산지 며칠 지나면 막 던지고 그럴 거였다.
하지만 어제 새로 산 것이어서, 정수린은 아끼고 있었다. 그런데 막 다뤄지니 짜증이 났다.
하지만 신재희가 무서워서 감히 뭐라고 말하지 못했다.
이 날도 정수린은 마감 근무조, 신재희는 미들 근무조였다. 오늘도 신재희가 정수린보다 먼저 퇴근할 거였다.
시간이 흘러 밤 10시. 정수린은 매장으로 다가갔다.
"바이저님. 혹시 신재희 갔어요?"
훈남 바이저한테 물어봤다.
그는 오늘 신재희한테 매장 일을 가르쳐주던 사람이었다.
"어. 왜?"
"아, 아니에요. 물어볼 게 있어서..."
'시발.'
(나) [퇴근함?]
정수린은 설마 싶은 마음에 신재희한테 톡을 보냈다. 기미정이 찾아왔던 이후, 전화번호를 교환했기에 톡 어플에도 자동으로 톡 친구가 된 상태였다.
신재희 [ㅇㅇ]
씹힐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신재희는 답톡을 해주었다.
(나) [내 아이패드는?]
신재희 [내가 가져감. 오늘 하루만 빌리자]
'아놔, 시발년...'
일진한테 물건 강탈을 한두 번 겪는 게 아니었다.
이렇게 하루만 빌리자, 하루만 빌리자 하면서 '대여기간'을 늘릴 것이고, 정수린이 포기해버리면 아예 자신이 가질 것이었다.
신재희 역시 그럴 것이 틀림없었다.
'개 같은 년놈들.'
남매가 쌍으로 지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