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화 〉과외 학생한테 따먹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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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수린은 침을 꼴깍 삼켰다. 그녀의 찐따 레이더가 경보를 울렸다. 신재희 앞에서 울렸던 것보다 훨씬 시끄럽게 울렸다.
신재희가 S급 일진이라면, 기미정은 SSS급 일진이었다.
기미정은 한 학년 높은 일진으로, 싸움에 미친년으로 유명했다. 실제 조폭 3명과 동시에 싸워서 이겼던 사건은 근방에 있는 학교 학생들이 다 알았다.
기미정은 바바리 코트 안쪽에 스웨터 원피스를 입었다. 하의실종패션처럼 원피스가 짧았다. 데이트를 하러 온 것처럼 화사한 화장까지 한 얼굴이었다.
'남친하고 영화보러 온 거면, 아무 일 없이 넘어가겠지? 그리고 나한테는 안 오겠지?'
매표소를 지키고 있는 것은 정수린과 신재희 둘이었다.
정수린의 소원처럼 기미정은 신재희 앞에 섰다.
"안녕하세요, 언니."
기미정은 정수린에게 눈길을 슬쩍 줬다.
옆에서 지켜보던 정수린은 기미정과 눈이 마주치자 얼른 고개를 정면으로 돌렸다.
"우리 재희. 찐따랑 붙어있으니까, 똑같이 찐따 같아보인다. 킥킥."
"..."
"응? 내 농담이 재미없었어?"
"흐흫... 히히힣..."
"흐흐흐. 웃겼지?"
"예."
'으아... 그 신재희 맞아? 완전...'
찐따 같았다.
일진 앞에서 기가 죽어서 몸을 바짝 낮추던 자신처럼 말이다.
신재희는 지금 '일진 앞에 찐따'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정수린의 머릿속에는, 신재희는 워낙 성격이 더러워서 일진 선배 앞이라도 고개를 떳떳이 세울 것 같았다. 전혀 그러지 않았다.
신재희도 역시 자기보다 무서운 존재 앞에서는 두려움에 떠는 인간이었던 것이다.
정수린은 일진 무리들을 보면서 가끔은 그들처럼 지낼 수 있으면 좋지 않을까 상상해본 적이 많았다. 학생들한테 무서움을 받으며, 빵셔틀도 시키고 삥도 뜯고, 찐따들끼리 서로 싸우게 만들어 주먹싸움을 벌이게 하고...
마치 신분제 시대의 귀족이 된 기분이 들지 않을까 싶었다. 그러면 학교 생활이 신날 것만 같았다. 하지만 지금의 신재희를 보니까 일진도 일진 나름의 그림자가 있구나 생각하게 됐다.
"놀랐잖아, 재희야. 헛소문이 퍼진 줄 알았는데 정말 영화관에서 알바했구나?"
'알바생 중에 성연중 졸업예정인 애들도 있었지. 걔들이 소문 퍼뜨렸나보네.'
정수린은 곁눈질하며 기미정과 신재희의 상황을 엿보았다.
기미정은 신재희의 가슴을 손끝으로 찌르고 있었다. 분홍색 가디건이 쑥쑥 들어갔다가 원형을 찾기를 반복했다.
'윽. 기분 개더럽겠다.'
여자가 여자의 젖가슴을 만지는 건 동성애적 성희롱이었다.
신재희는 입을 앙다물었지만, 화났는지 얼굴이 새빨갛게 붉혀져 있었다.
기미정은 히죽히죽 웃다가 코트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매표소 데스크에 올렸다. 비닐도 안 뜯은 새 것이었다. 던힐. 담배를 핀 적 없었던 정수린도 들어봐서 이름을 아는 담배였다.
기미정은 담배를 손끝으로 빙글빙글 돌리며 물었다.
"재희야. 무슨 영화가 재밌어? 추천 좀 해봐."
"아. 가 잘 나가고 있습니다."
고전 로맨스 명작을 리메이크한 것으로, 요즘 젊은 커플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았다. 방금 전 몰아닥쳤던 커플 손님들이 보러 온 게 바로 였다.
정수린은 신재희의 영화 추천이 적절하다고 생각했다. 지금 기미정도 애인이랑 데이트한 것 같기도 했으니.
"야. 재미없으면 환불해줄 거냐?"
"네?"
"네가 추천한 거 믿고 봤는데, 재미없으면 환불해줘야지. 상식 아니야?"
'그딴 상식이 어디 있어.'
정수린은 표정을 구겨지려고 했다. 하지만 참았다. 평생 찐따로 살아왔던지라 일진 앞에서의 표정관리를 성공해냈다.
"야. 안 그러냐?"
기미정이 자신한테 말을 걸기 전까진.
정수린은 놀란 표정으로 기미정을 바라봤다.
어버버.
정수린은 갑자기 SSS급 일진이 기습 질문을 해오자, 스턴에 걸리고 말았다.
말을 하는 방법을 까먹어버리고, 머릿속도 새하얘지며 생각 자체를 못하게 되었다.
"야. 네 동생 벙어리였냐?"
기미정이 시선이 신재희로 떠나서야 사고회로를 되찾을 수 있었다.
"..."
"시발. 야. 너 내 말 씹냐?"
"언니, 영화 안 볼 거면 그냥 가시죠."
'헉!'
신재희가 돌변했다. 여태껏 저자세로 나왔던 걸 내던져버리고, 일진 신재희가 되었다.
'기미정, 볼라 사이코년이라고 들었는데... 나중에 어쩌려고...'
신재희를 영화관 알바에 꽂아달라며 말했던, 신재준의 말이 떠올랐다.
'진짜 일진 그만둘 생각에 막 나가는 건가?'
"하... 시발. 너 생리하냐? 오늘 볼라 까칠하네."
"..."
"흐음. 여기가 CCTV도 다 있고 해서, 까부는 거냐?"
"까부는 거 아닙니다."
"맞는데? 까부는 거 아니면 당장 나 따라와."
"네."
기미정은 데스크에 올려두고 있던 담배를 다시 코트 주머니 속에 넣고 걸음을 먼저 옮겼다.
신재희는 정수린에게 말했다.
"나 화장실 갔다온다고 해."
'지, 지금 따라가면 볼라 처 맞는 거 아니야?'
신재희는 아직 근무시간이 3시간 정도 남아있었다. 얻어맞고 되돌아와서 일을 재개할 생각일까?
어쩌면 기미정을 따라간 뒤, 다신 안 돌아올지도 모르겠다.
오늘의 신재희와 많은 말을 했다. 30분 가까이 티케팅 업무를 알려줬으니 말이다.
또한 신재희가 실제 손님들을 응대할 때, 막히는 일이 생기면 정수린에게 헬프를 쳤다. 신재희는 도움을 받을 때마다 꼬박꼬박 말했다. '고맙다'고.
평소에 괴롭히던 일진이 조금이라도 친하게 굴거나, 호감을 보여주면 찐따는 매우 기분이 들뜨게 된다. 엔돌핀 분출이 강하게 일어나고, 괜히 나대게 되어버린다.
정수린은 지금 그런 상태였다.
신재희의 팔을 붙잡았다.
"왜?"
신재희가 미간을 찌푸린채 바라봤고, 기미정 역시 눈에 힘을 줘서 정수린을 노려봤다.
정수린은 이곳이 CCTV 투성이고, 성인 여성 매니저가 이 근처 검표하는 자리에 서있는 걸 알았다.
문명사회가 자신을 지켜줄 것이라 생각되니 용기 백 배 상태였다.
"따라갈 필요있어?"
"뭐?"
"너 어차피 일진 그만둘 거라며. 왜 따라가?"
정수린의 당돌한 발언에 신재희는 뭐라고 말하려다가...
피식했다.
"그러네."
기미정은 콧방귀를 끼다가 다시 데스크로 다가왔다. 주머니 속 담배를 꺼내다가 신재희에게 포물선을 그리듯 던졌다.
신재희는 그 담배를 붙잡았다.
"신재희. 일진회에서 나갈 거라고?"
"네."
"그거 선불이다."
"네?"
"너한테 담배 한 갑 주면, 신재준 따먹게 해준다며?"
그건 학교에서 퍼져있는 악성 루머 중 하나였다.
"무슨 개소리..."
"새학기에는 내가 첫 손님이겠네?"
기미정은 혀를 내밀었다. 그녀는 뱀처럼 기다란 혀를 가지고 있어 턱에 닿을 정도였다.
그런 혀를 현란하게 출렁이게 하더니 다시 입을 집어넣어 꿀꺽 삼켰다.
"첫 정액이니까 볼라 진하겠네. 맛있겠다."
"이 개시발년이!"
신재희가 펄쩍 뛰어서 데스크 위로 다리를 올렸다. 타넘어가서 기미정과 한 판 싸울 기세였다.
신재희의 욕설은 컸고, 신재희의 거친 행동은 눈에 띄었다. 검표 자리에 서있던 매니저가 달려오기 시작했다.
이미 신재희는 사고를 터뜨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정수린은 신재희가 더 큰 사고를 터뜨리는 걸 막기 위하여, 그녀의 허리를 붙잡아 데스크 너머로 못 넘게 만들었다.
신재희는 손을 뻗었지만, 기미정은 그것에 잡히지 않으려고 몸을 뒤로 뺐다.
얄미운 표정으로 거들먹거렸다.
"허. 손님을 때리게? 이거 소문나서 너희 오빠 찾는 손님, 뚝 끊기면 어쩌려고 그러냐?"
"이 개 시발년아!!!"
"무슨 일입니까!"
매니저가 분노의 외침을 내뱉으며 도착했다.
그녀는 이 상황을 가장 잘 설명해줄만한 정수린을 쳐다봤다.
정수린은 기미정을 노려보며 말했다.
"업무방해죄로 신고합니다? 엉뚱한 시비 걸지 말고 가세요."
기미정을 영화관에서 쫓아내려는 말을.
매니저는 정수린의 말을 전적으로 믿기로 했다. 사장 딸이니까. 그리고 매니저 역시 신재희가 손님과 너무 길게 이야기하는 게 이상해서 계속 지켜보고 있었다. 대화는 듣지 못했지만, 분위기가 '진상 손님'한테 당하는 분위기였다.
매니저가 기미정에게 말했다.
"손님. 더 난동을 부리면 경찰을 부를 수밖에 없습니다."
"하! 시발! 볼라 어처구니가 없네. 뭔 영화관이 손님을 패려고 하질 않나, 다짜고짜 쫓아내려고 하냐."
기미정은 가래침을 보란 듯이 로비 바닥에 뱉었다. 그리고 자신을 쳐다보는 직원들에게 중지를 세워보였다.
"더러워서 꺼져줄게, 시발년들아."
기미정은 마지막으로 신재희와 정수린을 노려봤다.
두 손가락을 자신의 눈에 댄 뒤, 신재희와 정수린을 향해 찔러보였다.
워커화가 성난 소리를 내며 멀어졌다.
신재희는 데스크에서 도로 내려왔다.
매니저가 다가와 물었다.
"무슨 일이야?"
"죄송합니다. 아는 사람이 시비를 걸어와서 참지 못했습니다."
신재희는 고개를 숙여 사죄했다.
정수린은 그런 신재희를 다시 봤다.
매니저는 한숨을 내쉬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손님이 없었으니까 다행이네. 그래도 재희야. 네가 어떻게 처리하지 못할 것 같은 진상이 오면 지금처럼 싸우려고 하지 말고, 나나 바이저들 호출해. 알았지?"
"넵."
"수린이는 친구, 잘 말렸어."
"네, 히히..."
매니저가 검표 자리로 되돌아갔다. 그 사단을 지켜보던 청소 중이던 알바생이나 매점을 지키던 알바생들은 서로 속닥거렸다.
정수린은 신재희를 바라봤다가, 검정스타킹의 허벅지 안쪽이 찢어진 걸 발견했다. 데스크에 올라가려고 하다가 어디 걸려서 찢겨진 모양이었다.
"재희야. 스타킹 올 나갔다."
신재희는 다리를 오자로 벌려 스타킹 상태를 확인했다.
"아, 시발."
"나 3개짜리 사서 남은 거 있는데... 하나 줄까?"
"그러면 고맙고."
"응, 있다가 쉬는 시간에 줄게."
"야."
"응?"
"개학한 다음에 어쩌려고 그러냐?"
정수린은 뒤늦게 학교 생활이 떠올렸다. 일진 중에 가장 싸움을 잘하는 기미정한테 찍혀버렸다. 그것도 단단히.
일진회를 빠져나오려고 하는 신재희의 편을 들어서 말이다.
매일 책상이 없어지고, 가방이 오수에 빠진 채로 발견되고, 학교 뒷산에 불려가 두들겨 맞고. 돈이 많은 까닭에 매일 돈을 뜯기고...
그런 미래가 그려졌다.
"아... 전학 갈까..."
그런 정수린의 팔을 신재희가 툭 쳤다.
"야. 해보지도 않고 도망갈 생각부터 하냐?"
"뭐?"
"아니다... 시발. 네 인생인데 네가 알아서 해라. 어쨌든 망설이고 있었는데, 네 덕분에 알리게 됐네."
"뭐를? 일진 관두겠다는 거?"
"어."
"아, 그, 미안..."
"뭐가."
"괜히 나대서..."
"됐어. 어차피 할 말이었고. 싸움 말려준 것도 고맙다."
"어? 응..."
신재희가 정수린의 등을 퍽 쳤다.
"새끼. 아까는 간댕이 부어올랐으면서, 다시 찐따로 되돌아왔네."
"하하..."
정수린은 학교에서 불행을 떠올리는 것보다, 더 먼 미래를 떠올려보기로 했다.
방금 일로 신재희에게 큰 호감을 산 것 같았다.
신재준과 미래에 결혼한다면 신재희가 '아가씨'가 될 건데, 그런 신재희랑 사이가 좋아진다면 쾌적한 혼인 생활을 누릴 수 있을 거였다.
"야. 정수린. 아까 알려준 것 중에 포인트 카드 여러 개 동시 사용했을 때 적용하는 방식이 헷갈린데. 다시 좀 알려줘."
'헉. 신재희가 내 이름을 불러줬어...'
찐따로 오래 지냈기에, 일진 같은 신재희가 친하게 굴자 기분이 좋아져버렸다. 정수린은 웃으며 했던 설명을 또 한 번 들려주었다.
"아, 그게 말이지."
* * *
다음날인 오늘, 오빠와의 과외가 잡혔다. 이번에는 카페나 도서관이 아닌 집에서 받겠다고 했다.
"재준이한테 선물로 주겠다고?"
아빠는 심플한 디자인의 검은색 백팩을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어. 오빠 가방 헤진 게 안타깝더라고. 그리고 나도 머리띠 선물 받았으니까."
정수린은 앞머리를 까고 검정색 머리띠로 고정시켜두었다.
집에서나 아니면 오빠와의 과외 시간 때에는 이렇게 앞머리카락을 까고 지냈다.
"흐음. 이 가방, 좀 싼티 나지 않아?"
"오빠가 학생이잖아. 학생다운 걸 매고 다녀야지. 그리고 너무 비싸면 오빠가 부담스러워할 수도 있으니까."
30만 원 밖에 안 되었다. 이 정도 선물이면 부담스러워하지 않고 받아줄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긴 하겠다. 그럼 아빠는 하늘이네 아빠랑 갤러리 좀 다녀올게."
"넵. 다녀오세요."
깔끔한 정장을 차려입은 아빠가 집을 떠났다.
집에 혼자 남게 된 정수린은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전신거울 앞에 서서 이리 저리 살폈다.
차림은 하얀 원피스. 신재준이 처음 과외 면접을 보러온 날 입었던 그것이었다.
치마를 들추자 검정색의 레이스 팬티가 보였다. 대비효과로 인해 창백한 피부가 더욱 희게 보이게 해주었다.
팬티 안에 손가락을 넣어, 보지를 훑은 뒤, 코에 대고 냄새를 맡아봤다.
약간 꼬숩한 냄새가 났지만 심하지는 않았다. 외음부 클렌저로 빡빡 닦은 덕분이었다.
'못 참겠다... 고백해야지. 신재희하고도 친해졌고, 마침 아빠도 집을 비웠고... 이거 완전, 나랑 오빠랑 빨리 사귀라는 운명의 뜻 같잖아.'
오늘 고백하면 분명 오빠는 받아줄 것이었다.
또한 밀폐된 방에 단둘이라는 상황이라서 자신이 좀 자빠뜨리면...
자신의 보지를 오빠의 입에 물릴 수 있을 지도 몰랐다.
"히힣... 아, 맞다."
오늘 도착했던 택배 상자 하나를 뜯었다.
최신 아이패드. 정수린, 본인이 쓰려고 산 것이었다.
'흐음... 가방이 겨우 30만 원짜리 선물이라 오빠가 실망하면 어쩌지? 쩝. 그냥 이것도 선물하자. 오빠가 부담스러워 하면, '빌려주겠다'고 하면 되겠지.'
언박싱도 안 한 아이패드를 가방에 담았다. 쏙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