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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화 〉과외 학생한테 따먹힘 (21/201)



〈 21화 〉과외 학생한테 따먹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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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웜."
"왜. 아, 시발. 왜 틀리는데."
"리듬게임 재밌냐?"
"몰라. 개 어려워서 때려치고 싶어."


신재희는 오빠의 알바를 하라는 성화에 엄지혜의 원룸에 피신해있었다.


엄지혜의 별명은 '웜'이었는데, 초등학교 영어 시간 때, '벌레'가 영어로 worm이라는 걸 배운 후부터 그렇게 불려졌다.


새벽 2시. 신재희는 엄지혜의 하나뿐인 컴퓨터를 빼앗은 채 롤을 했고, 엄지혜는 아이패드로 일본 가상의 아이돌들이 춤추는 리듬게임을 했다.

신재희는 승급전이 잡혔다. 이번에는 꼭 골드를 탈출하고 싶었다. 막상 승급전을 돌리려니까 최상의 컨디션이 아니었다. 새벽이기도 했고.

경험상, 새벽에 승급전이면 적팀에 빡고수가 있는 경우가 허다했다. 반면에, 같은 팀에는 '엌ㅋㅋ 저새끼 승급전이다. 던짐' 이런 트롤이 있기 마련이었다.


낮에도 저런 트롤이 많았지만, 그래도 덩달아 상대팀에도 저런 트롤이 있어서 균형이 이루어지는 편이었다.


'낮되면 돌려야겠다.'

브론즈 등급인 부계정으로 양학이나  생각으로 로그아웃을 했다. 게임이 다시 켜지는 동안 엄지혜가 하는 리듬게임을 쳐다봤다.


쉬워 보이는데 자꾸 노트를 놓치는 꼴이 한심해보였다.


"개 못하네."
"아니, 개 어렵거든?"
"줘 봐. 내가 풀콤 보여준다."

신재희는 어렸을  리듬게임을 팠던 적이 있었다. 이것처럼 핸드폰을 터치하는 리듬게임은 아니고, 컴퓨터 키보드로 하는 것이었지만 하는 방식이 건반형이라 똑같았다.

아이패드를 자신의 앞으로 끌고와 노래를 고르는데 자꾸 일본 노래가 흘러나왔다.


신재희는 혐오스럽다는 듯 말했다.


"씹덕오타쿠 새끼."
"아, 시발. 애니는 안 본다고."


경쾌한 비트가 나오는 곡을 골라 게임을 시작했다. 투둑투둑. 컴퓨터 키보드를 두드리듯, 아이패드를 터치했다.

노트가 눈에 다 보이는데 내려오는 속도가 너무 느렸다. 그러다 보니 자꾸 미스가 났다.


"아씨. 속도 너무 낮아."
"허접새끼."
"아놔... 속도가 문제라고. 슬라이드는 뭔데."


컴퓨터 리듬게임에는 없던 슬라이드 노트에 불편함을 느꼈다. 그렇지만 크게 어려움을 줄 정도는 아니었다.


'이 정도 난이도면 풀콤 껌인데.'


신재희는 그 판이 끝나고 엄지혜에게 속도를 높여달라고 했다. 옵션창에 들어가보니 죄다 일본어라서 뭐가 뭔지 몰랐던 것이었다.


속도를 올린 다음판에서 풀콤을 치고 자존심을 지켰다.

"이 쉑. 리겜 잘 하누. 그런데... 이제 누가 씹덕오타쿠지?"
"뭔 개소리야."
"얼마나 씹덕겜을 해댔으면 이렇게 잘 하냐고."
"컴퓨터 리겜으로 키운 실력이거든? 아씨, 오타쿠 취급 받으니까 개빡치네."
"나도 그랬거든, 시방새야."


신재희는 아이패드를 돌려주고 다시 롤을 하기 시작했다. 브론즈를 상대로 양학을 했다. 상대방이 '게임 봊 같이 하네'라는 말을 전체 채팅으로 때리자 기분이 좋아졌다. 그 말은 게임을  한다는 찬사나 다름없었다.


옆에서 씹덕 일본 노래가 들리고, 박자에 맞춰서 탬버린 소리가 났다.

"웜."
"뭐 또. 아씨, 네가 말 걸어서 미스 떴잖아."
"나 일진회에서 나가려고."
"지랄."
"왜 지랄인데."
"언니들이 나가게 냅둘  같냐? 아예 전학을 가라."


신재희는 엄지혜의 툴툴거리는 듯한 말에서 자신을 걱정하는 게 느껴졌다.

"도망 안 갈 거."
"똥이 무서워서 피하냐. 더러워서 피하지."
"너도 같이 나오쉴?"
"지랄하지 마. 나는 지금 생활 만족해."

엄지혜도 일진이었다. 신재희처럼 공부도 포기했고, 많은 학생을 괴롭히며 원망을 사며, 일진 선배들한테 바짝 엎드려지내야 하는 일진.

"시발... 내가 너 꼬셨잖아. 그게 미안해서 그러지."


엄지혜가 일진회 들어가게 된 건 절친이었던 신재희의 꼬드김이 컸다.

"시발. 내가 들어가기로 선택해서 들어간 거니까 신경 끄쇼."
"니 봊대로 해라."
"아니면 너 설마 혼자 나가는 거 무서워서, 나 꼬드기는 거냐?"
"아, 시발. 내가 그런 찐따로 보이냐."


[펜타킬!]
[팅! 챠르르르르! 팅팅팅팅!]
[전장의 지배자.]
[팅팅팅! 챠르르! 챠르르!]

스피커에서 나오는 롤 사운드와 핸드폰에서 나오는 리듬게임 노트음이 크게 퍼졌다.


양옆 원룸에 세들어 사는 이들도 학생이었다. 그들은 방음이   되는 벽 때문에 수면방해를 받고 있을 터였다. 하지만 일진인 엄지혜와 신재희가 무서워서 참고만 있을 거였다.


"웜. 나 알바해볼 생각인데, 영화관 알바 해밨냐?"
"너 죽을 때 됐냐?"
"뭐?"
"갑자기  하는 짓을 해대니까 무서울 지경인데."
"나도  이렇게 됐는지 모르겠다, 시발."

가슴 마사지.


알바를 한다면 오빠가 가슴 마사지 해주겠다는 말에 홀려서는 알바를 하겠다고 선언해버렸다.

"해본 적 없는데. 영화관 알바 후기 같은 거, 인터넷에서 찾아보던가."
"벌레 아니랄까봐. 도움이  돼요."
"뉘에."

신재희는 영화관 스태프 알바 후기를 찾아보았다. 검표, 티켓판매, 매점 관리, 상영관 청소 등을 하는 알바였다. 심한 진상 손님도 만날 수 있지만, 그런 것은 대부분 바이저나 매니저 직분이 가진 상사가 처리해주는 모양이었다.

'개 쉬워보이네. 아, 근데 하기 싫다.'


공부를 하면 뭔가 지는 느낌이 드는 것처럼, 힘들게 일하며 돈을 버는 것 역시 뭔가에 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 '뭔가'는 도대체 무엇일까. 생각해보니 정답을 알아챌 수 있었다.

옛날처럼 집안이 부유했으면 공부와 일을 안 해도 평생 놀고 먹고 살 수 있었을 거였다.


금수저에서 흙수저로 추락해버렸다. 신재희는 그 현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거였다.


공부를 하면, 일을 하면 그 비참한 현실을 인정하는 게 되는 것 같아 여태껏 하지 않았던 거였다.

'이대로 있으면... 기미정 같은 년보다 못한 병신이 돼.'

기미정은 일진이면서 공부도 잘하는 편이었다. 그리고 집안도 부족함 없이 사는 편이었다.

기미정은 자신의 어머니가 운영하는 차량 정비소에 취직할 것이다. 그리고 그 정비소의 사장이 되어 그녀와 그녀 자식들까지도 부족함 없이 살 거였다. 큰 굴곡이 없다면 말이다.


반면에 자신은 어떤가. 공부도 안 하지, 가족끼리 물려줄 사업체도 없지, 기술도 없었다.

이대로 가다간, 힘들게 일하는 언니와  언니를 내조하는 오빠의 생피만 빨아먹는 '기생수'가 될 것이 분명했다.

기초생활수급자가 아니라 기생(寄生)하는 짐승(獸)이.

"한다. 시발."
"뭘? 알바를?"
"어. 시발. 그리고 오빠한테 알려달라고 해서 공부도 할 거야."
"야... 자살할 때는 하드디스크 꼭 지워라."
"뭔 개소리야, 씨."
"자살할 때는 사람이 착해진대. 남겨진 사람한테 좋은 인상 심어주고 떠나려고. 아, 그래도 재준이 오빠가 공부 알려주면 할 맛은 나겠는데..."
"지랄. 우리 오빠 넘보지 마라."
"브라콤 새끼."


신재희가 어렸을 적부터  브라콤이라는 사실은 절친인 엄지혜만 알고 있었다.


다른 학생들과 교사들, 심지어 신재준 본인마저 신재희가 브라콤이라는 걸 모르고 있었다.

"웜. 나 그 아이패드 하루만 빌려주면  되냐? 아까  씹덕 리듬게임, 할만하네."
"네 핸드폰으로 해.  게임 지금 이벤트 기간이라 달려야 함."
"뭔 리겜이 이벤트가 있냐. 근데 핸드폰으로도 돼?"
"어."


엄지혜는 이벤트 점수 배수가 걸리고, 가장 시간이 짧아 이벤트 점수를 얻기 효율적인 곡만 반복하고 있었다.

신재희가 낼름 가져가버리면, 이렇게 생고생을 하던 것이 허무해질  있었다.

"맞다, 시발. 나 자고 일어났을 때, 가져가기만 해봐라."

신재희는 엄지혜의 물건을 자기 것인양 슬쩍 가져가, 사용해먹곤 슬그머니 돌려주곤 했다.


엄지혜는 그래도 참아줬는데, 자신도 신재희의 집에 놀러갈 때마다 신재준의 필기구 따위를 훔쳤기 때문이었다.

엄지혜도 다른 여자애들처럼 신재준에게 빠져있었다.



* * *


"할게."
"정말?"

다음날 집에 가서 오빠한테 일하겠다고 알렸다. 오빠는 믿기지 않은지 눈을 크게 떴다.


곧 대견하다는 표정을 짓더니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아, 어렸을 때로 돌아온 것 같았다. 자주 오빠가 쓰다듬어주던 그 시절로.


* * *



"네, 오빠."


정수린은 공부하던 중에 신재준의 전화를 받았다.

오빠가 내준 숙제를 완벽하게 수행해내서, 오빠한테 칭찬을 받고 싶었다.

[하늘이한테 들었는데.  방학 때마다 영화관 알바한다며?]
"어... 네. 왜요?"

오빠가  그걸 물어보는지 짐작이 잘 안 됐다. 그러다가 번뜩인 생각에 정수린을 기대하기 시작했다.


'나랑 영화관 알바 같이 하고 싶어서 그러나?'

과외 알바할 때뿐만 아니라, 영화관 알바도 같이 하면 행복할 것이었다.

정수린의 어머니는 돈은 쉽게 벌 수 없다는 걸 알려주겠다면서, 방학마다 영화관 알바를 시켰다. 하지 않으면 막대한 용돈이 끊기기 때문에 할 수 없이 수행해왔다.

매 방학마다 하기 싫었던 알바가 이번엔 기대가 되었다.

영화관 알바는 적절한 성비가 모였다. 알바생끼리 썸도 많이 일어나고, 사귀는 사람도 많이 생겼다. 모태솔로였던 정수린은 그 꼬라지를 볼 때마다 배알이 꼬였는데, 이번엔 다른 여자들의 배알을 꼬일 수 있게  것이란 기대감에 찼다.


영화관 창고나 비상구 계단에서, 다른 손님이나 다른 직원 몰래 오빠와 키스를 하는 상황이 저절로 그러졌다.


[재희 좀 알바시키려는데... 혹시 네 친구로서 알바 꽂아줄 수 없을까?]


하지만  기대와 꿈은 박살났다.

"..."

정수린은 잔뜩 찡그리며, 시뮬레이션을 돌렸다.

제대로 일하지 않는 신재희.

자신을 괴롭히며, 이따금 삥도 뜯는 신재희.


신재희가 진상 손님하고 싸운 까닭에, 그 신재희를 '친구'로 꽂은 자신한테도 꽂히는 좋지 않은 시선들...


[부탁할게? 응? 재희가 이젠 일진 그만두겠대. 착하게 살려고 마음 먹었어.]
"어? 정말요?"


그 미친 양아치가? 믿기진 않았지만, 오빠가 거짓말할 사람도 아닐 거 같으니 믿기로 했다.


[응. 그래서 알바도 해보겠다는데, 방학기간 시작된지 좀 지난 터라 알바 자리가 잘 없나봐. 근데 영화관 알바는 해보고 싶대.]
"어... 그런데 저한테 말씀하셔도... 면접은 봐야할 걸요? 웬만하면  붙을 거지만요. 영화관 알바하는 게 학생들이 대부분이라 쉽게 관두고 그래요. 지금도 공고 떴을 걸요. 어디 보자."


정수린은 컴퓨터를 켜서 알바 공고 사이트에 들어갔다. 성연CGV를 검색하자 알바생 상시 채용 공고가 떠있었다.


[좀 더 확실한 게 좋을 것 같아서. 만에 하나 떨어질 수도 있잖아. 재희가 일진으로 유명하니까...]


영화관 알바를 예비 고1부터 뽑았다.

정수린은 사장 딸이라는 특수함에 중1 때부터 알바했던 거였다.

용돈이 필요한 예비 고1들이 영화관 알바를 하고 있을 수도 있었다.


성연중 졸업 예정인 애들이 신재희가 일진 짱이라는 걸 바이저나 매니저에 알릴 경우, 신재희의 채용이 거부될 가능성이 분명 있었다.

신재희를 '사장 딸의 친구'로서 채용하는 거라면 바이저나 매니저는 거의 100% 채용해줄 것이었다.

'신재희가 내 아래에 들어가는  마음에 들긴 하네...'

[수린아? 어떻게 안 될까?]
"으음..."
[안 돼?]
"하아... 저희 어머니한테 말은 해볼게요."

아마 어머니는 허락할 게 뻔했다. '친구'는 돈으로 측정할  없는 재산이라고 말하는 어머니였다. '친구'임을 들먹이면 웃으며 같이 일하라고 할 것이었다.


[고마워요, 제자님.]
"히힣... 네..."

오빠의 존대말을 들을  있어서 기분 좋아졌다.





* *



주말이 지나고 월요일이 되었다. 정수린은 그토록 기다리던 오빠와의 과외시간을 가졌다.


영화관 마감 근무는 오후 5시부터였다.


그 근무시간 때문에 오빠와의 과외시간을 오후 4시에서 오후 2시로 앞당기게 됐다.

정수린은 영화관에 도착해 탈의실로 들어와 유니폼으로 갈아입었다. 유니폼은 정장 블라우스와 치마, 핑크색 가디건이었다.

옆에서  알바생이 환복하며 얘기를 나누었다.

"야, 봤냐? 신재희가 진짜 들어왔더라?"
"설마 알바장에서도 지랄하진 않겠지?"
"시발. 여기가 학교도 아닌데. 걔가 뭐  수 있겠어?"


정수린은 그 알바생들과는 적당히 눈 인사를 나누고 나왔다.


사무실이나 현장에 나가서 일하는 바이저와 매니저하고는 좀 길게 인사를 나눴다.

'매니저님은 그대론데, 바이저들은  바뀌었네.'

저번 여름방학 이후 처음 온 성연CGV였다. 매니저는 몇 년째 계속 일하지만, 슈퍼바이저들은 금방 관둬버려 얼굴이 바뀌었다. 하는 일은 많은데 워낙 박봉이다 보니 그랬다.

정수린이 영화관에서 하는 일은 다른 알바생과 크게 다를바 없었다.


다만 '사장 딸'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매니저와 바이저들이 정수린을 조심스럽게 대했다.


지금 정수린에게 배정된 파트는 매장.

손님이 주문한 팝콘과 콜라를 대령하고, 손님이 없어지자 멍하니 영화관 로비를 바라봤다.

옆에서 같이 매장을 지키던 20대 남자 바이저가 물었다.

"친구랑 인사는 했어?"
"친구요? 아, 신재희요? 아직  봤네요."

신재준의 부탁을 해오고, 어머니한테 '친구 한 명과 같이 알바하고 싶다'고 운을 띄운 건 토요일이었다. 어머니는 좋아하시며 그러라고 했다.

신재희는 일요일에 면접을 봤다. 그리고 붙었다. 월요일인 오늘부터 정식 출근을 했을 거였다.


정수린이야 당연히 면접더 보지 않고 곧바로 정해진 날부터 출근하면 되었다.

사장인 어머니의 입김이 역시 영화관 정직원들에게 확실히 들어갔던 것인지, 바이저는 신재희를 '정수린의 친구'로 알고 있었다.


"걔는 지금 뭐해요?"
"저기 있네."


'오... 신재희 진짜 일하잖아?'


신재희의 폭유에 맞는 유니폼이 없었나 보다. 블라우스의 가슴가 터질 듯 부풀어 있었고, 큼지막한 유두가 모양 그대로 튀어나와있었다. 핑크색 가디건은 단추는 잠그지 않고 있었다.


대형 청소기를 돌리며 영화 로비 구석부터 청소 중이었다.

그리고 신발은...


'내 농구화 아직도 신고 있네. 시발.'

신재희의 얼굴은 엄청 뚱한 상태였다. 뭐 씹은 얼굴이었는데 알바가 적성에 맞지 않은 듯했다.

"바이저님, 잠깐 신재희한테 인사 좀 하고 와도 될까요?"
"네, 그러세요. 손님도 없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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