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화 〉과외 학생한테 따먹힘
정수린은 마른 입술을 핥짝였다. 셔츠 위로 오빠의 유두를 핥아보고 싶었다.
오빠는 시험지를 내려놓았다. 그의 시선이 다가오자 정수린은 시선을 화들짝 돌렸다. 오빠 가슴께를 훔쳐보고 있다는 걸 들켜선 안 됐다.
정수린은 어느 여름날, 길가에서 만난 나시티의 미남의 가슴께를 무심코 빤히 쳐다본 적이 있었다.
그 미남은 정수린을 경멸적인 눈으로 바라보며 지나갔다. 그때 경험이 아직도 트라우마처럼 남아있었다.
"문제 푸느라 수고했고. 이거 기분 나쁘게 안 들었으면 좋겠는데, 넌 중1 수준부터 차근차근 배워야 해. 수학은 암기과목이 아니라서 밑에서부터 차근차근 익혀나가야 되거든."
"네, 오빠. 오빠가 시키는 대로 할게요."
"그래? 착하네, 수린이."
오빠가 미소를 지으면서 손을 뻗어왔다. 작은 키답지 않게 커다란 손으로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아, 기분 좋아... 연상남은 이런 게 좋구나...'
정수린은 만약 데이트를 한다면, 자신이 리드하는 것에 자신이 없었다.
언제나 무리의 일원으로 속한 상태에서 아무런 책임감 없이, 아무런 부담감 없이 시키는 대로만 하는 게 속 편했다.
그것은 연애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동갑이나 자신보다 연하와 사귀면 여자인 자신이 리드를 해야 할 터였다.
다행히 신재준은 연상이었다. 1살 차이지만 신재준이 오빠긴 오빠였다. 데이트할 때 그가 리드해줄 것이라고 생각하니, 벌써부터 마음이 편안해졌다.
정수린은 히죽 변태 같은 웃음을 만들어버렸다. 오빠가 순간 흠칫했다.
'내 웃음에 순간 반한 건가? 흐흫...'
"풀이를 해볼까?"
오빠는 시험지를 책상에 내려놓고 틀린 문제부터 풀이를 해주기 시작했다.
"4번 문제부터 풀어볼까. x절편 구하는 방법은 y=0일 때, x값을 구하는 거야. y절편은 그 반대고."
"아, 절편이 그거였구나. 그럼 개쉬운 거였네요."
정수린은 절편의 개념을 알게 되자 오빠가 풀이를 해내기 전에, 문제를 풀고 정답을 알아냈다.
'칭찬해줘, 오빠.'
오빠한테 머리를 들이밀며 쓰다듬기를 구걸했다.
"정답이야. 잘 했어."
정수린은 그의 쓰다듬기를 받으며 히죽히죽 거렸다.
/ / /
"아, 시간 다 됐네."
"예? 벌써요?"
"응."
내 말에 정수린은 깜짝 놀랐다. 그리고 탁상시계로 확인해봤다. 과외를 시작한지 90분이 넘었음을 이 소녀도 알게 되었을 것이었다.
"오빠, 좀 더 가르쳐주시면 안 돼요? 저 지금 수학에 재미 붙으려고 하는데..."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날 올려다보는데 깜찍해서 볼을 꼬집어주고 싶었다.
눈을 찌를 듯 내려오는 앞 머리카락과 커다란 안경이 좀 에러긴 하지만.
갑자기 신재희가 떠올랐다. 정수린이 신재희와 같은 나였다. 신재희가 이렇게 공부를 좋아하는 여동생이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신재희는 시험을 빨리 끝내는데 1위을 한다는 것을 신재준한테 자랑해댔다.
OMR 카드를 받자마자 이름을 적고, 학년 반 번호를 찍고, 해당 시험의 문항수 만큼 번호 찍기를 해버리는 것이다. 그렇게 전교에서 가장 빠르게 시험을 끝낸다는 게 신재희의 자랑거리였다.
'신재희에 대해서는 생각할수록 한숨만 나오는구만.'
'너 잘못했지? 회초리로 날 때려'를 시전해서 갱생을 성공할 수 있을까? 만약 성공한다면 공부부터 시키고 싶었다.
인생을 행복하게 살아가려면 좋은 대학교 졸업장은 거의 필수가 되어버린 한국 사회였다.
"공부할 때, 휴식도 중요해. 그리고 오늘 너희 아버님한테 나 좀 잘 말해줘. 그래야 오늘처럼 과외 계속 할 수 있을 테니까."
"넵, 저만 믿으세요! 저도 오빠가 알려줘서 수학이 재미있어졌어요!"
"고마워, 수린아."
정수린의 머리를 또 쓰다듬었다.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손가락 사이로 감겨와 기분이 좋았다.
머리 쓰다듬는 게 이번 과외하면서 습관이 되었다. 그녀가 잘 내 말을 잘 알아먹을 때마다 쓰다듬어줬는데, 그때마다 정수린은 히죽 웃음을 지었다.
소녀의 싱그러운 미소 같다기 보다, 좀 음흉한 구석이 느껴지긴 했다만...
오늘은 수학에 재미 붙이라고 개념문제의 풀이만 일러주고, 연습문제를 몇 개 풀게 했다.
변형 문제나 응용 문제에 들어가면 정수린의 작은 머리통이 터져나갈 것이었다. 수학에 재미를 붙이긴커녕 멀리하게 될 여지가 컸다.
'과외 초반은 중학교 수학 개념부터 배우게 하고. 그 다음부터 중학교 수학 변형/응용 문제 풀게 해야지. 고1 수학 예습은 나중에. 수포자였으니까 변형/응용 문제는 좀 버거워 할 테니... 당근을 제시해줄까? 정답을 맞추는 보상으로 포옹이나 뽀뽀를 해준다고 해서...'
그런 식으로 공부에 열의를 더할 겸, 스킨십을 허락하며 소녀를 발정나도록 하는 거다.
"그... 오빠."
"응?"
"과외 이후에는 뭐하세요? 겨울방학이잖아요."
과외를 받는 내내 정수린은 내 몸에 관심있는 티를 팍팍 냈다.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넋이 나가기도 했다. 내 손을 만져보고 싶은지, 풀이가 아니라 내 손가락만 쳐다보기도 했다. 음흉하게 내 가슴께를 흘낏거리기도 하고.
나랑 계속 함께 이고 싶은 모양이었다.
"집안일해야 돼."
"네?"
"집청소도 하고, 빨래도 돌리고, 설거지도 하고, 장도 봐오고..."
"바, 바쁘시겠네요."
"밀리면 나중에 하기 힘드니까."
"아! 가끔은 카페나 도서관 같은데서 과외하는 건 어떨까요?"
"음..."
정수린은 나와 데이트 분위기를 맛보고 싶은 걸까? 하지만 밀폐된 방이 아니면 애한테 따먹히기 힘들 것 같은데...
'아니. 공략을 해보자면 여러 상황이 만들어지는 게 좋겠지?'
내 대답이 늦자 거부당할 줄 알았는지, 정수린이 덧붙였다.
"노, 농담이었어요, 오빠. 히히..."
"아니... 해줄까?"
"네!?"
잠깐. 그런데 이러면 과외 알바가 갑자기 유사 데이트 알바가 되어버리는 거 아니냐?
나야 정수린을 꼬실 수 있는 상황이 다양해질 테니 땡큐긴 한데... '신재준'이 정수린의 제안을 들었다면 기분 나빠할 수도 있었겠다.
정수린, 본인은 모르는 모양이지만... 과외하는 내내,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소녀는 사춘기의 음습함이 뿜어대고 있었다.
'받아들일 생각이긴 한데, 좀 싫은 척 좀 내보자.'
표정을 굳히고 정수린을 쳐다봤다.
지금부터 잡을 컨셉은 '집이 너무 가난해서 어쩔 수 없이 과외 학생과 유사 데이트도 해주는 과외 선생님'이었다.
"백색소음이라고 해서, 파도소리나 빗소리, 아니면 카페에서 나는 불규칙적인 소리가 있는데. 그걸 들으면서 공부하는 사람도 많아. 그것 말고도 집에서는 공부 잘 못해서 카페나 독서실을 찾아가 공부하는 경우도 많고. 너한테 그게 맞으면 좋겠네."
"다음번 과외는 그럼 카페에서..."
"수린아. 당장은 어렵지 않을까? 일단은 과외 계속 쭉 할 수 있는지도 아직 결정난 게 아니잖아. 계속 쭉 하게 너희 아버님이 일단 오케이 하셔야, 카페에서의 과외를 하든 말든 할 것 같은데... 그 카페에서의 과외도 아버님한테 또 따로 허락 받아야할 거고."
"오빠, 걱정마세요. 제가 아빠 잘 설득할게요."
"그럼 제자님, 잘 부탁드려요."
"네, 네! 선생님! 저만 믿어요!"
* * *
"수린아, 과외 할만 했어?"
"어. 오빠, 엄청 잘 가르쳐 줘."
"재준아. 과외는 어떻게 진행할 생각이니?"
"지금 수린이가 수학 개념이 많이 부족한 상태여서요. 중1 때 배우는 수학 개념부터 빌드업하려고 합니다. 수린이가 똑똑해서 개념은 쉽게 배우더라고요. 그 다음에 응용/변형 문제를..."
"고1 수학을 예습시키려고 과외하려고 한 건데. 중1 수학을 배우게 하겠다고?"
아, 염병. 정수린은 내 말에 그냥 좋다고 따르기만 했는데, 이 놈은 태클부터 걸고 본다.
"아, 아빠!"
"가만히 있어. 너 사실 고1 수학 잘 몰라서, 중학교 수학만 과외하려는 거 아니야?"
"아버님, 수학이란 게요. 기초부터 튼튼하게 잡고 올라가야 돼요. 영어도 배우려면 일단 알파벳부터 배워야 하잖아요."
"너 지금 나 가르치려는 거야?"
아, 개새끼.
"앗, 진짜!"
정수린이 소파에서 일어나더니 자기 방에 달려갔다.
"가르치려는 게 아니라요, 아버님..."
"내가 왜 네 아버님이야."
"그... 아저씨."
'재희야... 이 아저씨를 겪어보니 네가 선녀였던 것 같다. 넌 때릴 수라도 있잖아.'
정수린은 집이 워낙 넓어서 좀 시간이 흘러야 자기 방에 갔다가 돌아왔다.
소녀의 손에는 공책이 들려있었는데, 내가 연습문제 만들어줄 때 쓴 공책이었다.
"이것 봐봐. 이게 중1 수학 문제인데, 아빠는 풀 수 있어?"
"너... 뭐하자는 거야?"
"중1 수학 문제를 무시하면 안 된다는 거지. 오빠 말이 맞아. 내가 중1 때부터 수학을 포기해버려서, 중2, 중3 수학 문제도 못 푸는 게 당연한 거고. 앞으로 고1 수학 역시 못 푸는 게 당연한 거야. 재준이 오빠가 고1 수학을 과외하러 온 거잖아? 중학교 수학을 가르쳐주려는 건 바로 그 고1 수학을 알려주기 위한 학습의 일환인 거지."
아저씨는 정수린의 열정적인 말에 이마를 짚었다가 날 쳐다봤다.
"수린이가 중학교 수학은 얼마 만에 뗄 수 있겠니?"
"90분씩 9회... 정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일주일에 3회씩 한다고 치면, 겨울방학 한 달 남았는데 3주를 중학교 수학 과외하겠다는 거네?"
"그렇죠."
"고1 수학 예습은 꼴랑 1주?"
"예. 하지만 중학교 수학은 수린이한테 꼭 필요합니다."
"그래, 좋아. 대신에 1회당 4만 원으로 하려고 했었잖아. 그거 1회당 3만 원으로 줄이자."
"아, 아빠! 쪽 팔리게 진짜!"
"정수린. 시끄러 워. 그리고 재준이 너, 과외 알바하겠다고 이것저것 알아봤겠지? 그럼 중학생 과외비가 고등학생 과외비보다 싸다는 거 알지?"
"예, 압니다."
"수린이 중학교 수준의 수학 과외할 때는 회당 3만 원. 나중에 고1 수학 예습 과외할 때는 회당 4만 원. 이렇게 가자고. 불만없지?"
이 아저씨가 논리적으로 맞는 말하니까 청개구리 심보 발동해서, 싫다고 말해버리고 싶었다.
"네, 없습니다."
"오늘 과외한 건 4만 원 주기로 했었으니까 4만 원 줄게."
그가 악어 가죽으로 만든 지갑을 꺼내더니, 만 원짜리 지폐를 찾았다. 하지만 지갑에는 온통 5만 원 권 뿐이었다.
"하필 잔돈이 없네. 5만 원 가지렴. 집 돌아가는 길에 맛있는 사먹어."
"가, 감사합니다."
난 황금색 지폐를 두 손으로 받았다. 1만 원 꽁으로 얻었다. 기분 좋네. 이 아저씨... 의외로 착한 거 아니야?
아니겠지. 이번에 5만 원 주고, 나한테 잔돈을 달라고 하는 것이 자존심 상했던 것일 뿐일 거다.
"과외는 월수금?"
"네, 그렇게 할게요. 수린아, 괜찮지?"
"네, 오빠."
"그럼 너 이젠 돌아갈 거지?"
"네."
"기다려. 외투 갖다줄게."
아저씨가 거실에서 자리를 비우자, 정수린이 손으로 입을 가리곤 속삭였다.
"제가 1만 원 채워드릴게요, 오빠."
난 좀 떨떠름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얘는 남의 자존심을 상하게 만드는 말을 쉽게 하네.'
아직 어려서 그런 거고, 날 생각해서 그런 거니 밉지는 않았다.
아저씨가 거실로 돌아왔다. 처음 보는 롱패딩 하나와 쇼핑백 하나를 들고서였다.
그가 든 쇼핑백에 본래 내가 입고 온 외투가 개어져 넣어진 상태였다. 뭐하자는 거지?
"이거 입고 다녀."
'이거'는 롱패딩 얘기였다.
"네?"
"이거 비싼 거거든? 딱 보고 마음에 들어서 샀는데, 막상 내가 입으니까 나한테는 안 어울리더라고. 젊은 애들한테나 어울리는 옷이었더라. 버릴까 했는데 마침 재준 학생한테 어울릴 것 같네. 우리집에 과외하고 올 때 만큼은 이거 입어."
이 아저씨, 착한 거야? 나쁜 거야?
자기집 들락날락하게 될 내가 가난한 옷을 입고 다니는 걸 이웃한테 보여주기 싫은 건가 싶다가도...
딱 봐도 유명 브랜드의 비싼 롱패딩인 지라, 호의적인 것 같기도 하고 애매했다.
"아저씨 손 아파. 안 입을 거야? 싫어?"
"아, 감사합니다... 제가 입을게요."
"됐어. 손 집어넣어."
그가 외투를 펼쳐주었고, 나는 팔 구멍에 두 팔을 밀어넣었다.
안감 진짜 부드럽네. 엄청 비쌀 거 같다.
"잘 입을 게요. 그럼 전 가보겠습니다, 아저씨."
"그래."
"수린아. 안녕."
"조심히 가세요, 오빠. 내일모레 봬요."
집으로 돌아가면서 아저씨가 준 것과 동일한 롱패딩을 찾아보았다.
모델명을 알아내고 중고거래된 게시물을 찾아봤다.
거래완료된 게시물을 하나 찾았는데, 무려 180만 원에 팔렸다.
"오, 쉣..."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정수린네 아저씨는 키다리 아저씨였다.
'부자들 심리는 모르겠다. 중고가 180만 원짜리는 옷은 그냥 주면서, 과외비 몇 만 원은 그렇게 아끼려고 구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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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수린은 공부하는 시간 90분이 이렇게 빨리 지나갈 수 있을 줄은 몰랐다.
체감상 20분 정도 밖에 안 지나간 것 같았는데.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니까 쏜살같이 흘러가버렸다.
"그... 오빠."
"응?"
"과외 이후에는 뭐하세요? 겨울방학이잖아요."
이대로 헤어지긴 싫었다.
오빠도 날 좋아하니까 헤어지기 싫어할 거라 믿어의심치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