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화 〉과외 학생한테 따먹힘
숲 공원을 관통하는 인공 개울이 있었다. 나와 김하늘은 그 개울 위에 만들어진 나무 데크 다리를 건너기 시작했다.
나는 '신재준'인 척 굴어보았다.
"어렸을 때는 개울 엄청 넓은 줄 알았는데."
"지금 보니 되게 좁지? 그땐 우리 몸이 엄청 작았잖냐."
신재준의 기억에 따르면, 여름에는 그 개울에서 물놀이하고, 겨울에는 썰매를 타면서 놀았다.
"기억하냐? 우리 누나가 너랑 나, 신재희. 썰매 태워줬잖아."
신재연이 어디서 시멘트 포대 같은 걸 주워와서, 노끈으로 연결한 다음 어린 동생들을 썰매 태워주었다.
'어린 신재연... 그때도 거유였구만...'
부유해서 돈 걱정 없었던 신재연은 잘만 웃었다.
"물이 마른 건가?"
개울은 내린 눈이 그대로 쌓여있었다. 그런데 수위가 거의 바닥이었다.
"듣기로는 겨울마다 상수시설이 얼음 속에서 고장났대. 그래서 몇 년 전 겨울부터는 상수시설이 얼지 않게끔만 물을 튼대."
다리를 다 건너고, 공원을 벗어나자 일반적인 보도블럭의 길이 나왔다.
"너 여기 온 거 오래만이겠다?"
"그렇지."
'신재준'도 신재희 만큼은 아니지만, 좋은 집에서 살다가 가난하게 된 것에 박탈감이 있었다. 김하늘과 같이 놀긴 하되, 근 몇 년 간 그녀의 집에 놀러간 적이 없었다.
"우리 아빠가 너 좀 데려오라던데. 너 보고 싶대."
"건강하시지? 아, 몇 달 전에 뵙긴 했어. 마트에서."
"아~ 그때? 아빠한테 들었어. 너 살 빠졌다고 걱정 많이 하더라."
"여기서 살 찌면 돼지되는데."
"그러게 말이야. 어른들은 애들이 뚱뚱한 게 좋은가 봐."
한 아파트의 현관 앞에 섰다. 유리문이 닫혀있었다.
"30. 기억해. 다음부턴 너 혼자 올 테니까."
"응."
김하늘은 30을 누르고 종소리 버튼을 눌렀다.
[어, 하늘이니?]
"예, 아저씨."
[옆에는 그 과외 선생님?]
"예."
[그래, 올라오렴.]
현관문이 열렸다.
과외 학생의 아버지 목소리는 버터를 바른 것처럼 느끼했다. 신재준의 기억에 의하면, 이런 목소리는 부잣집 안사람이 곧잘 내는 것이었다.
좀 꺼림칙해졌다. 나한테 사사건건 시비를 걸진 않겠지?
"정수린네 아버님, 착하셔?"
"착하시던데?"
김하늘한테 착하게 군다니까, 그 김하늘의 친구인 나한테도 그러겠지?
고속으로 솟구치는 엘리베이터였다. 귀가 멍멍해지자 침을 꿀꺽 삼켰다.
김하늘이 내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긴장하지 마."
"뭐래. 기압 차이 때문에 침 삼키건데."
"아, 예."
30층에서 내렸다. 소화전이 있는 복도가 나왔는데 계단문을 제외하면, 문이 단 1개였다. 1층을 1세대가 다 쓰기 때문이었다.
현관문 초인종을 누르자 스웨터를 입은 아저씨가 마중을 나왔다.
"어서와."
현관문에 들어와서도 또 몇 미터 정도의 타일 위를 걸어가야 신발을 벗을 수 있었다.
아저씨가 꺼내준 실내화를 신고 거실로 들어가니, 자그마한 몸집에 하얀 원피스를 입은 소녀가 거실 소파에 앉아있었다.
방이 따뜻해서인지 민소매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창백하다고 느껴지는 하얀 피부에 허리까지 닿는 긴 머리카락, 가슴은 아쉽게도 빈약했다.
앞머리카락이 두 눈썹 밑까지 내려와있고, 오버사이즈의 해리포터 안경을 끼고 있어 귀여운 미모를 해치고 있었다.
'프사기...는 아닌 것 같은데.'
정수린은 자기 SNS 계정에 머리띠로 앞머리카락을 뒤로 넘기고, 안경도 벗은채 웃고 있는 프로필 사진을 올려뒀었다.
혈색이 나빠보여 창백한 피부와 억지로 지은 듯한 미소는 연약 미소녀를 떠올리게 했었다.
'안경 벗기고 앞머리 뒤로 넘기면 엄청 예쁠 것 같은데.'
그런 생각을 하는데 아저씨가 외투를 벗어서 달라며 손을 내밀었다.
외투를 건네니 그는 내 외투 목 뒤에 붙어있는 브랜드명을 읽었다.
"쟝쟝...?"
뭐지, 이 새끼.
"시장에서 산 거예요."
"좋은 거 입네..."
이 아저씨, 첫 인상이 최악이었다. 입는 옷의 브랜드로 내 등급을 매기려는 게 느껴졌다.
'후우... 정수린한테 따먹히기 위해서 참는다.'
아저씨는 김하늘한테도 손을 뻗었다.
"아, 저는 금방 떠날 것 같아서요. 그냥 옆에 벗어둘게요."
아저씨가 내 외투를 어딘가에 걸려는지 잠시 자리를 비웠다.
김하늘이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내 어깨를 살짝 주물러줬다.
김하늘 이 년, 은근슬쩍 스킨십하네. 잘 하고 있어. 이러다가 은근슬쩍 자지도 터치하고, 은근슬쩍 날 따먹고 하란 말이야.
정수린은 자기 아버지 때문인지 민망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수린아, 안녕. 나 기억하나? 어렸을 때 한 번 논 적 있는데."
"예... 기억해요..."
정수린은 날 힐끗 올려다봤다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난 김하늘을 쳐다봤다.
'안 소심하다며?'
'원래는 안 소심한데?'
우린 눈으로 그렇게 대화를 나눴고, 정수린네 아버지가 거실로 돌아와 우리 보러 앉으라고 했다.
주방에 미리 준비해뒀는지 음료수와 다과를 든 쟁반을 가져와 컵을 나눠주었다.
그가 상석에 앉고, 나와 김하늘은 정수린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는 다리를 꼬더니 자신의 딸의 어깨에 손을 댔다.
"우리 수린이가 전교에서 100등 정도는 하거든? 다른 과목은 다 잘하는데 수학이 5등급이야."
"아, 수학을 알려주면 되겠네요."
공부머리는 있는데 수포자인 모양이었다.
원래 세계에서 고아였던 나는 잘 먹고 살기 위해서 공부를 열심히 했다.
돈 때문에 인서울 대학을 포기하고 전액 장학금을 받기 위해 지방 대학에 갔다. 놀고 먹고 죽자는 지방대 분위기에 휩쓸려 결국 코딩 노예가 되었다.
대학 때는 놀고, 군대가서 두뇌 리셋해오고 해서 고등학교 학업 내용을 다 잊어버렸었다.
그랬다가 학년 2등을 해오던 '신재준'의 기억을 주입받았다. 덕분에 고1 수준의 학업 정도는 남을 가르칠 수 있었다.
"하늘이의 친구라서 못 믿는 건 아닌데... 혹시 성적표 같은 건 없니?"
"아, 가져왔어요."
난 가방에 챙겨둔 고1 때, 학교 시험 성적표와 전국모의고사 성적표를 꽂아둔 파일을 내밀었다.
"준비가 철저한 게 마음에 드네."
"감사합니다."
"간식 먹어. 하늘이도, 그리고... 이름이 뭐랬지?"
"신재준 입니다."
"재준이도."
아저씨가 내 성적표를 한 장, 한 장 넘기는 동안 김하늘은 먹성 좋게 쿠기를 씹어댔다.
난 오렌지쥬스로 가볍게 입술만 축였다.
정수린은 아까부터 테이블만 노려보고 있었다. 테이블 유리로 정수린의 얼굴이 반사됐다.
그 애가 그걸로 날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아서, 테이블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정수린은 딴데로 고개를 돌렸다.
탁. 아저씨가 파일을 덮고 내게 내밀었다. 난 두 손으로 받았다.
"이왕 돈 내고 시간 들여서 과외하는 건데. 명문대학생한테 받는 게 좋을 거고, 고2로 올라가는 학생한테 받자면 2등보다는 1등한테 받는 게 나을 것 같은데."
내가 싫으면 까던가. 왜 이렇게 말이 길어.
난 옆눈으로 정수린을 살폈다.
정수린은 이 자리가 가시방석같은지 불편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자기 아버지한테 뭐라고 하고 싶어하는 얼굴이긴 한데, 파파걸인지 결국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 전전긍긍하는 꼴이 귀여웠다.
꼭 밀폐된 한 방에서 과외해주고 싶었다. 그러다가 난 따먹히고.
이 아저씨가 마음에 안 들었지만, 정수린의 과외를 따기 위해선 이 남자의 마음에 들도록 어필해야 했다.
"명문대학생은 배운지 몇 년 흘러서, 세밀한 학습은 저보다 못할 걸요. 전 고1 때 배운 게 아직도 생생합니다. 그리고 학년 1등하는 애하고는, 늘 1, 2문제 차이로 진 거였어요. 그 정도면 컨디션의 차이로 진 거라고 할 수 있죠."
"난 과외 선생님이 시험 칠 때의 컨디션 강의도 해줬으면 하는데."
아, 시발 새끼.
신재희는 예쁘고 가슴이 크고, 화 풀릴 때까지 때릴 수라도 있지.
이 놈은 진짜 좆 같다.
"농담이야."
"예? 예..."
"오늘 한 번 수업해볼래? 준비성 좋은 거 보니, 1일차 과외 수업도 해왔을 것 같은데."
"예. 일단 수린이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테스트해보려고요. 전년도 3월 모의고사 시험지 인쇄해왔어요."
"좋아, 아주 좋아."
이젠 안도해도 좋은 걸까.
"아, 그런데 하나가 걸리네."
"네?"
"우리 수린이 예쁘지?"
"예? 예..."
그는 자신의 딸의 어깨를 매만졌다.
"아, 아빠. 하지 마."
정수린이 위기심에 찬 얼굴로 말했다. 소녀는 아버지의 스킨십 보고 하지 말라는 게 아니었다.
"우리 수린이한테 이성적으로 접근할까봐 걱정 돼."
자기 아버지가 내뱉을 말이 짐작돼서 했던 말이었다.
내가 할 말을 잃고 입을 벌리고 있자, 옆에서 김하늘이 내 어깨를 감싸왔다. 내 팔로 그녀의 가슴이 눌려오는 게 느껴졌다.
"아저씨. 얘 마음은 제가 꽉 잡고 있거든요? 재준이가 저 말고 다른 여자한테 관심을 가질 리가 없어요."
김하늘의 어시스트를 들은 아저씨는 나와 김하늘을 흥미롭게 번갈아보다가 물었다.
"둘이 사귀니?"
"네. 그렇지, 재준아?"
"아, 맞아요."
난 김하늘의 어시스트를 기꺼이 받아주도록 했다.
그제야 아저씨는 방긋 미소를 짓더니 오늘 하루 과외를 맡겨보겠다고 했다.
* * *
과외는 1시간 30분씩 진행할 것이었다. 1회마다 3만 원.
시급 2만 원짜리 고급 알바인 셈이었다.
오늘 맛보기 과외도 돈을 준다고 했다. 이 부유한 집에서 4만 원은 별로 큰 돈도 아닐 것이었다.
일하는 시간이 워낙 짧아, 매장 같은 곳에서 알바해서 벌 수 있는 총액보다 턱 없이 적겠지만 돈을 보고 하는 과외 알바가 아니었으니 괜찮았다.
과외를 진행해야 하니 김하늘은 떠났다.
나는 정수린과 한 방에 있었다.
남녀역전세계여서 귀염귀염한 소녀의 방 느낌은 없었고, 삭막한 느낌의 소년의 방 느낌이었다. 그래도 여자애의 체취로 채워져있어서 남자의 마음을 안달나게 하는 건 있었다.
책상 구석으로 아저씨가 깎아다가 가져다준 과일 쟁반이 밀려져있었다.
정수린은 내가 프린트해온 수학 시험지에 고개를 박은채 열심히 샤프를 긁고 있었다.
풀이를 시도해보다가 말고 넘어가는 문제가 많은 걸 보면 좋은 점수를 기대하긴 어려울 것 같았다.
'알려줄 재미가 있으려나. 아니면 알려줘도 못 알아먹어서 답답하게 되려나.'
계절이 겨울인 걸 무시하고, 따뜻하게 달아오른 실내였다.
하품 나오려는 걸 억지로 참아내고, 무음 상태로 바꿔둔 핸드폰을 슬쩍 보았다. 김하늘로부터 톡이 날아와있었다.
김하늘 [남친아. 과외는 잘 돼 가?]
(나) [우리 헤어져]
(나) [안녕]
(나) [나 없이도 잘 지내]
김하늘 [나 30분도 안 돼서 차인 거야?]
김하늘 [와...]
(나) [ㅋㅋㅋㅋㅋ]
김하늘 [ㅋㅋㅋㅋㅋㅋㅋㅋㅋ]
(나) [일단 수린이 실력 알려고 문제풀이 시켜둠]
김하늘 [그때 동안 할 거 없음?]
(나) [ㅇㅇ]
김하늘 [이야. 개꿀 빠네]
(나) [공부 잘 하면 꿀 빨 수 있어]
김하늘 [공부 못하는 사람 서운해서 원]
난 'ㅋㅋㅋ'을 써놓고 보내기를 누르려고 했다.
"저, 오빠..."
"응? 모르는 거라도 있어? 그래도 일단 내 도움 없이 할 수 있는데까지 풀어 봐."
"아니, 그게... 그... 마, 많이 귀여워지셨다고요..."
정수린은 시험지에 시선을 고정한채 그렇게 중얼거렸다.
이 녀석, 신재준의 외모에 껌뻑 넘어가버린 게 틀림없었다.
"그래? 고마워."
너야말로 많이 귀여워졌다며 맞받아치고 싶었다.
정수린은 150정도의 키로 신재준보다 작은 키였다. 키도 작고, 체구도 가녀리고, 가슴도 작고, 머리도 작고, 샤프를 쥔 손도 작았다.
얇은 팔과 이어진 어깨는 가녀렸고, 쇄골은 도드라지게 튀어나와있어 핥아보고 싶었다.
원피스 어깨끈과 나란히 놓인 파란 스포츠브라 끈. 저 원피스 끈을 잡아내리면 보이게 될 빈약해도 부풀어있을 파란색 스포츠브라를 상상케 만들었다.
나는 책상에 팔을 세우고 볼을 괴었다.
정수린의 앞머리카락이 아래로 쏟아져서 이마가 훤히 보였다. 해리포터 안경 너머로 커다란 눈망울이 보였다.
'이마만 까도 확 예뻐지네. 안경까지 벗으면 더 예뻐지겠는데.'
정수린의 검은 자위가 힐끗 내 쪽을 바라봤다가 얼른 시험지로 내려갔다.
난 소녀의 오뚝한 코와 분홍빛의 입술을 눈으로 핥았다.
고개를 기울인 자세였기에 원피스 안쪽이 엿보였다.
도드라진 쇄골뼈 밑으로 파란색 스포츠브라가 빈약한 유방을 감싸고 있었고, 오돝토돌 빨래판처럼 갈비뼈가 튀어나와 있는 것도 보였다.
'빈유도 좋지.'
/ / /
정수린은 집에서 시간을 떼우는 걸 좋아했다.
그리고 겨울 추위를 싫어했다.
그런데 김하늘이 집밖으로 나오라고 했다. 좋아하는 집에서 나와야 하게 됐고, 싫어하는 겨울 추위를 겪게 돼서 정수린은 속으로 언짢았다.
하지만 정수린은 친구가 적었다. 이렇게 자신을 호출해주는 이도 극히 드물었다.
김하늘도 자신을 잘 호출해내는 편이 아니었다. 이번 호출을 이런저런 핑계대서 거부하면, 김하늘도 자신을 영영 호출하는 일이 없게 되어버릴지 몰랐다.
그래서 옷을 꽁꽁 싸매 입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