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화 〉겨울방학
'과외 학생을 어떻게 구하지.'
아날로그 감성이면 과외생 모집공고를 뽑고, 내 연락처를 뜯어갈 수 있게 문어발처럼 잘라둔 뒤 가로등 같은데 붙이는 거였다.
과외생 구하는 사이트에 글을 올리는 방법도 있었다. 지금 학부모 세대들은 인터넷 잘 다룰 아는 세대였다.
'그런데 그냥 과외생이면 안 돼. 미녀인 예비 고1이어야 하는데...'
흔녀 이하의 예비 고1이나 고추를 지닌 남학생한테 과외하는 건 노력낭비, 시간낭비였다.
과외 면접을 보려고 그들의 집에 찾아가는 것 역시 낭비였다. 인터넷에 공고를 때린다고 하면, 확률적으로 '꽝'이 접촉해올 가능성이 높았다.
'차라리 지인들한테 소개받는 게 나아.'
신재희가 떠올랐다. 걔도 예비 고1이었다.
신재준의 기억 속에서 신재희의 친구들 얼굴을 끄집어냈다.
'신재희가 예쁜 일진이라 엄지혜도 그렇고, 끼리끼리 노는 애들이 예쁜데.'
문제가 있었다. 걔들이 일진이라 공부할 생각이 없을 거라는 것, 과외받을 생각도 없을 것이란 것이었다.
일진 학생의 부모가 과연 자기 자식 과외시키려고 돈을 내려고 할까, 회의감이 들기도 했다.
'가장 중요한 건, 과외 학생이 어거지로 과외받다가 날 따먹는 게 아니라. 정말 열심히 과외받는 학생이 날 따먹는 걸 원해. 진짜 공부할 의욕이 있는 애한테 따먹고 싶단 말이지.'
일진 예비 고1들을 탈락. 신재희의 친구들한테는 나중에 다른 방식으로 따먹히기로 했다.
'신재준한테 가장 친한 지인은 바로 김하늘... 김하늘은 아는 사람들이 많아.'
김하늘에게 접촉할 겸, 걔한테 과외 학생을 섭외를 부탁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프로필사진 같은 거 보고 미녀가 아니면, 이런저런 핑계대면서 거부해버리고.
(나) [하늘아. 혹시 아는 동생 중에 과외 선생 구하는 애 없어?]
5분 정도 흐른 뒤, 답톡이 날아왔다.
김하늘 [웬 과외? 네가 과외 뛰게?]
(나) [ㅇㅇ]
김하늘 [이욜 ㅋㅋㅋ 성연고 최고 미소년이 과외 선생이라니]
김하늘 [여자 애들이라면]
김하늘 [제대로 공부 할 수 있으려나 ㅋㅋㅋ]
'은근슬쩍 외모 칭찬해오네.'
(나) [ㅈㄹ]
김하늘 [ㅋㅋㅋㅋ]
김하늘 [싹 톡 돌려서 물어봐 줄게]
(나) [ㄳㄳ]
이대로 김하늘과 톡을 끝내는 게 아쉬웠다.
집안 일도 다 했겠다, 신재희도 떠났겠다. 할 게 없었다. 심심했다.
신재준은 평소 김하늘에게 온갖 스트레스를 내뱉었다. 학교에서 있었던 스트레스, 집안에서 있었던 스트레스, 알바할 때는 알바장에서 있었던 스트레스.
김하늘은 늘 경청해주었고 때로는 진지하게, 때로는 유머있게 다독여주었다.
(나) [아 신재희 또 사고침 ㅡㅡ]
김하늘 [?? 뭔데 또 ㅋㅋㅋㅋ]
(나) [비상금 훔쳐다가]
(나) [그걸로 패딩 삼]
김하늘 [엌ㅋㅋㅋ]
김하늘 [얼마짜리?]
(나) [50]
김하늘 [미춋네 ㅋㅋㅋ]
김하늘 [환불함?]
(나) [ㅇㅇ 신재희 머리채 잡고 끌고가서 환불하고 옴]
김하늘 [ㅋㅋㅋㅋ 상상만으로도 볼라 웃기네 ㅋㅋㅋ]
(나) [아니. 비상금도 내 옷 서랍에 숨겨놨거든?]
(나) [거길 뒤져서 훔쳐가네]
김하늘 [ㅋㅋㅋㅋㅋㅋㅋㅋㅋ]
김하늘 [재희쓰. 선을 넘어부렷으]
김하늘 [혼냇냐?]
(나) [ㅇㅇ 유방빵 날림]
1분 동안 김하늘의 톡이 끊겼다.
김하늘 [아씨... 내 유방이 다 아프다...]
김하늘 [너 볼라 빡쳤었나 보네 ㅋㅋㅋㅋ]
(나) [좌측 유방 한 대. 우측 유방 한 대. 밸런스 있게 때림 ㅇㅇ]
김하늘 [앜ㅋㅋㅋ 니 미춋냐 ㅋㅋㅋㅋ]
(나) [나 때문에 가슴 짝짝이 되면 미안하더라. 그래서 양쪽 다 때렷지]
김하늘 [ㅅㅂㅋㅋㅋㅋ]
(나) [나 진지하게 생각한 건데]
(나) [웃겨?]
김하늘 [어 웃겨 ㅋㅋㅋㅋ]
(나) [(찐만두가 삐진 이모티콘)]
난 핸드폰을 빤히 내려다보다가, 애를 한 번 자극해보기로 했다.
김하늘한테 따먹히기 위하여.
(나) [돈 좀 꿔줄 수 있어?]
김하늘 [?? 얼마?]
신재준은 여태껏 김하늘한테 돈을 빌린 적이 없었다.
김하늘에게 얻어먹은 적이 많고, 옷 선물 따위를 받은 적도 많았다. 피시방비, 노래방비 같은 것도 김하늘이 대신 내준 적이 많았다.
그러나 현금으로 김하늘한테 빌린 적은 없었다.
(나) [보일러 앵꼬 남]
(나) [비상금도 딴데 당장 쓸데가 있고...]
(나) [20만 빌려줄 수 있어? 과외 알바하고 바로 갚을게]
김하늘 [ㅇㅋ]
김하늘 [차용증 쓸거임. 먹튀 불가임]
(나) [고마워]
김하늘 [차용증 양식 인터넷으로 보고 만들어놓으셈. 지금 니 집 가는 중]
(나) [? 희정이랑 논다며]
김하늘 [니 집 보일러 앵꼬 났다며. 빨리 기름 넣고 돌려야지]
김하늘은 오해를 하고 있었다. 신재준네 집이 보일러 뻥뻥 틀어놓고 사는 집인 줄 아는 모양이었다.
기억을 더듬어보면 김하늘은 이 집에 몇 번 들린 적이 있지만, 곧 금방 시내로 나가서 놀았다.
신재준도 사춘기는 사춘기인지라, 여사친이 가난한 자신의 집에서 노는 걸 싫어했던 것이다.
김하늘이 들릴 때마다 보일러가 꺼져 있었는데, 김하늘은 집에 머무는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 꺼둔 걸로 착각한 모양이었다.
(나) [나 지금 감동 받음]
김하늘 [소희정이 지 버린다고 지랄하네 ㅋㅋㅋ]
(나) [걔 버려. 나한테 와. 나랑 놀자]
김하늘 [ㅇㅋ]
난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자극 잘 받네. 김하늘을 오늘 보게 됐네.'
깔깔이 지퍼를 내려 안쪽 셔츠를 확인했다. 회색 면티였다. 나는 옷을 갈아입기로 했다.
서랍을 뒤적거렸다. 그러다가 넥이 누래지고, 많이 늘어진 흰색 반팔티를 찾았다. 그것으로 갈아입었다.
깔깔이 지퍼를 닫지 않고 거울을 통해 살폈다.
똑바로 서있을 때는 넥이 늘어졌기에 가슴께와 쇄골이 드러났다.
옆으로 몸을 기울이자, 깔깔이가 가려주지 않게 되어 얇은 면 너머로 유두가 비쳤다.
고개를 숙이면 늘어난 넥 속으로 상반신 안쪽이 다 보였다.
이 세계는 여자들이 쉽게 윗통을 까버리고, 남자들이 조신하게 상반신을 가리고 다니는 세계였다.
신재준이 수영장에 갔던 기억을 떠올려보자면 유방을 드러내고 다니는 여자가 5할은 되었으며, 남자들은 죄다 래쉬가드를 입고 다녔다.
김하늘한테 내 상반신 속살을 은근히 보여줘서 발정시켜볼 생각이었다.
* * *
"재준아, 노올자~"
현관문 앞에서 김하늘이 불렀다. 난 전기장판 위에서 보내다가 이불 밖으로 나갔다.
'쓰읍. 겁나 춥네.'
깔깔이 안에 긴 팔이 아닌 반 팔을 입으니 더 그랬다.
현관문을 열자, 보인 김하늘의 실물에 난 입을 벌렸다.
신재준보다 5cm 더 큰, 165cm에 단발머리의 소녀. 평소 웃음을 자주 짓는 상이었다. 나와 마주치자 눈 주름이 예쁘게 만들어지며 눈웃음을 쳤다.
단발머리를 아름답게 소화해내는 미모였다. 나는 김하늘의 머리가 장발이었다면, 더욱 예뻤을 것임을 의심치 않았다. 단발머리의 미녀는 장발을 하면 2배는 더 예뻐졌다.
후드가 달린 점퍼를 입고, 턱까지 지퍼를 잠그고 있었다. 다리는 착 달라붙는 스키니진.
후드와 바지, 신발 모두 값비싼 브랜드의 것이었다.
김하늘은 잘 사는 집의 딸이었다.
신재준도 어렸을 때는 김하늘처럼 잘 사는 집에 살았고, 이웃이 되었던 게 인연이 되어 소꿉친구가 된 것이었다.
신재준은 김하늘과 친구로 지내면서, 만약 김하늘이 고백해온다면 사귀어 줄 생각이 있었다.
신재준은 연애에 관심이 없었지만, 김하늘처럼 자신에게 헌신해주는 여자는 드물 것이란 걸 알았고 사귀다 보면 사랑이 생기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었다.
'재준아. 미안하지만 난 김하늘과 사귈 생각이 없어.'
김하늘한테 따먹힐 생각이었다.
"왔어? 들어와."
"오, 너희 집, 엄청 춥다. 보일러 기름 주문했어?"
"아직."
김하늘은 나와 함께 큰 방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주머니에서 5만 원 4장을 내밀었다.
"자, 이거."
"땡큐."
"너 나 아니면 동태됐겠네? 생명의 은인이라고 부르거라."
"뭐라는 겨."
신재연을 껴안고 자면 동태꼴 면할 수 있었다. 어젯밤을 그렇게 살아남았다.
"후우, 춥다."
"이불 속에 들어가. 전기장판 틀어놨어."
김하늘은 스스럼없이 이불 속에 들어갔다.
"오. 전기장판, 아주 후끈후끈하구만."
일부러 고온으로 틀어놓았다. 나중 계힉을 위해서.
나는 석유집에 전화해서 1드럼 주문을 했다.
"네, 1드럼이요. 현금으로 결제할 거예요."
그렇게 결제하고 나도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일부러 김하늘과 좀 떨어져 앉았다. 우리는 벽에 기댄채 이야기를 나눴다.
"1드럼? 그걸로 얼마나 가?"
"두 달? 겨울은 다 보낼 수 있을 거야."
뻥뻥 틀어대면 보름도 안 돼서 기름이 바닥날 것이었다. 하지만 보일러가 얼지 않게 잠깐잠깐 트는 거면, 겨울 내내 쓸 수 있을 거였다.
신재준의 기억에 따르면 그랬다.
"그래? 난방비, 생각보다 싸네?"
김하늘은 배려할 줄 아는 애긴 했지만, 지금처럼 무지에서 오는 말실수를 할 때도 있었다.
"그러게... 아, 맞다. 하늘아, 정말로 차용증 써?"
"당연히 농담이지."
"뭐야. 다 써놨는데."
바지를 주머니를 뒤지기 위해 벽에서 등을 떼었다.
주머니에서 두 번 접힌 종이를 꺼내 펼쳤다.
무지 공책 한 장을 찢어서 볼펜으로 쓴 차용증이었다.
차용일자, 차용금액, 변제기간, 채권자 이름과 연락처, 채무자 이름과 연락처 등이 적힌 차용증이었다.
"헐. 킥킥. 정말 썼어? 어디 봐봐."
김하늘이 내게 엉덩이를 붙였다. 나보다 키가 큰 만큼, 앉은 키도 김하늘이 좀 더 컸다.
그녀가 나보다 높은 시점에서 내가 펼친 종이를 내려다보았다.
난 슬쩍 고개를 숙였다.
지금 김하늘의 시선에는 내가 펼친 차용증 뿐만 아니라, 넥이 늘어난 티셔츠 안쪽도 보일 것이었다.
"오... 잘 썼는데?"
꿀꺽.
김하늘의 목에서 침을 삼키는 소리가 났다.
/ / /
"야! 승급전인데 왜 게임 꺼?!"
"재준이 집 기름 앵꼬났대. 넣어주고 와야 돼."
"아니, 그게 뭔... 아, 미친!
김하늘은 게임을 강제 종료하고, 피시방 이용을 중지시켰다. 피시방의 히터 때문에 벗어두고 있던 점퍼를 입었다.
"인마, 내가 다음에 꼭 버스 태워줄게."
"에휴, 알았다."
소희정은 스스로가 피지컬은 좋지만, 뇌지컬이 딸려서 롤 동급이 플래티넘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김하늘은 피지컬과 뇌지컬, 두 개 모두 겸비된 다이아 등급이었다.
소희정은 오늘 김하늘이 랭겜 버스를 태워줘서 승급하게 될 줄 알다. 그런데 갑자기 김하늘이 탈주해버렸다. 그것도 남자 보러 간다고.
소희정이 버스를 받는 입장이었기에, 탈주한 김하늘 보러 더 심하게 몰아붙일 순 없었다.
그리고 배알이 꼴려왔다.
신재준은 귀엽게 생긴 남자애였다.
'지금 신재준네 집에 간다고? 나도 좀 남자애 집에 좀 가보고 싶다, 시발. 부럽네...'
소희정은 둘 사이가 '친구 이상 애인 미만'이라고 생각했다.
'쟤들은 도대체 언제 떡치려나.'
소희정은 두 사람이 언제 사귀려나 싶었다. 어느 한 쪽이 고백을 하면 사귈 것만 같은데... 10년 넘게 저러고 있는 것도 대단하다 싶었다.
* * *
김하늘 [소희정이 지 버린다고 지랄하네 ㅋㅋㅋ]
(나) [걔 버려. 나한테 와. 나랑 놀자]
김하늘 [ㅇㅋ]
김하늘은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 주먹을 불끈 쥐었다. 오싹오싹하게 꼴려왔다.
'그래. 이렇게 날 의지해.'
그녀는 신재준을 좋아했다. 어릴 적부터 그랬다. 처음에는 외모를 보고 반했다.
제 누나인 신재연의 등 뒤에 숨어서 빼곰 고개를 내밀던 귀여운 모습이 아직도 선명하게 떠올랐다.
나중에는 부모한테 버려져서 인생이 추락한 신재준을 보고 새삼 또 반하게 됐다.
슈퍼 아파트에서 지내다가 언제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집으로 쫓겨난 신재준.
어릴 적 때처럼 헤픈 웃음은 잃어버렸지만, 그래도 삶이 나아질 거란 희망을 품고 공부와 집안일, 알바를 병행하는 모습이...
아름다웠다.
그리고 그런 신재준이 미안한 얼굴로 눈치를 보며 자신에게 도움을 요청해올 때마다...
'이런 또 젖었네.'
팬티가 젖었다.
'재준이가 돈 빌리는 건 처음이던가?'
신재준의 집은 방한도 제대로 안 됐다. 그런 집이니 보일러라도 돌려야 할 텐데, 그 보일러 기름을 사기에도 여의치 않은 상황인 듯했다.
'꼴에 자존심은 있어서 돈은 안 빌리려고 하더니... 한 번이 어렵지, 두 번부터는 쉬울 걸?'
김하늘은 신재준이 계속해서 자신한테 돈을 빌려가는 미래를 떠올렸다.
처음에는 소액을 빌렸다가, 돈을 쓰는 맛에 맛들려 거액을 빌려가는 것이다.
신재준의 심리에는 점차 채무감이 쌓일 것이며, 소년은 미안해서라도 김하늘의 작은 부탁 정도는 쉽게 들어줄 것이었다.
'야한 부탁도 따라주려나.'
수치심으로 물들인 얼굴로 결국 마지못해 야한 부탁을 따르는 신재준. 그 모습을 상상하자 정신이 아찔해져 넘어질 뻔했다.
"후..."
'아니야. 내가 시키는 건 차선이야. 재준이 스스로가 그런 마음이 들어서 나한테 봉사하게 해야지.'
김하늘은 어느 순간부터인가, 그런 그릇된 애정을 품고 있었다.
이번에 신재준이 돈을 빌린 것을 스타트로, 그 망상이 현실화가 될 가능성을 보여 기대감이 차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