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5화. 시작은 거짓으로, 끝은 이별로. -->
“내가 사랑을 주는 만큼, 그에게도 사랑받고 싶다고...그런 욕심을 부린 게 그렇게 잘못된 걸까요?”
“........”
올곧게 자신을 마주하는 여인의 말에 소연은 차마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잘못되었냐고? 그런 게 있을 리가 없다.
자신의 공허함을 달래기 위해 이어갔던 그 만남을 사랑이란 감정으로 변화해가고 싶다는 그 순수한 욕망은 그 무엇보다도 숭고하고 아름다운 것이다.
하지만 그 감정을 고수하는 것이 허락된다 할지라도, 이후에도 그걸 계속 유지하려 든다면 그녀는 영원을 고통속에서 살아갈 것이다.
...그런 건 이미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그가 가장 원치 않는 것이다.
“강수 씨는...당신이 행복해지길 바라고 있어요.”
“좋은 소식이네요. 저도 그렇게 생각하는데.”
“그 사람은 당신이 자신 때문에 고통스러워하길 바라지 않고 있어요.”
“그런 사람이 어째서 자신을 희생한 걸까요.”
“그 사람은 당신이 자기를 잊기를 바래서........”
“가능할 거라고 생각해요?”
“.......”
이어지는 침묵에 소연이 이를 질끈 깨물며 주먹을 틀어쥐었다.
소중한 사람의 죽음을 잊어라...그런 게 가능할 리 없다는 건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다.
그녀와 마찬가지로 자신 또한 던전 내에서 소중한 사람을 잃고 말았으니까.
그것이 자신이 벌인 그릇된 선택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은 지금도 남아있고, 어쩌면 평생 동안 자신을 구속하는 족쇄가 될지 모른다는 불안감 또한 지니고 있다.
하지만 그것이 짐이라고 생각해선 안 된다. 생살이 쥐어뜯기는 그 아픔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자신이, 연인을 잃은 여인의 슬픔에 공감하지 못할 리가 없었다.
“만약...오빠가 진심으로 저를 사랑하고 있다면, 자기가 사라진 후에 제가 어떤 마음을 품을지 잘 알 거라고 생각해요.”
그것이 자기 스스로 진심이라 착각하여 벌인 일이라 하더라도 상관 없다. 자신 역시도 마찬가지였으니까.
그것을 진짜로 만들기 위해서 퍼부은 노력마저 거짓이 되진 않는다는 것을, 그녀는 그를 향한 사랑을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깨달은 상태였다.
“분명 제가 자길 평생 동안 원망할 거라는 것도...분명 알고 있겠죠. 그걸 알고도 두 사람에게 모든 걸 맡긴 거라면.......”
“.......”
“...두 사람이 그 사람의 짐을 떠맡을 필요는 없어요.”
끝내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자신에게서 고개를 돌린 소연을 위로하듯 초희가 말했다.
자신이 해야 할 그 행동을 어째서 그녀가 하고 있는 것일까.
아련한 미소와 함께 이어지는 말에, 소연은 끝내 체념을 하며 고개를 숙였다.
“죄송해요, 강수씨. 전,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을 돌리게 할 수 없어요.”
“그런 걸 네가 왜 신경 써.”
입에 물고 있는 담배를 바닥에 내팽개친 요한이 그것을 짓밟은 채 소연의 옆에 섰다.
“상대 쪽에서 굳이 필요 없다고 하잖아. 그러면 그냥 우리는 내버려두고, 우리가 할 일에나 전념하자고.”
“...당신이 그런 말을 하니까 묘하네요.”
“뭐, 내가 틀린 말 했어?”
“그런 게 아니라, 당신도 저나 초희씨와 마찬가지로 던전 내에서........”
-파악
요한의 손가락이 소연의 이마를 가격했다. 얼떨떨한 표정을 짓고 있자, 요한이 코웃음을 터트리며 그녀의 옆을 지나쳐 걸어갔다.
“사람 하나가 할 수 있는 일이 그렇게 많을 리가 없잖아. 남아있는 사람한테나 신경 써. 설마 신경 쓸 수 있는 사람이 그 땅꼬마 말고 한 명도 없는 거야?”
“.......”
요한의 그 말에 소연이 씁쓸한 미소를 그렸다.
소중한 사람...던전 밖에 그런 사람이 분명 존재하고 있었다.
연화와 마찬가지로, 이 비루한 삶에 지탱점이 되어주었던 사람이.
“모두 저희들의 지시에 따라 움직여주시길 바랍니다! 이건 모두 여러분의 안전을 위한 것이니.......”
멀리서부터 군을 지휘하는 담당자의 호령이 들려왔다.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군인들의 손에 많은 이들이 이끌려가고 있다. 소연은 그들을 향해 망설임 없이 걸어가는 요한의 뒤를 따라갔다.
잠시 시선이 초희에게로 향해졌지만, 그마저도 머지않아 거두어지고 말았다.
홀로 남게 된 초희는 그들이 떠나가는 것을 뒤로한 채 조용히 주저앉았다.
그녀의 손에는 이전에 떨어트렸던 구겨진 편지가 쥐어지고 있었다.
억누르고 있던 슬픔이 편지를 적셔가고, 그것을 영원히 자신의 마음에 새기듯 가슴께에 올린 손을 움켜 쥐었다.
“...잊지 않아, 절대로.”
시작은 거짓으로, 그리고 끝은 이별로.
하지만 그를 향한 마음은 영원히 유지하길 바라며.
******
-지지직.
하얗게 물들어져 있는 스크린화면에 노이즈가 끼더니, 머지않아 암전되어 공간을 어둠으로 물들였다.
모든 것이 무가 되듯 사라져버린 환경 속에서, 그는 자신의 앞에 존재하는 희미한 실루엣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그래, 마지막 선물은 만족스러웠나?
중후함 속에 잠재워져 있던 기이한 목소리가 공간 내에 울려 퍼졌다.
사방이 빛으로 가득 채워진 것을 자각한 그의 시선이 주변으로 향해졌다.
이전까지 어둠으로 물들어져 있던 공간이 언제 그랬냐는 듯 수 많은 시곗바늘로 도배되어 있었다.
제각각 다른 크기에 다른 속도로 움직이는 그 공간 속에서 강수가 말 없이 보스몬스터를 마주했다.
“내기에서 진 나를 비웃기 위해서지? 내기에서 진 내가 이제와서 삶에 대한 미련이라도 가지는 걸 보고 싶어서.”
-어떤 반응을 보였어도 만족스러웠을 거라 생각하네. 자네가 보여주는 모든 것은 나에게 있어서 즐거운 유희가 되었으니.
“모든 걸 쏟아 부은 유희가 이런 보잘 것 없는 이야기라 미안하게 됐네.”
-.........
시계탑을 등진 검은 형상이 침묵을 유지했을 때 그가 자신의 품에서 새로운 담배를 꺼내들었다.
“던전이 세계를 집어 삼켰을 때 모든 힘을 쏟아 부어 시간을 되돌린 거야. 당연히 세계를 포괄하고 있던 던전 자체도 ‘붕괴되어버린 것’이나 다름이 없고.”
지금 이렇게 그가 남아있는 이유는 어디까지나 시간을 완전히 되돌리고 난 후 남은 힘으로 자신의 존재를 유지한 것에 불과하지만, 던전의 억제력이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그런 편법이 길게 허락될 리가 없다.
분명 그의 수명은 과거로 돌아온 자신과 연동되어 있었을 것이다.
자신이 죽어버리면 그 역시도 세계에서 사라져버리는...그런 위험한 도박을 그는 처음부터 별 상관없이 이행한 것이다.
자신을 죽이면 승리, 허나 그 전에 죽어버리면 패배...그 룰 하에 이어진 내기에 그는 처음부터 제 삶을 갈구할 생각이 없었다.
“설마 내가 모를 거라고 생각한 거야?”
-그럴 리가. 그저 자기가 앞으로 어떤 처지에 놓였는지를 알고 있으면서도 내 걱정을 하는 것이 신기하게 여겨졌을 뿐이네.
그가 강수의 말에 별 탈 없이 웃음을 지었다.
던전에 귀속되어 있는 존재로써 죽음을 두려워할 리가 없다. 오히려 그들은 자신을 해방시켜줄 자가 찾아오기를 그 누구보다도 희망하고 있다.
-자네도 알고 있겠지. 던전에 귀속되어 있는 모든 존재는 자신을 해방시켜줄 자가 찾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걸.
모를 리가 없다. 세계를 부수는 과정에서 수도 없이 봐왔던 광경이었으니까.
던전을 관장하는 모든 보스몬스터들은 다른 차원에서 악랄하고 끔찍한 죄를 저지른 죄인이며, 그들은 자신의 죄를 씻어내기 위해 던전(지하감옥)에 유폐되어, 자신을 죽일 자를 기다리게 된다.
그 운명에서 해방되는 건 오직 들어온 자가 자신을 죽이는 그 때 뿐.
자신이 봐와온 모든 보스몬스터들은 죽는 그 순간, 자신을 죽인 대상을 원망하기보단 감사를 전했다.
[네가 돌아오지 않았다면, 그는 보다 오랜 시간 동안 고통 받으며 살았을 테지]
[고맙다. 그를 해방시켜주어서.]
비록 최후의 순간에 자신을 칭하지 않았지만, 그 역시도 자신이 고통의 굴레에서 해방되기를 바라던 자였다. 과거로 돌아와서도 변함이 없었다.
유일하게 알지 못하는 건 눈앞에 있는 녀석뿐이었다.
모든 죄인들은 해방을 원하지만 ‘자결’은 불가능하다. 그건 던전의 억제력이 절대로 허락지 않는 것이니까.
눈앞에 있는 녀석처럼 내기를 주선하여, 자신을 던전이란 공간에서 빠져나가게 만드는 편법을 구사하는 것이 아니라면.
“좋겠네. 얻어걸린 한 놈 덕에 감옥에서 해방될 수 있게 되었으니.”-그리 좋은 느낌은 아니네. 시간의 흐름이란 나에게 있어선 너무나도 보잘 것 없는 것이니까.
시간을 관장하는 신이란 이름에 걸맞는 여유였다.
설령 영원히 유폐되어 있다 하더라도 눈앞에 있는 녀석은 아무런 감각도 느끼지 못할 것이다.
-나에게 있어서 두려운 건 아무것도 볼 수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되는 것이지.
“내기의 결과를 이행하게 되면 그런 꼴에 놓이게 되는 거 아니야?”-이미 자네가 사라지고 난 이후의 세계를 관람할 수 있는 방안 정도는 마련해뒀네.
“...치밀도 하셔라.”
애석한 미소를 짓는 강수가 문득 자신의 뒤에 일어나는 거대한 기운을 감지하고 그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시곗바늘이 수 없이 움직이는 공간의 중심에 돌연히 나타난 작은 문. 그것이 내기의 결과를 이행하기 위한 통로임을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자네가 선택한 길인 만큼 후회는 없을 거라고 생각하네.
“후회를 왜 해?”
피식, 웃음을 터트리는 강수가 조용히 문을 향해 손을 뻗었다.
[승리의 보상은?]
[던전을 모두 붕괴시키는 데에 성공한 것이니, 자네가 이제까지 겪어온 과거에 대한 수정과, 밝고 희망찬 미래가 되겠지.]
[패배의 대가는?]
[이제까지보다도 훨씬 더 고통스러울 지도 모를 비극.]
그는 내기에서 패배했고, 그 패배의 대가를 감당할 자신을 가지고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는 데에 망설임은 없다.
“내가 처음부터 바랬던 건...이 모든 걸 끝내는 거였는데.”
영원히 고통받아야 할 자신의 운명에 종지부를 찍게 될 순간이 찾아왔다. 마다하는 것이 더 이상한 것이다.
설령 뒤에 있는 자가 자신의 미련을 자극하려 한다 하더라도 소용 없다. 정해진 과거는 번복하는 것이 불가능하니까.
-끝이라...적어도 나는 그 말에 부정을 표하고 싶군.
“이제부터 시작이야...그런 뻔한 멘트를 할 생각이라면 집어 치워.”
시작 따위가 아니다. 어차피 이 이야기의 결말은 자신이 죽음을 맞이한 그 순간부터 정해진 것이나 다름이 없으니까.
자신과 연을 맺은 그들이 자신의 바램대로 움직여준다면........
“...잘 해낼 수 있겠지. 분명히.”
부싯돌이 튀기는 소리와 함께 피어오른 라이터의 불빛이 입에 물고 있는 담배의 끝에 열을 가했다.
씁쓸한 연기가 폐를 가득 채우는 것을 느낀 그가 하얀 잔상을 남기며 문을 열어제쳤다.
“가볼까. 지옥으로.”
눈앞에 드리워진 거대한 심연을 마주한 그가 자조를 지으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