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5화. 시작은 거짓으로, 끝은 이별로. -->
“연인과 함께 하기 이전의 자네는 스스로의 행복보다도,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비극을 더 신경 쓰며 살아온 겁쟁이었지. 그건 연인을 만나고 난 이후에도, 던전이 출몰하고 난 이후에도, 세계가 던전에 집어 삼켜진 후에도 줄곧 유지되어온 태도였어.”
연인의 썩어문드러진 시체를 불태우고, 그 잿가루가 흩날리는 것을 지켜보는 남자의 눈은 죽은 듯이 조용했다.
“그게 연인이 죽고 난 이후라고 해서 달라질 거라고 생각하나? 아니, 전혀. 그건 자네에게 큰 깨달음을 주었을 뿐이지. 언젠가 끔찍한 최후를 맞이할 인연을 맺은 대상들도, 자신과 같은 이상을 꿈꾸는 자들도, 해를 입히지 않는 자들도, 극악무도한 죄인들이 자신의 눈앞에서 벌이는 성가신 짓거리도. 살아있는 한 그 모든 것을 지켜보고 기억할 수밖에 없는 ‘영원한 방관자’가 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간사한 미소가 붉게 물들어지며 그의 숨통을 죄어오듯 벌어졌다.
“미래를 알고 있는 주제에 어째서 불사가 되는 것을 포기했지? 어째서 자신이 죽을 지도 모르는 능력을 선택하며 위험을 부담했을까. 그건 자네가 겁쟁이이기 때문이지. 아무리 다시 한 번 기회가 주어지더라도, 자네는 일이 잘못되었을 때를 우선으로 떠올렸을 거야. 자신의 기억보다도 훨씬 더 끔찍하고 암담한 일이 기다리고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상상을...그것이 앞으로도 끝없이 자네를 괴롭히고 있으리라 생각했기에, 자네는 자연스러움을 가장하며 스스로의 목숨을 언제든 쉽게 끊을 수 있는 방책을 마련했던 것이지. 과거로 돌아와 느낀 연인과의 행복을 뒤로 한 채...아니, 오히려 자네는 자신의 연인이 살아있다는 그 사실에 두려움을 느끼고 있는 거야.”
화면이 반전되고 그곳에 사랑하는 연인의 웃는 얼굴이 나타났다.
그것을 본 남자의 몸에 미약한 경련이 일어났을 때 보스몬스터의 붉은 두 눈이 게슴츠레 변해갔다.
여기서 더 자극을 준다면 어떻게 될까. 보스몬스터는 그것을 궁금해하고 있었다.
“과거로 돌아와도 기억은 남지. 기억 속에 존재하는 그녀의 끔찍한 최후가 현 시간의 그녀와 비쳐 보이지 않을 리가 없잖은가? 논점은 여인에게 느끼고 있는 죄책감의 무게와, 이후에 그 여인이 끔찍하게 죽는 것을 보고 싶지 않다는 불안함...자네는 분명 여인을 본 순간 무의식적으로 그걸 느꼈을 거야. 분명히........”
“너무 흥분했어.”
자신의 뒤에 바짝 달라붙어 조롱을 토하는 보스몬스터를 향해 강수는 슬며시 손을 내밀었다.
가볍게 턱을 밀쳐내는 손짓엔 그 어떤 힘도 실려있지 않았다.
그저 시끄러운 녀석을 밀어 내는 것에 불과한 행동이었다.
“그래 뭐, 잘 짜여진 이야기이긴 하네.”
그가 미약한 감탄을 섞으며 말했다.
과거로 돌아온 자가 두 사람을 대신해 희생했다는 것에 그보다 더 좋은 개연성을 가진 말이 뭐가 있을까?
아니, 있어도 아무래도 좋은 일이다.
그걸 자신이 인정하건 말건 모두 다 변명이 될 뿐이니까.
“마냥 그랬다면 처음부터 바로 옥상에서 떨어졌을 텐데, 내가 왜 이렇게까지 고생을 했는지.”
과거로 돌아왔을 때엔 내기에 대한 것을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지만, 적어도 보스몬스터를 마주하기 이전의 기억은 모두 가지고 있었다.
그 기억을 모두 도출해낸 결론이, 단순히 미래에 있을 일들을 수습하지 못할 것을 두려워하기만 하는 것이었다면 던전에 들어가기보단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리는 쪽을 택했을 것이다.
그렇지 않았던 건 분명 그 나름대로의 이유가 존재하고 있었다.
“그건 자네가 연인 때문이 아닌가? 자신이 죽고 난 이후에 겪게 될 비극적인 미래에 그녀가 여자가 어떤 미래를 보게 될 지를........”
“시체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잔뜩 죽여 온 녀석이 이제 와서 그 사람 하나를 걱정하고 개고생을 하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
강수의 말에 보스몬스터가 잠시 침묵을 했다.
흥분하여 달려들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 예상과는 달리 그는 침착하게 자신이 한 말의 허점을 파고들어오고 있었다.
“...그렇군, 내가 처음부터 잘못 짚었던 건가.”
머지않아 실소와 함께 이어지는 보스몬스터의 말에 강수가 코웃음을 터트렸다.
잘못 짚었다...마냥 틀린 말은 아니다.
그의 말대로 그는 처음부터 부정적인 부분을 먼저 생각했던 사람이었으니까.
“그럴싸하게 말한 부분을 바로 지적받으니 꼴이 말이 아니군.”
“애써 이해하려고 그러니까 머리가 아픈 거지.”
아무리 세상이 모두 정해진 법칙 하에 돌아간다 할지라도 인간은, 그리고 인간과 인간이 만나며 일어나는 사건은 종잡을 수 없는 법이다.
그것은 과거로 돌아오고 난 이후에도 자신의 뜻대로 돌아가지 않는 상황들을 연이어 마주하며 깨달은 사실이었다.
그걸 절대자의 위치에 올라서 있는 녀석이 이해하길 바라는 데엔 무리가 있겠지만, 애초에 이해해주길 바라지도 않는다.
빠르든 늦든, 머지않아 자신과 그의 잡담도 끝이 날 테니까.
그렇다면 끝으로 나아가기 전에, 허락이 된다면 한 가지 하고 싶은 일이 있었다.
“아직 시간 좀 남은 것 같은데 영화나 한 편 보자고.”
강수의 말과 함께 스크린에 나타나있는 화면이 반전되었다.
보스몬스터가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붉게 물들어진 눈을 화면쪽으로 향했다.
화면에 나타난 것은 한 명의 여자아이였다.
가련하고 연약하지만 그렇기에 많은 이들이 사랑하고, 무지하지만 그렇기에 오염되지 않고 순수한...어쩌면 이 세상에서 가장 깨끗하고 아름다울지도 모르는 존재.
그 소녀는 주변의 장대한 건물들에 어울리는 고결한 옷을 걸치고 있었다.
“흠, 귀족인가.”
“틀린 말은 아니지만 내가 살던 세계의 식으로 말하면...그냥 부잣집 아가씨지.”
“상류층의 자재가 주인공인 이야기라. 흥미롭군.”
“흥미로울 거 하나도 없는 얘기야. 들고 태어난 수저가 별로 의미 없는 이야기라서.”
한숨과 함께 그의 입가에 쓴웃음이 그려졌다.
“할아버지가 대기업 회장이고 아버지는 그 기업을 물려받을 후계자. 거기까지만 들으면 아주 인생 팔자가 다 편 것 같지만...정작 외가 쪽에 큰 문제가 있었어.”
“어미에게 지병이 있는 건가? 아니면 신분의 차이?”
“조폭 딸내미. 그것도 그 쪽 세계에선 아주 거장이라고 불리는 곳의.”
“...워우.”
강수의 말에 보스몬스터의 두 눈이 휘둥그렇게 벌어졌다.
절대적인 존재라 하더라도 예상하지 못하는 게 있다는 건가. 아니면 이야기를 관람하는 재미를 위해 스포일러에 해당하는 얘기를 보는 걸 꺼려하는 것일까.
어느 쪽이건 이야기를 멈출 생각은 없었다.
강수가 슬며시 손짓을 하자 또 다시 화면이 반전되며 새로운 그림이 떠올랐다.
각목을 들고 있는 무리에서 뛰쳐나온 한 다정한 여자가 깔끔하고 세련된 남자와 어울리고 다니는 부분이었다.
“당시에 여자 쪽은 자기 집안에 불만이 크게 느껴졌고, 그래서 집을 뛰쳐나와 신분을 숨긴 채 살아가고 있었지. 그러다가 만난 게 저 남자였고...이후는 뭐 말 안 해도 알겠지?”
또 다시 화면이 반전되었다. 여인의 손엔 갓난애기가 나타나 있었지만, 정작 그 여인을 바라보는 남자의 시선은 좋지 못했다.
“애가 생긴 걸 뒤늦게 알고, 남자가 그제야 여자의 정체를 알게 되었지. 대기업의 후계자가 다른 것도 아니고 조폭의...그것도 ‘자기 그룹에서 더러운 일을 도맡아서 했던 기록이 있는 녀석의 피붙이’와 몸을 섞었다는 걸 어떻게 받아들일 거라 생각해?”
그리 남자가 나쁘다고만 볼 순 없었다. 여자 쪽에서 자신의 사정을 숨기고 어울린 것이고, 아이가 생겼을 당시 ‘책임을 지겠다’고 말을 하며 영원한 사랑을 맹세하는 남자를 보며 신뢰를 산 결과물일 뿐이니까.
그저 운이 없었을 뿐이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라면 그런 헤프닝으로 받아들이고 넘어가겠지만, 정작 그 헤프닝으로 인해 태어난 생명은 세상에 나온 이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성장을 하게 되었다.
“처음엔 그래도 자기가 벌인 일이라고 남자가 거둬들였지만 애비 노릇 따윈 전혀 못해먹었지. 언제나 더러운 자식새끼 보듯이 쳐다보고...그 취급을 견디지 못한 여자가 결국 자식을 데리고 자기가 그토록 혐오했던 친가로 돌아갔어.”
화면이 반전되며 남자의 곁을 떠나는 여인의 모습이 나타났다. 여인은 험악한 인상의 남자들이 모인 곳으로 향해, 자신이 가지게 된 자식을 보살필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달라고 말을 했다.
돌연히 생겨나게 된 자식을 곱게 볼 리 없다. 하물며 가출한 딸의 자식이라면 더더욱.
하지만 그럼에도 여인은 굴하지 않고 그들을 설득했고, 끝내 그들의 일원으로 다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모정이라는 건가.”
“...그게 또 어긋났다는 게 문제지만.”
작은 한숨과 함께 반전된 화면에 검은 테로 이어진 사진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소녀를 세상에 태어나게 만들고, 그 소녀를 내팽개쳤던 아비의 것이었다.
“아주 대단한 사람이었지만 사고까진 어떻게 하질 못했지. 뭐, 실제로 사고였는지 ‘권력 싸움’의 희생양이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대기업 회장의 후계자 자리가 어지간히도 좋아야 말이지.”
심각한 이야기임에도 그는 큭큭 웃음을 터트릴 뿐이었다. 마치 싸구려 영화를 볼 때의 감상과도 같았다.
“그런 녀석이라도 사랑했는지 어미가 엉엉 울고, 어린 딸내미는 그 어미의 울음을 보고 덩달아 울고...그렇게 슬퍼할 시간이 이어지고 잊혀지는가 싶더니, 친가 쪽에서 다짜고짜 조폭집단에 협박장을 들이밀고 딸을 내놓으라고 윽박을 지르기 시작했지.”
자식을 버린 아비가 죽었음에도 친가 쪽에서 양육권을 주장하는 그 행동이 어처구니 없게 느껴졌겠지만, 주먹으로 어떻게 하기엔 급의 차이가 크게 났다.
결국 그들은 여인과 여인의 딸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거두어 들인 건, 도구로써 쓰인 건가.”
“죽은 후계자를 조금이라도 동정할 거리가 있어야 자기들이 저지른 비리를 묻어가기 쉬워지니까.”
거기에 딱 얻어 걸렸던 것이 저 모녀였다는 것이다.
죽은 자를 회고하는 애딸린 과부만큼 사람들의 동정을 살 수 있을 자가 또 누가 있을까?
“자기들이 거두어들였으니 자기들의 환경에 맞춰서 커야 한다는 강요가 이어졌지. 그걸 못 할때마다 ‘천박한 피를 이어받은 꼬마’라는 말을 주절대면서...."
모든 게 다 갖춰져 있는 환경이었지만 자유는 없었다.
화면 속의 소녀는 언제나 상류층으로써 갖춰야 할 소양을 강요받으며 살았다.
그 가엾은 소녀가 시간이 지나 차차 성장해나가는 것이 화면에 연달아 나타났다.
어느 정도 이어졌을까, 머지않아 한 장면에서 영상이 멈춰졌을 무렵, 강수의 얼굴에 어이를 상실한 미소가 그려졌다.
“그게 폭발한 게 사춘기 시절. 수틀리는 건 다 때려부수고 다녔던 질풍노도의 시기지.”
“때려부쉈다는 건 비유적 표현인가?”
“아니, 말 그대로 물리적으로 다 때려 부셨다고.”
전환된 화면에 나타나있는 건 열이 넘는 불량청소년들을 무릎 꿇린 채 당당히 팔짱을 끼고 있는 한 여고생의 모습이었다.
상류층에 걸맞는 만큼 국내에서 내로라하는 집안의 자재들이 모인 학교다. 당연히 어지간한 아이들은커녕 선생들조차도 손을 대기 꺼려하는 아이들이다.
그랬던 녀석들을, 그 여고생은 그저 눈에 거슬린다는 짓을 저지른다는 이유만으로 모조리 때려눕히고 그들의 위에 군림했다.
“누가 알았겠어. 거의 평생을 상류층 교육을 받으며 자라온 부잣집 아가씨가 사실 어미 쪽 피를 더 짙게 이어받은 천성 깡패라는 걸.”
“...남 일을 하듯이 말하는군. 자네와 무관계한 이야기는 아닐 텐데.
”“공교롭게도 저 때는 서로가 남남이었으니까.”
자조를 짓는 그가 어깨를 으쓱 움직였다.
당당한 소녀의 모습을 보고 있는 그의 눈엔 미약한 측은함이 서려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