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4화. 죄악의 천칭 -->
[지금부터 할 말만 전할 테니까 대답하지 말고 듣기만 해.]
보스몬스터를 몰아세우고 있는 두 사람은 자신들의 가슴에 손을 박아넣은 그가 속삭였던 말을 떠올려갔다.
[내가 찍은 19레벨의 특성은 환원...그룹으로 지정한 사람을 한정으로 대상이 지니고 있는 생명력과 능력을 모조리 흡수해버리는 능력이야. 어떤 식으로든 잘 구슬려서 그룹으로 만들기만 하면 대상이 누구건 무조건적으로 죽여버릴 수 있는 사기적인 특성이지. 덤으로 그 대상이 지니고 있는 능력을 흡수하는 것도 가능하고.]
두 사람 모두 그가 자신들을 죽이고 능력을 흡수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쓰러트릴 수 없을 정도의 강적이었으니까.
원망을 한다면 그걸 사전에 얘기하지 않고 왔다는 것이었다.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었던 건 아니겠지만, 끝내 자신들의 강함이 보스몬스터에게 미치지 못했을 때를 대비한 비장의 카드 정도는 자신들에게 말해줬으면 했으니까.
그에 대해 가지게 된 불만은 거기서 끝날 뿐이었다. 두 사람 모두 죽음을 각오하고 이곳에 온 것이었으니까.
...그 이후에 이어지는 말은 두 사람의 예상을 아득히 넘어서는 것이었다.
[그리고 20레벨에 찍은 이 특성의 강화판은은 흡수할 수 있는 능력의 수를 3개로 늘리고, 역으로 자신이 흡수한 힘이나 생명력을 다른 그룹원에게 전달할 수 있는 부가적인 특성이야.]
그 말을 들었을 때 두 사람은 자신들의 귀를 의심했다.
3개로 늘린다면 그저 두 사람의 힘과 능력을 흡수하고 그걸로 끝을 내면 된다. 설령 사실이라도 굳이 뒷내용을 거론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들을 시험하듯 미련을 남길 말을 했다. 마지막 순간에 자신들을 놀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두 사람 모두, 그가 자신들을 대신해 희생하겠다는 생각 따윈 추호도 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보스몬스터를 쓰러트리고, 더욱 나아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던전을 붕괴시켜 세계에 평화를 가져오겠다는 원대한 목적을 가진 사람이었으니까.
그런 자가 자신들에게 힘을 주입하고 목숨을 걸겠다고?
듣는 내내 귀를 의심했지만 그는 개의치 않고 두 사람을 향해 말을 이어갔다.
[가능한 선에서 육체능력이 다 할 때까지 보스몬스터 녀석을 몰아세운데다...소실의 인까지 나한테 달았어. 여기까지 떠먹여줬는데, 이기지 못할 리 없겠지?]
말을 끝맺었을 무렵 힘이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지만, 그는 두 사람이 날뛰는 것을 방지하듯 조용히 두 사람의 몸을 바닥에 눕혀갔다.
[쓰러진 척 하고 있어. 시체들 어그로가 나한테 끌렸을 때 신호할 테니까.]
그는 그렇게 자신들에게 힘을 전달하고.
보스몬스터가 걸은 각인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약해질대로 약해진 몸으로 시체들의 대군의 앞에 홀로 걸음을 옮겨갔다.
*****
-말도 안 돼...말도 안 된다고!!!
괴성을 내지르는 보스몬스터가 억지로 끌어낸 힘으로 스스로의 몸을 비대하게 키워갔다. 단순히 썩은 지방으로 몸을 포갠 것에 불과하지만, 그 경도는 본체를 보호하기 위한 갑옷의 노릇을 하기엔 부족함이 없었다.
-콰앙!
요한은 그 갑주를 날카롭게 깎아낸 전격의 창을 이용하여 단숨에 관통시켰다.
심장에 처박힌 전격이 몸 곳곳에 스며들며 마비를 자아내었을 때, 그 빈틈을 노린 소연의 공격이 보스몬스터의 몸을 꿰뚫었다.
그 고통조차도 보스몬스터의 이성을 돌려놓는데엔 무리가 있었다. 두 사람의 공세를 버티면서도 고에르의 증오는 어김없이 시체들에게 둘러싸인 연약한 녀석에게로 향해져 있었다.
이전처럼 시체들의 몸을 쥐어터트리긴커녕 그들의 공겪을 겨우 버텨내는 것이 고작인 인간이다. 눈빛에는 힘이 실려 있지만 궁지에 몰린 상태에서 발휘하는 살의보다 무의미한 건 존재하지 않는다.
하물며 자신에게 생명력을 지속적으로 흡수되고 있는 와중에도....
아니, 처음에 흡수되었던 생명력이 터무니없이 약화되어있는 것이 지금 이 순간 확실하게 느껴지고 있었다.
그가 지니고 있는 ‘부분재생’능력으로 각인이 새겨져 있는 손에 재생력을 집중하여, 자신에게 전송되는 힘을 아주 잠시만 증폭시켜 일시적으로 힘이 증가했다고 눈속임을 한 것이다.
고작 그것을 행하는 것만으로도 다른 부분에 가해지는 재생력이 소실되어 목숨이 위태로워질 터인데.
목숨을 건 도박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자신이 먼저 둘에게 죽는가, 그가 시체들에게 둘러싸여 죽임을 당하는가. 그런 문제도 아니다.
그는 처음부터 자신을 ‘버리는 말’로 써먹기 위해 두 사람에게 힘을 전가한 것이다.
-대체 어째서냐...
-퍼엉!
몸에 스며든 전격이 근육을 폭발시키는 굉음이 울려퍼졌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시체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자를 향해 오열을 터트렸다.
-이제까지 많은 이들을 죽여온 네가 희생을 자처하며 다른 이들에게 일을 떠맡긴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를...아니, 떠맡기는 것조차 아니야. 과거로 돌아옴으로써 모든 것을 알고 있는 네가 목숨을 져버린다는 건 목적을 포기하고 모든 책임을 내팽개치겠다는 것으로밖에 해석되질 않아!!
“........”
일순간 두 사람이 가하는 공격이 멈췄을 무렵 고에르의 입가에 진한 미소가 그려졌다.
-너희 둘도 분명 그렇게 생각하겠지? 너희가 봐와온 저 자는 절대로 자기를 희생시킬 만한 자가 아니야...분명 무언가 속이는 것이, 꿍꿍이가 있는 게 분명해. 분명히...분명히!!
아주 작은 의구심. 그것을 자극함으로써 생겨나는 균열. 그 부분을 노리고 반격을 가한다면 어떻게든 전세를 역전하는 것이 가능할지도 모른다.
그 실없는 생각은 머지않아 이어지는 요한의 포격에 증발하여 사라졌다.
-콰앙!
전신의 수분이 증발했을 때, 그를 주시하고 있는 요한의 양 손에 힘이 실렸다.
힘을 전가받은 그는 온몸에 나있는 부상이 모조리 회복되어있을 뿐만 아니라 강력한 전격을 몇 방이고 쏘아보낼 수 있을 정도의 육체능력을 손에 넣은 상태였다.
"쓰잘데기 없는 소리 씨부려대지 마. 꿍꿍이가 있다는 건 네 녀석보다 우리가 훨씬 더 잘 알고 있으니까.”
-키에아아아!!!
재생력을 상회하는 전격이 생명력의 끝자락에 도달했을 무렵 위기감이 이성을 집어삼킨 고에르가 모든 힘을 쥐어짜내어 주술을 사용했다.
사방에서 쏟아져내리는 금속의 폭풍, 그 속에서 기어오르는 썩은 시체들의 비명소리. 그 모든 것이 두 사람을 노리고 휩쓸고 들었지만, 무차별적으로 쏘아지는 공격으론 두 사람을 공격할 수 없었다.
-푸욱!
자신의 뒤통수를 꿰뚫고 들어온 큼지막한 금속덩어리를 눈치 챈 고에르가 조각나가는 두 눈을 뒤쪽으로 향했다.
활을 대신해 금속으로 이루어진 부메랑을 집어던진 여자는 자신을 주시하고 있는 외눈에 들끓는 살의를 표출하고 있었다.
“당신이 느끼는 의문은 저희들 역시도 느끼고 있는 겁니다.”
말 그대로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미래에서 옴으로써 온갖 비극을 겪은 자가 어떻게 자기희생 따위를 자처할 수 있었는지.
하물며 그가 어떤 사람인지 함께 다니며 질리도록 실감한 상태인 만큼 더더욱.
“하지만 그 생각에 대한 결론은 나중에 내려도 좋아요. 아니, 늦어도 상관 없습니다. 지금은 당신을 쓰러트리는 게 더 중요하니까.”
[가능한 선에서 육체능력이 다 할 때까지 보스몬스터 녀석을 몰아세운데다...소실의 인까지 나한테 달았어. 여기까지 떠먹여줬는데, 이기지 못할 리 없겠지?]
마지막에 그런 말을 하며, 그런 얼굴을 한 사람을 이해할 수 없고 믿을 수 없다고 물러서 있으라니, 여기까지 오고서 그 정도로 주저할 수는 없었다.
-퍼칵!
연달아 쏘아지는 화살에 재생되어가는 안면이 또 다시 뭉개져 내렸다.
이제는 한계에 치달은 육신을 겨우 가다듬어 두 눈만을 재생시킨 고에르가 강수를 주시한 채 오열을 터트렸다.
-아둔한 자식!!!! 겨우 과거로 돌아와 모든 비극을 바꿀 수 있는 기회를 손에 넣었다! 그것을 바꿀 수 있는 힘까지 제것으로 만들 수 있는 기회를 얻었는데도! 그런데 네 녀석은...고작 나 하나만을 죽이는 것으로 만족하고 죽어갈 생각이냐!? 이 세계의 존망이 어떻게 되든 상관하지 않고!?
“보스몬스터란 작자가 세계의 존망이 어떠냐느니...아주 대단한 성자 나셨어.”
고에르의 힘이 약화됨에 따라 시체들이 픽픽 쓰러져나간다.
그 속에서 다 죽어가는 몸을 이끌며 시체들을 내쳐가는 강수가 흐느적거리는 몸을 바로잡으며 자신을 주시하는 고에르와 눈을 마주쳤다.
“그럼 나도 하나만 물어보자...나랑, 지금 네가 싸우고 있는 그 둘...어느 쪽이 더 강한 거 같냐?”
그 말의 의미를 미처 깨닫기도 전 전격과 화살의 세례가 고에르의 몸을 무차별적으로 찢어발겼다.
두 사람의 공격을 버티지 못하고 무너져내려가는 보스몬스터를 주시하던 강수가 끝내 몸을 자빠트렸다.
아직 보스몬스터의 목숨이 붙어있는 상태, 자신의 얼마 안 되는 생명력조차 보스몬스터에게로 전가되고 있는 실세다.
시체들에게 살의 대부분을 물어뜯겨 뼈가 고스란히 들어날 정도다. 사방으로 흘러내리는 출혈조차도, 두 사람에게 세린과 자신의 능력을 모조리 건네주어 막아내는 것이 불가능하다.
얼마 남지 않은 생명력으로 겨우 숨통이나 유지할 뿐인 상태.
그런 몰골이 되어있음에도 그의 얼굴은 미약한 만족감이 그려져 있었다.
[두 사람도...이렇게, 이용할 생각인가요?]
[그렇게 되기 전에 끝내야지.]
이용을 하겠다고...그 말에 거짓은 고하지 않았다.
실제로 그는 두 사람을 이용하고, 앞으로도 계속 이용할 생각이니까.
“약해졌다, 하더라도...역시, 보스몬스터는...보스몬스터인가........”
모든 것을 알고 있어도, 불사신이었을 때와는 전혀 다르다.
그는 이미 다른 길을 선택했고, 그 길을 자신이 아닌 다른 이들을 주축으로 삼아 모든 일을 해결하고자 결심을 한 상태였다.
미래의 자신보다 훨씬 강한 자를, 그러한 가능성이 보이는 자를........
그런 자들과 ‘함께’ 싸워나갈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그걸 지향하고 싶었다.
[살고 싶지 않아?]
[살리고, 싶습니다.]
그런 가능성을 가지고 있던 자 중 한 명이 그의 앞에서 목숨을 잃어버렸다.
[조금이라도, 더 많이...살리고 싶어요. 살리고 싶어서...이제까지, 계속 여기에 남아있었던 겁니다.]
그럼에도 그는 최후의 순간에도 절망하지 않고, 자신이 죽고 난 이후의 미래를 걱정하고 있었다.
고작 한 사람만을 위해 세계를 구하려는 것이 아닌, 처음부터 자신이 할 수 있는 선에서 최대한의 사람을 구하고자 하는 그는 분명 영웅이라는 이름에 걸맞는 자였을 것이다.
비겁하게 도망만 치던 과거와는 달리, 그리고 끝내 멸망한 세계를 다시 한 번 멸망시켜버린 자신과는 달리.
"굳이 그때, 네가 그런 말을 해서, 이런 결정을 내린 건 아니야."
굳이 그 녀석처럼 자신의 희생으로 다수를 살리는 일을 일삼을 생각은 없었다.
그는 그저 자신을 대신해 싸우는 두 사람에게서 기회를 보았을 뿐이다.
[당신을...믿을게요.]
자신과, 자신을 먼저 대신해 죽어간 그 여자의 눈이 틀리지 않기를 빌면서.
[...세상엔, 두 사람이 필요해요. 당신도, 그렇게 생각하죠?]
“너도, 마찬가지고......."
희미해져가는 의식 속에서, 그의 귀엔 보스몬스터의 괴성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이제 시체들을 유지할 힘조차 존재하지 않는 보스몬스터를 상대로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그저 기다리고, 기대하는 것 뿐이었다.
최후에 남게 된 두 사람이 이 이야기의 마지막을 온전히 장식해주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