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2화. 죽은 자들의 왕 -->
어둠이 몸을 감싼 순간 느껴졌던 무게감이 어느 샌가 사라졌다. 질끈 감았던 눈을 뜬 네 사람은 경계심을 곤두세운 채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사방이 모두 어둠으로 뒤덮여 있는 곳이었다. 한치의 앞도 알 수 없는 환경은 무지한 이들로 하여금 공포를 느끼게 하는 데에 부족함이 없었다.
“설마 뭔가 잘못된 건.......”
“쉿.”
소연의 다급함에 강수가 제지를 가했다. 희미하게 보이는 인으로 그가 자신의 입가에 손을 올리고 있음을 확인한다.
세 사람은 선두에 서있는 그의 뒤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머지않아 그들의 눈에 어둠 속에서 새어나오는 희미한 붉은 빛이 들어왔다.
두 개의 붉은 반점...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느낌이었다.
-왔나.
붉은 빛이 번뜩이며 그들에게로 방향이 틀어졌다. 허공을 날고 있는 두 개의 붉은 점은 마치 사람의 눈을 연상케 하고 있었다.
“그래, 왔지. 처음 만났을 때 한 말을 지키려고.”
-...처음 만났을 때.
노쇠한 중얼거림과 함께 붉은 빛이 잠시 협소해졌다. 마치 그의 얼굴을 자세히 쳐다보고 무언가를 떠올리려는 듯 보였다.
-흠, 그렇군. 자네는...이 던전에 처음 왔을 당시 유일하게 당황하지 않았던 자였군. 여기까지 살아서 오다니. 참으로 대단해.
던전에 들어가 살아남았다는 것만으로도 칭찬받아야 마땅한 일이다. 하물며 던전의 지배자가 하는 칭찬엔 평범한 사람이 하는 것보다도 큰 무게가 실려있다.
다름 아닌 자신의 앞까지 도달해온 자들이라면 더더욱.
-이 던전의 곳곳이 약해져 간다는 건 던전의 힘에 의해 움직이는 존재들이 학살당하고 있다는 것, 그건 다시 말해 던전에 존재하는 이들의 평균적인 강함이 높아졌다는 의미이고, 이곳에 도전할 자들의 힘 역시 강해진다는 의미이지.
“허, 그래서...보스몬스터인 그 쪽 입장에선 별로 달갑지 않다는 뜻이야?”
-아니, 전혀. 오히려 환영해야 할 일이지.
붉은 두 눈이 좁아지며 눈웃음으로 변했다.
-한 곳에 앉아, 자신이 이전에 지었던 죄를 되새기는 시간을 가진다는 건 괴로운 일이니 말이야. 조금이라도 더 빨리 이곳에서부터 해방되고 싶은 마음이 있지.
“해방되고 싶다면 아무것도 하지 말고 가만히 있어. 고통 없이 한 방에 끝내줄 테니까.”
-그게 가능할 거라고 생각하나?
걷는 척 시늉을 하는 강수의 앞에 거대한 무언가가 엄습해왔다. 어두워서 자세히 보이지는 않았지만, 조금이라도 앞으로 다가갔다면 바로 짓눌렸을 기세였다.
-...아무리 내가 이 처지에서 벗어나고 싶다 한들, 이 공간의 억제력은 나를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아. 설령 이길 수 없는 싸움이라 하더라도 끝까지 싸움을 이어가도록 강요를 하지. 그건 미래에서 온 자네도 알고 있는 사실이 아닌가?
강수의 두 눈이 살짝 벌어졌다. 마치 예상치 못한 발언을 들은 사람의 반응이었다.
“설마 나 말고도 미래에서 온 자가 여기에 온 건가?”
-그럴 수도 있다만, 아쉽게도 죽인 자들을 일일이 기억하는 성격은 아니라서 말이야.
-화르륵!
불이 지펴지는 소리와 함께 그들이 지나온 길목에 푸르스름한 빛이 채워졌다. 입구의 양 옆에 기대어진 횃대에 푸른 불꽃이 일렁이며 주변을 밝힐 때, 그를 뒤따라오는 세 사람이 저마다 반응을 보였다.
“이건.......”
“악취미로군.”
소연의 당혹을 들은 요한이 이를 질끈 깨물었다.
주변은 시체로 도배되어 있었다. 난잡하게 잘려나간 시체부터 시작해 무언가에 뜯어먹힌 시체, 뼈와 살이 으스러지거나 아에 가루가 되어버린 자들도 존재했다.
모두가 제각각 다른 사인으로 이루어진 죽음. 그 시체로 도배된 땅을 주시하고 있던 세린이 입술을 내밀며 휘파람을 불었다.
“대단하네요. 이거. 전부 당신 작품인가요?”
-...놀라지 않는군. 하물며 작품이라고까지 말하다니.
“본질적으로는 당신과 같은 사람이니까요.”
그의 힘 없는 목소리에 세린이 조용히 대답했다.
“다만 저들의 시체에선 제가 이제껏 봐온 적이 없는 짙은 ‘악의’가 느껴지네요. 자신과는 전혀 무관계한 자를 살해하며 화를 풀어버리는...그런 잔인한 짓을 서슴없이.”
-그거야 내가 이 던전의 주인이니.......
“억제력에 의해 자리를 잡고 있다 하더라도 감정을 전혀 못 느끼는 건 아니겠죠. 혼자 끙끙 앓아대고 있다면 화풀이를 할 대상도 필요할 텐데.”
가운의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은 세린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 움직였다.
“설마 피치못해 이곳에 있다 해서 자신을 억울한 인간이라 포장을 할 생각은 아니겠죠?
-크하하하하하하!!
도발적인 발언에 보스몬스터가 폭소를 터트리며 강수가 있는 쪽으로 고개를 틀었다.
-하나만 물어보지. 자네의 옆에 있는 저 여자도 미래에서 온 여자인가?
“말도 안 되는 소릴.만약 이 여자가 조금 더 오래 목숨을 부지하고 있었다면 내가 알고 있는 만큼 세계가 개판이 되진 않았을 거야.”
“........”
강수의 말에 세린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에 대수롭지 않게 시선을 거둔 강수가 입에 물고 있는 담배를 슬며시 손가락으로 떨어트렸다.
“어쨌든...대충 이번 말을 들어보면 보스몬스터라고 해서 들어온 사람이 미래에서 왔는가 아닌가는 구분 못 하는 것 같네.”
-그야 당연한 거 아닌가? 나는 그저 이곳에 자리를 잡고 있을 뿐인 파수꾼에 불과한 몸인 것을.
“누구에게 들었지?”
-말해줄 이유는 없네.
이어지는 단답에 강수가 코웃음을 터트렸다.
어차피 듣지 않아도 상관은 없다. 여기까지 오며 미래에서 온 놈들을 몇 명 마주하지 않았던가? 그들과 자신의 기억을 대조해보면 확신은 못하더라도 짐작은 할 수 있다.
애초에 과거로 돌아온 뚜렷한 이유를 알고 있는데 그 가능성을 파악하지 못하는 쪽이 더 이상한 거겠지.
-여기까지 오는 데에 참으로 긴 여정이었겠군.
‘그 존재’에 대해 생각을 하고 있자 보스몬스터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가 내뱉어지자마자 입구 부근에 지펴져 있던 횃불의 앞에 있는 횃불에도 불이 비추어졌다.
더 많은 불빛이 입구를 밝히고, 그에 따라 더 많은 시체가 그들의 발치에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 반대지. 오히려 준비할 시간도 적을 정도로 적었으니까.”
-내가 그렇게 얕잡아 보인 건가? 제대로 된 준비도 없이 쓰러트릴 수 있으리라 생각할 정도로?
“네 녀석이 이렇게 약해졌다는 걸 아는데도 죽치고 구경만 하고 있을 수는 없지.”
-화르륵!
또 다시 불이 붙으며 방이 더욱 밝아졌다. 강수는 개의치 않고 그를 향해 대체 의문을 내뱉었다.
“그래도 역시 이상한 점이 있는데...아무리 섬기던 주인님이 죽어버렸다 해도 힘을 끌어다 쓰면서까지 던전 내에 몬스터들을 채워넣는 건 너무 성급한 결정 아니야?”
-내 주인은 먼 옛날에 목숨을 잃었다네. 남은 건 추악하기 그지없는 살덩어리 뿐이지.
-화르르르륵!
입구에서부터 시작된 횃불에 줄지어 푸른빛이 붙어났다. 거대한 돔의 형태를 이루고 있는 방의 절반가량에 불이 채워졌을 무렵 바닥에 널브러진 수백의 시체들이 그들의 눈앞에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 피폐하고 더러운 오물을 내가 군림하고 있는 이 공간에서 지워준 건 정말로 감사해줄 일이야. 그 이상의 마음을...자네가 느끼게 해줄 수 있으면 좋으련만.
불빛이 미처 비쳐지지 않는 곳에 존재하는 보스몬스터가 붉은 눈을 부라리며 자신의 거대한 몸을 들어올렸다.
검은 가운에 둘러싸여진 그의 몸이 일으켜 세워진 순간, 한낱 인간에 불과한 그들은 범접할 수 없을 만큼 높은 곳까지 그의 얼굴이 들려졌다.
-고독하고, 무기력했지.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음에도 아무것도 바꿀 수 없었어.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기록’하는 것뿐이었으니까.
“...기록?”
-그래, 기록!
요한의 의문에 찬 중얼거림에 보스몬스터의 목소리가 방 안에 메아리쳤다.
-그저 왕명에 의해서 기록을 할 뿐이었다. 아무도 간섭하지 못하는 곳에 숨은 채, 그곳에서 모든 것을 보고, 모든 것을 기록하며, 그들이 죽어가는 것을 지켜보고 계속 지켜볼 뿐이었다. 추한 비명을 들으면서도 말 없이 울음을 삼키고, 그러면서도 비극으로 가득찬 세계를 계속 쳐다보고...그러면서도 아무하고도 어울리지 못하는 고독함을 혼자 유지하며, 내가 태어나고 자라나며 뿌리를 박았던 그 땅의 모든 것이 파멸로 밀어닥치는 그 순간까지 계속!! 그 이야기의 종지부를!! 모든 것이 끝이 난 후에 진상을 알게 된 내가 어떤 마음이 들었는지 그대들은 상상할 수 있겠나!?
-콰앙!!
육중한 손이 바닥을 내찍었다.
살 한 점 존재하지 않는, 뼈와 가죽으로 이루어진 앙상한 손에서 일어나리라곤 믿을 수 없을 정도의 괴력은 그가 내리찍은 땅을 부수고 주변에 균열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것을 몇 번이고 반복한 흔적이 그의 발치에 여럿 보이고 있었다.
-모든 것이 재로 돌아가는 것을 느꼈지.
이전의 폭주와는 달리 고요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말 그대로, 모든 게 불타올랐던 거야. 내가 살아온 세월도, 바쳐온 충성도, 죄책감도, 그리고 그들에 대한 증오마저도.
-화르륵.
끝내 방 안의 테두리를 둘러치고 있는 모든 횃불에 불이 붙고, 보스몬스터의 모습이 온전히 그들의 앞에 모습을 드러내었다.
검은 후드를 둘러치고 있는 거인. 후드의 밑으로 나있는 그림자의 밑엔 공허함으로 젖어있는 두 눈이 흉흉한 빛을 내며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가운이 미처 가리지 못하는 손과 발은 앙상하기 그지없었다. 거인의 몸이었지만 너무나도 가벼워 보이는 모습은 상식의 괴리에서 비롯된 기괴함을 자아내고 있었다.
-내가 봐온 모든 과거는 내 힘의 원동력이 되었지. 순수한 이들이 타락해가고, 죽어가는 자들을 보며 통곡을 내지르고, 살고자 하는 갈망은 추하기 그지없는 손으로, 충성심에서 빙자된 망령으로 만들었다. 그것이 나의...절망의 사도라 불렸던 자의 모든 것.
머지않아 그의 몸을 두르고 있는 검은 후드가 벗겨져 바닥에 쏟아져 내렸다.
‘수 많은 사람의 머리가 엮여 만들어진 거대한 신체’.
그렇게밖에 표현할 수 없는 것이 그곳에 앙상한 팔과 다리를 이어주고 있었다.
머리의 개수의 두 배만큼에 해당하는 안구와 그와 동등한 양의 입들이 벌어지고 닫히길 반복하며 끔찍한 기괴함을 연상케하고 있다.
그 모든 것을 통솔하리라 생각했던 붉은 빛을 자아내는 머리조차도 그런 덩어리들이 엮여 만들어진 부산물에 불과할 뿐.
-나는 시체의 군주, 죽은 자들의 왕이니라.
수많은 입들이 일제히 벌어지며 일어나는 작은 외침에 주변의 시체들이 미미하게 경련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얘긴 들었다만 이건 완전 공포영화가 따로 없네.”
요한이 자신의 머리에 쓰고 있는 베일을 바닥에 벗어던지며 자신의 인벤토리에서 쇠사슬을 꺼내들었다.
“내가 별별 B급 공포영화들을 다 봐왔다만, 역시 진짜는 진짜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다.”
“그렇게 가볍게 받아들일 일이 아니예요.”
소연이 자신의 손에 활대를 들어올리며 붉은 렌즈가 씌어진 왼쪽 눈으로 주변을 살펴보았다.
미미하게 움직임을 내던 시체들이 서서히 몸을 일으켜세우고 있다. 던전을 돌아다니며 보았던 언데드들과 유사했지만, 본질적으로 그들과는 전혀 다른 점이 존재하고 있었다.
“...이 시체들, 모두가 저희들과 같은 사람들이에요.”
“네, 이 던전에서 죽어나간 사람들이네요.”
약제사의 가방을 꺼내들고 그것을 유유히 뒤적이고 있던 세린이 자신의 목에 주삿바늘을 겨누었다.
“몇몇 익숙한 얼굴도 보이고...죽었는데도 왠지 안 보이는 얼굴도 존재하네요. 뭐, 전부가 들어온 건 아니지만 일단 저희들과 같은 생존자 중 이 던전에서 죽은 사람이 여기에서 모습을 드러낸다고 보면 되겠죠. 강수씨께서 말씀하셨던 것처럼.”
슬쩍 입에 담배를 문 채 삽자루를 들어올리는 강수에게 시선을 옮기는 세린이 눈웃음을 지었다. 그런 그녀의 시선을 느낀 강수가 피식 웃음을 터트리며 보스몬스터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돌아가는 건 이미 늦었으니까 죽을 각오로 싸우라고. 저 놈 모가지를 쳐내는 걸 목표로.”
-그래, 그걸 위해서 노력을 하라고. 나를 이곳에서 해방시키기 위해!!
사방으로 퍼져나가는 지독한 살기와 함께 시체들의 왕의 비통한 외침이 울려 퍼졌다.
-사자의 군대여! 이질적인 공간 속에 구속되어, 저들의 살을 난잡히 먹어치워 너희들의 뱃속을 채워 넣어라! 살아생전 너희들이 느껴온 모든 고통을 이 공간에서 내가 해방되는 순간까지 계속 퍼트리는 것이다!!!!
-쿠와아아악!
메마른 목에서 울려퍼지는 숨소리가 퍼져나가며 사자들의 살의가 그들에게로 쏘아졌다.
========== 작품 후기 ==========
라스트 보스 배틀 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