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2화. 죽은 자들의 왕 -->
“무사하셔서 다행이네요. 두 사람.
”“너희 둘도.”
소연의 말이 들려왔을 때 그제야 강수의 시선이 보스룸에서 거두어졌다. 혼탁한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자, 요한이 눈을 가리고 있는 선글라스를 치켜세우며 찡그린 시선을 그에게 보란 듯이 내세웠다.
“구린 냄새가 나네.”
“향수를 좀 독한 걸 썼으니까.”
“니 발 밑에 쏟아진 피나 제대로 지우고 말해라.”
“.......”
자신의 발치에 흩뿌려진 혈흔을 내려다본 강수가 코웃음을 터트리며 그것을 짓이기듯 발로 두드렸다.
태류에게서 이야기를 듣고 난 후 그들과의 전면전이 있을 거라고 생각을 했지만, 정작 누군가가 이미 일을 처리하고 난 후였다.
모든 공격을 반사해버리는 능력을 지닌 그와의 전면전은 지금의 상태에선 정말로 목숨을 걸어야만 가능한 일이었던 만큼 경계를 하고 있었건만........
[그래 씨발...왠 좆같은 새끼가 걸려서...능력을 봉인당했어...그래, 그렇다고!]
“...쉽게 풀리면 나야 좋지만.”
입에 물고 있는 담배를 떨어트리고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용할 수 있는 건 모두 이용해먹어야 하는 처지다. 자신에게 방해가 되는 자를 누가 처리해주었다면, 이후에 그 자가 자신의 앞길을 가로막지 않는 한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일이다.
지금은 그렇게 받아들이고 넘어가면 될 뿐이었다.
“여기까지 오느라 수고 많았어.”
조용히 자신을 뒤따라온 세 사람을 향해 말했다.
그리 크지 않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무게가 실려있는 목소리였다.
“원래라면 더 준비를 거쳐야 했지만, 지금이 이 던전을 공략할 수 있는 가장 최적의 순간이니까. 던전을 보강하고자 무리하게 힘을 끌어다 쓴 상태라 약해진 녀석이고...공략을 하려면 지금이 가장 적기라 할 수 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호락호락한 상대는 아니야. 뒤에 있는 녀석은 그 어떤 짓을 저질러도 죽지 않는 불사의 능력으로도 잡는 데에만 꼬박 1년을 소비했을 정도의 녀석이니까.”
자그마치 세계를 집어삼켰던 던전의 보스몬스터가 있는 입구를 지키고 있던 파수꾼 노릇을 했던 녀석이다.
그것을 떠올린 강수는 그와의 일전에서 있었던 끔찍한 기억을 삼키듯 숨을 삼켰다.
“그걸 너희들은 하나의 목숨만으로 처리를 해야 하는 거야.”
“그래서, 목숨 아까운 사람은 돌아가라고?”
씁쓸함이 서린 목소리에 요한이 입을 열었다.
“궁시렁대지 말고 그냥 들어가. 어차피 여기에 있는 놈들 다 너 따라 여기까지 온 건데.”
“.......”
강수의 시선이 슬며시 요한에게서 거두어지고 나머지 두 사람에게로 향해졌다. 세린은 말 없이 웃고 있었다. 사지를 앞둔 사람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평온한 얼굴이었다.
“이제 와서 쫓아내진 않겠죠?”
최후의 보루에서 만약을 걱정하는 소연이 강수를 향해 물었다. 강수는 그런 소연을 보며 작게 웃음을 터트린 채 조용히 등을 돌려 검은 문을 향해 손짓을 했다.
“그래, 시답잖은 말은 집어 치우자고. 말꼬리가 길어져봐야 미련만 더 생길 뿐이니까.”
중얼거림을 마지막으로 나머지 세 사람이 그를 따라 검은 문의 앞에 섰다.
준비가 된 자는 언제나 들어갈 수 있지만 나가는 것은 자유롭지 않은, 오직 각오가 된 자들만이 들어설 수 있는 공간.
그 입구를 앞둔 남자가 기나긴 싸움의 종지부를 찍을 준비를 취하며 손을 들어올렸다.
“가자, 지옥으로.”
머지않아 문에서 터져 나오는 검은 파도가 그들의 몸을 집어 삼켜버렸다.
*****
“이제야 가셨군.”
네 사람이 보스룸으로 들어간 직후, 그들이 지나온 곳과 다른 통로에 매복하고 있던 자가 슬쩍 그곳을 벗어나 그들이 떠나간 자리를 주시했다.
검었던 보스룸의 중심에 붉은 빛을 자아내는 자물쇠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그것은 내부에 보스를 공략하는 자들이 있을 때 외부에서의 출입을 허가하지 않는다는 표시였다.
그들이 온전히 보스룸에 들어간 것을 확인한 남자가 깊게 숨을 내쉬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뒤집어쓰고 있는 후드를 벗어던진 그는 자신의 잘려나간 오른팔을 내려다보며 자조를 터트렸다.
“어차피 내 도움 없어도 잘 할 녀석들인데 괜히 나섰나.”
온전히 들어가는 그들을 보고 있자니 팔까지 내주며 싸운 게 후회가 들었다.
어느 정도 각오는 했다만 설마 반사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을 줄이야. 미래에서 마주해본 적이 없는 적이었다 하더라도 상대가 너무 나빴다.
만약 대인용으로 제작해둔 능력을 소실시키는 무기가 없었다면 지금쯤 바닥에 널브러진 시체가 되어버린 건 자신이었을 테지.
“그래, 긍정적으로 받아들이자고. 나 정도나 되는 인간이 이렇게나 피해를 입을 정도의 상대를 제거해준 거잖아. 이 정도까지 해줬는데 제대로 못 해주면 억울하다는 말 밖에 할 게 없지.”
투덜대는 남자가 피식 웃음을 터트리며 보스룸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혹시 저랑 어디서 만나신 적 있으신가요?]
“...젠장, 역시 대신 갈 걸 그랬나.”
미련이 남은 것을 자각하고 보스룸을 쳐다본 채 뒷머리를 긁적였지만, 이미 한 번 포기한데다 그들이 들어가 버린 상황에서 정정을 요구할 수도 없다.
그저 이곳에서 그들이 보스룸에서의 일을 성공적으로 끝내기를 기대하는 것만이 자신에게 허락된 유일한 일이었다.
아무리 자신이 덮어씌운 책임을 고스란히 떠맡은 자가 신경 쓰인다 하더라도........
“결국 자네는 남는 쪽을 택한 건가.”
“........”
남자가 어깨에 지고 있던 검을 슬며시 바닥으로 늘어트리며 통로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어두운 통로 사이로 희미하게 엿보이는 검은 실루엣. 형상도 말도 인간의 것이었지만, 아무리 몬스터가 아니라 한들 적이 아닐 것이란 보장은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자네 정도 되는 실력자가 고작 ‘그런 녀석’에게 팔이 잘릴 줄이야. 미래를 알고 있어도 마주친 적이 없는 적이니, 이런 식으로 덜미가 잡혀버리고 마는군.”
“당신 나 알아?”
남자는 그에 본능적으로 적의를 표출했지만, 정작 중후한 목소리를 지닌 노인은 태연히 웃음을 터트릴 뿐이었다.
“공교롭게도 처음 보네만. 이번 시간대에도, 그리고 이후의 시간대에도.”
그 말이 현재의 인간에게 나올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알아차린 남자가 긴장한 마음을 다잡으며 그림자를 주시했다.
“그냥 이거 하나만 물어봅시다. 당신은 적입니까, 아군입니까?”
“적은 아니네.”
곧 통로 속에 숨어있는 존재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중절모를 쓰고 있는 중후한 인상의 노인. 어느 모로 보나 평범한 인간인데다 자신을 향한 위화감 따윈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지금은 지나가는 노인네 정도로만 알아두게나.”
“........”
인자한 목소리에 남자가 손에 쥐고 있는 칼을 끝내 거두어들였다.
“칼 겨눈 건 죄송하게 됐습니다. 그러니까........”
“주혁이라고 부르게나.”
“아, 네. 주혁 어르신. 저는 박지섭이라고 합니다만.”
한쪽만 남은 손으로 자신의 올백머리를 쓸어넘기는 그가 주저앉은 채 노인과 눈을 마주보았다.
“영감님도 미래에서 오셨습니까?”
“굳이 말하자면 그렇게 되겠지.”
클클, 웃음을 터트리는 주혁이 의미심장한 시선을 지섭에게로 보냈다.
“그걸 궁금해하는 건, 자신이 과거로 돌아온 이유를 알지 못하기 때문인가?”
“아, 그건.......”
“굳이 그런 걸 알려고 할 필요 없지 않나. 과거가 어떻든, 모든 것이 청산된 지금에선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인 것을.”
주혁의 눈이 미약하게 날카로운 빛을 내었다.
“그래, 미래가 중요한 것이지. 때문에 과거로 돌아온 자들은 모두 자신들이 알고 있는 것을 바탕으로 미래를 바꾸려 드는 것이지.”
“........”
“자네는 과거로 돌아옴으로써 뭔가 이루고 싶은 건 없나?”
지섭의 침묵에도 불구하고 노인은 아랑곳하지 않고 질문을 건네었다.
그 질문에 지섭이 곰곰이 뭔가를 생각하는가 싶더니, 이내 어깨를 으쓱 움직이며 가벼운 목소리를 내뱉었다.
“딱히 없습니다.”
의외의 대답을 들은 노인의 눈에 흥미가 일었지만, 그런 변화마저 지섭에게 있어선 보잘 것 없게 여겨지고 있었다.
“이유를 물어봐도 되겠나?”
“원하는 것이 없는 데에 굳이 이유같은 게 필요할까요?”
“원하는 것이 없는 자가 어째서 자신의 팔을 희생하면서까지 타인을 구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네만.”
“...젠장, 어디서부터 지켜보고 있었던 건지.”
노인의 말에 지섭이 허탈한 웃음을 터트렸다.
“욕심이라기보다는 죄책감에 가깝죠. 이번에 나선 건."
지섭이 자신의 잘려나간 팔을 내려다보며 얘기를 시작했다.
"과거로 돌아오기 전부터...그 이전에 던전에 휩쓸리기 이전부터 자포자기로 살던 인생이었어요.”
검도 대회에서 우승을 하는 등 성과를 낸 적도 있다. 그 경험을 살려 도장을 운영했지만, 시대가 시대인 만큼 정통적으로 운영을 하는 체육관들은 대개 문을 닫아버리고 만다.
그 역시 그런 식으로 세월의 흐름을 견디지 못하고 실추되어버린 낙오자였다. 그나마 다행인 건 술과 도박을 멀리 하는 건전한 생활을 일삼았다는 것 정도일까.
하지만 자극이 없는 만큼 삶은 언제나 공허했다. 앞으로 그런 공허한 삶에 뭘 채워넣어야 할지 고민을 하는 것만이 그에게 남은 유일한 과제였다.
그 과제를 푸는 중에 일어난 것이 바로 던전의 출몰이었다.
“던전이 출몰했을 때에도 막살다 죽으려고 막나갔는데, 거기에 운이 좀 겹치다보니 어느 샌가 살아남은 것도 모자라 유명세도 타게 됐더라고요.. 뭐, 그 후에 무리를 했다가 반쯤 폐인이 된 적도 있다만.......”
스스로의 어리석은 과거를 회고하는 그가 피식, 하고 코웃음을 터트렸다.
“그런 식으로 자기 몸 안 가리고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세계는 쫑나버렸죠. 그런 곳이라도 살아남으려고 이런 저런 일을 잔뜩 했는데...어느 날 제가 능력으로 만든 무기가 도적들 사이에서 고액에 거래되고 있다는 걸 알았어요.”
그 날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게 떠오르고 있다.
피해자들의 시체에 자신이 만든 무기가 꽂혀있는 것을 보았을 때, 자신의 경솔함이 자신 뿐만 아니라 다른 이에게도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건 제정신으로 견딜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스스로 목숨을 끊을까도 생각을 했지만, 이미 저질러놓고 도망치기엔 자신이 지은 죄가 너무나도 컸다.
“그 마음 좀 덜어내려고 사람 좀 모으고 마을을 만들었습니다. 언제부터인가 그들이 저를 대장으로 몰기 시작했죠. 간접적이라고는 하나 정신나간 녀석들의 악행에 가담한 내가 과연 그들에게 영웅 취급을 받아도 될까...생각하다가, 정신 차리고 보니 동료들 구하려고 나 스스로 몸을 던지고 있더라고요.”
거대한 괴물에게 몸이 작살나는...이제껏 겪어보지 못한 잠깐의 고통이 이어진 후 정신을 차리고 나니 과거로 돌아와 있었다.
어떤 이유인지는 모른다. 모르기에 이것이 처음에는 사후에 보게 되는 꿈이나 환상같은 게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지만, 그가 경험한 미래는 그러한 생각을 단숨에 종식시켜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상황파악은 거기서 끝이 났다. 사후에 과거로 돌아왔다 한들, 그는 갑작스러운 상황에서 뭔가를 추구하고자 하는 생각 따윈 전혀 할 수 없었다.
“사실 세계가 어떻게 되든 그런 건 별로 상관없어요. 영웅 노릇을 해봐야 또 다른 후회할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고, 그런 거 고민하면서 사는 게 복잡하기도 하고....”
멸망한 미래에서 몇 번이나 절망을 경험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귀찮은 일을 피하는 걸 당연시 여겨오는 성격 때문일까.
언제나 흐름에 맡기며 살아왔던 것처럼, 어떤 운명이 다가오더라도 괜한 일을 하지 말고 모두 순응하고자 마음을 먹었었다.
처음에는 분명 그랬을 터였다.
“...그런데 다른 녀석들 노력하는 걸 보니 그게 안 되더라고요.”
씁쓸한 목소리를 내뱉는 그가 자신의 얼굴을 손으로 감싸 쥐었다.
자신에게 사람을 구하고자 제안을 한 사람이 목숨을 걸고 싸우다 죽었다.
그를 사랑하던 여자는 울고 있고, 그들과 친하게 지냈던 동료는 지금도 한 사람이라도 더 살리겠다며 피를 쏟아내며, 한 명은 울고 싶은 마음을 꾹 참고 사람들을 달래고 있다.
그저 방관자의 입장에만 서있기엔, 한때 짐을 짊어진 적이 있던 경험이 덜미를 잡고 있었다.
힘을 가지고 있음에도 어째서 그들의 앞에 나서지 않았는지...뒤늦게 돌이킬 수 없는 일이 일어나고 나서야 그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더 이상 늦게 나서면 안 된다고 생각을 했고, 결심한 김에 목숨 걸고 싸워보려고 했는데 세상에나. 내가 떠넘긴 짐덩어리를 고스란히 지고 있는 꼬마아가씨가 사지로 나서겠다고 자진할 줄은........”
어이가 없다는 듯 웃음을 터트리는 그의 시선이 보스룸으로 향해졌다.
과거라 하여 나약하다 생각을 했건만, 뿌리부터 저 정도로 강한 인간이 되리라곤 생각지 못했다.
만약 그녀가 이번 싸움에서 승리를 거두고 빠져나온다면, 필시 미래에서 자신이 봐왔던 모습보다도 훨씬 더 굉장한 인물로 성장할 것이다.
살아남는다면.......
“보통은 과거로 돌아와 세계를 변화시키려 하는 법이건만, 과거로 돌아옴으로써 자기 자신이 변화하는 경우도 있군. 참으로 재미있는 일이야.”
지섭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노인이 만족스러운 듯 웃음을 터트리며 턱수염을 쓰다듬었다.
“자네의 이야기를 들려준 답례로 뭔가를 들려주고 싶네만.”
“하하, 던전 한가운데에서 한가하게 잡담이라도 하자고요? 몬스터가 오면 어쩌려고.......”
“이 곳과는 전혀 다른 세계에, 인간의 욕심과 남겨진 자의 슬픔이 만들어낸 ‘군주’에 대한 이야기이네.”
자신의 말을 무시한 채 이어지는 노인의 말에 지섭의 두 눈이 크게 벌어졌다.
주혁은 그것을 보고도 이제까지의 평온한 분위기를 고수하며 그와 눈을 마주보았다.
“관심 있나?”
그를 주시하고 있는 눈에는 인자함만이 서려있었다.
그것이 오히려 경계심을 불러일으켰다.
노인에게 있어서, 자신의 뒤에 존재하는 문 속에 가두어진 압도적인 힘을 지닌 존재가 너무나도 하잘 것 없게 여겨지는 것처럼 보였으니까.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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