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8화. 발악 -->
“...그래, 댁들도 죽으러 간다기보다는 기회를 얻으려고 가는 거니까, 성공하면 또 볼 수 있겠지.”
출구와는 다른 쪽의 통로로 걸음을 옮기는 지섭이 그들을 향해 슬쩍 손을 들어올렸다.
“기회가 되면 또 만나보자고. 그 쪽도, 그리고...아가씨도.”
그 말을 마지막으로 통로를 향해 망설임 없이 걸음을 내딛으려 했을 때일까?
“혹시 저랑 어디서 만나신 적 있으신가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이루어진 소연의 발언에 지섭의 발걸음이 잠시 멈춰지고 말았다.
이번에 그를 불러세운 건 살기가 아닌 순수한 의문에서 비롯된 것. 지금의 그녀는 눈앞에 있는 남자로부터 왠지 모를 낯익음을 느끼고 있었다.
“던전에 들어오기 전에...어디선가.......”
“이곳에 들어오기 전엔 한 번도 만난 적 없었어. 난 아가씨를 이 던전에서 처음 보거든.”
“.......”
“...뭐, 살아남으면 언제든지 볼 수 있겠지만.”
피식, 웃음을 터트리는 그가 통로의 어둠속으로 들어서며 손으로 브이자를 그렸다.
“엑스트라는 엑스트라 답게 긴 말 안하고 이쯤에서 조용히 물러나도록 할 테니 나머지 분들께서 잘 해보세요. 그럼 이만~!”
평상시의 여유가 담긴 말과 함께 그의 모습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자신들에게서 떠난 그는 머지않아 모여있는 생존자그룹과 합류하려 앞으로의 일에 대한 상담을 할 것이다.
그런 그의 흔적을 요한은 탐탁치 않은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저렇게 쉽게 포기할 거였다면 애초에 오질 말던가. 망할 자식.”
“쉽게 포기한 게 아니라 기회를 양도한 거겠죠.”
요한과는 달리 세린은 그의 마음을 이해하는 듯 그와 대화를 나누었던 소연을 묘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뭔가, 엄청 신경 쓰는 것 같더라고요. 소연씨에게.”
“........”
그 작은 목소리는 소연에게 들리지 않았지만, 소연 역시도 지섭에게 신경을 쓰고 있었다.
사지로 향하길 바라지 않으면서도 마찰을 일으키기 꺼려하고, 그러면서도 그녀의 의사를 존중하는...모순적이면서도 배려를 행하는 모습. 도저히 초면인 사람에게 취할 수 있는 모습이라곤 생각할 수 없었다.
...그에 대해서 진지하게 물어보는 건 훗날을 기약해야 할 문제일 것이다. 중요한 건 앞으로 그들과 함께 하며 하게 될 일에 관한 것이니까.
“솔직히 말해서, 반쯤 포기하고 있었어. 아가씨가 합류하는 거에 대해서.”
강수의 질문에 소연이 다시 그를 마주보았다. 이미 그는 그녀를 시험하는 태도를 감춘 채 한껏 여유로운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그건 제가 각오를 굳히지 못해서 였나요?”
“목숨을 거는 이유가 그렇게 쉽게 나오는 게 아니니까.”
친구의 죽음에 대해 분노하여 막연히 자신을 따라온다는 ‘인스턴트한 각오’였다면 바로 내쳐버렸을 테지만, 미래와 다른 길을 걸으면서도 확고하게 의지를 발휘하는 그녀의 기상은 실로 존중할만한 것이었다.
문제가 있다면 그녀가 ‘자신을 뛰어넘겠다’라는 말을 거론했다는 것이다.
“세상 살다보면 별여 별 일이 다 일어난다지만, 누군가가 나를 멘토로 삼겠다 선언하는 건 전혀 예상하지 못했는데 말이야.”“그야 좋아하니까요.”
“...농담이 너무 지나쳐.”
“농담이 아니라 진심이에요. 전 당신을 좋아해요. 당신처럼 되고 싶다는 그 말은 거짓이 아니고요.”
소연의 손이 슬며시 자신의 가슴쪽으로 향해졌다. 감정의 고조로 인해 잔잔히 요동치는 심장의 감각을 느낀 그녀가 입가에 조용히 미소를 그렸다.
“이건 분명 존경이라는 감정이겠죠.”
“...아, 그래. 존경.”
자칫 오해할 지도 모르는 그 발언을 바로 정정시켜준 소연의 대답에 강수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다.
“마지막 동료로 들어온 걸 환영해...라고 느긋하게 말하고 싶지만, 지금은 시간이 여의치 않아서 환영식같은 건 못해줄 것 같네.”
강수의 시선이 다시 입구 쪽으로 향해졌다. 당장 이곳에 몬스터들은 들어오지 않지만, 던전 곳곳에 균열이 가해지는 지금, 이곳 역시도 무사하리란 보장은 존재하지 않는다.
보스가 약해짐에 따라 붕괴된 안전책은 이곳에 모여있는 모두를 사지로 몰아넣을 지도 모른다.
물론 그와 별개로 당장 보스몬스터가 약해졌기에 잡으러 간다는 이유가 더 크지만, 이곳에서 살아남은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이 던전이 붕괴된 이후에 싸울 인력이 더 많아진다는 것이다.
그들을 지키는 것 또한 미래를 추구하는 그들에겐 득으로 작용이 된다. 그것 또한 무시할 수 없는 이유인 만큼, 당장 보스룸으로 향하는 데에 다급함이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노닥거리느라 상당히 시간도 지체됐어. 보스에 대한 설명은 가면서 해줄 테니까 바로 서두르자고.”
“네~ 기대하고 있을 게요~”
“.......”
강수의 말에 신을 내며 방방 뛰는 세린과는 달리, 통로 안으로 들어서는 요한의 얼굴에는 아직도 어둠이 드리워져 있었다.
그의 시선은 아직도 강수의 뒤를 따르는 소연에게로 향해져 있었다.
“...아직도 반대하시는 건가요?”
“저 자식이 데리고 가기로 했다면야 데리고 가는 거지만 역시 불안할 수밖에 없으니까.”
“소연씨가 싫으신 건가요?”
“네가 몰라서 그래. 저 녀석이 없었을 때 저 여자가 무슨 모습을 보였는지. 아마 저 녀석 없었으면 저 여잔 여기서 몇 시간도 못 버티고 죽었을걸?”
“미래에 강수씨랑 만난 적이 없었는데도 10년 이상 살았다고 하지 않았나요?”
“말이 그렇다는 거지 말이.”
“........”
두 사람의 대화를 뒤에서 듣고 있던 소연이 말 없이 강수의 뒤를 따라갔지만, 그녀의 발걸음에는 이전보다 재촉이 서려있었다.
세린이라면 몰라도 요한의 경우에는 어리숙했던 때의 그녀가 크게 민폐를 끼쳤던 적이 있었다. 그 감정이 아직까지도 남아있는 만큼 자신을 탐탁치 않게 여길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 그녀의 긴장을 읽어낸 강수가 혀를 차며 통로 밖으로 빠져나온 채 세린과 요한을 향해 조용히 말을 건네었다.
“콩트하는 건 괜찮지만 가급적 거기에 뒷담은 섞어 넣지 말아줬으면 하는데. 아무리 그래도 앞으로 같이 목숨 걸고 나갈 동료들인데.”
“...아, 그래. 네 말대로 같이 목숨 걸고 싸울 동료긴 하지.”
통로를 막 벗어난 요한이 잠시 자리에 걸음을 멈춰선 채 강수를 향해 고압적인 말을 내뱉었다.
“근데 미래에서 온 너는 이 여자를 엄청 신뢰하는 것 같지만, 애초에 강한 건 미래의 이야기지 지금 시간대가 아니잖아.”
요한은 소연과 함께 다녀본 적이 있고, 지금 시간대에서 소연이 지니고 있는 강함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상태다.
표식능력을 이용한 최고수준의 명중률과 더불어 기계체조를 했던 경험을 살린 스타일리시한 전투. 그 규합된 전력은 이제껏 마주해온 다른 능력자들 중에선 ‘상위권’에 속하는 수준이다.
하지만 상위권이라는 건 최고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능력을 잘 운용하는 것으로 세린과 비등하게 겨룰 수 있는 지섭’을 데리고 가는 쪽이 더 낫다고 생각될 정도로, 요한은 그녀의 힘을 신뢰하지 않고 있었다.
“강함으로 치면 이 여자의 반의 반의 반의 반의 반도 못 따라갈 것 같은 부실한 여자를, 굳이 남아있는 돌까지 빼내며 데리고 온 이유가 뭔지 이해가 안 되는데........”
“그냥 솔직하게 이 아가씨가 위험을 자처하는 거 싫다고 말해라.”
“.......”
이어지는 강수의 말에 요한이 바로 입을 다물었다. 뭔가를 말하려 했지만 끝내 제대로 말을 내뱉지 못해 얼굴을 잔뜩 우그리는 모습이 매우 우습게 보였다.
“...맨날 솔직하게 말하니까 돌려서 까는 걸 억지로 하려 들면 바로 들통나지.”
“아 그래! 미안하다! 거짓말 좆도 못하는 놈이라서!”
“아니, 뭐...그게 네 장점이라면 장점이니까 신경 쓰진 않는다만.”
다시 발걸음을 옮기는 강수가 일행을 데리고 통로로 들어서며 설명을 이어갔다.
“확실히 넌 능력의 위력이나 응용면에선 최상위 수준이고, 세린도 리스크가 있긴 하지만 육체적인 면에선 따라올 자가 없을 정도야.”
능력도 기술도, 심지어 육체능력도 모두 따지면 소연이 그들보다 뒤떨어진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요한의 말대로 지섭의 능력인 ‘장비를 강화하여 전력을 보강하는 능력’에 비하면 팀플레이에서 뒤떨어지는 감도 적잖아 존재할 터.
“근데 이론이랑 실전은 좀 다르거든.”
곧 그 발언을 내뱉으며 일행과 함께 방에 들어선 직후.
-찰그랑, 덜컹!
굉음과 함께 그들이 들어선 방의 모든 통로에 철망이 쳐지며 길이 막혀버렸다.
그 직후 방의 가운데에 고스란히 모습을 드러낸 거대한 괴물. 이제까지 마주했던 것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을 정도로 거대한 체구를 지니고 있는 괴물이 세 마리나 존재한다.
네임드는 아니다. 다만 던전을 구성하는 힘이 약해짐에 따라 강한 힘을 지닌 몬스터가 세 마리나 한 방에 밀집된 현상일 뿐.
-쿠, 으으...오오아아아........
그 괴물들이 울음소리를 내뱉으며 육중한 거구를 그들이 있는 곳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에 적의를 느끼며 요한이 전력을 끌어모을 준비를, 세린이 자신의 목에 약물을 주사할 준비를 취했지만, 강수는 두 사람의 행동에 손을 들어올려 제지를 가하고 반대쪽 손으로 손짓을 했다.
“할 수 있지?”
“네.”
곧 그녀가 손에 활을 들어올리고 시위를 잡아 당겼다.
활의 능력으로 인해 생성된 붉은 화살. 그것이 정확히 괴물들의 머리를 향해 겨누어지기 시작했다.
“잘 봐둬, 저 거대한 괴물들을 이 아가씨가 혼자서 10초 만에 처리하는 걸........”
-푸슉!
그의 말과 함께 소연이 쏜 화살에 거대한 괴물 중 한 마리의 머리가 반파되었다. 그에 아랑곳하지 않고 나머지 괴물들이 그녀가 있는 곳으로 달려들려 했지만, 이미 그녀는 ‘표식이동’ 특성을 이용해 측면의 벽쪽으로 몸을 움직인 상태.
그 상태로 ‘표식분열’특성을 이용해 분열된 표식을 향해 곧장 화살을 발포했다.
-퍼엉!
또 다시 폭발하듯 으스러지는 괴물들의 머리. 순식간에 두 마리의 괴물이 쓰러져 시체가 되었을 때, 요한과 세린의 얼굴에 미약한 경악이 서려갔다.
“...잘못 말했어. 정정할게. 10초가 아니라 3초였어.”
참상 속의 시체들이 먼지가 되어 사라져가는 것을 눈여겨보는 강수의 입가에 진한 웃음이 그려졌다.
화살의 위력 자체가 그녀가 원래부터 사용하던 석궁보다 강하긴 하지만, 실제로 그들의 머리가 대파될 정도의 위력을 자아낸 건 왼쪽 눈에 부착되어 있는 ‘심판자의 눈’에 의한 효과였다.
심판자의 눈은 바라보는 대상이 지니고 있는 죄의 수치를 확인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대상이 지니고 있는 급소를 확인하고, 그 급소를 가격할 시 추가 피해를 입히는 효과’를 지니고 있다.
그것이 그녀가 지니고 있는 능력과 결합될 경우, ‘확인한 급소에 정확히 명중시켜 대상을 예외 없이 즉사시켜버릴 수 있는’효과를 자아내게 된다.
제대로 된 방어구나 중장비를 걸치지 않은 대상이라면 제대로 손도 쓰지 못하고 당할 터.
“애초에 ‘암살자’한테 화려한 능력이나 압도적인 신체능력 따위는 필요 없어. 중요한 건 냉정하게 적을 조지는 방법을 구상하고, 그걸 쉽게 만들어가는 상황을 유도하는 거지.”
움직이지 않는 대상에 한해선 필중. 약체화를 비롯한 각종 특성으로 적을 약화시키고, 특성을 이용해 표식을 분열시켜 다수의 적을 상대하는 팀플레이에서도 지원가로 활약할 수 있다.
하지만 그녀의 진가는 지원과 공격보조를 이어가며 전황의 판도를 유리하게 바꿔나가고, 결정적인 순간에 적의 핵심을 바로 도려낼 수 있는 ‘암살’.
먼 미래에 자신을 수도 없이 죽여온 ‘최흉의 암살능력’인 만큼, 그녀가 지니고 있는 능력의 강력함은 그 누구보다도 그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물론 과거의 불안정한 면만으로는 미래의 그것을 재현하긴 어렵겠지만, 기억은 날아갔어도 미래의 자신을 한 번 재현해본 적이 있는 상태다.
적과 대면하는 싸움 속에서 어떤 식으로 움직일지, 마음가짐을 어떻게 갖춰야 할지, 어느 순간에 기회를 포착해야 할지, 그 모든 것을 ‘무의식중에’스스로의 몸에 각인시켜놓았다면........
“저 정도면 가히 최강전력이라 할 만 하지 않겠어?”
“...그래, 너 짱 먹어라.”
여유가 섞인 그 말에 요한이 패배를 시인했다.
대형몬스터 세 마리를 순식간에 일격사 시키는 건 최강의 공격력을 지닌 자신조차도 행할 수 없는 영역이었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 작품 후기 ==========
원거리 딜러인 줄 알았어요?
안됐네요, 하이브리드 암살자였습니다!
가시는 길에 소연추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