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브래이커-213화 (213/251)

<-- 48화. 발악 -->

“........”

질문이 내뱉어진 이후 소연은 말 없이 그의 눈을 마주보고 있었다. 올곧은 그의 눈과는 달리, 안대에 가려진 눈을 제외한 한쪽 눈은 반사적으로 밑으로 내려가려는 기색이 엿보이고 있었다.

그가 어떤 이유로 자신에게 그런 질문을 건네는지는 알고 있다. 이제부터 그들이 향할 곳은 말 그대로 목숨을 걸어야만 하는 곳. 거기에 어수룩한 마음을 지닌 자가 따라가면 개인 뿐만이 아닌 무리의 전멸로 이어질 수 있다.

설령 이제껏 그가 탐을 내왔던 사람이 합류하겠다 자진해서 나설지라도, 지금은 한시라도 빨리 보스를 처치해야만 기회를 쟁취할 수 있는 상황이다.

한 번 불안전한 모습을 보인 자신을 데려가는 것이 탐탁치 않게 느껴지는 건 분명 그에게 있어선 당연한 일이다.

그런 그를 따라나서겠다는 발언에 설득력을 심기 위해선, 이 자리에서 당당히 그를 향해 말할 필요가 있다.

자신이 무엇을 위해 그를 따라나서겠다고 말을 했는지를.

“...연화는, 저에게 있어서 ‘친구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었어요.”

확신이 없는 그 말은 듣는 이들이 의문을 느끼게 만들기에 부족함이 없는 것이었다.

친구도 아닌 친구 같은 사람...만약 그녀에 대해서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자기 의지가 없다’라는 부분을 먼저 떠올릴 것이다.

“연화를 처음 만났을 때에 느꼈던 건 분명 동정이었어요.”

그 이후에 이런 저런 관계를 가졌다 할지라도 계기는 그런 사소한 것에 불과했다.

비참한 일을 저지르고 만 자신보다도 당시의 상황이 훨씬 암울하고 비참했었다. 그것을 버틸 힘도 없었고, 그렇기에 위태로워 보였던 그녀에게 자신은 손을 뻗어주었다.

조금이나마 자신을 버팀목삼아 무너지려는 것을 억지로 다잡기를 바랬으니까.

“그랬던 애가, 어느 한 순간부터...제 앞에 서서 지켜주기 시작했어요.”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강해지고, 뒤에서 보호를 받던 작은 여인은 언제부터인가 그림자를 벗어나 자신을 지켜주었다.

자신과의 만남이 계기가 되었던 걸까? 아니면 자신이 만들어준 그 안전의 시간 동안 연약했던 그녀가 성장할 수 있던 시간이 마련되었던 것은?

어느 쪽이건, 세상을 홀로 살아가 수 있을 정도로 강해진 그녀에게 있어서 자신은 더 이상 필요 없는 인간이라 생각이 들었었다.

그렇게 생각하여, 그녀에게 있어서 불필요한 자신은 떠나는 게 당연하다 생각하여 떠나려고 했지만, 그녀는 언제나 자신의 곁에 멤돌며 앞서 다가오는 위험으로부터 보호를 해주었다.

“언제나 의문을 품었어요. 어째서 그 애가 나에게 헌신을 하는지에 대해서. 그걸 물으려 했지만 이미 연화는.......”

“그래서 그 아가씨에 대한 복수라도 하겠다고?”

사정을 차근차근 설명해나가는 강수가 자신이 유추해낸 것을 직접 입 밖으로 내뱉었다.

물론 진심으로 그녀가 복수를 위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녀는 이 던전이란 공간을 어떻게 취급해야 하는지를 어느 정도 깨달은 상태였으니까.

“...그런 게 무의미하다는 건 강수씨가 가장 잘 알고 있지 않나요?”

냉정히 이어지는 그 말에 강수가 실소를 터트렸다.

확실히 그녀의 말대로 이 던전의 출몰은 이후에 이 세계에서 자연스럽게 일어날 현상이고, 앞으로도 계속 일어나게 될 일이다.

누가 죽건, 어느 공간이 휩쓸리건, 적응하고 버티는 것이 한계일 뿐. 그걸 인간이 직접 거스르는 건 불가능하다.

...그녀가 이 자리에 온 건 그것을 부정하며 재해에 증오심을 퍼붓기 위해서가 아니다.

“앞으로도 이 일은 계속 벌어진다면...원치 않더라도 누군가가 비참히 죽어가겠죠. 제가 보는 곳에서도, 제가 보지 못하는 곳에서도.”

객관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그녀는 지금 이 순간에도 이 공간이 나타난 현상이 세계에 미칠 영향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고, 그에 대해 주관적으로 판단을 내려 앞으로의 미래를 어떻게 받아들일지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 건 싫어요.”

자신의 의지로 직접, 그녀는 앞으로 벌어질 미래에 대한 부정을 내뱉었다.

“그냥, 그런 걸 ‘어쩔 수 없다’며 방관하는 건...싫어. 아무도 죽게 하고 싶지 않아. 막을 수 없다면...하다못해 내가 지킬 수 있는 사람들만은 지키고 싶어.”

붉은 보석이 박혀있는 안대가 그녀의 감정에 반응하듯 흉흉한 빛을 내기 시작했다.

“그걸 위해서라도 힘을 길러야 해. 앞으로도 이런 일이 계속 벌어진다면, 하다못해 그걸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손에 넣어야 한다고...더 강해져야 돼.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아니...미래의 나보다도 훨씬 더! 아니!! 당신보다도 더!!!”

고함소리에 공기가 얼어붙고, 퍼져나가는 전율은 비수가 되어 노려보는 대상을 향해 빠르게 쇄도했다.

아니, 노린 것은 그의 저편에 존재하는, 인간이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강대한 존재.

그 존재에게 턱 없이 작은 비수 한 자루가 커지길 바라며, 지금의 그녀는 눈앞에 있는 남자를 향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의 발악을 벌였다.

“부탁드릴게요. 저를 데려가 주세요, 저를...당신이 직접 강하게 만들어주세요.”

“........”

격동 끝에 이어지는 고요함 속에서, 그는 말 없이 자신을 넘어서려는 이의 기백을 맞닥트리고 있었다.

미래의 기억도, 이전의 치열했던 전투의 기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그 누구라도 친구의 죽음을 서럽게 여기고, 당분간은 일어서지 못하리라고 생각할 것이 분명하다.

설령 다른 사람들에게 기억을 잃기 전에 대한 것을 물었어도, 그 설명이 그녀의 마음에 와 닿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단지 그것만을 보더라도, 그 누구나 역경에 무너져 내리는 가녀린 여성의 상을 상상할 터였건만....

‘이렇게 제 멋대로 바뀌어버리면 이 쪽도 적응이 안 되는데 말이야.’

어쩔 수 없이 소중한 이를 제 손으로 희생시키고, 어쩔 수 없이 많은 이들이 죽어나가는 상황 속에서 다수를 구하기 위해 소수를 버려온 일을 수 없이 저질러왔다.

그렇게나 비참하게 살아온 그녀의 삶은, 앞으로도 미래와 비견될 정도로 비참하게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녀는 그 미래를 받아들이는 마음가짐을 다잡고 있었다.

상황에 휘둘리며 최적의 상황을 도출하기만을 반복하는 대의를 위한 영웅이 아닌, 상황에 적응하기 위해 자신의 의지로 싸워나가는 ‘굳센 마음을 가진 인간’으로.

...그것은 어쩌면 죽은 친구를 기리고,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여유를 확보했기에 가능한 일이 아닐까?

[강수씨, 저는 인간답게 살고 싶어요. 그 누구보다도 더.]

[그걸 위해서라면 전 뭐든지 할 거예요. 설령 그게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일이라도.]

“힘을 바란다고는 하지만, 날 따라오다가 죽을 지도 몰라. 그러면 아가씨 목적도 전혀 이룰 수 없게 될 텐데.”

“아무런 대가도 없이 힘을 얻을 수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않아요. 하물며 당신마저도 목숨을 걸고자 하는데, 당신보다 강해지길 바라는 제가 목숨을 걸지 않으면...그건 각오를 굳힌다고 할 수 없지 않나요?”

그의 진지한 질문에도 불구하고 소연은 의사를 굽히지 않고 그에게 진심을 토로했다.

확실히 ‘목숨을 걸고 간다’라고 직접 말한 만큼 온전히 살아서 돌아오는 것을 바라는 건 어리석은 짓이다. 하물며 지금 따라나서고자 하는 자는 ‘이 세상에서 이 상황에 대해 가장 잘 적응할 수 있는 인물.’

그 자를 뛰어넘고자 한다면, 그 자가 하고자 하는 모든 것을 버텨내고 그의 곁에 악착같이 붙어 다녀야만 할 것이다.

“그런데 타이밍이 좀 나빴어. 이번 싸움에서 굳이 따지자면 어리숙한 사람보다는 좀 더 됨됨이가 되어있는 사람을 데리고 가고 싶거든. 아가씨가 이 친구보다 보스전에서 도움이 될 거라는 보장이 있어?”

“...날 너무 과대평가 해주네.”

빈정거리며 자신의 옆에 대기하고 있던 지섭에게 손짓을 하자, 지섭이 껄끄러운 표정을 지으며 강수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이 친구의 말에는 공감이야. 아무리 진심이라고는 해도 아가씨는 아직 깨어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목숨을 거실 수 있으세요?”

그녀를 만류하려던 중 이어지는 살벌한 말에 지섭의 입이 다물어졌다.

“목숨을 거는 건...뭐, 보스룸에 들어가는 건 수락했으니까........”

“보스룸에 들어가는 게 아닌 다른 상황에선?”

재차 이어지는 질문과 함께 소연의 손에 쥐어진 활의 방향이 지섭에게로 향해졌다. 시위는 당기지 않았지만, 당장이라도 화살이 쏘아질 듯 한 살기가 그에게로 겨누어지고 있었다.

“저는 각오가 되어 있어요. 죽을 각오도, 당신을 이 자리에서 죽일 각오도. 당신은 그럴 각오가 되어 있나요?”

“아, 잠깐. 잠깐, 나 지금 너무 갑작스러워서 상황 파악이 안 되는데.”

순간 지섭이 당황하며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했다.

“...저, 이렇게 놔둬도 돼? 여기서 시간 끌면 안 되는 거 아니었던가?”

“억지 부리는 여자 상대도 못하는 녀석을 데리고 가고 싶진 않은데. 한 번 싸워보지 그래?”

자신을 말릴 줄 알았던 강수는 오히려 그녀와 자신과의 싸움을 보채려 하고 있었다.

상황이 점점 위험해져가는 것을 느낀 지섭이 안색을 창백하게 물들이며 소연이 있는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녀는 언제라도 싸운다는 말이 내뱉어지면 자신과 직접 맞붙을 기색을 보이고 있었다.

어수룩한 모습 따윈 전혀 보이지 않았다. 고작 최초의 던전에 막 들어온 여자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기권, 될까?”

머지않아 그의 입에서 맥 빠지는 말이 내뱉어졌다.

“그게, 따라가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은 했지만, 저렇게까지 진심으로 나오면 오히려 이 쪽이 칼을 겨누기가 힘들어진다고 해야 할까. 그리고 애초에 싸움을 막지 않는다는 건, 저 아가씨의 실력이 나랑 비슷하거나 이상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거겠지...아니야?”

“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아는 법이지.”

우물쭈물 이어지는 지섭의 말에 강수가 대기하고 있던 나머지 두 사람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런데 앞으로 필요한 건 개인의 강함보다는 팀워크라서, 저 아가씨의 패기에 짓눌려버리면 아마 여기 두 녀석이랑 같이 다니는 데에도 고생 좀 할 거야.”

“아, 그래...그건, 이제까지 잡담하면서 질리도록 실감했으니까.”

세린과 요한을 둘러보던 지섭이 체념을 표하며 소연에게 고개를 향했다. 이미 그녀는 자신이 전의를 상실했음을 알아차리고 활대를 거두어들인 상태였다.

“아가씨 정말로 따라갈 거야? 죽을 지도 모르는데?”

“죽는 건 두렵지 않아요.”

“죽을 지도 모른다는 걸 알고 가는 건 죽으러 가는 것보다 훨씬 더 비참한 일이야. 과정은 괴로운 법이니까. 아가씨는, 지금 그 괴로운 일을 하겠다는 거라고.”

“제가 합류하길 바라지 않으신다면 저랑 싸워서 이기시는 쪽을 추천할게요.”

“...젠장, 마음을 단단히 먹었군.”

소연의 단호한 말에 지섭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나머지 일행으로부터 등을 돌렸다.

“포기하는 거야?”

“저렇게 진심을 다하는 여자가 날 죽이려고 달려드는 상황을 어떻게 곱게 받아들이겠어? 하기야, 애초에 어영부영 합류한 뜨내기 엑스트라 녀석이 뜬금없이 고정 멤버로 발탁되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었지. 아 물론 삐진 건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말고.......”

“솔직히 말꼬리 늘어트리고 하는 거 추한데,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요?”

“그냥 포기한다고 말하지 뭘 그렇게 말꼬리를 질질 늘어트려? 안 따라올 거면 1절에서 끝내고 곱게 물러나야지.”

“그래! 떠난다 떠나! 너희들이랑 같이 어울려 있다간 내 여린 마음이 더 이상 못 버틸 것 같으니까!”

요한과 세린의 맞장구에 지섭이 완전히 패배를 시인하며 한숨을 토해냈다.

방금 전까지 자신을 동료로 맞이하는 것 같은 분위기는 온데간데 없이 사라진 비정한 모습은 지금 이 자리를 벗어나고자 하는 충동을 느끼게 만들었다.

========== 작품 후기 ==========

가시는 길에 던부추 부탁드립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