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6화. 돼지의 왕 -->
“...흐음, 여기인가?”
어두운 통로를 빠져나온 그림자는 방에 들어서자마자 턱에 돋아난 수염을 쓰다듬어갔다.
방 내부에는 몬스터나 함정 따윈 존재하지 않았다. 특이점이 있다면 통로 앞이 거대한 문으로 막혀있다는 것 정도.
그는 망설임 없이 문이 있는 쪽을 향해 걸어갔고, 문을 향해 뻗은 손에 힘을 실어 넣었다.
손아귀의 힘에 반응하듯 검은 문이 찢어 지듯 양쪽으로 벌어졌다. 그 속으로 작은 몸을 드리운 그는 그대로 안으로 들어가 안쪽에 존재하는 존재를 맞닥트렸다.
“안녕하신가?”
그 인사말에 어둠 속에서 두 개의 빛이 번뜩였다.
그것은 이 공간에 자리를 잡고 있는 존재의 눈이었다.
누군가가 입장하지 않으면 최소한의 활동조차도 하지 않는 만큼 고독한 그 존재는 자신이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돌연히 들려온 목소리에 심히 놀란 반응을 표했다.
-자네는...평범한 인간이 아니군.
그것이 안으로 들어온 그를 대면한 괴물의 첫 마디였다. 그는 그 존재를 마주하며 조용히 웃음을 터트렸다.
“굳이 따지자면 자네와 같은 부류지. 다른 점이 있다면, 지금은 특권을 통해 인간의 가죽을 뒤집어쓰고 있다는 것 정도.”
-...흐음, 그렇군.
그의 말에 괴물이 붉은 빛이 새어나오는 눈을 가늘게 떠갔다.
-그래서 여기엔 뭐하러 온 거지? 나를 죽이려고 온 건가?
처음부터 살의를 지니고 있느냐를 묻는 괴물의 질문에 그는 코웃음을 터트렸다.
“그럴 리가. 그저 지나가는 차에 이 공간을 지배하고 있는 자에게 인사 정도는 하고 가는 게 좋지 않을까 해서 들린 거네.”
-마치 내가 자네의 존재를 가벼이 받아들인다는 것처럼 들리네만.
“그런 거 아니었나?”
-전혀.
탁, 하고. 손가락이 튕기는 소리와 함께 공간 곳곳에 푸른 빛이 치솟아오르기 시작했다.
벽과 천장에 존재하는 횃불들에 그의 힘이 자아내진 푸른 빛이 터져 나온 것이다.
그 빛에 비춰진 방의 내부엔 기괴하게 망가진 시체들이 즐비해 있었다.
팔과 다리, 심하면 손가락 뿐. 그 외에는 형체도 알 수 없을 정도로 무참히 조각나 사방으로 흩어져 방 곳곳을 적시고 있었다.
그 끔찍한 참상은 저 괴물이 자신의 영역에 들어온 침입자들을 용서하지 않는다는 걸 가르쳐주고 있었다.
“청소 정도는 하고 살지 그러나?”
푸른 빛에 훤히 모습이 드러난 그가 인자한 웃음을 지으며 턱의 수염을 쓰다듬었다. 머지않아 참상으로부터 시선을 거두고, 자신을 맞닥트린 괴물에게 시선을 옮겼다.
넝마를 연상케 하는 것으로 몸을 두르고 있는 거대한 그림자. 머리로 추정되는 부분에는 이제까지 그를 주시하고 있던 붉은 두 눈이 선명히 드러나 있었다.
-자네 역시도 이들과 같은 운명을 맞이하리라곤 예상하지 못한 건가?
“...같은 위치에 오른 친구끼리 이러지 말게나. 지금의 나는 평범한 인간과 다를 바 없는 상태이니.”
-그렇다면 룰에 따라 내가 이 자리에서 자네를 처형해도 별 문제가 없다는 뜻이로군.
-꾸드득, 드득.
허공으로 들려진 넝마 위쪽으로 팔이 돋아나고, 그것이 곧 그가 있는 곳을 향해 휘둘러지기 시작했다.
그는 괴물이 자신에게 휘둘러지는 팔을 대면하면서도 말없이 눈을 감아볼 뿐.
“한때 자네가 섬겼던 그는 이제 곧 죽음을 맞이할 걸세.”
체념이라고도 생각할 수 있는 그 태도에 휘둘러지는 그의 손이 허공에서 멈춰졌다.
풍압이 땅과 벽을 갈라내며 굉음을 터트렸지만, 정작 그 표적이었던 자는 그 공격에 노출되지 않고 태연히 그 자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방금 뭐라고 했지?
“총명했던 왕은 이제 곧 광기에서 해방될 거라고, 그렇게 말했네.”
-........
중후한 목소리로 이어지는 설명에 뻗어졌던 손이 거두어졌다.
붉은 빛이 새어 나오는 그 두 눈은 믿기 어려운 것을 본 것 마냥 휘둥그렇게 변해져 있었다.
-자네는 외지에서 온 존재라고 했을 터인데, 그 자에 대해서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나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나? 어떻게 알아낸 거지?
“지배자들끼리 서로 교류를 나누는 경우야 흔히 있는 일이 아닌가?”
-나는 자네와 마주친 적이 없네.
“그야 그렇겠지. 이 시간대에선 말이야.”
슬며시 그가 자신의 머리에 쓰여진 실크햇을 치켜세우며 눈을 드러내었다.
“머지않을 미래에, 나는 다수의 지배자들의 위에 군림하게 된다네. 그 중 하나가 바로 자네였고.”
-...미래에서, 허, 그렇군.
그제야 괴물이 그의 말에 납득의 의사를 표하듯 고개를 위 아래로 흔들었다.
-지도자의 자리에 올랐음에도 부여받은 사명을 이루지 못한 무능한 지배자라는 것인가? 그걸 되돌리기 위해 과거로 돌아와 이런 나약한 존재의 가죽을 뒤집어 쓴 것이고?
“나라고 실패하고 싶어서 실패한 게 아니네. 자네도 다른 이들도 모두 죽고, 오직 무한한 힘을 지닌 나만이 그 자를 상대해야만 했으니까.”
그 때를 회고하는 그가 저도 모르게 코웃음을 터트렸다.
“무한한 힘을 지닌 자와 무한한 생명을 지닌 자. 그 끝도 없는 싸움에 질리고 마는 건 당연한 것 아니겠나? 그 자는 포기할 수도 없는 처지이니, 이런 식의 선택을 할 수밖에.”
-...정말로 그 수밖에 없었던 건가?
“거짓말을 해서 뭐하겠나?”
-.......
괴물이 그의 태연한 대답에 침묵을 하며 시선을 거두었다.
-이곳에 온 목적은 뭐지? 정말로 인사만 하고 온 것은 아닐테고, 굳이 나의 주인이었던 자가 죽는다고 여기까지 와서 전하려고 한 이유는 뭔가?
“그 이후에 벌어질 일이 내기에 조금 치명적으로 작용할 지도 몰라서 말이네.”
슬며시 들어올려진 그의 주름진 손에 힘이 실렸다.
“자네가 섬겼던 그 자가 사라진다는 게 꼭 그의 성공만을 의미하는 건 아니야. 미래와 다른 선택을 한 만큼, 그 역시도 이번 싸움에서 죽거나 그와 동등할 정도의 타격을 입을 가능성이 있으니까.”
-그 싸움에서 자네가 과거로 돌려보낸 그 자가 죽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는 건가?
“아주 없진 않겠지. 그 왕은 강하니까, 자네보다도 훨씬 더.”
-하지만 던전 내에서 적용되는 억제력은 내가 있는 이곳보다도 훨씬 더 가볍지.
자신보다 강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이 그보다 쉽게 꺾인다고 자부하진 않는다. 지배자의 자리에 오르는 자격은 강함이 아닌, 공간을 구축하는 데에 얼마나 힘을 썼느냐로 판가름이 되니까.
부흥했던 왕국이 몰락하고, 미쳐버린 채 죽음을 맞이한 왕은 그저 오염된 고기를 게걸스럽게 먹어치우며 비대하게 몸만을 키웠을 뿐인 폭주한 괴물에 불과하다.
그런 하잘 것 없는 존재 따위, 다른 누군가의 손에 의해 죽건 말건 그런 건 그완 아무래도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오히려 흥미를 느끼는 쪽은 그 괴물의 죽음이 연루되어 있고, 동시에 눈앞에 있는 자와 내기를 벌였다는 미래에서 온 존재에 관한 것이었다.
-그 자가 그 살덩어리와 싸우다 죽을 가능성이 있지만 그게 완벽하진 않을 테고...머지않아 이곳에 찾아왔을 때 그 존재를 내 손으로 죽이길 바라는 건가? 이 세계를 진정으로 멸망시키기 위해서?
“바라지 않는다면 거짓말이겠지. 하지만 그가 죽는 것만으로는 내기는 끝나지 않는다네. 내기를 끝내려면...그가 과거로 돌아옴으로써 남긴 모든 흔적을 지워버릴 필요가 있지.”
앞으로 뻗어진 손에 힘이 실리고, 각진 손가락이 오므라들었다. 실크햇 밑에서 빛나는 그의 냉철한 두 눈이 무언가를 쥐어터트릴 듯 쥐어진 주먹으로 쏘아지기 시작했다.
“그래, 나는 확실하게 그 모든 것을 지워주길 바라는 거야. 현 시간대에서 가장 강대한 힘을 가진 존재 중 하나이자, 그가 쓰러트려야 할 가장 높은 벽인 자네가 직접.”
미래에서 온 지배자는 과거의 망령을 향해 말한다.
“만약 그가 그 싸움에서 살아 돌아와, 자네를 마주하게 된다면 절대로 자비를 보이지 말게. 그 어떤 일이 있어도."
-...자비라는 걸 가지는 건애초에 불가능한 일이라는 건 자네도 알고 있을 텐데.
애초에 던전이란 공간에 구속된 존재는 의식은 존재해도 자유의지를 발휘할 수 있는 권한은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식으로든, 그들의 존재는 내부에 휩쓸려 들어온 이들에게 위협이 되도록 설계되어 있으니까.
하지만 그런 만큼 의식을 지니고 있는 자가, 하물며 ‘보스몬스터’라고 불리는 자가 자신이 있는 공간에 위험이 되는 요소를 맞닥트리게 된다면, 그에 큰 경계심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그 충고는 받아들이지.
내 이 자리에서 죽을 지언정 그 존재가 이 세상에 존재했다는 모든 것을 지워버리겠다 이 자리에서 다짐하겠다.
그 의지에서 비롯되어 고조되어가는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실크햇을 쓴 노인이 입가에 조롱을 그려갔다.
그의 자극으로 인해 이 곳의 지배자는 본래보다 더 위험한 존재로 변화하였다.
그 거대한 강자를 쓰러트린다 하더라도, 머지않을 미래에 이곳에 찾아왔을 때 그가 마주하게 될 것은 그가 예상한 것보다도 훨씬 더 지독하고 끔찍한 시련일 것이다.
그것을 지금 당장 그의 곁으로 다가가 가르쳐준다면, 그 거대한 존재를 쓰러트리는 데에 다하게 될 열의를 식게 만드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
-콰아아아앙!!
폭발적인 소리가 공간을 가득 메웠다. 그 소음에 노출된 모든 이들은 귓속이 얼얼하게 변해가는 것을 느꼈다.
폭격을 연상케하는 괴랄한 충격이 방금 전까지 그들이 서있던 통로 부근을 덮친 것이다.
만약 사전에 얘기를 듣지 못했다면 방의 중심에 존재하는 거대한 존재를 맞닥트리자마자 몸이 얼어붙어, 그 공격에 노출되어 형체도 없이 이 세상에서 사라졌을 지도 모른다.
그러한 생각이 든 이들의 얼굴이 하나 둘 씩 창백하게 변해갔다.
고작 한 번의 공격만으로 통로 인근의 땅이 완전히 뒤집어질 정도의 일격. 그런 것을 앞으로 몇 번이고 날리는 적을 이제부터 자신들이 상대해야만 한다는 걸 직시한 것이다.
“뒤처지면 위험해집니다! 모두 정해진 대열을 맞추세요!”
그 혼란을 풀어헤친 것은 그들의 선두에서 활을 쥔 채 침착히 외치는 소연이었다.
시위를 당긴 순간 나타나는 붉은 화살을 전방으로 겨누었다. 그 표적은 손에 쥐어진 대검을 바닥에 처박은 채 몸을 고정시킨 괴물이 아닌, 그의 몸이 박혀있는 곳의 부근에서 돋아나는 기괴한 살덩어리들이었다.
썩고 오염된 살덩어리들이 뿌리에서부터 분리되어 형체를 잡아갔다. 하나하나가 모두 녹아내리는 인간을 연상케하는 그것은 이제껏 던전 내에서 수 없이 마주했던 시험체형 몬스터들과 비슷하게 보였다.
차이점이 있다면 그들이 지니고 있는 오염도와 부패능력은 일반적으로 배회하는 녀석들보다 훨씬 더 강력하다는 것.
“방어능력 보유자들은 모두 전방으로! 공격을 전담하는 자들은 후위에서 저들을 공격하십시오!”
소연의 명령에 각종 방어장비를 걸치고 있는 이들이 전위로 나서기 시작했다.
그들을 대표격으로 지도하는 자는 소방복을 걸치고 있는 건장한 체격의 남성. 강수와 함께 입구 부근에서부터 이곳까지 온 태산이었다.
“모두 돌격!”
“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태산의 호령과 함께 중장비를 걸친 이들이 하나둘씩 앞으로 뛰쳐나갔다.
달려들은 괴물들이 합금된 방패와 오염을 막아주는 방호복들과 충돌하며 사방으로 더러운 액을 퍼트렸다.
당장은 장비의 효력을 통해 오염에 노출되지 않아도 접촉하는 시간이 길어지면 위험해진다. 그들을 빨리 처리할 필요성을 느낀 공격담당자들은 자신들을 지도하기로 한 담당자, 다윤의 뒤를 따라 능력을 사용할 준비를 취했다.
“아군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공격!”
-화르륵! 퍼엉!
화염과 더불어 압축된 공기의 폭발, 진공상태로 날아드는 칼날 등등, 위협적인 공격들이 방어자들의 앞으로 다가온 괴물들을 싸그리 밀어내었다.
약 열이 넘는 사람들이 벌인 연계에 괴물들은 그들의 집단에 별 다른 피해를 주지 못한 채 맥 없이 으스러져갔다.
“이대로 대열을 유지하면서 공격을.......‘
“아아아아악!!”
소연이 다음 명령을 이어가려던 중 누군가의 괴로운 비명이 울려 퍼졌다. 방어자 중 한 명이 미처 처리되지 못한 몬스터를 떨쳐내지 못하고 몸을 물어뜯기고 있었다.
살결에 맞닿은 오염물질이 그의 피와 살을 썩게 만들며 고통을 유발했다.
“사, 살려......”
-퍼억!
죽음을 당면한 그가 애절히 나머지 이들을 향해 손을 뻗기 시작한 때, 누군가가 빠르게 그의 곁으로 다가와 몬스터를 쳐날려 그의 몸을 해방시켰다.
물론 몬스터가 떨어져도 이미 육체에 스며든 오염물질은 그를 괴롭히고 있었다.
몬스터를 쳐날린 남자는 그의 썩어가는 부분에 손을 올리며 격하게 담배연기를 토해냈다.
“거 다 큰 양반이 엄살 오지게 피우네”
오염된 부분이 서서히 회복되어간다. 그것은 그가 지니고 있는 ‘재생력’의 상위특성 중 하나인 면역체의 효과.
오염이나 부패에 대해 강한 면역력과 치유력을 심어주는 그 특성이 부분재생과 결합되어 오염된 그의 신체부위를 빠르게 회복시켜주고 있었다.
독이 많이 퍼졌다면 모를까, 아직 한 부분만 오염되었다면 안정권까진 회복할 수 있다.
“여기서 징징대려고 온 거 아니잖아. 한 번 목숨 걸고 싸우러 왔으면 바로 가야지.”
“으악!”
끝내 그의 몸이 멀쩡하게 변했음을 자각한 강수가 반강제로 몸을 일으켜 세우며 다시 몰려드는 괴물들을 향해 내던졌다.
부패를 유발하는 그들의 살은 인간에게 있어서 치명적으로 다가오지만, 그가 지니고 있는 능력은 그것을 어느 정도 방지할 수 있는 효력을 지니고 있었다.
하물며 강화된 재생전파 특성은 그것을 다수에게, 그것도 원거리에서 빠르게 걸어주는 것을 가능케 만들어주는 특성.
“살 썩거나 뼈 부러지거나 하는 거 걱정하진 마라. 내가 치유능력은 딸려도 다른 어지간한 부분들은 다 커버쳐줄 수 있거든.”
몰려드는 몬스터와 그들과 맞서 싸우는 아군을 둘러본 그가 입가에 진한 미소를 그렸다.
========== 작품 후기 ==========
이제까지 소수로만 움직여서 부각되지 않았지만 주인공은 집단전에 한해선 최고의 지원능력자입니다.
가시는 길에 던부추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