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브래이커-195화 (195/251)

<-- 45화. 제목 미정 -->

조금이라도 방심할 경우 그녀의 손에 쥐어진 메스가 자신의 급소를 찌를 것이다. 아니, 그 이전에 목을 움켜쥔 순간부터 살을 쥐어터트려 죽이는 것도 가능하다.

그럼에도 위협만 하고 죽이지 않는 이유는, 애초에 자신을 죽일 생각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솔직히 말할게요. 당신을 만나기 이전엔, 당신에게 별로 좋은 감정을 품지 못했었어요.”

세린은 소연의 목을 쥐고 있는 손에서 차차 힘을 빼나갔다.

막혀오던 숨통이 조금 트였지만 목을 빼낼 수 있는 여유는 확보되지 않았을 뿐더러 메스도 급소 부근에 고스란히 겨누어진 상태였기에 섣불리 움직일 순 없었다.

“그의 얘기를 들어보면 도저히 저희와 함께 갈 만한 사람으론 보이지 않았거든요. 그래서 직접 만나서 얘기를 나눠보고 싶어서 이렇게 찾아온 거였어요. 정말로 당신이 그의 옆에 설 자격이 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서.......”

어떻게든 자리를 벗어날 궁리를 하고 있는 소연을 조롱하듯 세린이 입가에 조소를 그려가기 시작했다.

“그러던 차에 상당히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었네요. 미래에 그가 수많은 사람을 죽였던 학살자라고, 분명히 그렇게 말하셨죠?”

“그 말에 거짓은 없습니다.”

“거짓이라고 생각해서 그런 게 아니에요. 오히려 이런 비현실적인 공간에서 상식에 얽매이는 건 바보짓이죠.”

미래에 있던 사람이 과거로 돌아옴으로써 소심함을 벗어던진 채 다른 사람들의 앞에서 당당히 포부를 보이는 것도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에 긍정의 의사를 표한 세린이 목을 움켜쥐고 있던 손이 당겨 소연과의 거리를 좁혔다.

“어째서 그가 그런 눈을 가지게 되었는지 납득이 되기 시작했어. 그리고 당신도.......”

한 순간 시야에 어둠이 드리워지고, 몸을 짓누르는 기백이 소연의 몸을 엄습하기 시작했다.

-퍼억!

거리가 좁혀진 직후를 소연의 주먹이 세린의 턱을 치고 지나갔다.

갑작스러운 공격을 버텨내지 못한 세린이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물러난 직후, 세린의 손에 쥐어진 메스를 빼앗은 소연이 역으로 그녀의 몸을 밀어붙여 벽 쪽에 매다꽂았다.

정신을 차렸을 때 세린의 눈에 들어온 것은 자신의 앞에 겨누어진 작은 흉기. 역으로 자신이 목숨이 노려지는 쪽이 되었음을 자각했을 때 세린의 얼굴에 처음으로 감탄이 그려졌다.

“부작용 때문에 힘조절이 잘 안 된 것도 있지만 이렇게 쉽게 제압될 줄은 몰랐는데...역시 미래에서 온 능력자답네요. 정말 대단해~”

여유를 담은 웃음으로 자신을 마주하는 세린을 노려보는 소연이 입을 열며 무거운 숨을 토해냈다.

“그를 대상으로 ‘먹이’라는 표현을 쓴 걸 봐선, 당신도 그를 노리고 있는 듯하군요. 그런데 어째서 당신은 그의 곁에 붙어있으신 거죠?”

“그가 저의 힘을 원하고, 저는 그 갈망을 이용하기 위해서죠. 그가 저를 곁에 두는 걸 허락하는 시간 동안 기회를 노려, 그의 숨통을 끊어내기 위해서.”

살가운 웃음을 마주하고 있자 피부가 저릿해져오는 것을 느꼈다.

적어도 그 남자에 대해서, 눈앞에 있는 여자와 자신은 공통된 목적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근본적인 이유는 다르다. 단지 보는 것만으로 은연 중에 그것을 파악할 수 있었다.

“그를 죽이려고 하는 이유는 뭡니까?”

“괴롭게 죽고 싶어서요.”

무거운 질문에 세린이 가벼운 목소리를 내뱉었다.

“그의 목숨을 노리기 위해 가장 가까운 곳에서 배후를 노리고 노린다면, 그 목숨을 노리는 과정에서 저는 수 없이 고통스러운 일을 겪게 되겠죠.”

죽기 위해 누군가에게 살의를 품고, 그 과정을 즐긴다.

정상적인 인간이 할 수 있는 생각이 아니었지만, 눈앞에 있는 여자는 그것을 너무나도 당연시 여기고 있었다.

그녀와는 전혀 다른 이유로 그를 죽이려 하는 소연에게 있어선 이해할 수 없는 것을.

“고작 그런 이유로, 미래에 대재앙을 일으키려 한 남자에게 협력을 하고 있다는 겁니까?”

“고작이라~ 남에겐 그렇게 생각될 지도 모르겠네요.”

세린이 소연의 말에 자조를 터트렸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면, 오히려 그에게 붙어있어야 할 마음이 더 강해지는데 어쩌죠? 저는 나쁜 남자에게 크게 매력을 느끼는 여자라서~”

학살자건 대재앙의 시초건, 오히려 그 남자가 악랄하면 악랄할수록 환영해야 할 일이다. 그가 혐오스러운 인간임을 알게 될수록, 보다 적극적으로 그를 죽이려 들 것이고, 그럴수록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룰 수 있다는 뜻이니까.

그것을 부정하는 건 자신이란 존재 자체가 잘못되었다 폄하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그 남자나 눈앞에 있는 여자와는 다르게, 오세린이라는 여자는 이 공간에 휩쓸리기 이전부터 더러움에 찌들어있던 여자였으니까.

그런 더러움을 읽어내는 건 소연에게 있어서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그녀가 살아온 생애는 알지 못해도, 미래에 수많은 악당을 처단하며 손을 더럽혀온 만큼 눈앞에 있는 여자와 같은 눈을 가진 자들을 수 없이 만나왔으니까.

“당신은...제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위험한 생각을 품고 있는 자로군요.”

확신을 담은 발언에 세린은 입꼬리를 올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래서 여기서 죽이기라도 하게요?”

“필요하다고 생각되면 그렇게 할 겁니다.”

“필요하면이라.”

자신의 선고가 내려졌음에도 세린은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죽기를 바라는 자였지만, 눈앞에 있는 자가 선사하는 죽음에선 아무런 매력도 느끼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그래요, 당신이 보기에 전 추잡한 인간이겠죠. 하지만 지금 솔직하게 얘기하자면, 저는 지금 당신을 가여운 인간이라 생각하고 있어요.”

이전까지 발하고 있던 살의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온기가 식어버린 동정이 세린의 두 눈에 담겨졌다.

“당신의 말을 들은 이들 중 일부는 머지않아 자신의 의지로 직접 이 자리에 오겠죠. 정작 먼저 나선 자가 이제까지 의지 없이 다른 이들의 선택에 밀리며 살아온 허수아비가은 존재라는 것을 알지 못한 채.”

소연의 몸에서 희미하게 경련이 일어났다.

아주 미약한 변화지만 확실하게, 세린의 속삭임은 눈앞에 있는 여자에게 변화를 심어주고 있었다.

“스스로 의지를 발휘하지 못하는 여자를 믿고 따르며 사지로 걸어가는 자들 또한 가엾다고 생각하는데,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푸욱.

살이 꿰이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목을 향해 겨누어진 메스가 세린의 살을 파고들은 것이다.

급소를 찔렀다 생각을 했지만, 머지않아 목과 메스의 사이를 가로막은 손의 존재를 직시하게 되었다.

다급히 메스를 놓고 자리를 벗어나려 했지만, 그 전에 선혈이 흐르는 손이 소연의 팔을 붙잡는 것이 먼저였다.

“말이 좀 거슬렸나봐. 그래도 난 이 말을 정정할 생각이 전혀 없는데.......”

이전에 목을 쥐었을 때보다 훨씬 더 강한 힘이 실리고, 힘을 버티지 못한 손의 관절이 삐걱이기 시작했다.

소연은 그 괴로움을 억제하며 반대쪽 손으로 조작하고 있는 스마트폰에서 새로운 단검을 하나 꺼내들었다.

휘둘러지는 매서운 칼질에 세린의 볼에서 피가 치솟아 올랐지만, 세린은 아랑곳하지 않고 소연의 몸을 벽쪽으로 밀어붙여 피가 튀어오른 얼굴을 들이밀었다.

“당신은 그와 정반대편에 섰지만, 그건 절대로 정의감에서 비롯된 게 아닐 테죠.”

-퍼억!

이를 질끈 깨문 소연의 팔꿈치가 세린의 안면을 강타하려 했지만, 그 전에 세린의 손이 팔꿈치를 틀어쥐는 것이 먼저였다.

“정의를 주장하는 것도, 자신을 따르는 모두가 그런 걸 바라고 있으니까, 그런 그들이 그 남자를 위험하다고 생각하니까 당신은 그 남자를 증오하는 거야. 자신의 의지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의지를 빌려가면서."

-파악!

둔탁한 타성과 함께 팔꿈치를 쥐고 있는 손이 튕겨져 나갔다.

그 직후에 이어지는 칼부림을 피해 뒤로 물러난 세린이 유유히 몸을 뒤로 물려갔다.

“개인적인 감정이 섞이지 않더라도 상관없습니다. 그것을 배제하는 것이 대의를 이루기 위해 필요한 일이라면.”

“...대의라, 진심으로 그렇게 말한다는 점이 정말로 가엾게 느껴지는데 말이죠.”

그녀를 향한 조소를 손으로 감춘 세린이 슬며시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 말을 들으니 그가 요전에 저에게 했던 질문이 떠오르네요. 지금 모습을 보니 아마 소연씨에게도 같은 질문을 건넸을 거라는 추측이 드는데.......”

가느다랗게 뜨여진 눈이 소연에게로 향해졌다. 마치 자신이 관심을 가질지 말지에 대한 반응을 떠보는 것 같은 시선에 소연은 침묵으로 일관했다.

하지만 당장이라도 달려들 것 같은 태세가 조금은 잦아들었다. 세린은 웃으며 자신의 기억을 되새겨 그가 했던 말을 또박또박 얘기를 이어갔다.

“1천 명의 사람 중 500명만을 안정적으로 살리는가, 혹은 자신의 목숨을 바쳐 절반의 확률로 1000명의 사람들을 살릴 기회를 얻을 것인가.”

“첫 번째.”

거론된 두 가지의 선택지 중 소연은 망설임 없이 전자를 선택했다.

“...대답이 빠르시네요. 어째서죠?”

“절반이라는 확률은 수 백의 목숨을 걸기엔 너무나도 높기 때문입니다. 안정적으로 누군가를 확실하게 살릴 수 있는 길을 선택하는 것이 올바른 선택이죠.”

“그게 대의를 중시하는 사람이 도출해낸 답이란 말이죠?”

머지않아 세린의 입가에 진한 웃음이 그려졌다.

“우연일지도 모르지만...이 질문, 지금 이 상황이랑 엄청 비슷한다는 생각 들지 않아요?”

“...!?”

세린의 발언에 소연의 두 눈이 크게 벌어졌다. 뒤늦게 그녀가 어째서 이런 질문을 건넸는지를 파악한 것이다.

“1천의 사람 중 500명을 희생시키는 쪽을 선택하는 사람이 광신도들을 제물로 바쳐 여길 벗어나는 것이 아닌 이 자리에 서서 자신과 함께 사지로 걸어갈 자들을 기다리는 이유는 대체 뭘까요?”

“그 질문과는 상황이 전혀 다릅니다.”

세린의 능청이 섞인 물음에 소연이 다급히 대답했다.

"이 통로 저편에 존재하는 괴물은 이 던전을 지배하는 보스몬스터보다도 강대한 힘을 지니고 있는 레이드 몬스터. 그가 지니고 있느 힘은 시간이 지날수록 겉잡을 수 없이 커져갑니다."

그런 그가 상대적으로 약해진 시기로 돌아왔다면, 그를 조금이라도 더 빨리 잡아 최대한 희생을 적게 만들 필요가 있다.

마냥 그렇게 생각한다면 누구라도 수긍할 수 있는 문제겠지만, 세린은 소연의 대답을 탐탁치 않게 여길 수밖에 없었다.

미래라면 모를까, 현 시간대에 그녀를 따라 안에 존재하는 몬스터를 잡고자 나서는 이들이 얼마나 될까?

아니, 수보다도 문제가 되는 건 각오다. 아무리 각오를 다지려 해도 그녀와 달리 제대로 된 비극을 겪어보지 못한 이들의 각오란 부질없게 꺾여나가기 마련이니까.

아무리 미래에서 왔고 그를 상대해본 경험이 있다 한들, 그런 이들을 이끌고 가봐야 50%는커녕 따라나선 소수의 인간들을 제물로 바치는 일이 되어버릴 게 뻔하다.

그것을 소연 자신이 모를 리는 없을 것이다.

“만약 제가 당신처럼 대의를 추구하는 인물이었다면 차라리 500명을 모두 제물로 바치고, 이 자리를 잠시 벗어난 후 다시 제대로 자격을 갖추고 있는 사람들을 모아 이곳에 왔을 거예요."

시간이 지날수록 강해진다 하더라도 그녀가 상대했던 시절보다는 약할 것이 분명하고, 제물로 바쳐진 자들을 구할 수는 없지만, 그 외에 나머지 사람들을 안정적으로 구해낼 수 있을 테니까.

대의를 중시하는 소연이 거기에 생각이 미치지 않았을 리 없다.

“그럼에도 그 모든 걸 감수하며, 모두가 선호하는 선택지란 대의마저 접어둔 채 실패할 확률이 높은 도박을 자진해서 행하려는 이유는 무엇일까.......”

말꼬리를 흐리며 이어가는 의문에 소연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아니, 대답할 수 없었다는 표현이 정확할 것이다.

그녀가 하는 말을 부정하려 드는 건 자신의 마음을 속이는 것이고, 그 모든 것을 감수하며 이 자리에 서있는 진짜 이유를 말하는 건 이제까지 자신이 고수하고 있던 것을 어긋내는 것이나 다름이 없으니까.

하지만 세린은 이미 그녀가 이 자리에 서있는 시점에서부터, 그리고 대의를 위하는 자가 모순되는 행동을 보인 순간부터 어렴풋이 그 이유를 알아차린 상태였다.

“분명 그와 같은 이유겠죠. 과거로 돌아옴으로써, 이전까지 지향했던 태도를 고수할 필요가 없다는 걸 깨달았을 테니까.”

========== 작품 후기 ==========

가시는 길에 던부추 부탁드립니다.

오늘 오후에 한 편 더 올릴 예정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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