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브래이커-187화 (187/251)

<-- 43화. 비정한 영웅 -->

현재 그들이 있는 곳엔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있다. 그들 중 대다수는 나약하지만, 일부는 절망교의 잔당들을 소탕하는 데에 적극적으로 임하며 자신들이 지니고 있는 강대한 힘을 행사했다.

불확실한 한 사람에게 매달리기 보단, 그들에게 손을 뻗고 자신을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을 구하는 게 더 효율적인 판단일 것이다. 수 백 명이 모인다면 그 중 한 명 정도는 자신과 동조해줄 사람을 찾을 수 있기 마련이니까.

그에 대해서 전혀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 생각이 반영되었기에 일순간 연화의 감각을 속이는 것이 가능했던 것이다.

지금의 발언에 내포된 의미를 눈치 채지 못한 것은 어디까지나 의도적으로 그것을 숨겼기 때문이다.

“너, 아직도.......”

“쉽게 포기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아. 그런데 이 아가씨가 지니고 있는 재능이 너무 탐이 나는 처지인지라.”

-뿌드득.

이가 갈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지만, 강수는 개의치 않고 그녀의 일그러진 표정을 마주한 채 코웃음을 터트렸다.

“여기서 한 탕 할 기세네.”

“...그걸 직접 말하는 이유가 뭐야.”

“저번에도 말했다시피 난 이 아가씨의 의지를 존중할 거야. 이 아가씨가 가고 싶지 않다고 한다면 억지로 끌고 가지 않는다고 말했던 건 분명한 사실이고, 지금도 그 생각은 전혀 변함이 없어.”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지금까지의 뉘앙스만을 따진다면 억지로 데려가겠다는 듯이 들렸다. 적의가 세워진 만큼 그 쪽에 더욱 강한 생각이 들었지만.

“이 사건 이후로 이 아가씨의 심경엔 큰 변화가 일어나겠지. 어쩌면 그 변화가 나를 따라 나서게 되는 것일 수도 있고.”

머지않아 이어지는 말은 일순간 그러한 생각에 균열을 일으켰다.

“그런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나도 확신하고 말하는 건 아니야. 하지만 그 쪽을 따라가 밖으로 나간다는 게 확정된 것도 아니잖아?”

단도직입적인 발언에 연화가 잠시 입을 다물었다. 바로 대답하지 못한다는 것은 그녀도 그 가능성을 생각해두고 있다는 뜻일 터.

아마 그녀가 말하는 ‘데리고 나간다’라는 발언도 어느 정도의 강제성을 염두에 두며 한 말일 것이다. 정말로 소연이 이 사건을 계기로 그를 따라나서게 되고자 하는 의지를 발휘할 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아무리 그래도.......”

“죽을 뻔했던 주제에.”

한 순간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 같은 감각이 머리를 엄습해왔다. 눈을 크게 벌려뜬 연화가 힘겨이 고개를 들어올렸다.

입가에 그려진 비릿한 웃음과 온기가 느껴지지 않는 싸늘한 두 눈동자.

마치 자신을 비웃는 것 같은 표정에 연화의 표정이 삽시간에 굳어졌다.

“만약 내가 간섭하지 않았다면 이 아가씨한테 죽었을 거야.”

“그건 그저 운이 없어서 그런 것 뿐이야.”

“아가씨가 아니었더라도 다른 사람이 그 대상이 될 수도 있었어. 아무 관계도 없는 타인이.”

“이젠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야.”

죄어오는 목을 억지로 비집고 열며 힘겨이 말을 내뱉었다.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듯하면서도 어떻게든 말을 이어가는 위태로운 모습이 너무나도 위태로워 보였다. 그런 추한 모습을 스스로 돌이켜볼 여유조차도 없는 것일까.

“그건 소연이의 의지가 아니었어. 그걸 강요한 몬스터는 이제 없다고, 더 이상 생각할 필요도 없는 문제잖아!? 이제 이런 일, 더 이상 겪지 않아도 되는데...당신은 왜 그렇게 소연이한테 그런 걸 강요하고 싶어서 안달이 난 거야? 대체할 수 있는 사람은 근처에 얼마든지 있는 이 상황에서까지 소연이한테 손을 뻗으려는 이유가 뭔데!?”

“.......”

이어지는 호통에 강수는 입을 굳게 다문 채 고개를 숙였다.

자신의 앞에 쓰러져 있는 여인에게 계속 목을 매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저 미래에 마주쳐본 적이 있어서? 단순히 그녀의 능력을 높이 사서?

아니, 그런 것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따로 있다. 강수는 그것을 이미 알고 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그걸 사실대로 말한다 해도, 눈앞에 있는 작은 여인은 전혀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녀의 안전을 기리는 만큼 자신이 좋을 대로 해석하고 넘어갈 게 분명하니까.

“첫 인상이라는 게 그렇게 쉽게 사라지지 않는 법이잖아.”

끝내 얼버무리기로 한 그가 씁쓸히 웃으며 고개를 들어올렸다. 이전과는 상반되는 얼굴을 마주한 연화의 폭주가 한순간 흐트러졌다.

“길게 입씨름해봐야 달라지는 것도 없지. 이 대화는 아가씨가 깨어나면 그 때 다시 하.......”

-꼬르륵.

갑작스레 들려오는 소음에 대화에 종지부를 찍으려던 강수의 입이 다물어지고 말았다.

마치 사람이 공복에 들어섰을 때에 날 법한 소리. 그 소리의 근원지는 다름 아닌 눈앞에 있는 작은 여성이었다.

“......읏.”

그것을 연화 또한 자각했는지 얼굴을 붉히며 다급히 고개를 옆으로 틀었다.

“그러고 보니 싸움 끝난 이후로 아무것도 안 먹었던가?”

“그래서 뭐! 생리현상이니 당연하잖아! 하루 이틀 안 먹는다고 안 죽어!”

“사흘 나흘 되면 죽지. 그 때 되기 전까지 계속 버티고 있을 생각이야?”

“시, 시끄러워!”

분한 듯 표정을 우그러트린 연화가 끝내 고개를 밑으로 내리깔았다. 분위기가 고조되는 순간에 제대로 채우지 못한 공복감으로 부끄러움을 느낄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으니 당연한 반응이겠지.

“아직 식사 배급하는 중일 테니까 가서 먹고 와.”

“........”

“거 눈초리 한 번 되게 사나우시네. 없는 동안 내가 무슨 짓이라도 저지를 것 같아서 그러는 거야? 난 그냥 이 아가씨 상태나 좀 보러 온 거지 해코지 하려고 온 게 아니야. 이제까지 충분히 설명했을 텐데. 내가 이 아가씨를 그런 눈으로 보는 게 아니라는 것 정도는.......”

“말 안 해도 아니까 길게 주절대지 마. 입 꿰매버리기 전에.”

끝내 몸을 일으켜세운 연화가 강수에게서 벗어나 통로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방을 벗어나기 전, 연화가 등을 돌려 강수가 있는 쪽을 쳐다보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당신이 소연이를 데리고 가게 두지 않아. 절대로.”

“그래, 열심히 해.”

“...칫.”

혀를 차며 자리를 벗어나는 연화. 머지않아 어둠 속으로 들어선 그녀의 인기척이 사라졌을 무렵 코웃음을 터트린 그가 입에 담배를 물었다.

“참 대단한 아가씨야. 그런 일을 당해놓고도 어떻게 이렇게까지 매달릴 수 있는 건지.”

아무리 자기 의지가 없었다 하더라도 그녀의 선택으로 인해 죽을 뻔한 위기에 처했다. 그럼에도 저렇게까지 헌신을 다할 수 있는 것을 생각해보면, 연화와 소연의 관계는 단순 우정의 관계를 초월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게 일방적이라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겠지만.

[그대는 이 여인을 특별하게 생각하는 듯하지만, 그건 일방적으로 주는 감정이었을 뿐. 이 여자는 지나가는 길에 본 인간과 그대를 동일한 급으로 여기고 있다. 중요하지도, 하찮지도 않게. 그저 오래 봐왔기에 얼굴이 익었고, 그렇기에 친구라는 단어로 정의되는 관계성만을 유지해 나가는 그저 그런 인간으로.]

소연의 기억을 빌린 몬스터가 직접 연화의 앞에서 했던 발언이었다.

그가 거짓말을 할 리는 없을 테니, 소연에게 있어서 연화라는 인간은 지나가는 인간들보다 약간 더 눈에 익은 정도라는 그 말은 분명 사실일 것이다.

평범하게 생각하면 짝사랑과도 같은 개념이다. 일방적으로 감정을 주지만, 그럼에도 보답받지 못하는 그런 어색하고 비참한 관계.

하지만 연화는 그것을 알면서도 개의치 않고 그에게 반론을 가했다.

어째서 그녀가 다른 이들에게 가치를 부여하지 않는 것인지, 그러한 인간으로 성장하여 어떤 고충을 겪었는지.

‘자기 모친한테 살해당할 뻔했다...고 했던가.’

쓰디쓴 담배연기를 내뱉은 그가 쓰러져 있는 소연을 내려다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아가씨도 참 불우한 인생을 타고났어.”

올해로 스물 둘이다. 사건이 일어났을 때라고 하면 기껏 해봐야 중고등학생 정도. 그 때 그녀는 사람을 죽이고, 어미한테 죽임을 당할 뻔하고, 그 후유증으로 몇 번이고 목숨을 끊으려 했다.

그 아슬아슬한 줄타기 속에서 살아남아 만들어진 것이 소연이라고 하는 인간이고, 그것을 베이스로 던전이란 환경이 엮여 만들어진 것이 바로 미래에 자신이 마주했던 영웅이다.

대의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그 무엇이든 저지르는 비정한 영웅.

자신은 그 존재가 지키고자 했던 것을 모조리 으스러트린 장본인이었다.

[당신 때문에 죽은 겁니다! 모두가 당신 때문에...!!]

아직도 그 때의 기억은 선명히 남아있다.

감정이 존재하지 않으리라 생각했던 그녀가 처음으로,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신에게 내비추었던 감정.

그 감정을 다시 한 번 마주하게 된다면, 자신은 그 때와 똑같은 짓을 저지를 수 있을까?

지켜야 할 사람도 살아있고, 세계도 온전한 상태이고, 하물며 ‘변화할 가능성’이 존재하는 이 시대에.

‘내 손으로.......’

슬며시 그녀의 목으로 손을 뻗어갔다. 머지않아 그것이 목을 완전히 포개기 직전, 손가락에 실어넣은 힘을 거둔 그가 자조를 터트렸다.

“솔직히 말할게, 난 아가씨가 무서워.”

의식을 잃은 그녀에게 들릴 리 없는 속마음을 고백한다.

처음 만났을 때에 두려움보다는 당혹이 앞섰다. 자신이 죽는 모습을 몇 번이고 보아도 끈질기게 달라붙어 자신을 죽이기 위한 온갖 수단을 발휘했으니까.

그랬던 그녀가 미래엔 우습게 보였고, 때로는 성가시게 느껴졌다. 최후의 그 순간엔 동정도 느꼈지만 고작 그 뿐이다.

그랬던 그녀를 과거에 돌아와서 마주하게 되었다. 불사신도 아닌, 그저 생명력이 질길 뿐인 인간의 모습으로.

미래의 그녀를 보고 가능성을 확인했지만, 그 미래가 고스란히 이루어질 경우 오히려 자신에게 해가 가해질 지도 모른다.

그런 그녀를 자신의 입맛대로 뜯어고쳐 최고의 인재로 만들어낸다. 그것은 분명 많은 것을 희생시키고, 또 그녀의 의사를 짓밟아야 하는 짓이다.

“그냥, 여기서 서로 다 끝낼 수 있으면 얼마나 좋아. 아가씨도 나도 괴롭지 않고 참 편할 텐데.”

반쯤 농담이 섞인 발언을 내뱉은 그가 조용히 입에서 담배를 거두며 주저앉혔던 몸을 일으켜 세웠다.

“쓸데없는 소리를 했네.”

아마 연화의 성격상 식사는 빠르게 해결하고 다시 소연의 곁으로 올 것이다. 아니면 식사를 통째로 가지고 여기까지 올 지도 모른다. 소연이 깨어났을 때를 대비해 두 개를 같이 가지고 올 수도 있고.

어느 쪽이건 오래 남아 있어봐야 사납게 변한 눈초리만 보게 될 게 뻔하다.

상태가 양호하다는 것은 확인했다. 아직 깨어날 기미도 보이지 않으니 슬슬 자리를 뜨는 것이 좋겠다 생각한 강수가 연화가 나갔던 통로를 향해 발걸음을 움직였다.

-부스럭.

그 순간 귀에 들려오는 희미한 소음. 몸을 움직이는 과정에서 옷이 추슬러질 때 나는 소리에 강수의 고개가 반사적으로 뒤쪽으로 움직였다.

“아, 깨어났.......”

-푸욱!

살이 꿰이는 소리가 울려 퍼지고 격통이 뇌리를 파고들었다.

시야의 절반이 붉게 물들어졌다는 것을 뒤늦게 파악한 강수가 뒤늦게 손에 움켜쥐고 있는 것에 힘을 실어넣으며 표정을 우그러트렸다.

머지않아 손에 쥐어진 그것이 뒤쪽으로 밀려났지만, 그를 예상하듯 습격한 대상은 반대쪽 팔을 곧장 그의 머리를 향해 휘둘렀다.

-퍼컥!

턱을 정확히 가격하는 주먹. 진동에 의해 뇌가 떨려오는 것을 느낀 강수가 다급히 피로 버무려진 손으로 눈을 움켜쥐며 뒷걸음질을 쳤다.

무언가가 눈을 찌르고 들어왔다. 전조도 없이 벌어진 일은 제 아무리 산전수전을 다 겪어온 그라 하더라도 쉽게 대처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물며 그것을 저지른 자는 이전까지 그의 앞에서 쥐죽은 듯 쓰러져 있던 자.

“다짜고짜 뭐하는.......”

“당신, 약해졌군요.”

따지려드는 순간 차가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것이 비수가 되듯 날아들어 그의 입을 다물게 만들었다.

남아있는 한쪽 눈으로 그녀의 모습을 살펴 보았다. 몸을 일으켜세운 그녀는 왼쪽 손에 버무려져 있는 피에 개의치 않고, 손에 쥐어져 있는 것을 바닥에 내팽개치고 있었다.

피와 투명한 액체로 적셔진 눈동자가 바닥에 퍼져나가 흙먼지로 적셔간다. 그것이 자신의 눈이었음을 알아차렸을 때엔, 들어올려진 발의 그림자가 눈동자의 밑을 뒤덮고 있었다.

“이전에 마주쳤을 때에만 해도 그 정도 상처는 별 다른 피해조차 되지 않았을 텐데, 죽지 않는 것만이 당신의 장점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배려라곤 전혀 느껴지지 않는 무미건조한 목소리. 그와 더불어 날카롭게 뜨여진 그녀의 두 눈이 강수에게로 향해졌다.

“하기야, 이유 따윈 신경 쓸 필요 없겠지요. 약해졌다면 오히려 당신을 제거하는 작업을 더욱 수월히 이행할 수 있다는 뜻이니."

자신과 함께 다녔을 적에 본 적 없는 눈이다. 굳이 따지자면 미래에 마주쳤을 때에 표하던 것과 같았다.

몬스터의 정신이 남아있어서? 아니, 그런 게 아니다. 카즈라는 이름을 지닌 그 몬스터는 이미 교주와 함께 다른 몬스터에게 먹혀버린 상태다.

설령 그가 돌아와서 그녀의 정신을 장악했다 하더라도 이 정도로 유사한 분위기를 자아내진 못할 것이다. 미래의 그녀와 완전히 동일한 모습을.......

‘설마, 정말로....’

불가능이라는 생각에 확신을 가질 순 없었다. 자신이야말로 돌연히 떠오른 가능성을 높이는 산 증거였으니까.

“모든 것은 대의를 위해, 이번에야 말로 당신을 제거하도록 하겠습니다.”

뽑아낸 눈동자가 가차없는 발길질에 짓뭉개지고, 차가운 적의가 곤두세워져 그를 압박해가기 시작했다.

자신이 마주했던 사상 최악의 적이 갑작스레 모습을 드러낸 순간이었다.

========== 작품 후기 ==========

조로도 눈 하나 빠지고 존나 쌔졌음. 이거 강해지는 플래그임.

구라지만.

암튼 가시는 길에 던부추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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