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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왕국의 부흥을 바라던 왕은 군사력을 강화하고자 병사의 양성에 힘을 기여하고, 국고를 든든히 하고자 외교에 활발한 정책을 펼쳤다.)
(그렇게 그 어떤 위험에도 굴하지 않고, 그 누구도 배를 곪지 않아도 되는 이상적인 나라가 완성되리라 생각했지만, 풍족함 속에서도 빈곤은 존재하고 있었다.)
(아주 사소할 뿐인 고민은 설산에서 구르는 눈덩이처럼 크게 부풀어 오르고, 그것은 곧 국민들의 불행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문제를 해소하고자 왕이 선택한 것은 종교였다. 왕은 자신의 나라에 기여할 종교단을 초청하여, 그들이 믿는 종교를 왕국의 국교로 지정하였다.)
(교단의 신도들은 왕의 지원을 받아 나라 곳곳에 자신들의 교단이 가르치는 ‘타인에 대한 배려’를 가르쳤다.)
(국민들이 사소한 불행이 그들의 가르침에 잠식되고, 끝내 전 국민들이 교단을 포용하던 때, 왕은 그들의 능력을 높이 사 그들의 지원을 아낌없이 행하였다.)
(그렇게 나라의 부흥에 일조하던 교단은 왕이 지도하는 왕국과 함께 오래토록 왕국과 운명을 함께 했어야만 했을 터이지만, 머지않아 찾아오게 된 재앙은 그들의 신앙심을 뿌리째 뽑아 태워버리고 말았다.)
(아무리 강한 군력을 지니고 있어도, 많은 재화를 모으더라도, 원인을 알 수 없는 질병을 막아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부흥을 바라던 왕국은 서서히 무너져 내리고, 희망을 잃은 이들은 교단에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들은 신을 향해 구원을 바라고, 기도를 하며, 자신들을 고통 속에서 해방시켜주기를 바랬다.)
(하지만 정녕 그들이 바라는 것은 자신들에게 손을 뻗어줄 구원자였을까? 아니면 자신들의 억울함을 받아줄 수 있는 무한한 존재였을까.)
(교단에 들어선 이들은 자신들의 기대에 보답하지 않은 신에게서 등을 돌리고, 그의 이름을 등에 엎은 채 역병에 감염된 이들을 하나 둘 씩 죽여가기 시작했다.)
(명분은 확고했다. 역병이란 ‘악’이며, 그에 감염된 이들은 악에 종식된 악마의 하수인들. 때문에 선을 지향하는 자신들이 처치해야 마땅한 존재다.)
(한때 자신들이 보듬었던 이들을 고통스럽게 처리해가는 일을 반복하고, 반복하고...그럼에도 줄어들지 않는 살육감을 해소하고자 그들은 자신들의 교단에 속하지 않은 이들을 하나 둘 씩 악으로 치부하여 학살해갔다.)
(그 모든 행위의 중심에는 교단을 지도하는 교주가 존재하고 있었다.)
(미쳐버린 왕의 실험으로 인해 역병을 버텨낼 수 있는 몸을 가지게 되었지만, 시체나 다름 없는 몸이 개조되어 나타난 그의 몸은 그저 살아있을 뿐인 괴물에 불과할 지어다.
(흉측하게 변한 육신에 잠들어있는 타락한 정신은 신의 이름을 앞세우며 자신들의 눈앞에 나타난 모든 이들에게 어긋난 정의를 강요한다.)
(그것이 절망으로 가득 찬 세계에서 자신들이 행해야 할 성전임을 굳게 믿으며.)
(“그 어디에 구원이 존재한단 말인가. 삶이란 고통으로 가득 차있으며, 그 끝은 결국 칠흑 같은 어둠 만이 존재할 것을. 결국 처음부터 절망이 예견되어있다면, 그 절망을 품어줄 존재에 등을 기대어라. 그리하면 심연 속에서도 마음의 구원을 받을 수 있을 지어니.”)
[기록자의 회고록-타락한 교주 크툴라의 기록 中]
*****
교주, 크툴라는 자신이 포박시키고 있는 자에게 굳은 신뢰를 지닌 자였다.
이 정체불명의 공간에 휩쓸리고 난 이후 지워져버린 기억들이 서서히 떠오르는 가운데, 눈앞에 있는 자는 자신과 함께 역병이 감돌기 시작한 땅에서 ‘악에 잠식되어버린 자들’을 무수히 처단해왔다는 것을 어렴풋이 떠올린 상태였으니까.
냉정하고, 침착하고, 무자비하게. 그러면서도 한 점의 흔들림도 없이.
그 모든 것이 바로 교단을 위해서 행한 일임을 기억하고 있는 크툴라는 이런 공간에 휩쓸렸다 하더라도, 카즈가 자신을 배신하리란 가능성을 단 한 번도 염두에 두지 않고 있었다.
그 자의 말을 듣기 전엔.
[심판자 님 말입니다. 요새 좀 움직임이 이상하신 거 눈치 채셨습니까? 지난 번에 잡아온 여자에게 유독 신경을 쓰고 있다거나, 정신을 바로 장악해도 될 것을 굳이 쓸데없이 이런 저런 대화를 하며 시간을 끄는 것도 그렇고.]
처음에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었다. 던전에 휩쓸려온 이에게 사제라는 높은 직위를 선사한 이유는 그에 따른 능력과 신앙, 그리고 자신을 만족시켜줄 만한 ‘광기’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때에 따라선 그 어떤 잔인한 일이라도 해야 하는 것이 신을 지탱하는 자가 해야 할 사명이다. 광기가 크면 클수록 그에 따른 일 또한 쉽게 수행할 수 있는 만큼, 그 자가 보여준 광기는 자신이 세운 교단을 이끌기엔 최적의 재능이라 표현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
하지만 인정하는 건 고작 그것뿐이다. 런 모습만으로 자신과 같은 세계의 출신이 아닌 자를 신뢰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기에 처음에는 흘려들으려 했지만, 머지않아 그가 관심을 보이던 인간의 몸을 장악하고 나타났을 때에 약간의 의문이 들게 되었다.
그의 정신장악 능력은 온전한 의식을 지니고 있는 자에겐 사용하기가 어렵다. 하물며 자신처럼 기억도 희미한 자가 아닌 외지에서 들어온 인간에게 사용할 경우 육체와 정신이 모두 망가져 써먹지 못하게 될 것이 뻔하다.
삶을 포기했다 하더라도 미약하게나마 반발은 느껴진다. 대상의 육체 제어권을 넘겨받고자 한다면 아무런 거부감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그를 설득하는 수밖에 없다.
설득...인간을 대상으로 무슨 설득을 했을까, 고민 끝에 머지않아 결론이 내려졌다.
‘그는 몸을 빼앗은 대상과 거래를 나눈 것이다.’
무의식적으로 절대로 깨져서는 안 될 규칙을 지정하고, 그 규칙이 깨어지는 순간 거래가 취소되어 쌍방 모두 해가 가해질 지도 모르는 절대적인 거래. 자신이 신뢰하는 자가 인간을 대상으로 그 거래를 진행했다면?
그 거래의 내용은 무엇일까, 직접 물어보려 했지만 좀처럼 기회는 나오지 않았다. 그는 몸을 얻자마자 자신에게 제물을 구해오겠다는 말만을 남긴 채 자리를 벗어났으니까.
처음에는 신경 쓰지 않으려고 했다. 어떤 거래를 나누었다 하더라도 그가 행하고자 하는 일은 모두 교단을 위해서라고 생각을 했으니까.
이 공간에 휩쓸리기 이전에도 분명히 교단을 위해 수많은 죄인들을 자신의 눈앞에서 학살했던 그가 아니었던가? 온전치는 않더라도 그 순간을 기억하고 있는 자신이 그를 의심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하지만 그 사제가 남겼던 불온한 움직임이란 발언은 미약하게나마 마음속에 불안함을 심겨갔고, 기억 속에 드문드문 비워진 공백이 그와 규합되어 적잖은 괴리감으로 변모되었다.
자신이 무언가를 놓치고 있을 지도 모른다. 그 생각은 그에 대한 신뢰의 방향성을 조금 틀어내어 지금의 결단을 내리게 만들었다.
-내 자네를 신뢰하고 있지만, 그래도 만약이라는 게 있는 법이니 말이네. 뭔가...불안해서 말이야.
-꾸드득, 드득.
벽에 달라붙은 촉수가 더욱 단단히 고정되어 그의 몸을 움직이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누르는 힘은 강하지 않았지만 몸에 알맞게 맞춰진 그것으로부터 빠져나가는 것은 쉬운 일이라 할 수 없었다.
-이번 일이 끝나고 나면 풀어줄 테니 걱정하지 말게나.
크툴라는 끝내 카즈를 포박시킨 촉수로부터 고개를 돌렸다.
지금도 구덩이에서 빠져나온 괴물은 자신의 더러움을 충족시켜줄 무언가를 먹고자 하는 마음이 다분한 상태였다.
이대로 사슬을 잡아 당겨 그를 던져 넣으면, 그의 육신은 손에 짓뭉개진 채 구덩이로 흡수되어, 타락한 괴물과 하나가 되어갈 것이다.
-자 그럼 바로 시간 끌 거 없이 시작해보도록 하지. 이 더러운 괴물을 만족시켜줄 제물을 바치고자.......
-콰창!
사슬을 잡아 당겨 포박된 제물을 날뛰는 손에게로 던져 넣으려던 직후, 사슬이 끊어지는 소리가 울려퍼짐과 동시에 그의 머리를 향해 둔중한 무언가가 휘둘러지기 시작했다.
이마가 벌어지며 생겨난 수 많은 눈이 돌연 자신에게로 다가오는 존재를 감지해냈고, 그것은 방심하고 있던 크툴라에게 경각심을 심어주어 공격으로부터 대응하도록 만들었다.
-꾸극, 콱!
손에 쥐고 있던 사슬을 놓고, 팔을 세워 공격을 막아내었다. 팔을 대신하여 솟아오른 다수의 촉수가 머리를 망가트리려는 공격을 억제시킨 직후, 크툴라의 썩은 두 눈이 자신에게 공격을 강행한 자에게로 움직여졌다.
삽을 굳게 쥐고 있는 두 손과 자신을 굳세게 주시하고 있는 성난 두 눈. 방금 전까지 포박된 채 쓰러져 있던 남자임을 알아챈 그의 시선이 다급히 바닥으로 향해졌다.
끊어진 사슬의 잔해가 바닥에 널브러져 있다. 단지 그것만으로 그가 포박을 벗어나 자신에게 공격을 가했다는 사실을 인지할 수 있었다.
-어, 어떻게 포박을........
-퍼억!
삽으로 촉수를 밀어낸 강수가 품에서 꺼낸 담배를 입에 문 채 온 몸에 힘을 실어 넣었다.
미리 완력으로 끊어내기 쉽도록 조정한 사슬을 풀어헤쳐 공격을 가한 것은 그로썬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정신을 장악해야 할 카즈가 포박된 상태에서 얌전히 있으면 제물로 바쳐지게 될 뿐이니까.
예정이 틀어졌지만 이대로 전투를 펼칠 수밖에 없다.
-크, 으윽, 이 미천한 자가!!
교주가 으름장을 토해내며 강수가 있는 곳을 향해 손을 뻗었다. 수 많은 갈래로 나뉘어진 촉수가 자신을 향해 뻗어졌을 때, 강수는 손에 쥐고 있던 삽을 멀리 내팽개친 채 스마트폰을 조작하여 무기를 꺼내들었다.
-스각, 서걱!
두 자루의 장검으로 자신의 사지를 옭아메려는 촉수를 쳐내었지만, 그것만으로는 모든 공격을 막아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촉수의 무리 속에 감추어져 있는 원형의 입. 날카로운 이빨이 세워지며 그의 머리를 먹어치우고자 뻗어지는 때, 멀리서 날아든 붉은 섬광이 그것을 꿰뚫어 재기불능의 상태로 만들었다.
-무슨...!?
교주가 놀라며 눈을 부릅뜬 채 공격이 날아온 방향으로 고개를 틀었다.
벽에 짓눌려 포박되어 있어야 할 카즈의 몸이 사라져 있다. 이미 그는 표식능력의 상위특성인 ‘지정이동(일정시간마다 표식이 있는 위치로 순간이동)’을 이용해 자리를 빠져나가고, 구석진 곳에 자리를 잡은 채 그에게 공격을 가할 준비를 취하고 있었다.
-어째서인가, 카즈. 왜 그대가........
-콰작!
앞에서 휘둘러지는 공격이 세워진 촉수에 막히며 썩은 피를 터트렸다. 뒤늦게 자신이 공격당했음을 자각한 교주가 팔을 변환시켜 만들어낸 촉수를 바닥에 매다꽂으며 그에게 압박을 가했다.
끝이 날카롭게 변한 촉수들을 피해낸 강수가 바닥에 떨어트린 삽을 주워들며 자리를 벗어났다. 바닥에 흉하게 파여있는 구멍들은 자칫 그의 목숨이 떨어질 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심어주었다.
“말과 좀 다르지 않아? 어지간하면 의심을 살 리는 없다고 했을 텐데.”
-틀린 말은 아니다. 아직 그는 기억이 온전히 돌아온 상태가 아니니까.
강수의 옆으로 다가선 카즈가 시위를 당긴 채 손 끝에 화살을 만들어내었다. 그 역시도 예상치 못한 상태에 강수와 마찬가지로 적잖은 당혹을 느끼는 상태였다.
-아무래도 그 사제의 말에 자극을 받은 모양이군.
작은 발언이라도 의심의 발화를 만들기엔 부족함이 없다. 자세히는 몰라도 그 사제가 벌인 자그마한 이간질은 그들의 작전을 망쳐버린 나비효과가 되어 덮쳐왔다.
-어째서 그대가 잡아온 제물과 합심하여 나를 공격하는 것이지? 설명을 해보게나 카즈.
-........
-...설명하기 어려운 일인가?
카즈의 침묵에 교주가 힘없이 고개를 땅으로 떨구며 중얼거렸다.
-...내 그대를 믿으려 했지만, 아무래도 무언가 잘못된 것 같군.
-꾸드득, 드드득.
변이된 육신을 버텨내지 못한 교주복이 찢어지며 그의 흉한 모습이 드러났다.
사방으로 뻗어지는 촉수와 더불어, 그 촉수와 연결되어 있는 썩은 살덩어리의 집합체는 이제껏 봐온 그 어떤 괴물보다도 끔찍하기 그지없었다.
-일단 그대를 제압하고서 생각하겠네. 이 의식을 끝마치고 나면 그 때에 제대로 해명을 해야 할 것이야.
거대한 팔을 등에 진 그가 살벌한 목소리를 토해내며 사방으로 촉수를 뻗었다.
공간에 즐비한 양초의 불씨들이 촉수에 의해 흐트러지고 깨져나가 바닥과 벽을 태우기 시작하는 가운데, 카즈는 시위에 매어진 화살의 끝을 교주를 향해 겨누었다.
-미안하게 됐군.
“그런 말 하지 마. 애초에 편히 해결할 수 있다고 굳게 믿는 게 잘못된 거니까.”
이미 벌어진 일이다. 첫 번째 작전이 실패하리란 염두는 이미 해둔 상태다.
정신을 장악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이후의 여정을 쉽게 만들기 위한 조건일 뿐. 그것이 깨어졌다면 어려운 길을 택하면 될 뿐이다.
“그 녀석들이 잘해주길 빌어야지. 잘할 수 있도록 우리도 버텨줄 필요가 있지만.”
스마트폰을 꺼내든 강수가 자신의 그룹원들에게 ‘작전 실패’라는 메시지를 보내었다.
그 메시지를 보는 이들이 자신이 생각하는 대로 작전을 수행해주기를 간절히 바라며.
========== 작품 후기 ==========
게임 역사상 희대의 병신 이벤트 중 하나인 키리의 믿약이 시행되기 전, 던파를 줄창 했던 저는 던파의 세계관에 대해서 알아보고 그랬습니다. 그마저도 이후에 대전이인가 뭔가 때문에 그마저도 싹 다 뒤집어져서 아예 관심을 꺼버렸지만요.
아무튼 그 과정에서 'GBL교'라는 거에 대해서도 알아봤는데, 그 이름의 약자가 'Grand Blue lore'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당시에 대다수의 분들이 고블린이라고 기억하고 있던 걸 생각하면 정말 충격적인 반전이었죠.
이 지식을 친구에게 전파하고자 가볍게 질문을 건네본 적이 있습니다.
'야, 너 GBL 약자 뭔지 알음?'
'알음. 긴(G) 발의(B) 로터스(L)자너~!'
'...?'
가시는 길에 던부추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