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화. 각자의 역할 -->
부상을 입은 세린을 희선에게로 데리고 갔다. 다행히도 몸에 큰 부담이 있었지만, 능력을 이용한 치료는 의학적으로 수술을 하는 것과는 다른 초능력의 반열에 오른 것. 부상이 얼마나 심하건 목숨만 붙어있고, 온전히 치료를 할 환경만 갖춰진다면 어떻게든 치료를 할 수 있다.
하지만 희선의 기본 능력은 어디까지나 ‘육체적인 부상을 빠르게 회복시켜주는 치유능력’일 뿐, 그 외에 상위 특성들을 이용하여 회복력을 높이거나 특정 상태이상을 완치하는 것도 가능하지만, 그 중엔‘ 약물부작용’의 효력을 줄여주는 효과는 존재하지 않았다.
“육체 적성수치가 매우 낮음으로 추락했네요.”
희선에게 치료를 받고 난 후 자신의 스마트폰을 확인한 세린이 쓴웃음을 지었다.
“죄송해요, 그 부분은 제가 어떻게 할 수가 없어서.......”
“아뇨, 뭐. 무리를 한 건 저니까요. 어쨌든 태산씨랑 다윤 씨도 구할 수 있었고...시간이 좀 필요하지만 중화제를 주기적으로 복용하면 부작용의 회복시간도 빨라져요.”
다급함에 들이부으면 오히려 역효과가 나지만. 말 뒤에 그렇게 덧붙인 세린의 쓴웃음에 희선이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회복을 직접 맡아 한 만큼 그녀의 몸상태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나머지 인원도 마찬가지. 뒷수습을 하던 중 갑작스럽게 몰려든 수 십 명의 기습으로 인해 중상을 입은 태산과 다윤의 상처도 심각하지만, 두 사람보다 심각한 부상을 입었음에도 그녀는 태연히 웃음을 짓고 있었다.
한편으로는 대단하다 생각되지만, 그마저도 걱정에 집어삼켜질 수밖에 없는 처지...
“수습할 일 남아있지 않아요? 아까 전에 잡은 녀석들을 관리한다거나.”
“네, 그래야죠.”
기습공격으로 세린을 습격한 이들은 현재 죽어가는 목숨을 힘겨이 붙잡은 채로 끌려온 상태였다. 죽일지 말지, 혹은 그들을 이용할지를 상의하는 건 마냥 가벼이 여길 수 있는 일이라 할 수 없었다.
서서히 한 두 명 씩 자리를 벗어나 광신도들을 모아놓은 곳으로 향하고, 끝내 자리에 남은 것은 세린의 치료를 전담하는 희선과 요한 뿐.
“희선씨도 가보세요. 다른 분들도 봐주셔야죠.”
“...네.”
희선마저 세린의 말에 자리를 떠났고, 오직 요한만이 세린을 마주하게 되었다.
세린은 쓸쓸히 웃으며 요한과 눈을 마주쳤다.
"하실 말씀 있으시죠?“
“그래, 엄청나게 많지.”
선글라스를 벗은 그가 불만이 가득한 표정으로 그녀를 쏘아보았다.
“아무리 기습적으로 쳐들어왔다고 해도 그렇지, 목숨 하나하나 일일이 살려가면서 무리를 한 이유가 대체 뭐야?”
“아무리 그들이 심한 짓을 한 인간들이라 해도 그렇지, 너무한 발언이네요.”
“그들은 우리 적이야.”
“요한씨도 죽이지 않으셨잖아요?”
“난 감당할 수 있는 선이었으니까. 하지만 넌 아니었잖아.”
공개적으로 자신들이 향하는 경로의 입구를 통해 온 놈들을 다른 이들과 협력하여 싸운 것과, 그들의 실패를 알아차리고 주변에서 대기하고 있던 20명의 인원이 기습적으로 처들어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공격을 가해온 건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다.
태산과 다윤은 그 과정에서 치명상을 입었고, 그들을 지키기 위해 홀로 자리에 남아있던 세린은 자신의 몸을 망쳐가며 20명을 상대했다.
그 과정에서 우두머리에 해당하는 한 녀석을 제외하고 나머지 이들의 목숨만은 붙여놨다. 그로썬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아무리 자기 목숨을 헤프게 여겨도 그렇지........”
“헤프게 여기는 건 맞지만, 이번에 그런 건 좀 다른 차원의 문제예요.”
요한의 말에 세린이 눈을 감으며 나지막한 목소리를 내뱉었다.
“요한씨도 자각하고 계시겠죠? 강수씨가 없는 지금 이 무리를 이끌고 있는 사람들이 누구인지를.”
알고 있다. 그들이 자신들을 의지하고 있다는 것 정도는.
이유는 자신들이 가장 강하기 때문이고, 이 던전에 대해서 가장 잘 알고 있는 그에게 동조하고 직접 연관이 된 이들이니까.
“특히나, 요한씨는...자각하고 계시겠지만, 지금 이곳에서, 중심이 되어 이끌고 있어요. 모두가, 당신에게 의지하고 있고.”
그렇기에 그는 항상 신중하고, 행동 하나하나에 조심을 할 필요가 있다. 무리를 이끄는 자가 그릇된 판단을 할 경우 모두가 불신을 할 것이고, 끝내 집단은 와해되고 말 테니까.
그 중에서도 ‘살인’이라는 행위는 정말로 신중하게 할 필요가 있다. 그들은 이곳에 들어오기 전엔 평범한 사람들이었으니까.
“저와는 다르게, 저 분들은 누군가를 죽이는 행위에 대해서는 전혀 익숙하지가 않아요. 그런 이들의 앞에서, 살인이라는 행위를 당연시 여겨야 한다고 강요하면 어떻게 될 것 같아요?”
“다들 그 정도는 각오한 일이야.”
“...각오라는 게 얼마나 헛되게 무너지는지 알고 계신 분께서 너무한 말을 하시네.”
크큭, 세린이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누구나 한계라는 걸 가지고 있어요. 설령 가능하다 하더라도, 그걸 과신해서 반복하고 나면 무너지고 말아요. 저는, 그저 제가 감당할 수 있는 선까지 버티면서 그들을 죽이고, 그 한계를 약간 넘어설 뻔해서 어쩔 수 없이 한 명을 죽이고 만 거예요.”
“...버틴 거라고? 이게?”
겉으로 보기에도 창백한 안색은 그녀의 몸이 허약해졌다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 회복되긴 하겠지만, 그 과정에서 느껴지는 고통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수준일 것이다.
“그야 이렇게 고통 받는 게 제가 원하는 일인 걸요? 물론 죽는 건 ‘아직은’원치 않는 만큼 그 때가 오면 저도 전력으로 저항을 하겠지만......."
요는 목숨이 붙어있을 때까진 그러한 한계를 넘지 않겠다는 의미다. 사지가 비틀리고 심장이 쥐어터지는 고통이 느껴진다 하더라도.
우스운 건, 그 한계선을 자신보다도 사람을 죽여본 경험이 무수히 많은 이 여자가 더 잘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 몸이 이 지경이 되고도 버텨낼 수 있다면 괜찮겠지.”
“이해해주시는 거군요.”
“이해? 전혀. 내가 말하는 건 경고야."
세린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요한이 화를 터트렸다.
"네 한계선이 태평양만치 넓다면야 감당할 수 있는 선까지 버티는 걸 손 댈 생각은 없지만, 그건 이번처럼 나나 다른 녀석들이 어떻게 할 수 없는 곳에서 일이 벌어졌을 때의 얘기야.”
요한이 그녀의 이마에 검지손가락을 찔러 넣으며 얼굴의 거리를 좁혀갔다.
“어떻게 됐든 간에 지금은 같이 싸우는 입장이야. 옆에 손 뻗으면 다른 사람 손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라고. 그런데도 그 손을 마다하고 앞으로 뛰쳐나가서 된통 당하고, 처참한 꼴로 ‘괜찮아 걱정 없어’같은 말을 주절거리며 돌아오는 걸 보면 다른 놈들이 무슨 생각을 할 거라 생각해?”
“걱정하겠죠. 이번처럼.”
“걱정뿐만이 아니야. ‘나는 이렇게 되어도 괜찮다’라는 걸 보여주면 모두가 너한테 의지하려 드는 게 아니라 자책감을 더 크게 느껴. 그래서 위험한 상황이 되면 네가 했던 행동을 그대로 따라해서 너도 나도 똑같이 그 일을 저지르겠지.”
“...그건 좀 싫네요.”
“그래, 이제야 깨달아서 참 다행이네. 그럼 이제부터라도 그 생각 고쳐먹어.”
다른 이들 없이 홀로 다닐 때엔 무슨 일을 하건 상관 안 하지만, 지금 그들은 공통된 목적 하에 움직이는 입장이다.
정말로 다른 녀석들을 신경 쓰고 있다면 자신 하나가 어떻게 되어도 상관 없다며 무리한 일을 하기보단, 감당하지 못하는 일을 버텨내며 다른 이들과 힘을 합쳐 극복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이다.
이런 극단적인 상황에 처한 사람들에게 필요한 건 자신을 대신해 무거운 짐을 짊어질 사람이 아닌, 함께 짐을 짊어져줄 사람이니까.
그러한 요한의 생각을 파악한 세린은 요한의 분노를 직시하며 나지막한 웃음을 지었다.
“걱정해주시는 건가요?"
“걱정이 아니라 위태로워보여서 손이 뻗어지는 거야.옆에서 보면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하는 것처럼 보이니까."
"곡예에는 별로 자신이 없는데."
“과거가 어떻든 간에 앞으로 함께 싸울 사람이야.”
세린의 농담에도 불구하고 요한은 자신이 할 말만을 한 채 그녀에게서 등을 돌렸다.
“등을 맡길 사람이 무리한 짓을 하려는 걸 막는 건 당연한 거라고.”
“친절하네요, 당신은.”
세린의 말을 뒤로한 그가 끝내 자리를 벗어났다.
“정말로 좋은 사람이에요.”
머지않을 미래에 그가 목숨을 잃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만큼, 현재의 상황엔 안타까움이 느껴질 수박에 없었다.
그도 이곳에 들어오기 전엔 평범한 학생이었을 터인데, 어쩌다 이렇게 무거운 짐을 지게 만든 것일까? 그 짐의 무게를 급격히 더한 것이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이라는 점이 안타깝게 느껴질 뿐이었다.
죽기를 바라는 그녀에게 있어서, 남에게 자신이 받아야 할 아픔을 공유시키는 것은 너무나도 껄끄러운 일이었으니까.
다른 이들과 함께 앞으로의 계획을 얘기하고자 무리로 다가선 요한의 뒷모습을 주시하고 있었을 때일까? 문득 얼굴이 반쯤 벗겨진 남자가 자신에게로 다가오는 것을 자각한 세린이 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참으로 우직한 청년이지요?”
“네, 그렇죠. 저 따위와는 함께 하는 게 아까울 정도로.”
이어지는 그의 말에 세린이 눈웃음을 지었다.
감정이 거의 느껴지지 않은 건조한 웃음이었다.
“이름이 어떻게 되셨죠?”
“배들호라고 합니다.”
“배들호, 배들호...? 아하핫~”
이어지는 소개에 세린이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다.
“기구한 운명이네요. 예수의 독실한 제자들이 한 자리에 모이다니.”
“이름을 이용한 농담이군요.”
농담에 기분 나빠하는 기색 없이 받아치는 그의 말을 들으며 세린이 자신의 입가에 손을 올렸다.
“솔직히 말할게요. 전 당신을 죽이고 싶어요.”
“직설적이군요.”
“그야, 저런 순수한 청년을 자신의 추한 색으로 더럽히려는 것처럼 보이니까요.”
자세한 것은 모르지만, 그가 무리에 합류한 이유가 요한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은 잘 알고 있다.
그는 요한이 무언가를 해주기를 바라고 있다. 아마도 그것은 그가 바라는 것이자, 그가 절망교에 들어서게 된 계기와 관련이 있는 것일 지도 모른다.
순수하게 그를 마음에 들어하는 자신과는 달리 그를 이용해먹고 싶어 하는 남자가 마냥 좋게 보일 수 있을까?
“그는 우리 같은 악당들과는 달라요. 선하고, 선하고, 선한 마음을 가진...그렇기에 그것을 계속 유지해야만 해요. 이곳을 빠져나간 이후에도 계속.”
“그가 상당히 마음에 드신 모양이군요.”
"단순한 동경이에요. 만약 제가, '그이'의 죽음을 받아들였을 당시에 그처럼 강한 마음을 품고 있었다면, 이런 길로 들어서진 않았을 거라는 헛된 동경.”
그런 동경을 지켜보며, 자신의 과거를 되새기고 아픔을 가증시키는 것만으로도 지킬 가치는 충분히 있다.
그런 부정의 감정을 읽는 능력을 지닌 남자는 그에 애석함을 느끼며 고개를 숙였다.
“당신은, 너무나도 마음이 병들어있군요. 어떤 의미에서 그 남자보다도 훨씬 더.”
“고칠 수 없는 불치병이죠. 시간은 되돌릴 수 없으니까.”
설령 시간을 되돌려도 기억은 남는다. 기억마저 지워져버린다면 완전히 새로운 사람이 되는 것이니 이제 와서 논하는 건 무의미한 일이다.
그렇기에 그녀는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을 부정하지 않고 떳떳함을 가지려는 것이다. 설령 그것이 자신이 이제껏 저질러온 것들보다도 더한 악행으로 이어진다 하더라도 말이다.
“그 남자, 한강수라고 했던가요? 그를 따라나서는 것도 그에게 있어선 위험한 일은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만.”
“그를 따라나선 건 요한씨 자신의 의지니까요. 적어도 그가 요한씨에 대해서 무언가를 저지르고자 하는 것에 터치를 할 생각은 없어요.”
애초에 그는 요한의 심성을 자신보다 더 잘 알고 있다. 설령 그걸 알고도 터치하려 든다면 오히려 요한 쪽에서 그에게 대응을 할 것이다.
그는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 걸 철저하게 밀고 가는 사람이니까.
하지만 그가 요한보다 먼저 관심을 보였던 자는 어떨까?
“그 아가씨는 후회하지 않을 선택을 하길 빌어요. 저처럼 길을 잘못 들게 되면, 평생을 괴로워하며 살 테니까.”
씁쓸함이 서려있는 중얼거림을 마지막으로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세우려 했을 때일까?
문득 자신의 가운 주머니에 넣어둔 스마트폰에서 일어나는 진동을 눈치 챈 세린이 그것을 꺼내어 들었다.
강수에게서 온 메시지였다.
"어머나~ 이 짖궂은 남자."
메시지를 읽은 세린의 두 눈이 황홀감에 젖아기기 시작했다.
========== 작품 후기 ==========
가시는 길에 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