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5화. 하찮은 인간. -->
붉게 물들어진 시야의 절반이 검게 물들어질 정도다. 아니, 그마저도 현재진행형으로 침식되어가는 수준이다.
비대하고, 그러면서도 지다. 그의 몸이 보이지 않을 정도의 흑빛이 주변으로 퍼져나가다 끝내 시야를 완전히 뒤엎었다.
이제까지 이런 것을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자신이 한때 섬겼던 존재에 조차도........
-크윽...!
그것을 버텨내지 못한 몬스터가 끝내 자신의 눈을 포개고 있는 렌즈를 손으로 가리며 표정을 우그러트렸다.
-대체, 그대는...얼마나 큰 죄를 저질렀기에.......
“죄?”
처음으로 선명히 표해지는 감정의 변화에 강수가 입에 물고 있는 담배를 떨어트리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 오기 전에 마주쳤던 20명을 빠르게 정리하고 여기까지 오긴 했다만."
-20명? 아니. 그 수준이 아니야. 이건...그 분 보다도 훨씬 더.......
말꼬리가 흐려지고, 머지않아 침묵으로 이어졌을 무렵 그의 입에서 코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 렌즈 그거야? 대상이 죽인 사람의 수 같은 걸 숫자로 표기하는...설마 했지만 역시 시간을 되돌려도 저지른 건 남아있나 보네.”
이전까지 흑으로 물들어져 있던 남자는 태연히 자조섞인 웃음을 지었지만, 그의 속에 감추어진 죄악을 들춰낸 몬스터는 도저히 그의 존재를 가벼이 여길 수 없었다.
-여기서...제거해야........
끝내 그의 기운을 버티지 못한 몬스터가 이성을 잃은 채 냉정히 활을 들어올렸다.
-제거를, 제거해야 한다...그대를 이 자리에서...어떻게든...무슨 희생을 치르더라도 반드시.......
힘이 풀린 눈동자는 이제까지 마주쳐온 언데드들보다 약간의 생기만이 느껴질 뿐.
그러면서도 자신을 죽이겠다는 의지를 토해내는 그녀의 모습을 보며 강수가 일그러진 웃음을 지었다.
“옛날생각 나는 모습이네. 정말로.”
자신이 기억하고, 원하는 대로의 모습을 본 순간 그가 가장 처음으로 느낀 것은 자신의 목숨을 위협받는 것에 대한 공포였다.
미래와 달리, 지금의 그는 불사의 몸이라고 할 수 없는 상태였으니까.
******
“...윽.”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힘겨이 몸을 일으켜 세웠다.
겨우 정신이 뜨여졌다 생각했을 무렵, 연화는 흐릿해진 시선을 차츰 주변으로 움직여갔다.
바닥에는 물기가 젖어있는 타일이 배치되어 있고, 곳곳에는 다수의 칸막이들이 존재한다. 입구 부근의 세면대에는 앞에 선 이의 얼굴을 비치는 거울이 덩그러니 존재하고 있었다.
“여기...화장실? 내가 왜.......”
-철썩!
의문을 느끼며 중얼거리고 있자 살을 때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얼얼해진 볼을 움켜쥐며 자신의 볼을 때린 그림자에게로 시선을 주었다.
노란 장발의 교복을 걸친 소녀가 들어올린 손을 다시 자신에게로 겨누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연화는 그 자가 누구인지를 잘 알고 있었다.
그 뒤를 따르고 있는 세 명 역시도.
“홍연화, 너 요새 건방지다?”
“...건방지다니, 뭘.”
-철썩!
의문을 토해내자 노란 머리의 여인이 다시 연화의 뺨을 때렸다. 뺨을 때리는 힘을 버티지 못한 연화가 뒷걸음질을 치고 화장실의 칸막이에 몸을 부딪쳤다.
이전까지 친구의 얼굴을 빌린 몬스터에게 된통 당해 빈사의 상태에 빠졌다.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부상이었는데, 지금의 자신은 몸이 상당히 멀쩡한 상태였다.
아니, 마냥 멀쩡한 게 아니라 바뀌어 있었다. 손가락은 조금 더 가늘고, 키도 아주 조금이지만 줄어있다. 가장 눈에 띄는 건 복장이다. 그녀는 자신의 뺨을 친 여자와 마찬가지로 ‘교복’을 입고 있는 상태였다.
그것도 자신이 나온 모교의 교복을.
“...아.”
그제야 연화는 지금의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자각했다.
소위 악몽이라고 부르는 것이고, 동시에 자각몽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녀에게 있어서 별로 이상할 것은 없었다. 일상에서도 매일 같이 꾸는 것이었으니까.
시작은 학창시절, 자신을 괴롭혔던 녀석들의 험한 짓으로부터 시작된다.
이런 식으로 화장실로 불려와 뺨을 맞는 건 정말로 가벼운 일이다. 그들의 괴롭힘은 단순한 육체적인 폭행으로 그치지 않으니까.
복도를 지날 때 들려오는 험담은 장난 수준이다.
교실에 들어선 순간 교과서가 전부 찢겨져 있거나, 체육 시간에 입어야 할 체육복이 물에 담겨 젖어있는 둥, 자신이 없는 곳에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에 거리낌 없이 손을 뻗고 망가트린다.
누가 저질렀는지 따윈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저지른 가해자도, 그걸 방관하고 있던 자들도 모두 한마음이 되어 그것을 확인한 자신을 비웃는다는 것이니까.
그렇게 뒤에서 구시렁대는 녀석들이 있는가 하면, 이런 식으로 대놓고 자신에게 갈굼을 표하는 녀석들도 존재한다.
평범하게 폭행을 일삼고 돈을 뜯어내는 녀석들도 있지만, 아무 이유도 없이, 자신의 불만을 해소하고자 화풀이용으로 삼는 녀석들도 존재한다.
눈앞에 있는 노란머리는 후자에 속하는 녀석이다. 언제나 짜증나는 일이 있을 때면, 그녀는 자신의 패거리를 이용해 자신을 외진 곳으로 끌고 와 폭력을 저질렀다.
화장실에 자신을 끌고 왔을 당시엔 교제를 하고 있던 일찐 선배와의 사이가 틀어졌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는 꼴 하나하나가 전부 눈에 거슬려. 평소에는 그냥 참아줬는데 오늘 만큼은 못 참겠다. 내가 오늘 좀 예민한 상태거든.”
예민하긴 개뿔. 뭐든 구실이 필요한 거겠지.
그럼에도 차마 그것을 입밖으로 내뱉지 못했다. 이 악몽은 기억을 재구성한 것에 불과하니까. 설령 말한다 해도 돌아올 일도, 머지않아 당하게 될 수모도 똑같다.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이 꿈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는 것뿐이다.
“연화 얘 요새 건방지다니까. 꼴에 공부한다고 주말에 도서관에 다닌다니까?”
“우리 반 반장한테도 꼬리치고 말이야.”
“지 주제도 모르고.”
옆에 있는 녀석들이 이러쿵 저러쿵 뒷담을 까는 소리가 들려왔다.
학생이 공부를 하는 건 당연한 것이다. 주말에 공부의 장소를 도서관으로 정한 건 단지 알콜과 담배 냄새로 절은 집에 한시도 있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꼬리를 치다니, 그때는 그저 장래희망 조사표를 받느라 잠깐 대화를 나누었을 뿐이었다. 그나마 남들과 달리 양심적이었던지라 괴롭힘을 당할 때면 탐탁찮게 보는 시선이었지만, 단지 그것 뿐이었다. 그는 직접 자신을 돕거나 남들을 말리지 못했다.
가해자들을 막아세웠다가 그들의 칼날이 자신에게로 향할 것이 두려웠을 테니까.
이제 와선 이해되는 행동이지만, 당시의 어중간한 호의가 자신을 더욱 괴롭게 했던 것이 기억에 선명히 떠올랐다.
왜 그들의 표적이 되었더라? 명분이야 뭐든 갖다 붙여도 되는 처지지만, 그러한 처지가 되기 전의 근원은 분명히 존재하고 있다.
분명 부친의 사업이 잘못되고, 어미와 자신을 버리고 집을 나가 행방이 묘연해졌을 때였다.
빚은 남지 않았지만 집에 재산이 없고, 어미는 아비가 사라진 이후의 공백을 채우지 못해 이 남자 저 남자를 만나며 돈을 뜯는 삶을 살았다. 의외로 매력적인 외모를 지니고 있었고, 그런 그녀의 몸을 탐하는 남자는 매우 많았으니까.
그 소식을 숨기려 했지만 결국 알 놈들은 다 알기 마련이다.
야반도주를 한 아비와 매춘을 한 어미라는 쓰레기 같은 부모를 둔 자식으로.
그런 ‘추락한 삶’은 남들에게 동정을 사기보단 눈에 띄는 표적이 되고, 그 시선은 고스란히 가학으로 이어졌다.
이유는 아무래도 좋다. 중요한 건 눈에 띄는 자를 한 명 잡아다 자신들의 가학성을 해소시켜줄 대상을 찾는 것이었으니까.
하물며 학교랑 집만 보내면 신경도 안 쓰는 무관심한 어미와, 그저 허수아비처럼 있을 뿐인 교사의 존재는 그들의 행위에 망설임마저 느끼지 않게 만들었다.
어느 때엔 쓰레기장으로 끌려가, 쓰레기통에 머리에 처박히고 내동댕이 쳐진 적도 있었다.
건물 옥상에서 떨어트리는 시늉을 하며 겁을 주고, 끝내 문을 잠그고 방과후나 돼서야 풀린 적도 있었다.
옥상에 있었을 당시 차라리 떨어지면 편해지지 않을까. 그런 생각까지도 했을 정도로 그들의 괴롭힘은 인간으로써 버티기 어려운 수준이었다.
“그런데 얘 얼굴 왜케 더럽냐? 잡티가 너무 많은데?”
그들이 턱을 움켜쥐고 외모에 대한 험담을 늘어놓았다. 매일같이 그들이 묻힌 더러움을 씻어내고자 청결하게 다닌다. 더러움이 끼었다면 그건 자신의 몸이 아닌 그들의 눈일 것이다.
“더러우면 씻어줘야지. 연화야, 고마워해. 우리가 손수 네 얼굴을 씻겨주는 거니까.”
호의를 표한다는 듯이 주절거린 그들은 화장실 칸막이의 문을 열어재치고 그 속에 자신을 밀어넣었다.
청소가 되어 있지 않아 비릿한 냄새가 흘러나오는 변기에 얼굴을 들이밀었을 무렵, 그 더러움이 자신의 얼굴을 적실까 두려워 발버둥을 쳤다.
생리적인 거부감에 이성을 잃고 날뛰었지만 돌아오는 건 폭행이었다. 그럼에도 계속 들이밀지 않겠다 저항을 했지만 다수의 힘을 버텨내는 건 불가능했다.
‘제발, 용서해줘.’
당시의 자신이 그들에게 했던 말이었다.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들에게 용서를 빌었다.
마치 이 자리에서 살아 숨 쉬고 있다는 것 자체가 죄라도 된 것처럼.
하지만 그마저도 가벼이 흘려들은 그들은 행동에 절제심을 발휘하지 않았다.
그렇게 억지로 자신의 얼굴을 변기에 쳐넣고 할 말은 이제까지의 경험으로 충분히 에상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이야, 원래부터 더러웠지만 변깃물로 세수하니까 더 깨끗해졌네. 하긴, 시궁창에서 굴러먹던 녀석인데 이 정도는 해줘야지.’
그 말을 진심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 더욱 화가 치밀어 올랐다.
어미도 아비도 쓰레기지만, 자신이 살고 있는 환경은 그들과 별반 다를 바 없는 곳이다. 학교, 집, 길거리...그런 공간에서 자신을 격리시켜 시궁창 속에 처박길 강요하는 건 다름아닌 그들이지 않은가?
그렇게 말을 해도 달라지는 건 없다. 그녀의 주변에 있는 모든 이들은 자신에게 어떤 짓을 저질러도 상관 없다는 인식이 처박힌 상태였으니까.
단 한 사람을 제외하고.
“소란스러워서 와봤는데, 무엇을 하고 있는 건가요?”
조용한 목소리였다. 괴롭힘을 주도하는 노란머리나 주변에 있는 세 사람과는 전혀 다른, 현재의 상황을 전혀 알지 못하는 문외한의 목소리.
“이제 곧 수업 시작할 시간인데, 돌아가는 게 좋지 않나요?”
행동을 멈춘 모든 이들의 시선이 입구 쪽으로 향해졌다. 그들의 입장에서 보면 한창 좋을 때에 방해를 받은 것이나 다름이 없었으니까.
“야이씨 한창 좋을 때. 네가 뭔데 이래라 저래.......”
“야 이 미친년아!”
막 짜증을 토해내려는 일행 중 한 명이 노란머리의 손에 머리를 쳐맞고 입을 다물었다. 연화의 뺨을 때렸을 때보다도 더욱 격한 힘이었다.
“너 쟤 누군지 몰라!? 정신 나갔어!?”
“으, 윽. 미, 미안.”
뺨을 얻어맞은 녀석이 사과를 내뱉었다. 뭔지는 몰라도 자신이 잘못을 저질렀다는 것을 뒤늦게 자각한 듯 싶었다.
끝내 노란머리를 포함해 나머지 이들의 시선이 화장실로 들어온 이에게로 향해졌다. 곧 그의 존재를 직시한 일행들이 하나 둘 씩 얼굴을 창백하게 물들이며 몸을 떨었다.
“저 애, 그........”
“젠장, 재수 옴 붙었네.”
노란머리가 격하게 중얼거리며 그녀의 옆을 지나쳐 화장실 밖으로 빠져나갔다.
변기칸 밖으로 얼굴을 빼내었을 때, 그녀와 몸을 부딪치기 직전 옆으로 몸을 빼내는 행동이 연화의 눈에 들어왔다.
자신에게 거침없이 폭력을 휘둘렀을 때와는 달랐다. 마치 더러운 걸 피한다기보단 무서워서 도망치는 것 같은 행동.
“괜찮으세요?”
끝내 그들이 자리를 벗어났을 무렵, 화장실 안으로 들어온 여인이 연화에게로 다가왔다.
어깨 위까지 기른 짧은 머리카락과 더불어 온기가 감돌지 않는 눈. 무미건조한 목소리.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듯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지만,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시선엔 걱정이 깃들어 있었다.
“다투신 건가요? 많이 다치신 것 같은데, 일단 양호실에 가는 게 좋을 것 같네요.”
동급생임에도 불구하고 꼬박꼬박 존대를 내뱉는 그녀는 다른 이들과는 다른 이질감이 느껴지고 있었다.
마치 자신과는 전혀 다른 세상에서 온 것 같은 여인.
“부축해드릴게요. 손, 잡아주시겠어요?”
그 여인이 자신을 향해 손을 뻗었을 때, 연화는 망설임 없이 그녀의 손을 붙잡아 몸을 일으켜 세웠다.
처음 보는 여자였지만, 직접 괴롭히거나, 보이지 않는 곳에서 괴롭히거나, 그저 방관을 하는 자들과는 달리, 처음으로 자신에게 손을 뻗어주었던 자였으니까.
지금 와서 생각하면, 그것은 무지에서 비롯된 용기가 아니었을까 싶다.
만약 그녀를 피했던 녀석들처럼, 그녀가 ‘고작 중학생 때 사람을 죽인 전과가 있는 살인자’라는 걸 알았다면,
그걸 안 상태에서도 그녀의 손을 붙잡을 수 있었을까?
========== 작품 후기 ==========
오늘 오후 중에 제목 바꾸겠습니다.
던전 브레이커 추천을 줄여서 틴귀추(던커추)라 바꿔야 할 지 고민이네요.
그래도 일단 이번 편은 던부추로 하겠습니다.
가시는 길에 던부추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