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화. 심판자 -->
목숨줄이 붙어있다는 건 참으로 다행으로 여겨야 할 일이다. 가뜩이나 사람 수가 적은 상황에 힘을 가진 강자를 잃는다는 건 전력에 큰 타격이 가해진다는 것이니까.
다만 그런 그녀가 빈사상태에 빠졌다는 것보다 더 신경 쓰이는 건 그녀를 이런 꼴로 만든 존재였다.
몬스터...소연의 모습을 빌리고 있는 존재가 걸치고 있는 옷은 날카로운 흉기에 베여 거덜난 상태였다 그 속에서 흐르는 출혈의 양은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지만, 그럼에도 몬스터는 멀쩡히 몸을 일으켜세운 채 자신과 연화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대충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겠구먼.”
작게 중얼거린 강수가 바닥에 쓰러져 있는 연화에게 능력을 사용했다.
“편히 쉬고 있어, 뒷일은 나한테 맡기고.”
재생력으로 인해 무기력해진 몸이 서서히 회복되고, 상처부위에 새살이 돋아나기 시작했을 무렵, 긴장이 풀린 연화의 눈꺼풀이 스르륵 감겨갔다.
“편히 쉬고 있어. 뒷일은 나한테 맡기고.”
“...소연이는.”
“걱정 마. 안 죽여.”
강수의 말에 잠에 저항하던 연화의 눈이 끝내 감겨졌다.
애초에 한계에 몰려있던 정신을 오기로 붙잡고 있던 상태, 몸의 회복과 더불어 자신의 친구를 죽이지 않는다는 말은 자신이 그녀를 해할지도 모른다는 미약한 불안감을 덜어내어 그녀의 의식을 가라앉혔을 것이다.
강수는 쓴웃음을 지으며 자신의 겉옷을 연화의 위에 덮어주었다.
“죽이진 않겠다만. 험한 짓은 할지도 모르지. 상황이 상황인 만큼.”
와이셔츠의 옷깃을 고친 그가 몸을 일으켜 세우고, 연화를 상대했던 자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는 자신이 연화를 보듬어주기 전까지 말 없이 자리를 지키고 서있을 뿐이었다.
“얌전히 기다려주는 건 여유야? 아니면 친구에 대한 정이야?”
-........
그는 대답 없이 그를 쳐다보기만 할 뿐. 강수는 그의 침묵에 코웃음을 터트리며 어깨를 으쓱 움직였다.
“조금만 더 빨리 발견했으면 좋았을 텐데 말이야.”
-그 작은 여인을 신경 쓰고 있는 건가?
“신경을 쓰는 건 이 아가씨 사정보다는 내 사정이지. 그 쪽이 빌리고 있는 그 몸. 내가 탐내고 있던 사람이거든.”
-...탐을 낸다?
이어지는 발언에 몬스터가 곧 수긍을 한 듯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그렇군, 그대는, 이 몸의 주인을 이용하려고 들었던 건가?
“별로 좋은 표현은 아니지만 부정은 안 할게.”
그의 말을 긍정한 강수가 삽자루를 들어올려 끝을 몬스터에게로 겨누었다.
“그래서 지금 엄청 열이 뻗치는 상태야. 내가 없는 사이에 그 아가씨의 몸을 독차지하는 녀석이 나타났으니까.”
-독차지라, 그 역시도 좋은 표현은 아니군. 나는 어디까지나 정당한 거래를 통해 이 주인의 몸을 빌리고 있을 뿐이다.
“그 거래에 아가씨가 내건 게 혹시 ‘대의를 이룬다’거나 하는 그런 이유는 아니겠지?”
-........
이어지는 침묵은 긍정을 의미하는 것일까. 이어지는 말에 강수는 이제껏 자신이 느끼고 있던 의구심에 확신이 드는 것을 느꼈다.
“어쩐지 묘하게 분위기가 비슷하다 했어. 그 때 봤던 모습하고.”
그는 소연의 미래에 대해서 기억하고 있다.
기계적이고, 냉정하고,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지금 눈앞에 있는 자도 마찬가지다. 그는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원래 몸의 주인이었던 자의 친구를 죽이려 했다.
그 행위에 죄책감을 느끼되 망설임을 느끼지 않는다.
해야 하는 일을 저지르는 데에 주저 없이 손을 휘둘러 손을 더럽히고도 개의치 않고 나아가는...눈앞에 있는 그런 소연의 모습과 유사점이 많이 엿보였다.
만약 미래에 있었던 모습이 현재 소연에게 덧씌워진 존재와 연관이 되어있다면.......
“알아야 할 게 더 늘어버렸어.”
쯧, 하고 혀를 찬 강수가 머리를 움켜쥐며 그를 향해 짜증이 서린 시선을 향했다.
“다른 거 하나 더 물어보자. 혹시 그 아가씨한테서 뭔가 눈에 띄는 거라도 발견한 거야? 아무리 우연이라 해도 ‘두 번’씩이나 무작위로 골라서 같은 인물에게 손을 뻗으리라곤 생각할 수 없는데.”
-두 번...? 마치 나를 이전에 만난 적이 있다는 듯이 말하는군.
“글쎄.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너랑 만난 거였는지도 모르지.”
그가 소연을 만난 것은 세계가 멸망하고 난 이후의 이야기. 하물며 친한 사이도 아닌 철천지 웬수나 다름이 없었다.
그녀에 대한 성장과정은 아쉽게도 그로썬 알 길이 없다. 바꿔 말하면, 그는 현재의 소연과 미래의 소연이 같은 존재인지 다른 존재인지도 전혀 모른다는 것이다.
자신이 일고 있는 그 존재가, 어쩌면 김소연이라는 인간의 가죽만을 뒤집어쓴 몬스터였다면?
아무리 미래를 경험한 그라 하더라도 상식선에선 이해가 되지 않는 이야기였다.
의식을 먹어치우고 가죽을 뒤집어쓰는 몬스터들이야 여럿 존재하지만, 누군가를 대신하고 그 사람처럼 행동한다는 건 단순히 흉내를 내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경지의 일이니까.
애초에 몬스터가 ‘대의를 지킨다’는 이유로 행동을 하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설령 의식을 유지하고 지능을 발휘할 수 있는 몬스터라 할지라도.
‘...애초에 실마리가 앞에 있는 상황에서 고민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겠다만.’
입에 담배를 물은 강수가 눈을 치켜뜬 채 그를 주시했다. 그는 자신의 적의를 읽고 활을 들어올려 태세를 바로잡고 있었다.
아직도 벌어진 앞섬에선 피가 흘러내리고 있다. 평범한 인간이었다면 고통에 허우적대야 정상인 부상이다.
“빌린 건 의식만이 아닐 텐데. 아프지 않아?”
-...이 여자도 각오했던 일이다.
-푸슉!
당겨진 시위에 화살이 생기고, 그것이 머지않아 강수가 있는 곳을 향해 날아들기 시작했다.
-터엉!
머지않아 허공에 휘둘러진 삽이 정확히 붉은 화살을 쳐내었다. 화살을 이루고 있던 힘은 삽에 충돌하자마자 으스러져 사방으로 파편이 되어 흩어졌다.
몬스터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연달아 시위를 당겨 그를 향해 다수의 화살을 쏘아보냈다.
-터엉, 터엉, 터엉!
이어지는 사격도 그는 가볍게 삽으로 쳐내며 모조리 튕겨내었다. 그것도 머리와 심장만을 노린 유효타를.
-...!?
“어쭈, 몬스터 주제에 놀라기까지 하네?”
화살을 쳐낸 자신의 행동에 놀라움을 표하는 몬스터를 향해 그가 비웃음을 터트렸다.
“별로 놀랄 거 없어. 이 쪽도 몸 망가질 각오를 하면서 쓰는 거니까.”
와이셔츠의 옷깃을 걷어내어 목 부근에 아물어가는 바늘자국을 보여주었다. 통로를 통해 이곳으로 들어서 기습을 가하기 전, 그는 전투를 대비해 세린에게서 얻은 강화제를 주사해놓은 상태였다.
신경을 극도로 예민하게 만들어 일정 시간 동안 순발을 극한까지 늘리는 약물. 지금의 그는 권총을 든 대상이라도 미세한 움직임을 캐치하여 막아낼 수 있는 순발능력을 얻은 상태였다.
“그래도 보기 좋네. 내가 알고 있는 모습보단 사람다워서.”
-...약하진 않다는 건가.
상처 부분을 손으로 움켜쥔 몬스터가 그를 주시하는 시선에 힘을 실어 넣었다.
한 순간 그의 몸이 둔해지고 무거워졌을 무렵 몬스터가 빠르게 시위를 튕겨 머리를 향해 화살을 쏘아보냈다.
“표식 두 개를 연달아 걸어 쏘는 약체화.”
-터엉!
쏘아지는 화살을 삽으로 튕겨낸 그가 고개를 옆으로 비틀어 뒤이어 날아오는 화살을 피해내었다.
“빗맞춘 척 하면서 배후를 노리는 사격.”
허공을 지나친 화살이 궤적을 꺾으며 날아든 순간 뒤로 비틀어진 그의 몸이 화살을 맞닥트렸다.
-푸슈사삭!
삽에 의해 배후에서 날아드는 화살을 튕겨낸 직후 사방에서 날아드는 다수의 화살. 허공으로 날아들다 궤적을 꺾어 날아드는 그것을 본 강수가 진한 웃음을 그리며 인벤토리를 활성화시켰다.
-까앙, 까앙, 카칵 캉!
양 손에 쥐어진 단검과 장검을 이용해 절묘하게 화살들을 튕겨낸 그가 바닥에서 증발하듯 사라져가는 화살들을 내려다보며 진한 웃음을 그렸다.
“연달아 표식을 이동하며 회피지점을 봉쇄하는 난사...다음엔 또 뭐야?”
화살로부터 시선을 돌리고 고개를 들어올렸을 무렵, 강수는 몬스터가 원래 있던 자리에서 모습을 감추었음을 자각했다.
그의 몸이 나타난 곳은 이전에 있었던 곳의 반대쪽. 벽을 짚은 채 허공에 날아든 그가 활을 들어올린 채 자신을 향해 화살을 쏘아보내기 직전.
-쇄악! 카각!
투창처럼 빠르게 날아든 단검이 등 뒤의 벽에 반쯤 처박혔을 때 시위를 당기던 몬스터의 손이 일순간 멈춰졌다.
“...표식이 새겨진 곳으로 순간이동? 그건 또 처음 보는 기술인데. 내가 없는 새에 레벨업 한 걸로 찍은 건가봐??”
-........
이어지는 그의 발언에 몬스터는 끝내 손에 쥐고 있는 활을 거두며 그를 쏘아보았다.
감각이 뛰어나고 힘도 있지만 이전에 마주했던 흡혈귀보다 훨씬 위험한 상태다.
그 여자와는 달리, 눈앞에 있는 자는 ‘자신의 능력과 전략’을 모조리 꿰고 있었으니까.
설령 꿰지 못한 것이 있다 하더라도 기본을 알고 있는 상태에선 그 어떤 전략을 보여주더라도 머지않아 파훼될 뿐이다.
“그래, 이 아가씨가 왜 이렇게 속수무책으로 당했는지 이해가 되네. 원래 자기 머리에 겨누어진 레이저 포인터라는 게 자기한테만 안 보이는 법이지.”
강수는 연화와 달리 소연이 표식생성이란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헤어진 이후는 모르겠지만, 그 이전에 찍은 특성들은 모두 그녀에게 보고를 받은 만큼 전부 기억하고 있다.
그렇기에 눈앞에 있는 몬스터가 다루는 전략을 모조리 꿸 수 있는 것이지만, 강수는 자신이 그의 전략을 파훼하는 것보다도, 어째서 눈앞에 있는 몬스터가 그녀의 전략을 다루는지에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너 정말로 의식만 빌린 거 맞아? 아가씨가 몬스터인 척 연기하는 게 아니라?”
-확실히 이 몸의 주인이 가지고 있는 능력 뿐만 아니라 전략까지 구사한다면 가질 수 밖에 없는 의문이로군.
이어지는 강수의 말에 몬스터가 공격을 멈추고 설명을 이어갔다.
-네 예상대로, 나는 이 몸의 원래 주인이 지니고 있던 모든 것을 구사한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기억’을 빌려 사용할 뿐이지. 그 기억에 ‘누가 그것을 가르쳐주었나’는 존재하지 않는다.
“...누구인지를 모른다?”
-이 공간에 귀속된 나에게 부가된 억제력이다. 누구와 관계를 이루었다 하더라도 그들의 존재는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는다. 이 공간에 휩쓸려온 존재라 할지라도, 외부의 존재에 대한 기억을 파헤치는 것이 불가능한 것이지.
“쉽게 말해서 안면인식 장애 비스무리한 상태라는 건가? 반대로 말하면 그 아가씨의 시점에서 겪은 기억들은 모두 알 수 있다는 거네. 그렇다면 다른 사람도 아닌 그 아가씨를 선택해 거래를 행한 이유도 기억 상에 존재할 가능성이 있다는 건데........"
-...이대로 계속가면 위험해지겠군.
이어지는 그의 물음에 대답 대신 현재의 상황을 직시하는 말이 내뱉어졌다.
그것이 전투에 대한 것인지, 아니면 곤란한 것을 파헤치려는 자신의 호기심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어느 쪽이건 지금의 그가 이곳에 있는 이유는 이뤄야 하는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나에겐 거기에 있는 작은 여인이 필요하다. 그대 역시도 조건을 충족시킬 수 있는 대상이 될지 모르지만, 가급적 일을 빨리 처리해야 하는 만큼 싸움은 최소한으로 끝나고 싶다. 계속 막아세운다면 이 쪽도 전력을 발휘할 테지만, 그렇게 되면 그대도 무사히 넘어가진 못할 터. 이 몸의 주인과 행한 거래의 조건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라도 이 이상 시간을 지체하고 싶진 않다.
“미안한데 난 욕심쟁이라 이 꼬마 아가씨랑 그 쪽 아가씨 몸도 데리고 갈 생각이거든. 얌전히 벗어나려면 날 쓰러트리고 가야 할 거야.”
자신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가볍게 이어가는 그의 말에 몬스터는 슬며시 고개를 숙였다.
머지않아 연화와의 전투에서 떨어져 내린 붉은 렌즈가 발치에 내동댕이 쳐져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것은 김소연이라는 인간과 별개로 그가 원래부터 지니고 있는 신체의 일부. 대상이 지니고 있는 죄악의 수치를 확인할 수 있는 눈이다.
-싸움은 불가피하다는 건가.
몬스터는 그것을 주워들어 자신의 왼쪽 눈으로 가져갔다. 소연의 몸을 빌려 바라보는 세계가 적색으로 물들어지고, 머지않아 시야에 들어온 이들의 신체가 검게 물들어져갔다.
데미지를 버티지 못하고 바닥에 쓰러져 있는 작은 여인의 몸에서 검은 기운이 물씬 풍겨왔다. 사지에 불꽃처럼 일렁이는 검은 안개의 크기는 그리 크지 않지만 색은 매우 짙다. 10명 채 되지 않은 사람을 최근에 죽였음을 의미했다.
자신이 마주하고 있는 남자 역시도 몸이 검은 색으로 물들어져 있다. 이전에 자신이 상대했던 작은 여인보다도 훨씬 더 짙은 기운을 가진........
-...뭐야.
그의 죄를 읽어낸 몬스터의 입에서 힘없는 경악이 내뱉어졌다.
========== 작품 후기 ==========
가시는 길에 던부추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