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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브래이커-155화 (155/251)

<-- 37화. 심판자 -->

원래 있던 방에서부터 정신 없이 도망친 연화는 어느새 다섯 방 이상 달려왔음을 자각했다.

상당한 거리다. 그들이 그 남자를 처리하지 못했다면 아마 여기까지 오는 데에 상당한 시간이 걸릴 터.

“쿨럭.”

체력이 방전되어 숨을 몰아쉬다 못해 기침이 토해졌다. 지친 몸을 바닥에 주저앉힌 연화는 다급히 스마트폰을 꺼내들어 지도를 확인했다.

그의 위치는 이전과 다를 바 없는 곳에 표기되어 있었다. 그것이 적들을 막아두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적들에게 당해 꼼짝도 못하는 상태가 된 것인지 지도를 보는 것만으로 확인할 수는 없었다.

알 수 있는 것이라곤 방 근처에 누군가가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 정도. 하지만 적들은 자신이나 다른 이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는 수단을 갖추고 있는데다, 몰려다녀도 어째서인지 몬스터들이 몰려들지 않는 능력을 가진 자들이다.

한 곳에 정체되면 이전처럼 포위할 수 있는 기회만을 줄 뿐. 휴식마저도 지금 상황에선 사치일 뿐이다.

“...젠장. 마시기 싫은데.”

지도를 거둔 연화가 곧장 자신의 인벤토리에 잔뜩 들어있는 아이템들로 시선을 주었다.

두 칸 가량을 차지하고 있는 대량의 혈액팩. 그것은 던전 내를 누비던 중 자신을 습격했던 인간들의 몸에서 뽑아낸 피를 취하여 얻은 것들이었다.

흡혈귀는 흡혈을 통해 떨어진 체력과 생명력을 빠르게 회복시키는 것이 가능한 존재다. 열 방이나 되는 거리를 쉬지도 않고 주파한 동안 바닥난 체력을 단시간에 회복시켜 휴식시간을 단축시키려면 피를 마시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라는 것이다.

피를 마신다. 한때 인간이었던 자의 몸에 들어있는 피를.......

“꿀꺽.”

연화는 그것이 들어있는 팩을 거침없이 뜯어 자신의 입에 집어 넣었다.

끈적한 액이 혀를 타고 목구멍내부로 스며들고, 그와 동시에 비릿한 냄새가 후각을 자극해 머릿속을 휘저어갔다.

흡혈귀의 특성 중 하나인 피에 대한 강력한 갈망이 충동적인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것이다.

끝내 거침없이 피를 들이킨 연화는 다 비워진 혈액팩을 내던지며 자신의 입가에 손을 올렸다.

“우윽, 으엑.”

속에서부터 치솟아 오르는 구역질에 괴로움을 호소한 연화가 입을 틀어막고 욱욱거리길 반복했다. 겨우 역겨움이 잦아들었을 무렵 새파랗게 질린 안색을 가로저은 연화가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끔찍한 시체들, 몬스터들의 향연, 그리고 자신을 습격하는 인륜을 져버린 인간들 등등.

모든 고난을 아무렇지도 않게 버텼다 할 순 없지만, 적어도 그것을 참아낼 수 있는 인내심 정도는 갖추고 있었다. 흡혈귀로써 얻은 정신수치와는 별개로 이제까지의 경험은 그 모든 위험을 버텨내며 나아갈 수 있는 활로를 만들어주었다.

하지만 아무리 익숙해지려 해도 도저히 익숙해질 수 없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흡혈’이라는 행위였다.

공포증이나, 혹은 손에 피를 묻히는 것을 꺼려하는 것이 아니다. 그녀가 피를 거북하게 여기는 것은 ‘입에 집어넣는 것’그 자체였으니까.

“애초에 채식 주의자한테 왜 이딴 능력을 쥐어주는 거냐고!!”

-철퍽!

손에 쥐고 있는 반쯤 남은 혈액팩을 바닥에 내팽개쳤다.

내용물이 바닥에 쏟아져 흩어지고, 머지않아 팩이 던전에서의 작용에 의해 증발하듯 사라져버렸다.

그럼에도 바닥에 묻어나 있는 피는 남아있다. 그것이 눈에 들어왔을 무렵 이전에 섭취했던 피가 다시 입 밖으로 치솟아 오르는 것을 느끼고 입을 손으로 틀어막았다.

돼지든 소든 닭이든 뭐든 고기 자체를 싫어하며, 특히나 그 짐승의 피를 이용해 만든 ‘선지’는 아예 거들떠도 보지 않았다.

그런 자신이 던전에 들어오며 얻게 된 능력이 평범한 짐승도 아닌 인간의 몸에 들어있는 피를 빨아 마시며 힘을 보충하는 능력이라니, 운이 없다기엔 정도가 지나치다.

“...이따위 공간 빨리 나가버리든가 해야지.”

욕지거리를 내뱉었지만, 지금은 그런 걸 따질 겨를이 없는 상태였다.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 벌어질 수 없는 만큼 조금이라도 더 빨리 기력을 보충할 필요가 있었으니까.

다시 혈액팩을 입에 가져간 연화가 주저앉혔던 몸을 일으켜세우며 통로를 거닐었다. 피를 마시는 것을 통해 어느 정도 체력이 회복되는 것이 느껴졌지만, 그와 별개로 속을 뒤흔드는 역겨움은 걸어가는 중에도 그녀를 끝 없이 괴롭혔다.

피에 대한 강한 욕구를 느끼면서도 그와 별개로 심리적으로 거부감을 느끼다니, 거식증에 걸린 인간이 공복에 시달리는 느낌이 이런 걸까.

끝내 대 여섯 팩 정도를 비우고, 그 모든 것을 바닥에 내팽개친 연화는 겨우 몸에 활력이 찾아왔음을 자각하고 다시 자신의 스마트폰의 지도를 들어올렸다.

그는 아직도 원래 있던 곳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는 상태. 따돌리고 빠져나갔다면 진작 빠져나갔을 테지만, 그럼에도 아직 그 자리에 남아있다는 데엔 걱정이 크게 들 수밖에 없었다.

탈출하지 못한 걸까? 어쩌면 자신이 도망칠 시간을 벌기 위해 계속 그들과 전투를 벌이는 것일 지도 모른다.

잡혔을 수도 있지만, 능력을 습득함으로써 얻게 된 예리한 감각은 그와 대화를 나누었을 당시에 강한 설득력을 느끼게 해주었다.

[걱정 마. 안 죽어. 잡히지도 않을 거고.]

“........”

말을 떠올린 연화가 잠시 걸음을 멈추고 자신이 지나온 길을 돌아보았다.

이제 와서 돌아가기엔 너무나도 멀어졌다. 그를 도우러 간다 하더라도 도리어 자신이 잡힐 것이 뻔하다.

이제부터 자신이 골라야 할 선택지라고 해봐야 여기서 돌아가거나, 아니면 해야 할 일을 마저 진행하는 것 정도뿐일 것이다.

“해야 할 일........”

어둠이 드리워진 통로를 돌아본 연화가 몸을 움츠리며 스마트폰을 들어올렸다.

이미 일을 진행하기로 했을 때부터 지도의 갱신은 되어있는 상태였다.

그가 그룹지정을 해둔 상태이기 때문에, 원래 그와 그룹이 되어있던 요한과 세린의 위치를 확인하는 것도, 그들과 메시지를 주고받는 것도 가능하다.

이대로 그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 재정비를 하는 것도, 원래부터 진행하고자 하는 일을 진행하여 그들에게 정보를 전하는 것도 충분히 고려할 수 있는 일이다.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과연 어느 쪽을 고르는 것이 좋을까?

그녀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인물은 소연이었다. 소연을 구하기 위해 그녀는 그들의 일에 동참을 한 것이었고, 가장 먼저 소연의 행방을 알 수 있는 별동대에 지원을 한 것이었다.

지금도 그 마음은 여전하게 남아있다. 소연과 함께 다른 이들을 구하고 싶다는 마음역시도.

그것을 위해서 그에게 수작을 부려 정신적으로 제어를 가하려 했던 것이 아니었는가? 만약 그가 배신이라도 해서 나머지 사람들이나 소연에게 위험을 끼치기라도 하면 곤란하니까.

정작 그가 대신 미끼가 된 지금, 그런 걸 생각해도 무의미한 일이지만.......

“...젠장.”

답답함을 떨쳐내지 못한 연화가 끝내 머리에 쓰고 있는 모자를 누르며 발걸음에 재촉을 가했다.

그가 멋대로 정한 일이긴 했지만, 결국 그에게 도움을 받았다는 것은 확실한 사실이다. 쉽게 당하리라곤 생각지 못하지만 20명이나 되는 이들을 상대하는 것도, 도망치는 데에 성공하여 그들을 뿌리치는 것도 모두 그의 몫.

원래부터 다른 사람들을 지도하는 역을 맡았던 만큼, 그가 손을 쓰지 못하는 지금 그를 대신해 일을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자신 뿐이었다.

그를 완전히 신뢰하진 않더라도 그가 그렇게 되어버린 것에 책임감 정도는 느끼고 있다.

만약 그였다면 지금의 상황에서 과연 어떤 일을 골랐을까? 지금 자신이 해야 하는 일은 그에 염두를 두고 생각을 하는 것이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그는 이 공간에 대해 자신보다 훨씬 더 잘 알고 있으니까. 그라면 분명 어느 쪽도 이룰 수 있는 효율적인 것을 선택할 것이다.

먼저 본거지로 향한다, 혹은 돌아가서 도움을 요청한다.......

“...돌아가자. 일단은.”

그리 길지 않은 고민 끝에 연화는 돌아가는 쪽을 선택했다.

애초에 생각해볼 것도 없는 고민이다.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선 그들의 본거지에 잠입할 필요가 있지만, 그들의 본거지에 잠입했다가 자칫 자신의 얼굴을 알고 있는 녀석에게 들통이라도 나면 모든 것을 그르칠 게 뻔하니까.

정말로 그가 거기에 있는 20명을 다 죽여버리지 못하는 이상 자신의 얼굴을 기억하는 녀석이 남기 마련이다. 제 아무리 강해도 그런 게 쉬울 리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만큼, 차라리 일행에 합류하여 다음 기회를 기약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설령 다급함이 느껴진다 하더라도, 이 일은 혼자서 이룰 수 있는 일도 아닌 만큼 더더욱.

하지만 이 마음을 삭히고, 언젠가 자신이 목표로 한 것을 이루었을 때 그것이 헛된 희망으로 다가선다면 어떻게 될까?

아무리 간절히 원하더라도 일어날 일은 일어나게 되어있다.

목적을 이루리라 생각하는 그 순간 자신의 앞에 처참한 결과가 기다리고 있다면, 과연 그 순간을 자신이 버텨낼 수 있을까?

-터벅, 터벅.

상념에 잠겨있던 중, 귀에 들려오는 소리에 일행이 있는 쪽으로 돌아가려던 연화의 발걸음이 도중에 멈춰졌다.

소리가 들려오는 곳은 자신이 가려고 했던 통로 쪽의 방향. 극한까지 단련된 청각은 통로를 통해 방으로 유입되어오는 누군가의 존재가 감지되고 있었다.

몬스터라기엔 발걸음소리가 너무 일정한데다 절도가 있다. 이것은 여유를 가진 사람의 발걸음 소리다.

광신도들처럼 몰려다니는 기색도 느껴지지 않는다. 소리를 내는 것은 한 사람이다.

가만히 있는 것만으로 소리의 존재는 점차 거리를 좁혀오고 있다.

자신에게 해악이 적인가, 아군인가, 어느 쪽의 가능성이 높은가 하면 전자이다.

던전 내에서 마주하는 이들은 아무리 호의적이라도 처음엔 의심을 하고 봐야 하는 법임을 이제까지의 경험으로 파악한 상태니까.

하물며 적들의 본거지가 부근에 있는 만큼 경계심이 더욱 앞설 수밖에 없다. 일단 뒤로 물러서서 상황을 지켜보려 하는 것도 잠시.

-푸슉!

공기를 가르며 날아드는 무언가가 머리를 향해 쇄도해왔다.

흡혈귀 특유의 예리한 감각은 빠르게 날아드는 그것이 무엇인지를 인지시키기도 전에 위기감을 느끼게 만들어 반사적으로 몸을 움직이게 만들었다.

고개를 옆으로 움직인 순간 공기를 갈라내는 굉음이 귓속을 파고들고. 끝내 그것이 허공을 지나쳐 반대편의 벽에 꽂혔을 무렵, 통로 쪽을 주시하던 연화의 두 눈에 희미한 빛이 들어왔다.

어두운 통로에 희미하게 엿보이는 붉은 색의 빛이 하나. 그것이 무엇인지를 파악하기도 전, 또 다시 통로 안쪽에서부터 무언가가 연화에게로 날아들기 시작했다.

-푸슈슉, 슈학!

통로에서부터 무차별적으로 쏘아지는 그것이 방의 곳곳에 꽂혀갔다. 다급히 몸을 뒤로 물리며 피해낸 연화는 바닥과 벽에 처박힌 그것이 ‘화살’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바닥에 처박힌 화살촉은 잘 모르겠지만 화살대 부분이 아예 붉은 빛으로 물들어져 있다. 극히 짧은 시간 동안 박혀있던 그것은 머지않아 사라져버렸지만, 화살이 박혀있던 자국은 선명히 남아있었다.

“누군지는 모르겠다만 다짜고짜 공격을 가해왔다는 건 자기도 칼침 맞을 각오 정도는 했다는 거겠지?”

위기를 감지한 연화가 두 자루의 쿠크리를 꺼내들며 능력을 해방시켰다. 흡혈귀 특유의 노랗고 예리한 눈동자에 화살을 쏘아보낸 이의 모습이 선명히 눈에 들어왔다.

몸이 부각되지 않는 낡고 허름한 검은 옷과, 그것을 두르고 있는 검은 망토. 손에는 한 자루의 활이 쥐어져 있다.

사회에서 지내온 인간이라기엔 너무나도 괴악한 차림새였지만,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머리에 두르고 있는 검은 붕대.

머리카락과 이목구비의 구분 없이 모든 것을 둘러치고 있어 얼굴을 살펴볼 순 없지만, 유일하게 왼쪽 눈이 위치해있어야 할 부근엔 붉은 색의 렌즈가 박혀있었다.

보기에 따라서 섬뜩함을 자아내는 그것은 붉은 렌즈를 연화가 있는 곳을 향한 채 다시 손에 쥐어진 검은 활의 시위를 당겨갔다.

========== 작품 후기 ==========

다키스트 던전 DLC가 나와 휴재 기간 동안 해봤습니다. 소감을 얘기하자면 모기새끼들은 지구 상에서 싸그리 다 박멸시켜야된다는 겁니다.

그래도 우리 연화는 귀여우니까 봐줍시다. 일러스트가 넘나 귀여운것.

가시는 길에 던부추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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