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화. 무자비 -->
“그래. 이왕 이렇게 된 거 그냥 여기서 말끔하게 끝내자고. 어차피 그 쪽도 습격한 녀석에게 자비를 내려줄 만큼 호구는 아니잖아? 그러니까 피차 서로 목숨을 노리는 상황, 여기서 결판을 내는 쪽이...쿨럭!”
투지를 불태우던 그녀의 입에서 각혈이 터져 나왔다.
은에 찔린 상처가 더욱 벌어지고, 그에 힘을 잃은 듯 후들거리던 두 다리가 바닥에 내려앉았다.
각혈을 억지로 집어 삼키는 연화가 이를 질끈 깨물었지만, 아무리 기를 써도 가슴의 상처는 회복되지 않았다.
흡혈귀에게 있어서 은이란 독과도 같다. 자그마한 상처라 할지라도 은에 서려있는 기운은 살을 파먹고, 내부를 헤집어 생명력을 고갈시켜간다.
지금도 육체가 빠르게 무너져 내리고 있을 터.
그럼에도 칼을 겨누고 있는 모습을 보니 애처로움이 느껴지는 한편, 각오를 꺾지 않는 모습에서 적잖은 경외심이 느껴졌다.
자신의 목숨이 위험하다고 생각해서 그런 것이 아닌, 추후에 친구에게 위험을 끼칠지 모른다 생각하기에 칼을 겨누고 있는 것을 보면 더더욱.
“그 부상, 그대로 내버려두면 진짜로 죽을 거야.”
“그건 그 쪽이 상관할 바 아니잖아. 애초에...어?”
억지로 힘을 실어 넣는 목소리가 머지않아 의아함에 찬 탄성으로 바뀌었다.
희미하게 몸에서 느껴지는 빛. 그것은 강수가 재생전파를 이용해 타인을 회복시킬 때 일어나는 현상이었다.
“재생력을 심어줬어. 기본적인 회복능력도 뛰어나고, 약화 제거 특성도 찍었으니까 은에 찔린 상처도 빠르게 회복될 거야.”
스마트폰을 들어 올려 자신의 특성창을 연화에게 보여주었다. 거리가 상당했지만 흡혈귀 특유의 인간을 초월한 감각을 통해 먼 거리에서도 작은 글씨를 확인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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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레벨)이물질 제거-재생력이 발동할 때 회복약화 특성을 제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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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복약화는 회복계 능력이나 포션 등, 데미지를 회복시켜주는 효과를 억제시키는 효과다. 이 효과에 걸린 대상은 회복력이 매우 더뎌질 뿐만 아니라, 오염으로 인해 역으로 피해를 입는 경우가 있다.
이물질 제거 특성은 재생력이 회복약화 특성을 완벽하게 제거하는 특성이다. 상시적으로 재생력이 적용되는 자신이야 말할 것도 없고, 타인에게 재생전파를 사용할 시 그 대상의 회복약화효과를 즉각 제거하는 것이 가능하다.
은에 상처가 악화되어가는 흡혈귀도 예외는 아니었다.
-스르륵.
흡혈귀 특유의 회복력과 더불어 그의 부분재생 효과가 더해져 상처의 회복속도가 눈에 보일 정도로 빠르게 진행되었다.
고통은 남아있고, 은에 피해를 입은 후유증도 가시지 않았지만, 그것도 머지않아 재생력으로 인해 빠지게 될 효과다.
“무슨 수작이야?”
“수작 같은 거 없어. 아까 전에 단검을 겨누기는 했지만 그건 디까지나 위협이었지, 찔린 건 그쪽이 돌발적으로 저지른 짓이고.”
위협에 대응한 것도 어디까지나 ‘자신을 지키기 위한 행동이었다’라고 변호를 하는 강수의 말에 연화의 두 눈이 협소해져갔다.
강행수단을 행하며 자리를 벗어난 이유는 그에게 대놓고 적의를 발산한 자신을 살려주리라고 생각지 않았기 때문이다. 설령 살려준다 하더라도 습격을 한 자신을 용서할 리 없으니까.
이런 식으로 치료를 하기 전까지 적의를 보이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 생각은 흔들리지 않았었다.
“게다가 처음부터 난 그 쪽이랑 싸울 생각이 전혀 없었거든, 지금도 마찬가지고.”
“...뭐?”
양 손을 들어올리며 이어가는 강수의 말에 연화가 경악을 터트렸다.
“싸울 생각이 없다니, 제정신으로 하는 말이야?”
“그 쪽이 날 습격하긴 했지만, 어차피 서로의 목적은 같으니까.”
“그 쪽이 소연이를 구하려고 하는 이유는 소연이를 이용해먹기 위해서잖아!”
“그 점은 부정하지 않지만, 겸사겸사 다른 사람들을 돕는 것도 같지. 안 그래?”
이어지는 그의 말에 연화가 벙찐 표정을 지었다. 강수는 큭큭 웃음을 터트리며 입에 물고 있는 담배를 슬며시 떨어트렸다.
“처음부터 죽일 생각이었다면 괜히 눈속임 같은 번거로운 짓 따윈 하지 않고 반격의 여지없이 힘으로 밀어붙여서 제압했겠지.”
흡혈충동으로 인해 정신력이 떨어진 상태라면 바로 힘으로 제압을 하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그럼에도 안개화와 환시를 이용해 위협했다 착각하게 만들고, 가까이 다가와 제압을 하려 한 이유는 간을 보며 자신이 어떤 인간인지를 파악하고, 육체적인 피해를 최소화시키기 위함일 것이다.
자신들의 목적지가 앞으로 싸움을 벌여야 하는 곳임을 생각하면 당연한 처사다. 그 싸움에 몰두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더더욱.
“자기 할 일이 있다 하더라도, 그들을 구하러 나서는 자들을 지도하는 내가 여기서 쓰려져버리면 곤란하니까. 그래서 흡혈을 통해 흡혈인자를 주입해서 명령을 내릴 생각이었던 거 아니야? 절대로 그 아가씨에게 손을 대지 말고, 다른 사람들도 배신하지 말라는 식으로.”
“.......”
이어지는 침묵에 강수가 쓴웃음을 지으며 자신의 스마트폰의 특성창을 움직여갔다.
"대체 얼마나 신뢰를 못 사는 얼굴이면 이런 수까지 쓰려고 한 건지 모르겠다만, 흡혈을 했다 해도 효과가 그리 길게 이어지진 않을 거야. 내 능력의 특성상 상태이상으로 장기간 제압을 하려 드는 건 무의미하거든.”
그가 지니고 있는 11레벨의 특성인 면역체는 감염이나 부패 등의 효과에 큰 면역력을 지닌다 흡혈귀가 기본적으로 지니고 있는 ‘흡혈인자 투입’에 당한다 하더라도 머지않아 회복되어버린다는 것이다.
설령 눈을 마주쳐 카리스마를 통해 큰 압도감을 심어준다 할지라도 트라우마 보호 특성을 통해 버텨내는 것이 가능. 상태이상을 유발하여 자신을 제압하려드는 것의 효율이 떨어지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이다.
“그걸...지금 말하는 이유가 뭐야? 능력이 안 통하면 내가 얌전히 놔줄 거라고 생각한 거야?”
정신적으로 굴복시키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무력을 사용하면 될 뿐이다. 최대한 싸움을 피하고자 온전한 방법을 취했던 이유는 어디까지나 ‘최선책’일 뿐이지, 그 수단만 존재했기에 강행한 것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연화는 그에게 바로 달려들진 않았다. 바로 무력을 사용하기엔 자신을 습격한 녀석에게 너무나도 큰 자비를 내려주고 있었으니까.
“죽을 뻔한 거 치료까지 해준 사람의 얘기 정도는 들어줄 거라 생각했으니까.”
싸울 의지가 없다는 의견에 설득력을 더하듯 그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내뱉었다.
“선인은 아니라도 공과 사 정도는 구분할 수 있는 사람이야. 설령 원하지 않는 결과가 나온다 해도 그 아가씨나 다른 사람들을 구하고자 하는 마음은 진심이고.”
스마트폰을 거둔 그가 조용히 연화와 눈을 마주쳤다.
아무리 흡혈충동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카리스마의 효과를 통해 4단계나 증가된 정신력이다.
흡혈귀의 능력과 합쳐질 경우 어지간한 인간은 눈을 마주보는 것만으로도 실신할 정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앞에 있는 남자는 자신과 버젓이 눈을 마주보고 있었다.
“얘기 정도는 들어줬으면 해. 내가 왜 광신도들을 처리하고, 그 아가씨나 다른 사람들을 구하려고 하는지.”
그의 올곧은 눈빛을 마주한 연화가 끝내 그를 향해 세우던 적의를 잠깐 거두어들였다.
*****
잠시 소강상태로 접어들었을 무렵, 강수는 연화에게 소연과 함께 만났을 때부터 헤어지기 전까지 있었던 일들에 대해 설명을 해주었다.
몬스터를 처리하고 난 후 들어선 방에 나타났을 때 그녀와 함께 다니며 싸우는 법을 가르쳐주고 공간에 대해 설명을 해준 것도, 사람을 죽이고 난 후 그녀가 정신적인 증후군에 시달렸던 것도, 그 후 함께 죽을 뻔한 위기를 몇 번이고 넘겨왔던 것도.
그 하나하나를 연화는 모두 경청하며 들었지만, 얘기를 거듭할수록 연화의 표정은 점차 석연찮게 변해갔다.
시시각각 겉으로 드러나는 분노나 혐오, 안쓰러움, 서운함. 그 모든 감정의 앞에는 소연에 대한 걱정이 존재하고 있었다.
단지 그것만을 보더라도 이 던전을 배회하며 소연을 얼마나 생각했을 지를 알 수 있었지만, 중요한 건 소연의 행적보다 추후에 소연이 해야 할 일에 관한 것이었다.
‘이 던전을 부수는 것이 나의 목적이다.’
목적을 밝힌 순간 연화의 두 눈이 크게 벌어졌다.
처음에는 허무맹랑한 얘기를 하는가 싶었지만, 흡혈귀 특유의 예리한 감각을 통해 그의 진지함을 감지하고 그 생각을 거두고 말았다. 눈앞에 있는 남자는 진심으로 이 던전을 부수고자 하고 있었다.
던전을 부수는 방법은 던전 어딘가에 존재하는 보스몬스터를 격파하는 것. 거기에는 수많은 위험이 따르고 있으며, 최소한의 자격을 갖추기 위해선 던전 내를 돌아다니며 꾸준히 성장을 해나가야 한다.
하지만 스스로의 무력이나 강함보다 더욱 필요로 하는 것은 함께 할 수 있는 동료.
그 계획에 동참할 동료로써 눈독을 들이고 있는 자가 바로 소연이라고 연화를 향해 솔직하게 고백을 했다.
“그 아가씨는 내 제안을 거절했어.”
“...뭐?”
처음 그녀의 이름을 거론했을 때 연화의 입에서 격한 호통이 내뱉어지려 했지만, 이어지는 강수의 말에 연화가 저도 모르게 말꼬리를 흐리고 말았다.
“그야 당연한 거지. 아무런 목적도, 이유도 없이 함께 해달라는 말만 듣고 아무것도 모른 채 사지로 걸어가진 않을 테니까.”
예상외의 대답에 당혹을 표하는 연화에게 친절히 설명을 해주었다.
처음부터 소연에게 눈독을 들이고 있었던 이유는 어디까지나 잠재성을 발견했기 때문이지, 나머지 두 사람처럼 처음부터 자격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 아니었다.
소연이 지금 시간대에 자격이 갖추어졌다고 판단을 내린다면 그 때 데리고 갈 것이다.
자신의 의지로 직접 ‘당신을 따라가겠습니다’라고 말하는 순간에 말이다.
“나도 그 아가씨를 강제로 데려갈 생각은 없어. 그래서 재차 ‘설득’을 하는 중인데, 설득을 들은 아가씨에게서 대답을 듣기 전에 이렇게 떨어져버리고 말았지.”
“...그 말을 믿으라는 거야?”
“능력으로 알 수 있을 텐데. 내가 하는 말이 거짓말을 하는지 아닌지 정도는.”
쓴웃음이 그려진 그의 얼굴을 마주한 연화가 머지않아 한숨을 토해내며 이마를 부여잡았다.
자신의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친구가 위험에 빠지는 걸 걱정하는 건 이해하지만, 나도 그 아가씨가 가급적 옳은 선택을 하길 바란다는 걸 알아줬으면 해.”
“...댁 마음 따위 내 알 바 아니야.”
이를 질끈 깨무는 그녀가 토라진 듯 고개를 돌렸다.
“어째서 이 던전을 부수고자 하는 마음을 품게 됐는지도, 이 던전을 부수는 방법에 대해서 알고 있는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런 ‘사소한’것에 관심을 가질 생각은 없어.”
“사소하다니, 나한테는 중요한 문제인데.”
“나한테는 소연이가 더 중요해.”
밑으로 늘어트린 손에 쥐어진 쿠크리에 힘이 실렸다. 날카로운 날이 손떨림에 맞춰 부들부들 떨리는 것이 강수의 눈에 들어왔다.
“죽으러가는 사람들을 막아 세울 생각은 없지만 죽지 말아야 할 사람까지 억지로 끌고 가려는 행동까지 이해해줄 생각은 없어. 하물며 거기에 소연이가 연루되었다면.”
“그러니까 내가 그 아가씨를 데리고 가는 때는 자기 스스로 가겠다는 의지를 표할 때........”
“소연이가 자기 의지를 발휘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강수의 변명에 연화가 다시 소리를 질렀다.
분노에 차면서도 상당한 확신이 서려있는 눈빛이었다. 겉으로 드러난 감정을 엿보는 것만으로 그녀가 얼마나 진지한지를 알 수 있었다.
========== 작품 후기 ==========
가시는 길에 던부추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