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브래이커-109화 (109/251)

<-- 28화. 당신이 죽는 이유 -->

머릿속에 쉴 새 없이 떠오르는 것은 그가 총구를 겨누기 직전의 선택. 쏘라는 강요를 내뱉으며 자신을 향해 외쳤던 목소리.

그 목소리를 무시하고 계속 그 짓을 강행하게 만들었다면 손가락을 모두 잃게 된다 하더라도 살아남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의 고통을, 그로부터 우러나오는 증오를 모두 무시한 채 계속 손가락이 꺾이기만을 고수했다면........

“사후 세계가 있다면 그는 과연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방독면의 검은 렌즈가 차차 자신과 거리를 좁혀왔다.

“한 손의 손가락이 모두 꺾였을 때 그 고통을 참지 못하고 방아쇠를 당기기를 간절히 바랬던 그의 최후...하, 머리통에 구멍이 뚫리고 나서야 깨달았겠지. 차라리 손가락 열 개를 모두 꺾여서라도 살아남았어야 했어, 라고. 그리고 그 증오는 어김없이 너에게로 향해지겠지. 자신의 어리석음을 듣고 총의 방아쇠를 당기기를 선택한 너에게로........”

“입, 닥쳐!!!”

쑤셔오는 머리를 감싸 쥐며 부릅 뜬 눈을 그에게로 향했다.

“대체 뭐가 재밌다는 거야, 이런 일을 해서 너한테 무슨 득이 되냐고! 그 사람이 너한테 무슨 짓을 저질렀기에...내가 너한테 무슨 짓을 저질러서!! 증오고 뭐고 알게 뭐야, 애초에 이런 환경을 만든 것도 그를 죽인 것도 다름 아닌 너잖아!!!”

“맞아, 내가 다 만든 거지.”

세린의 오열에 살인자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그를 여기에 묶어둔 것도, 손가락을 꺾은 것도 총의 방아쇠를 당긴 것도 모두 나. 하지만 그를 죽이는 선택만큼은 네가 했지.”

“그렇게 강요를 한 건........”

-쿵!

그녀의 고함이 스패너의 충돌음에 닫혀지고 말았다. 자신의 앞에 떨어진 것을 살인자가 주워 휘두른 것이었다.

“사람의 목숨이라는 게 시시껄렁한 강요 한 마디에 걸어버릴 정도로 단순한 거였나?”

고요함 속에서 방독면 뒤에 감쳐진 살인자의 두 눈이 흉흉히 빛을 내었다.

“그가 고통 받기를 원치 않았나? 아니지, 그의 손가락이 꺾이든 뭘 하든 너한테는 전혀 피해가 가해지지 않으니까. 진심으로 살기를 바라고 있었다면 열 손가락이 모두 꺾이는 한이 있더라도 그가 죽을 확률은 0%로 만들었을 텐데...은연중에 이렇게 생각한 거겠지. 시끄럽게 울려 퍼지는 비명과 발버둥을 보는 것보다 차라리 그가 죽는 게 나을 지도 모른다고.”

“아니야, 나는........”

“아니라고 부정해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아.”

살인자가 몸을 슬쩍 비켜서고, 머지않아 세린의 눈에 수술대 위에 올려진 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누가 저질렀건, 어떤 환경에서 벌어졌건, 네게 선택권이 주어진 이상...이것만은 변하지 않아.”

한 손의 손가락이 모두 꺾이고, 이마에 총알이 박혀 흉하게 망가진 모습. 뚝뚝 흘러내리는 뇌수가 바닥을 적셔가고, 삶을 갈구하던 두 눈은 벌어진 채 라이트가 비춰지는 풍경만을 멍하니 주시할 뿐이었다.

살인자는 그 시체를 보며 조소가 섞인 목소리를 내뱉었다.

“그의 죽음은 네 결정으로 인해 벌어진 일이야.”

속으로 끝없이 그것을 부정한다고 해서 뭐가 달라질까, 그런 짓을 반복한다고 해서 눈앞에서 시체가 지워지는 일은 없다.

시간은 거슬러갈 수 없고, 자신의 선택으로 인해 그가 죽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설령 그것이 자신의 의지를 교묘히 이용한 녀석의 악의가 깃들은 것이라 하더라도.

“...대체, 왜.”

힘이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가 움켜쥐고 있는 손의 사이를 비집고 흘러 나왔다.

“대체, 내가...뭘 잘못했다고.”

“정말로 알고 싶은 거야?”

세린의 말에 살인자가 역으로 질문을 건네었다. 마치 자신의 의사를 존중해주듯이. 이제까지 내비췄던 조롱을 모두 감춰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싸늘하기 그지없는 목소리가 그녀의 귓속을 파고들어오고 있다.

“...차라리 아무것도 모른 채로, 그냥 괴로워하다 죽는 게 좋았을 것을.”

서서히 그가 세린의 옆을 지나치고, 그녀가 지나온 방을 향해 손가락을 가리켰다.

무의식적으로 시선을 옮긴 순간 기억 속에 존재하는 무언가가 그녀의 눈앞에 나타났다.

그가 저지른 짓을 직시하기 전에 마주했던 한 구의 시체. 머리과 불길에 타버린 시체를 손으로 감싸 쥐는 살인자가 그의 몸을 정성스럽게 손으로 쓰다듬어갔다.

“이 시체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알아? 머리에 인화성 물질로 둘러치고 불을 붙이고, 불을 끄고 붙이길 반복했어. 처음에는 5초정도 불을 붙이고 꺼주고, 다음에는 10초 정도...좀 더 오래 버틸 줄 알았더니 20초 정도 지나니 머릿속까지 바짝 익어버려 죽더라고. 의외로 오랫동안 살아남아 깜짝 놀랐지."

끔찍한 소리를 지껄이는 그가 머지않아 그 시체를 바닥에 내팽개치고 새로운 시체를 주워들었다. 머리가 완전히 으스러져 흉한 꼴이 되어있는 여성의 시체였다.

“그 다음으로 죽였던 여자는 참 볼만했어. 제한시간 내에 문제를 맞히지 못해서 프레스에 머리가 으스러져 터져버렸거든.”

호두까기 인형을 이용해 호두를 깨트리듯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한다. 망가진 머리의 파편이 손을 적셔감에도 방독면은 개의치 않고 시체를 내버리며 세 번째 시체를 향해 손을 뻗었다.

“세 번째가 제일 가관이었지. 그가 원하는 대로 쇠막대에 연결된 스프링을 감아주다가, 마지막에 감았던 걸 한 방에 풀은 순간 이런 식으로........”

쇠막대에 의해 가슴팍이 흉하게 파여 내부의 살과 뼈가 드러난 시체. 그는 가슴팍에 박혀있는 쇠막대를 가벼이 뽑아내고 바닥에 내팽개쳤다.

“...심장만 파일 줄 알았더니 몸이 완전히 아작나 버렸더라고. 스프링의 힘을 너무 얕잡아봤던 거지.”

말 없이 자신을 쳐다보기만 하는 세린을 마주하던 방독면이 곧 시체를 내버린 채 다시 반대편으로 걸음을 옮겼다.

머지않아 그가 도달한 곳은 이전에 그가 쏴죽였던 시체가 배치된 수술대의 위.

“그리고 이게 네 번째야. 내가 죽인 네 번째 희생양.”

흉하게 뽑혀나간 손을 어루만지고, 파헤쳐진 머리 사이로 손가락을 집어넣으며 스스로의 손을 피로 더럽혀간다.

누군가의 피가 손을 적셔가며, 서서히 손에 무게가 더해져가고.

“아무 기억도 없으니 불편해?”

이내 피묻은 손을 가차없이 바닥에 내팽개치며 다시 세린과 눈을 마주쳤다.

“기억을 찾고 싶어. 답답해. 내가 왜 이런 일을 겪어야 하는지 모르겠어.”

자신의 속마음을 읽어내듯 읊조려간다.

아니, 정확히는...이제까지 자신이 죽인 시체들을 둘러보기 전까지 자신이 품고 있던 생각들을.

“얄팍한 소리를.”

그것을 부정하는 작은 목소리와 함께 시야가 암전되었다. 방금 전까지 주변에 있던 시체들도 그의 모습도 어느 한 순간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다.

-스르릉.

금속음이 들려온 직후, 시야가 번뜩였을 무렵 자신의 몸이 수술대의 위에 올라가 있음을 자각했다.

“수술대에 몸이 밧줄이 묶인 채, 카메라를 앞에 두고 벌벌 떠는 너. 언제나 그의 앞에는 공구를 쥐고 서있는 녀석이 나타났지.”

예리하고 맑은 톱이 그녀의 팔을 향해 겨누어지고 힘이 실려 간다. 이제까지 지속적으로 꿔왔던 악몽과 마찬가지로 살이 잘리고 뼈가 갈려나가는 격통이 밀려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로 인해 내뱉어지는 고통스러운 비명이 자신을 향해 조잘대는 살인자의 목소리에 집어 삼켜져갔다.

“그는 항상 잡혀온 대상들을 향해 삶과 죽음의 경계를 가르는 게임을 주선하고는 했어. 너는 언제나 그 게임의 희생양이었지. 때로는 손가락이 뽑히고, 때로는 머리에 못이 박히고, 때로는 독극물이 주사되고, 불에 태워지고, 도끼에 발이 잘리고, 가시달린 철망에 추락하고........”

-콰작.

굉음과 함께 시야가 격변했다.

힘이 실린 톱날에 잘려나간 머리가 허공으로 치솟아 오르고, 포물선을 그리듯 날아올라 끝내 살인자의 손에 안착했다.

“잊고 있었다면 말이야. 차라리 이 끔찍한 기억들을 모두 잊은 채 ‘인간다운 공포’에 휩싸여 죽을 수 있었을 거야.”

피묻은 손이 방독면을 덮어가고, 그에 쥐어진 힘이 서서히 그녀의 눈에 얼굴을 드리밀게 만들었다.

“알지도 못하는 일에 대한 죄책감을 느끼며 고통스럽고 비참하게...그렇게 죽는 것이 나에게 있어선 분명 축복이라고 할 수 있었을 텐데, 운이 없었지. 하필이면 ‘그 남자’를 만나버렸으니까.”

끝내 방독면이 벗겨지고 난 후, 변조가 섞이지 않은 순수한 목소리가 그곳에 울려 퍼졌다.

“자, 꿈에서 깨어날 시간이야. 잠시 ‘자작극’을 멈추고...해야 할 일을 해보자고. 이제까지처럼 너 자신을 위해서.”

그 말을 마지막으로 잊고 있던 기억의 잔상들이 그녀의 머릿속을 헤집어가기 시작했다.

*****

“허억.”

격하게 숨을 토해내며 몸을 고꾸라트렸다.

머리가 지끈거린다. 머릿속에서 무언가가 뒤죽박죽 섞이고 있다.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침대 위에 앉아있는 아이가 어느 한 순간 영정사진이 되어 나타나고, 비명을 지르던 이가 웃고 떠들다 다른 이를 차로 치어 죽이고, 아이의 사진을 보여 울부짖는 여자가 깔깔 웃음을 터트리다 피투성이로 변해버리고.......

원인도 결과도 모두 엉망진창이다. 순서를 고려하지 않고 영상의 짝을 맞춰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영문을 알 수 없는 것들이 수 없이 머릿속을 헤집고 있다.

-두근, 두근.

터질 듯 뛰어오르는 심장의 박동을 억제하듯 가슴을 움켜쥐었다.

가빠오는 호흡을 억지로 참아내고 가다듬고, 심장의 펌프질에 요동치는 맥박을 무시한 채 기억의 잔상들을 하나 둘 씩 살펴갔다.

엉망진창인 기억들 속에서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스스로의 팔에 대고 주삿바늘을 겨누고 있는 장면.

[처음 해보는 거라서 잘 될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려면 어때? 실패하면 다시 하면 될 뿐인데.]

그 주삿바늘이 혈관을 타고 몸 안으로 스며들어가고...그 이후에 있었던 일들이 파편이 되어 으스러지고 사라져갔다.

또 다시 머릿속이 깨질 듯 아파오기 시작한다. 떠올려서는 안 되는 기억이라도 떠올려서?

아니, 그 이후에 이어지는 기억 따윈 아무 짝에도 쓸모없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주삿바늘이 자신의 혈관을 찌르기 이전에 있었던 일들.

[만약을 대비해서 해독제 정도는 만들어놓는 게 좋을까? 넌 어떻게 생각해?]

“...해독, 제.”

그 말이 떠올랐을 무렵, 세린은 자신의 인벤토리를 활성화시켜 안에 들어있는 아이템을 다급히 밖으로 끄집어내었다.

꺼내든 것은 인벤토리의 가장 첫 번째 칸에 고스란히 보관되어 있는 가방류의 아이템인 ‘약제사의 차원가방’.

소모품을 한정으로 무한히 집어넣을 수 있는 그것은 비밀번호를 입력하지 않으면 열리지 않는 구조로 되어있었지만, 세린은 개의치 않고 가방의 입구에 존재하는 자물쇠에 차근차근 번호를 돌려 맞춰갔다.

“7, 1, 0, 5, 7, 1, 0, 5, 7, 1, 0, 5.......”

‘7105’란 숫자를 세 번 반복하여 완성된 비밀번호.

-딸칵.

소음이 울려 퍼지고 상자의 문이 열렸다.

세린은 그것을 격하게 열어재쳐 안에 손을 집어넣고, 내용물을 닥치는 대로 뒤적여 물건을 찾아내었다.

머지않아 벌벌 떨리는 그녀의 손에 쥐어진 것은 기억 속에 존재하는 것과 다른 색의 약물로 채워져 있는 주사 하나.

그것을 꺼내들자마자 세린은 자신의 손에 쥐어진 스마트폰의 화면을 전환하여 주사기를 향해 렌즈를 겨눈 채 촬영버튼을 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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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각증 치료제(조합품)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는 데에 도움을 준다. 사용할 시 기억상실 상태이상을 회복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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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사기를 손에 쥔 세린은 벽에 기대어 있는 남자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

자신이 몸부림을 쳤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미동조차 하지 않고 눈을 감은 채 잠을 청하고 있었다.

[차라리, 기억이 없는 편이...더 나을 지도 모르지.]

[그래도, 나에게 해를 입힐 지도 모른다고, 너무 자책하지 마. 아가씨가 생각하는 것만큼 난 깨끗한 녀석이 아니니까.]

기억을 되찾는 것에 불안함을 느끼는 자신을 타이르고 손으로 직접 보듬어주었던 그에게 감사를 느끼지 못한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그런 그가 피해를 보지 않기를 바란다. 자신의 추악한 손에 의해 망가지기를 바라지 않는다. 자신의 손이 그의 피로 더럽혀지는 것은 싫다.

기억을 되찾는다면, ‘지금의 자신’이 원하지 않는 그 일이 머지않을 미래에 이루어지고 말 것이다.

차라리 기억을 잃었을 때 죽어버렸으면, 자신이 잃어버린 과거가 이다지도 추하고 잔혹한 것인 줄 알았다면 그런 식으로 발버둥을 치지 않았을 텐데. 의지하려 들지 않았을 텐데.

“미안, 해요.”

혀를 씹어서라도 목숨을 끊고 싶었지만 이어지는 것은 그를 향한 사죄였다.

악몽에서 깨어난 순간부터 기억은 서서히 떠오르고 있다. 조각난 파츠들이 하나 둘씩 서서히 맞춰지지만 그 과정이 이어지면 이어질수록 감당할 수 없는 괴로움은 더욱 커져가고 있었다.

‘기억을 찾아야 한다. 올바르지 못한 일을 바로잡기 위해서.’

그 욕구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을 억제하고, 기억을 되찾길 거부하는 자신을 괴롭혀가고 있다.

무엇이 잘못되었기에 손을 더럽히고, 추한 일을 저질러온 자신이 이다지도 기억을 되찾길 갈망한단 말인가.

“...저, 이 기억을, 감당할 수가 없어요.”

손아귀의 힘을 억제하려 들었지만, 그럼에도 바늘은 서서히 목과의 거리를 좁혀가고 있다.

그 바늘이 찔린다면 분명 지금의 간절함은 영원히 지워져 버리겠지. 아니, 어쩌면 이 세상에서 ‘자신’이란 존재가 영원히 사라져버릴 지도 모른다.

기억에도 없는 죄에 대한 죄책감, 무력함에 몸서리를 쳤던 공포.

그리고 그를 향했던 연심마저도.......

‘...연심, 이라니.’

일순간, 잔상 속에서 희미하게 생겨난 기억에 괴로움에 일그러진 미소가 그려졌다.

누군가를 사랑할 자격 따윈 자신에게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주제에, 그런 마음으로 이 상황을 모면하려 든단 말인가?

그 마음이 일그러지는 것조차도 죄라고 한다면 달게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강수씨......"

끝내 그의 이름을 부른 그녀의 입가에 나지막한 미소가 그려졌다.

어쩌면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기억을 되찾지 않은 자신이기에 표현할 수 있는 '인간다움'을 그에게로.

“제가, 무슨 짓을 저질러도...저를 용서하지 말아주세요.”

이내 목의 혈관에 바늘이 맞닿았을 때 피스톤을 누르는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두근

심장의 박동에 맞춰 피에 섞여 들어가는 약물이 몸 안 구석구석 퍼져갔다.

========== 작품 후기 ==========

자 이걸로...등장인물 한 명이 죽었네요.

가시는 길에 던부추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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