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화. 네가 죽는 이유 -->
한때 자신의 친구였던, 백일면이라는 칭호로 불렸던 녀석을 제손으로 죽이고 난 후 수십이 넘는 방을 지나쳤다. 거짓의 마녀에게 강제로 이동이 된 후의 방에서 출구까지의 거리를 환산해보면 대략 절반 정도 왔다고 볼 수 있었다.
중간에 휴식도 몇 번 치렀고, 위험한 함정이나 몬스터들을 맞닥트리기도 했지만, 불행 중 다행히도 그의 선에서 어떻게든 처리할 수 있는 위험들이었다.
함정을 모두 파훼하고 난 후 나타난 트랩룸의 박스를 연 강수는 그 안에서 여럿 소모품과 장비 아이템 하나를 얻었다.
여러 개가 짝을 지어진 투척용 단검처럼 다수의 물품이 한데 엮여있는 물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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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급상자
분류: 보관함
등급: B+
부가설명
의료도구를 보관하는 상자, 안에 들어가는 약재와 도구들이 자적으로 소독되는 효과가 존재한다.
내구도: 25/25
연관치
육체-4 재주-7 순발-1 정신-3
부가옵션
-최대 25개의 소모품을 집어넣을 수 있음. 집어넣은 소모품을 10분 이상 보관할 시 효과가 50% 증가한다.
-‘의료계’의 장비도구들을 안에 집어 넣을 수 있다. 집어 넣은 장비들은 일정시간에 걸쳐 재생되며 소독효과가 부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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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것도 나와주는군.”
만약 자신이 재생력이란 능력을 갖추고 있지 않았을 경우 정발 반갑게 받아들일 수 있는 물건일 것이다.
생존에 도움을 주는 소모품의 보관한도가 늘어나는데다 그 효과를 50% 증가시키는 능력까지 가지고 있으니 말이다.
물론 소모픔의 보관만을 치면 세린에게 그보다 상위호환에 해당하는 물건이 존재한지만, 애초에 그건 비밀번호를 모르면 개봉자체가 불가능한 물건이다.
설정해둔 비밀번호를 잊어버리면 결국 인벤토리의 한 칸 만을 차지하는 계륵이나 다를 바 없는 물건...그것을 어찌 좋다고 받아들일 수 있을까? 하물며 이건 소모품과 별개로 ‘의료용’으로 한정되긴 하지만 장비 또한 집어넣을 수 있으니 인벤토리의 확장에도 더욱 도움이 된다.
안을 살펴보니 메스나 수술용 가위, 상처를 봉합할 때 사용하는 바늘 등이 잔뜩 들어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무기로써 쓰기엔 부족하지만 아직 인벤토리에 여유가 있는 만큼 가지고 있어서 나쁠 것은 없을 것이다.
“이거. 인벤토리에 넣어줘.”
“........”
“...이봐.”
응답이 없어 옆에 멍하니 서있는 세린의 어깨를 툭툭 건드렸다. 한 순간 세린이 몸을 움츠리며 자리에서 다급히 뒷걸음질을 쳤다.
“죄, 죄송해요. 잠시 딴 생각을 좀 하느라.”
“이거 좀 인벤토리에 넣어줘.”
세린의 말을 무시하고 손에 쥐고 있는 응급 상자를 건네주었다. 그것을 받아든 세린은 힘겨이 자신의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들어, 강수가 가르쳐준 대로 응급상자에 스마트폰의 렌즈를 겨누었다.
한 손에 무게를 지니고 있는 물건을 드는 것이 힘겨웠던 것일까, 인벤토리의 수납을 위해 촬영하기 직전, 세린의 손에서 상자가 미끄러져 내렸다.
“아, 앗....!?”
“조심해.”
다급히 그녀의 곁으로 다가가 떨어지는 상자를 들어올렸다. 특유의 높은 순발력으로 상자를 정확히 캐치하고, 안에 있는 내용물이 떨어지지 않도록 상자의 뚜껑에 손을 올렸다.
다행히도 내용물이 쏟아져 내리는 대참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너무 무거웠던 건가? 아니면........”
“죄송해요.”
최소한의 걱정을 건네려 하자 그녀의 입에서 사과가 내뱉어졌다.
“한, 눈을...팔아서, 죄송해요. 제가...저도 모르게, 신경이 쓰여서........”
강수를 마주하며 말을 하고 있음에도 자신이 지나온 길목을 힐끔힐끔 쳐다보는 세린. 마치 누군가가 자신을 쫓아오는 것이 아닐까, 걱정하는 눈짓이었다.
이제까지 계속 이런 식이었다. 한때 자신의 친구였던 ‘백일면’을 제 손으로 쓰러트리고 난 후에 몇 번이고 계속...심지어 휴식을 위해 잠깐의 수면을 치르는 중에도 악몽을 꾼 듯 비명을 지르며 깨어나는 행동도 반복했다.
곁에서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위태로운 상태라는 것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몸보다도 정신쪽이 말이다.
“스마트폰 줘봐.”
“네, 여기........”
세린이 건네준 스마트폰을 들어 올려 응급상자를 인벤토리에 집어 넣은 후, 그녀의 정보창으로 바로 화면을 전환시켰다.
그녀의 상태이상을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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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태이상: 기억상실(회복중), 약화(회복중), 레벨 격하(회복중), 정신이상(편집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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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하군.’
앞의 세 개는 원래부터 가지고 있던 상태이상들이고 조금씩이나마 회복중일 테니 괜찮지만, 문제는 추가적으로 생성된 정신이상이었다.
편집증. 극심한 두려움으로 인해 피해망상에 빠져 의심병이 도지고 환각, 환청 등에 시달리게 되는 증상이다.
이 증상이 심해질 경우 자신이 이제까지 곁에 두고 있던 동료의 말조차 모두 무시한 채 자신의 뜻대로 행동을 하다 끝내 자기 자신도 믿지 못하는 비이성적인 사고를 가지게 된다.
이 증상이 심해질 경우 자신에게 상처를 가하는 자해를 반복하고, 마주하는 모든 이들을 두려움의 대상으로 인식해 그들에게서 도주하는 행위를 반복하며, 억지로 다가서려 할 경우 과도한 대처를 가해 그들에게 피해를 입힌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아직 증세가 약하다는 것이다. 증상이 심했다면 당장 이곳에서 도망쳤을 테니까.
그녀의 상태가 심각해지기 시작했던 때. 자신이 ‘백일면’과 조우를 했을 때를 조심스레 떠올려 보았다.
분증을 확인해본 바 원래 지니고 있던 본명은 백승혁. 자신과 엇비슷한 나이인 30대 초반이었다.
독으로 인해 몸에 흉이 가해져 신체의 특징 등으로 직업이나 그 외의 무언가를 특정하는 것은 불가능했지만, 던전 내에서 무슨 일을 겪었는지는 조금이나마 추측하는 것이 가능했다.
몸 곳곳, 급소를 벗어난 부분에 상처가 잔뜩 존재하고 있었다. 치명상은 피했지만 그 상처의 수가 상당히 많아 보는 것만으로도 껄끄러움이 느껴질 정도. 아마 미치기 전에 습격을 당했고, 그 후유증으로 인해 미쳐 날뛰다 자신을 발견하게 된 듯 싶었다.
그와 과거에서 만난 것은 그것으로 끝. 이미 본인임을 확인했고, 완전히 숨이 끊어진 것도 스마트폰의 기동이 끊어진 것을 통해 확인한 상태였다. 씁쓸함이 남긴 하지만 원래라면 그 정도로 그쳐야 할 문제이지만........
[...악몽에서만, 본 건 아니예요. 이곳에서도 ,본 적이 있어요.]
[깨어났을 때.......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아서, 혼란스러울 때...그가 나타났어요. 괴물이라고, 생각해서...도망치니까, 비명을 지르고...칼을 들고 쫓아와서...그 때 절 쫓아오면서, 이렇게 외친 걸 들었어요.]
정작 세린이 그 백일면과 이 던전에서 마주친 적이 있고, 그로 인한 후유증으로 공포에 떨다 정신이상까지 걸리고 말았다. 그가 죽고 난 이후에도 계속 현상이 지속되는데 마냥 가벼이 여길 수 있을 리 없지 않은가?
[..백, 일면.]
[그런 이름이었어, 그가, 내 눈 앞에서...직접...죽였어, 원장님을, 직접.......]
혼란스럽긴 해도, 그녀는 분명히 백일면이라는 이름을 처음 거론했을 때 ‘다른 누군가’에 대한 것도 거론했었다. 그 원장이라는 작자가 정말로 그녀의 앞에서 ‘백일면의 손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면........
‘던전 안이 아니라 바깥일 가능성도 부인할 수는 없지.’
만약 후자라고 한다면, 그녀는 이 던전에 들어오기 전에 ‘백일면’과 만나본 적이 있다는 뜻일 것이다. 그것도 그다지 좋지 않은 관계로써.
물론 확신은 없다. 미래에 그를 만났던 때엔 서로의 과거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나누지 않았으니까. 그도 자신에 대해서 거의 알지 못하고, 자신 또한 그가 어떤 인간이었는지를 알지 못한다.
하지만 그가 죽기 이전, 그가 어떤 인간이었는지를 추측할 수 있는 발언은 분명히 들었었다.
[...그깟 ‘단죄’라는 게 대체 뭐길래, 이용해먹을 수 있는 녀석까지 적으로 돌려버리는지.]
[말했잖아, 숙명이라고 세계가 멸망하기 이전엔 그 사실을 숙지하며 살아왔으니까, 죽는 그 순간까지도 그걸 따르는 수밖에 없어. 내가 원해도, 원치 않아도.......]
세상이 멸망하기 이전에도 ‘단죄’라는 말이 어울리는 존재로써 살아왔다. 그렇다고 한다면 그는........
“아, 아아....악!”
생각에 잠겨 있던 중, 자신의 앞에 서있던 세린이 비명을 지르는 소리가 강수의 귀에 들려왔다.
“오, 오지마...오지마....이 쪽으로 오지마, 난, 나는........”
어느 한 방향을 기점으로 뒷걸음질을 치는 세린. 다급히 세린이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려보았지만 다가오는 몬스터나 사람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허공을 보고 비명을 지르는 이유는 분명 편집증으로 인해 환각을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난, 아무것도 몰라. 대체 내가 무슨 짓을 저질렀다고, 대체 왜...아무것도 모르는데 대체 왜, 어째서.......”
“진정해!”
횡설수설하며 반대쪽 통로로 도망치려는 세린의 몸을 감싸 쥐었다.
한 순간 몸을 떨은 세린이 강수를 마주했다. 익숙한 얼굴임을 확인했지만 그럼에도 그녀의 얼굴에 드리워진 창백한 기운은 사라지지 않았다.
“강수, 씨...저, 저 쪽에 뭔가가...꿈틀거리고, 이 쪽으로 다가와서.......”
“헛것을 본 거야.”
“헛, 것...?”
“...피곤해서. 헛것을 본 것뿐이야. 너무 걱정하지 마.”
최대한 그녀를 안심시키기 위해 등을 토닥이며 부드러운 목소리를 속삭였다. 그에 자신이 주시하고 있던 통로를 쳐다보던 세린이 끝내 고개를 떨구며 양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미안해요.”
희미한 흐느낌이 새어 나오고, 그것이 머지않아 울분에 찬 사과로 변질되었다.
“계속 불안해요. 자꾸, 누군가가 저를 노리는 것 같아요.”
던전 내에서 정신이상에 걸리는 것은 매우 흔한 일이다. 하물며 그녀는 약화로 인한 정신수치 하락에 기억상실까지 덧씌워진 상태. 진작 미치지 않은 것이 오히려 이상할 정도다.
강수는 그런 가엾은 여인을 품은 채 흐느낌에 귀를 기울였다.
“자꾸, 떠올라요, 방독면이 쓴 자를 저를 죽이려 하는....톱으로, 팔이랑 목을...자르는 그게 자꾸만 떠올라서....어느 한 순간, 나타나서, 절 구속하고, 죽이는 게 아닐까....하는....그런 생각이 계속.........”
길게 이어가던 말이 어느 한 순간 잦아들어갔다. 울분으로 인해 목이 막혀버렸는지 입만을 뻐끔거리던 그녀는 끝내 강수의 품에 머리를 파묻었다,
강수는 그런 세린의 등을 토닥이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
정말로 가엾은 여인이 아닌가. 정신이상으로 인해 죽어버린 망령이 자신의 주변을 배회하는 것을 느끼다니.
기억을 잃기 전의 그녀가 어떤 존재였는지, 자신의 친구였던 자와 어떤 관계였는지 그로썬 알 도리가 없지만, 적어도 지금의 모습만을 보면 동정을 느껴야 할 대상으로 보일 뿐이었다.
“그 녀석은 죽었어.”
조용히, 그녀를 품에 안은 채 귓가에 속삭이듯 말했다.
“...봤잖아, 그 녀석의 시체.”
“........”
뭐라 말을 하려고 하는 세린이 끝내 강수의 씁쓸한 미소를 마주하고 입을 다물었다.
짧은 말이었지만 그 말에는 확신이 담겨있었다.
고작 그것을 들었을 뿐임에도, 마음속에서 느껴졌던 떨림이 조금이나마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자신이 이제껏 수도 없이 되내었던 그 대상이 이 세상에서 사라졌다. 그 하나의 사실에 왜 이렇게 안도감이 느껴지는 걸까.
“죽였, 죠...그 사람, 강수씨가 직접.........”
그가 직시시킨 사실을 되뇌며 끝내 머리를 움켜쥐는 세린.
“그 사람을...날 죽이려고 했던 사람을, 죽였어...나를........”
진정했다고 생각했던 그녀의 몸에서 다시 떨림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환각을 보았기 때문에? 아니, 지금의 그녀는 ‘자신의 몸을 포개고 있는 남자의 손’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마치 자신을 지켜주리라 생각했던 울타리가 감옥으로 변해가는 걸 느낀 것처럼.
“죽이지 말아줘........”
곧 자신의 옷자락을 부여잡는 세린의 입에서 오열이 터져 나왔다.
“아무것도 모른 채 죽고 싶지 않아...제발, 죽이지 말아줘...제발.......”
“.......”
비통함을 터트리는 그녀를 보고 있자니 착잡함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대체 이 여인은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기에 자신에게 삶을 갈구하는 것일까?
========== 작품 후기 ==========
이 소설에서 백일면은 아스팔트에 붙은 껌딱지 같은 존재야.
단물 다 빠져서 뱉었는데도 바닥에 남아서 쉽게 떨어지질 않아 이 에피소드를 시작한 내가 골머리를 썩고 있지.
가시는 길에 던부추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