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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전 브래이커-97화 (97/251)

<-- 26화. 원치 않은 조우 -->

그가 상대했던 자들도 멸망한 세계에서 이제까지 살아남은 베테랑들이었다. 강한가 약한가를 따지면 분명히 강하다. 죽지 않을 뿐인 몸을 지닌 자신보다도 훨씬 더.

그는 그런 자들이 열이 넘게 주변을 둘러 쳤음에도 혼자 뛰어들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을 모조리 전멸시켰다.

능력에 의존하지 않은 신체만으로도 무기에 버금가는 흉악한 성능을 내었다.

몸을 두르고 있는 중장비들은 그의 몸에 피해가 가해지는 것을 막아내었고, 인벤토리에서 교차로 꺼내들은 무기들은 자신에게 접근하는 모든 이들의 육체를 남김없이 도륙내었다.

설령 그에게 접촉하여 공격을 가하는 데에 성공했다 하더라도 기다리는 것은 지독한 독. 그의 몸에서 흐르는 피와 입에서 토해지는 숨결은 닿은 모든 것을 녹이고 부패를 유발하는 ‘맹독’의 성질을 띠고 있었다.

남게 된 것은 끔찍하게 망가진 시체들 뿐. 그는 그 참상에 홀로 선 채 흉한 얼굴에 다시 방독면을 뒤집어썼다.

“준비운동 거리도 안 되네. 하하하!”

참상을 만들어낸 녀석이 내뱉은 첫말이었다. 마치 자신이 저지른 일에 부담 따윈 전혀 느끼지 않는다는 발언.

그 말을 내뱉으며 그는 피가 묻어나있는 몸으로 강수가 있는 곳을 향해 걸음을 옮겨왔다. 타인을 죽일 때 발산했던 적의 따윈 이미 증발한 지 오래였다.

“워우, 내가 싸우는 중에 그냥 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계속 지켜봐주고 있던 거야?”

“........”

자신의 볼을 감싸 쥐며 감탄하듯 말하는 그. 자신보다 훨씬 더 크고 중장비로 몸을 둘러친 녀석이 그런 자세를 취하니 속이 역해지는 것을 느꼈다.

더군다나 처음 마주쳤을 때엔 몰랐지만 근처에 서있는 것만으로도 악취가 맡아질 정도, 재생력으로 인해 급속도로 회복이 일어나는 몸의 내부가 썩어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로 인한 괴로움 따윈 그에게 있어서 사소한 것에 불과할 뿐.

“확실히 성가신 녀석들을 처리하는 데에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네.”

그가 만들어낸 참상을 보며 내린 감상평이었다.

그들을 상대하는 데에 몇 번이나 죽음을 맞이해야 할지 장담을 할 순 없었다. 부족한 전투력은 장비들만으로 충족시켜야 하고, 그를 위해 자신의 장비를 모조리 저주템으로 도배시킬 정도로 나약한 자신이지 않은가?

그런 자신의 곁에 열이 넘는 베테랑 생존자들을 상대로 가벼이 승리를 거두는 녀석이 함께 가겠다고 말을 하고 있다. 성가신 일을 도맡아서 해줄 몸종이 한 명 있다면 앞으로의 여정도 더욱 수월해질 것이다.

“네 마음대로 해. 날 따라올지 혼자 떠날지.”

“하하하하하하하!”

강수의 말에 그의 입에서 유쾌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뭐가 저렇게 기쁜 것일까? 그런 자신의 의문을 읽은 것인지 그가 곧장 강수의 곁으로 다가왔다.

“사실 처음이거든. 세계가 멸망한 이후로 다른 사람이 따라오는 걸 허락한 건. 몸이 이렇다보니 다른 놈들은 다 겁을 먹고 도망쳐버리고...능력의 특성상 어쩔 수 없는 건데 말이야.”

그는 아쉽다는 듯이 말했지만, 마냥 그의 외모나 근처에 풍기는 독기 때문에 다른 이들이 접근하길 꺼려하는 건 아니라고 판단을 내렸다.

이전에 보였던 거침없는 행동은 절대로 이 세상에서 살아남으려고 하는 자들의 것이라고는 볼 수 없었으니까.

물론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그를 데리고 다니는 건 어디까지나 목적의 완수를 위해서일 뿐. 필요가 없어지거나 뒤를 찌르려 든다면 가차 없이 죽일 것이다.

“이렇게 ‘친구’가 된 것도 인연인데 악수라도 하지 않겠어?”

“친구는 무슨. 착각하지 마. 친구놀음을 하려고 널 데리고 다니는 게 아니라, 네가 함께하면 조금이라도 더 빨리 목적을 이룰 수 있으니까 제안을 수락한 것뿐이니까.”

“...야박하구먼.”

거절을 당했음에도 상당히 들뜬 목소리였다.

“그럼 친구에서는 물러나고, 동료 정도로 하자고. 같은 목적을 향해 나아가는 사이니까...전우는 어때? 네가 죽든, 내가 죽든, 언젠가 누구 한 명은 목적을 이루기로 다짐을 하는 거야. 세계를 멸망시키겠다는 야망을!”

“...아무렇게나 생각해라.”

“우호호호호호!”

마지못해 내뱉은 한 마디에 그가 기쁜 듯 웃음을 터트리며 덩실덩실 몸을 흔들었다. 이전까지 사람을 잔인하게 죽이고 살을 녹여버리는 독을 내뿜었던 녀석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유쾌함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 쪽 이름은 어떻게 돼?”

“한강수.”

“멋진 이름인데? 서울 한복판을 가로지를 것 같은 이름이야.”

학창시절 그런 별명으로 애들에게 놀림을 당했던 것이 생각났다. 이 녀석의 능력은 혹시 타인의 기억을 읽어내는 것일까?

이제는 돌아오지 않을 과거의 단편이 짓뭉개지는 것을 느끼며 입에 담배 한 개비를 물었다.

“그 쪽은 이름이 어떻게 되는데?”

“내 이름을 궁금해 하다니, 이런 영광이! 으음, 하지만 이름보다는 친근함을 담아 애칭으로 불러줬으면 하는 마음도 있는데 말이야!”

“앞으로 ‘따까리’라고 부르면 되나?”

“내가 자진해서 다가선 거긴 하지만 너무한 별명이네.”

강수의 비아냥에도 개의치 않은 그가 방독면의 흡입구에 손을 올렸다. 스읍, 하아. 하는 소리가 울려 퍼지고, 곧 그가 자신의 손에 쥐고 있는 무언가를 자신의 인벤토리에 집어 넣었다.

자신이 담배를 피우듯 기호식품 같은 거라도 흡입구를 통해 섭취한 걸까? 생각하고 있자, 굳게 닫혀 있던 그의 입이 서서히 열리기 시작했다.

“백일면.”

짤막한 한 마디. 한 순간 그것이 자신의 말에 대한 대답임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특이한 이름이네.”

“본명은 아니야. 다만 세상 사람들은 나를 그런 이름으로 불렀으니까, 그 쪽도 그렇게 부르는 게 좋지 않을까 싶어서. 뭐, 부르는 칭호야 아무래도 좋은 일이지. 안 그래?”

곧 그가 강수를 향해 손을 뻗어왔다.

“그럼 앞으로 잘 부탁해 파트너.”

“........”

말 없이 그의 손을 맞잡았다. 두터운 장갑으로 덧씌워져 손바닥을 타고 독기가 피부로 스며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그것이 누군가와 손을 잡음으로써 느껴지는 온기라면 달게 받아들여야할 일일까. 썩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나쁘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와의 첫만남에서 느낀 것은 그저 그런 감상이었다.

******

상념에 잠겨있는 동안 시야를 덮었던 붉은 하늘이 다시 검은 색으로 돌아왔다. 지금 이 순간이 멸망 이후의 세계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슬며시 밑으로 시선을 옮겼다. 무릎에는 초희와 유사한 외모를 지닌 여성, 세린이 머리를 뉘운 채 쥐도 새도 모르게 잠을 청하고 있었다.

눈 앞 부근에 손을 휘저었지만 반응은 보이지 않았다. 잠에 완전히 빠져있는 상태란 뜻이다.

이전에 세린에게서 뽑아든 스마트폰은 이미 손에서 사라진 지 오래였다. 일정시간이 지나면 다시 소유자에게로 돌아가는 습성 때문이었다.

다시 있을 법한 곳에 손을 집어넣으려 하자 그녀가 몸을 뒤척였다. 한 순간 잠에서 깨는 게 아닐까 하고 몸을 떨었지만 다행히도 깨어나진 않았다.

다시 그녀가 걸치고 있는 가운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 최대한 그녀의 몸에 영향이 가지 않도록 신중하게.......

“...음?”

문득 손에 쥐어지는 것을 감지하고 함께 꺼내어 들었다. 스마트폰과 함께 그의 손에 쥐어진 것은 그녀의 이름이 적혀있는 명찰이었다.

주민등록증과는 별개로 그녀의 신분을 증명하는 물품. 그 앞부분에 슬쩍 시선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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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XX병원

정형외과의-오세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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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

버젓이 사진이 찍혀있는 명찰은 그에게 의외라는 생각을 심겨주었다.

몸에 걸치고 있는 하얀 가운은 확실히 의사 특유의 ‘그런 분위기’를 내긴 하지만, 애초에 그녀가 걸치고 있는 가운은 던전에서 구한 물건이 아니었던가?

우연이라고 한다면 상당히 기가 막힌 게 아닐까 싶었다. 현직 의사에게 의사의 아이덴터티인 흰색 가운이 주어졌다고 한다면........

“...으윽.”

그녀의 얼굴이 그려진 명찰을 보고 있자 무릎을 배고 있던 그녀가 슬며시 자신의 머리를 양 손으로 부여잡았다.

자신이 자극을 해서...그런 이유가 아니었다.

마치 악몽이라도 꾸는 듯, 그녀는 식은 땀을 흘린 채 몸을 뒤척이길 반복하고 있었다.

“그만 해...이런 거, 싫어...나....제발........”

괴로운 신음을 내뱉는 그녀의 볼을 손바닥으로 두어번 두드렸다.

힘은 실리지 않았지만, 볼에 손이 접촉한 것에 놀란 그녀가 자신의 몸을 발딱 일으켜 세웠다.

"허억!"

“놀랐어?”

“...강수, 씨?”

잔뜩 젖어있는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세린. 꿈을 꾸는 중에 가위라도 눌린 것인지 온 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그리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니었다.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격렬한 행위에 수치심이라도 느끼는 사람인 줄 알 정도로.

“크흠!”

근처에 다른 사람이 없는 것을 다행으로 여기며 헛기침을 토해내었다.

“상태가 안 좋아 보이는데, 아까 상자에서 나온 포션이라도 마시는 게 좋을 것 같네. 능력 덕분에 효과도 나아질 테고.......”

“가지 마세요!”

슬쩍 고개를 돌리려던 직후, 그녀가 다급히 소리를 지르며 강수의 몸을 끌어안았다. 갑작스러운 대쉬에 놀란 강수가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아가씨, 갑자기 왜........”

“같이, 있어줘요. 떨어지지 마요, 제발, 혼자 내버려두지 말아요. 그 자가 올 거예요. 날 죽이려고, 날 죽이려고.......”

“...일단 진정해.”

그녀의 몸을 떨어트리려 했지만 옷주름이 진하게 생길 정도로 손에 힘이 실려있었다.

육체능력이 매우 낮음 상태인 만큼 떨쳐내는 건 어렵지 않지만, 피해를 주는 것도 아닌데 겁에 질린 사람을 내칠 정도로 야박한 마음을 가지진 않았다.

젖어있는 그녀의 이마를 쓰다듬었다. 땀을 잔뜩 흘렸기 때문인지 창백하게 질린 얼굴에선 온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무슨 악몽을 꾼 거야?”

자다가 이런 행동을 보인 것이니 악몽을 꾸었다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강수의 말을 듣고 뒤늦게 그것을 자각한 그녀가 옷채를 쥐고 있던 손을 떨어트렸다.

“꿈, 이었겠죠...그건........”

석연치 않은 목소리, 마치 이전에 있었던 일이 현실인지 아닌지 조차 구분이 가지 않는 듯 보였다.

“...어딘가, 눕혀져 있었어요.”

꿈의 내용이 아직도 생생히 떠오르는 듯, 떨림이 잦아들지 않는 자신의 양 팔을 끌어안았다.

“움직일 수가 없었어요, 사지는...묶여있었고...발버둥을 쳐도...움직일 수가 없어서, 하지만 그 사람은 저한테...다가왔어요.”

바닥으로 향해진 그녀의 시선이 둥그렇게 변해갔다. 무의식적으로 실려가는 힘은 그녀의 눈을 충혈 되게 만들었다.

“피묻은, 가면 같은...걸, 뒤집어쓰고, 손에는 못이랑 망치를 쥐고...그걸 저한테 겨누고, 제 손가락 끝에 못을 하나 하나씩 박았어요. 손톱이, 깨지고, 살이 파이는 느낌이, 너무 선명하게 느껴져서.......”

자신의 왼 손목을 오른손으로 쥘끈 틀어쥐는 세린. 그녀의 어깨에서 떨림이 더욱 격하게 일어났다.

“그, 후에 톱으로, 제 양 손을 잘랐어요, 아프고...피가 흐르고...괴롭다고, 차라리 죽여달라고, 외치니까...그걸, 제 목에 겨누고....그리고.......”

순간 구역질이 치밀어 오르듯 자신의 입을 양 손으로 틀어막는 그녀. 억지로 빠져나오려는 걸 삼키려는 듯 등에서 격하게 경련이 일어났다.

“내가 왜 그런 일을 겪었는지...꿈인지 현실인지도, 구분이 안 가요, 기억이 없어서...난, 대체 왜...내가 이런 일을...당해야.......”

거기까지 말한 직후, 말꼬리를 흐린 그녀가 호흡을 굳힌 채 어느 한 곳으로 다급히 고개를 꺾었다.

한 순간 그녀가 일으킨 행동의 변화에 의아함을 느끼는 것도 잠시. 코끝을 찌르는 역한 냄새를 자각한 순간, 강수의 표정이 급격히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피냄새'

썩은 시체와 시험체들이 내는 것보다 훨씬 선명하고 구역질을 자아내는 사람의 것.

그 냄새를 자아내는 존재가 통로 저편에서부터 이곳을 향해 걸음을 옮겨오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던부추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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