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던전 브래이커-94화 (94/251)

<-- 25화. 닮은 여자 -->

오세린이라는 이름을 가진 여자에게 던전에 대해 대략적으로 설명을 해주었다.

시내 한복판에 던전이 나타났다, 그리고 그곳에 수많은 사람이 휩쓸렸고, 정체불명의 능력을 얻었으며, 그 능력을 이용해 던전 내에 존재하는 괴물들을 처리하며 살아남아야 한다는 것도.

“말도 안 돼.”

그 모든 설명을 듣고 난 후 세린이 처음으로 내뱉은 말이었다.

“못 믿겠어?”

“그, 그야...보통 그런 건 소설이나 영화에서나 나오는 이야기잖아요.”

“...기억상실인 녀석들은 이런 데에서 꼭 상식을 걸고 넘어진다니까."

불길한 색으로 물들어진 거대한 그림자가 나타나 ‘내가 너희들을 납치했다. 살고 싶으면 발악을 해라’라고 위협하는 걸 기억하고 있다면 적어도 현재 상황을 수긍할 수 있을 테지만, 그에 대한 기억도, 이제껏 자신이 생존해온 기억도 날아가 버린 상태에서 그런 걸 곧이곧대로 순응하길 바라는 데엔 무리가 있다.

더군다나 ‘기억’은 지워졌어도 ‘지식’이라는 것은 남는다. 지식의 범주에 속하는 상식 또한 남아있으니, 말도 안 되는 상황에서 선입견을 쉽게 버리는 게 불가능한 것이다.

“아무런 기억도 없는 상황에서 이런 곳에 덩그러니 떨어져 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비현실적인 상황 아니야? 그리고 아가씨는 날 만났을 때 ‘사람이냐 아니냐’를 물어봤었지. 쓰러지기 이전에 괴물이나 그 비슷한 걸 발견했기 때문에 그런 질문을 건넨 거 같은데. 내 말이 틀려?”

“........”

강수의 말에 세린이 입을 손으로 감춘 채 시선을 회피했다.

“어느 순간 갑자기 깨어났을 때, 마스크를 쓴 거인이 있었어요. 그 사람이 저를 죽이려 들었고, 그래서 도망치다, 지쳐서 여기에 쓰러졌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 쪽이 다가오셨고........”

얘기를 들어보면 기억을 잃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듯싶었다. 우연히 자신을 만난 게 천만 다행이었으리라. 만약 자신을 만나지 못했다면 아무것도 모른 채 괴물들에게 둘러싸여 잡아먹혔을 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세린은 마냥 안도하거나 하진 않았다. 설령 이곳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을 만났다 하더라도 자신이 처해있는 상황이 변하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충분히 알아들었을 거라 생각하고...아까 얘기했던 대로 이 빌어먹을 공간에서 나갈 수 있는 출구로 향할 거니까, 가급적 얌전히 따라왔으면 해. 알았지?”

두 사람과 떨어진 자신인 만큼 쓸 만한 능력을 지닌 자와 함께 다닐 필요가 있다. 그 사람이 ‘인벤토리의 개수도 많고 행운수치가 높다’고 한다면 물자의 수급 면에서 크나큰 득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것도 어디까지나 당분간이다. 일단 이 여자를 출구까지 데려다주고 나면 그 후에는 이 여자의 선택에 맡길 뿐이니까.

기억을 되찾았을 때에 자신이 탐을 낼 만한 능력을 보인다면 섭외도 생각해볼 수 있겠지만, 특성 하나 제대로 확인하지 못하는 상태에선 그녀의 능력이 쓸 만한지 아닌지를 확인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설령 쓸만하다 하더라도 각오가 되어있지 않다면 데리고 갈 수도 없지만, 겁에 질려 벌벌 떠는 지금 꼴을 보면 그것도 고려하기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억도 없고, 몸도 약하고, 능력도 최저수준...자신을 만나기 전에 과연 이 여자는 어떤 식으로 생존을 해왔을지 궁금해질 지경이다.

동료가 몬스터들에 의해 전멸을 했는지, 아니면 원래부터 혼자 돌아다니며 목숨만 부지했던 것인지........

“저, 저기, 이름, 가르쳐주실 수 있나요? 앞으로 같이 다니려면...들을 필요가 있을 테니까.”

“이름?”

그녀의 말에 고개를 갸웃거린 강수가 곧 어깨를 으쓱 움직이며 대답했다.

“한강수. 편한 데로 불러줘.”

“그럼, 앞으로 강수 씨라고 부를게요.”

그녀의 말에 잠시 담배를 물고 있는 입을 다물었다. 누구누구씨라는 건 확실히 초면인 대상에겐 그보다 준수한 칭호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뭐라고 해야 할까, 듣기가 상당히 거북하다.

못생겼다거나 한 것은 아니다. 미적 기준에서 치면 나름대로 준수한 외모. 불안이 서리기도 했지만

하지만 눈가 밑이나 입꼬리 끝에 나있는 미미한 주름이나 여성치고는 상당히 거친 느낌이 드는 손은 그녀의 나이가 그리 적지 않다는 것을 가르쳐주고 있었다.

대략 30대 초중반...어쩌면 자신보다 나이가 더 많을 지도 모르는 여자에게 공적인 자리도 아닌 곳에서 '씨'라고 불리는 건 조금 기분이 묘했다.

‘정신연령으로 치면 이 쪽이 10년은 더 먹었겠지만.’

속으로 그렇게 생각을 하며 다시 질문을 건네려 했을 때일까?

-가르륵, 크아악!

귀에 소음이 들려왔을 무렵 세린이 화들짝 놀라며 몸을 움츠렸다.

“무, 무슨 소리....”

“거기 가만히 있어.”

소리가 들려온 직후 몸을 떠는 세린을 뒤로한 강수가 인벤토리에서 무기를 꺼내들었다. 평소에 주로 쓰는 삽이 아닌 한 손으로 쥘 수 있는 망치. 흔히 장도리라 불리는 물건을 든 채 언데드가 있는 곳을 향해 다가섰다.

-퍼억!

굉음과 함께 언데드의 몸이 뒤쪽으로 나가떨어졌다. 강수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연이어 망치로 괴인의 머리를 내리찍어 숨통을 끊어내었다.

뇌수가 바닥과 벽에 낭자하고, 끝내 머리가 완전히 으스러진 언데드의 움직임이 멈췄을 무렵 그의 망치질이 멈춰졌다.

기껏 해봐야 레벨 1짜리의 배회하는 언데드. 아무리 자신이 전투능력이 전무하다 한들 레벨 10을 넘어선 시점에서 상대하지 못할 리가 없다.

물론 기억이 없는 여자에게 있어선 강하건 약하건 관계없이 모두 무섭게 느껴지겠지만.

“사, 사람...죽인 거예요...??”

“아까 좀비 같은 것들 봤다며. 그거랑 같은 부류야.”

강수의 대수롭지 않은 설명에 세린의 시선이 밑으로 향해졌다. 바닥에 쓰러져 있는 시체에서 흐르는 검은 피...도저히 인간의 것이라고는 볼 수 없는 것이었다.

“사람은...아닌 거죠? 정말로?”

보고도 믿기지 못하는 듯 강수를 향해 물었다. 기억이 없는 만큼 이 상황 자체를 모두 수용하는 데엔 무리가 있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강수는 그녀의 반응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어깨를 으쓱 움직였다. ‘아무리 그래도 사람처럼 생겼는데 죽이면 안 되죠!’라고 말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라 여길 일이라 생각했으니까.

“사람이라는 건 대화가 통하는 놈들을 일컫는 거야. 가끔 말 할 줄 아는 놈들도 있는데, 그 놈들도 혓바닥 놀리면서 우리 같은 녀석들의 숨통을 끊어내려 드니 조심할 필요가 있지.”

설령 사람이라도 자신에게 위해를 가한다면 제거할 필요가 있다. 그러한 의미를 내포시킨 대답을 한 강수가 사라져가는 시체가 있는 쪽으로 시선을 옮겨 보았다.

그곳에 머지않아 덩그러니 나타난 전리품 상자 하나. 레벨 1로 추정되는 몬스터를 잡고 나온 것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운 행운이었다.

‘저 여자 덕분인가.’

행운이 높은 자와 이제껏 단 한 번도 같이 다녀본 적이 없었다. 이전까지 생존자들을 몇 번 마주한 적이 있긴 하지만 그들과는 한 번 만나고 바로 떨어졌으니까.

파티에서 가장 행운이 높았던 요한조차도 행운수치가 ‘보통’에 머물러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하며 받아들였지만 세린의 행운은 그보다 한 단계 높은 ‘높음’수치. 곁에 있는 것만으로 이전보다 훨씬 아이템의 수급을 원활히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이 상자 좀 열어줄 수 있을까?‘

“상자를요...? 제가?”

“행운수치가 그 쪽이 더 높으니까. 이런 건 행운수치가 높은 쪽이 열어야 좋은 보상이 나오거든."

강수의 말에 세린이 의아함을 느꼈지만, 어찌되었건 ‘일단 열어봐라’라는 의견으로 받아들여 그의 곁으로 다가섰다.

“시체가 사라지고...상자가...뭐야 여긴 대체........”

연달아 당혹을 터트리는 세린이 곧 상자의 입구를 손으로 열어 재꼈다. 그녀의 손힘에 가벼이 열린 상자의 내부에는 그녀의 행운이 반영된 아이템들이 존재하고 있었다.

“웃...으읏!”

곧 그녀가 안에 들어있는 물건을 주워들었다. 막 그것을 꺼내려는 순간 들어 올리려던 허리가 딱 굳어졌다.

상자 안에 들어있는 것을 끄집어내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지만 힘이 제대로 들어가질 않는 듯 그녀의 몸만 움직일 뿐이었다. 그러고 보면 그녀의 적성수치는 ‘약화’로 인해 모두 최저수준에 도달한 상태가 아니었던가?

“내가 대신 빼줄게.”

강수가 세린의 옆을 지나쳐 안에 들어있는 것에 손을 뻗었다.

대부분은 소모품, 장비아이템은 하나 뿐이었다. 하지만 그 장비는 그가 사용하기에도 상당히 무리가 있는 물건이었다.

양 손으로 들어 올려도 겨우 가슴팍까지 들어 올릴 정도. 무게로만 치면 헬스장에서 쓰이는 덤벨을 가뿐히 뛰어넘을 수준이다.

“와, 그걸...간단히 들어올리시네요.”

옆에 있던 세린이 강수가 망치를 들어 올린 것을 보고 감탄을 내뱉었다. 육체능력이 최저치인 상태에서 망치를 들어 올려봤으니 당연히 저리 감탄을 느끼겠지.

그녀의 시선을 무시하고 바닥에 내려둔 망치의 정보를 확인했다. 화면에는 ‘중력을 3배로 받는다’라는 기본 옵션이 붙어있었다.

중력을 3배로 받는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질량이 3배로 적용된다는 것. 당연히 어지간한 근력으로는 쉽게 들어 올리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일단 가지고 있는 게 좋을 것 같네. 스마트폰 줘봐.”

“또요?”

“말로 설명하기 보다는 직접 보여주는 게 나을 테니까.”

곧 강수가 그녀가 건네준 스마트폰으로 바닥에 떨어진 망치를 촬영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바닥에 떨어져 있던 망치가 하얀 빛을 자아내는 가루로 변해 스마트폰의 렌즈에 스며들어갔다.

“뭐, 뭔가요 그건...마법? 마술인가?”

“이 공간 자체가 판타지니까 일일이 이런 거에 놀라면 피곤해질 텐데......"

피식 웃음을 터트린 강수가 세린에게 스마트폰을 돌려주었다.

세린은 스마트폰을 양 손으로 굳게 쥔 채 주변으로 넌지시 시선을 주었다.

"뭐 신경 쓰이는 거 있어?"

“그게, 제 생각보다 훨씬 신기한 곳이다 싶어서......."

신비함과 불안, 그 외에 이런 저런 감정이 뒤섞인 감상이었다.

이전에 자신의 거침없는 태도를 보았기 때문일까? 조금은 그녀의 몸에서 느껴지는 떨림이 잦아들어 있었다.

물론 그것이 이 공간에서의 완전한 적응으로 이어지진 않겠지만,.

“기억이 없지만, 뭔가...제가 적응할 수 있을 만한 곳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녀도 그것을 자각하고 있는 듯 시선을 회피한 채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아무것도 모르니까.....당신을 만나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혼자였다면, 어떻게 됐을까 걱정이 들기도 하고..........”

말 없이 자신을 쳐다보는 강수를 향해 세린이 다급히 고개를 숙였다.

“고마워요, 도움을 주셔서.”

감사인사다. 우습게도 자신을 짐꾼으로 이용해먹으려는 녀석에게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고 있다.

그게 썩 나쁜 기분은 아니었지만, 왠지 모를 오묘함이 적잖아 느껴졌다.

이렇게 가까이서 호의를 받고 있자니 누군가와 대조되어 보인다고 해야 할까.

“닮았네.”

누구인지를 떠올리던 강수가 무의식적으로 중얼거렸다.

“닮아요?”

“내 아내랑 그 쪽이랑. 상당히 닮았어.”

"....네?"

세린의 몸이 살짝 굳어졌다.

========== 작품 후기 ==========

부추밭에 심겨진 부추가 1만 포기를 넘어서 기분이 무척 좋은 작가입니다.

10만 포기를 넘어서길 바라며, 가시는 길에 던부추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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