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화. 거짓의 마녀 -->
고깔모자와 더불어 가슴께가 깊이 파인 검은 드레스를 걸치고 있다. 쇄골 부분에 올려져 있는 왼손가락이 선을 타고 목쪽으로 향해 여인의 턱을 매만져갔다.
도톰한 입술이 벌어지며 튀어나오는 자그마한 혓바닥과 모자의 그림자에 감춰져 있는 붉은 눈동자는 요염함이 느껴짐과 동시에 살벌한 위화감을 보는 이에게 심겨주고 있었다.
기억 속에 남아있는 여인도 처음 만났을 당시에 분명히 저런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이제는 다시 보지 못하리라 생각했던 만큼 반가움마저 느껴졌지만, 본모습을 내보였다는 것은 ‘시답잖은 농담’은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자신을 상대하겠다는 의지를 표한 것이니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었다.
“아~ 정말로 안타까워...이 모습을 보이는 건 조금 시간을 들인 후로 하려고 했는데 그 쪽이 그런 재미없는 얘기를 들려주니 나도 모르게 힘을 해방시키고 말았잖아.”
“...처음엔 살려주겠다는 뉘앙스로 말하지 않았던가?”
“자비를 베풀어주려는 이 나의 마음을 처절히 짓밟을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으니까.”
웃음을 짓는 여인이 자신의 가슴밑에 올려둔 양 팔을 힘껏 들어올렸다. 검은 드레스에 포개어진 살이 들어 올려지고, 쇄골 밑의 골짜기가 더욱 깊어지기 시작했다.
“그래도 너무 무서워하진 마~ 마지막 순간에 이렇게나마 내 아름다운 모습으로 눈요기라도 할 수 있잖아? 적어도 이 공간 곳곳에서 쓰레기처럼 죽어나가는 다른 녀석들보단 행복한 최후를 맞이할 수 있을 거라고 장담할게.”
마치 자신을 유혹하듯 감미로운 목소리로 속삭여온다. 귀를 간질이는 목소리에 강수는 잠시 입에 물고 있는 담배를 떨어트리며 한숨과 함께 연기를 토해내었다.
“내가 사는 곳에선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라는 속담이 있거든? 그 속담을 남겨준 선조들이 행복한 최후라는 말을 들으면 분명 까무러칠 거라고 생각해.”
“정녕 그렇게 생각했으면 그런 얘길 꺼내지 말았어야지.”
머지않아 그녀의 입가에 싸늘한 냉소가 걸리기 시작했다. 아주 찰나의 순간, 그 웃음을 마주한 자의 등에 한기가 스쳐지나갔다.
“이 던전 어디에서 누구의 입을 통해 들었는지는 몰라도 참 마음에 안 들어. 누구의 면전에 대고 그따위 말을 지껄이는지...아니, 누가 말했느냐보다 그 말을 하필이면 내 앞에서 했다는 게 문제지.”
이를 선명히 드러내는 여인의 입이 또박또박 열리며 감정에 찬 목소리를 토해냈다.
“나를 이렇게 화나게 한 대가는 톡톡히 치러줘야겠어.”
“누가 들으면 날 처음부터 살려서 돌려보낼 생각이 있는 줄 알겠어.”
“처음부터 그런 생각이 있었지. 나에 대해서 너무 오해하시는 거 아닌가?”
강수의 담담한 말에 여인이 자신의 입가를 손으로 감춘 채 몸을 부르르 떨었다.
“난 일단 다른 녀석들과는 달리 ‘생각’이라는 걸 할 줄 아는 녀석이라고. 인간이었던 내가 다른 세계의 주민이라 할지라도, 너희들을 상대로 잔인한 처벌을 내릴 리는 없잖아? 한다 하더라도 배려 정도는 해줄 수 있는데.......”
“혓바닥 하나만 가지고 왕을 섬기는 충실한 신하들의 모가지를 죄다 끊어낸 여자가 하는 말 치곤 설득력이 없어도 너무 없다.”
머리를 포개고 있는 고깔모자의 챙을 눌러쓴 여인이 자신의 이를 가는 모습을 숨기고는 억지로 코웃음을 터트렸다.
“지금 자기 처지가 어떤지도 파악하지 못하는 것 같은데...이곳은 원래 네가 있던 곳과는 터무니없이 떨어져 있는 곳이야. 거기다 이곳의 입구는 내가 신호를 내리지 않는 이상 전혀 열리지도 않........”
“거짓말.”
짧게 이어지는 강수의 말에 마녀의 입이 일순간 다물어졌다.
그는 이미 여인에게서 시선을 거둔 채 자신의 품에서 꺼내든 스마트폰을 확인하고 있었다.
“확실히 지도를 확인해보면 위치가 상당히 떨어진 건 알겠다만...말만 좀 할 수 있을 뿐이지 너도 결국 본질은 방구석에 처박혀있는 시체들이랑 별반 다를 바 없잖아?”
다른 점이 있다면 ‘자신이 원래 속해있는 방을 벗어나 사냥감을 데리고 이 방으로 끌고 올 수 있다’라는 것 정도다. 그것은 그녀가 지니고 있는 능력의 일부였으니까.
하지만 그 능력이 던전 내의 룰에까지 영향을 미치진 못한다. 몬스터룸은 방에 존재하는 몬스터를 쓰러트리거나, 혹은 일정시간이 경과하면 출구가 열리게 된다.
그것을 역전시키는 것은 능력의 범주를 넘어선 ‘권능’에 해당하는 짓이다. 보스몬스터도 아닌, 일개 네임드에 불과한 이 여자가 그런 짓을 벌일 수 있을 리 없다.
눈앞에 있는 강자를 상대하지 않아도 시간을 끌면 충분히 이 자리를 벗어나는 것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물론 그 때가 될 때까지 이 여자가 자신을 놓아줄 생각은 없을 테지만.
“......너, 짜증나.”
-우우우우웅.
주변에 쳐져있는 붉은 각인들이 그녀의 의지에 반응하듯 빛을 자아내며 진동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이 곳에 귀속되고 난 이후로 이렇게 짜증나는 녀석은 처음 봐. 어떻게 이렇게까지 말 하나하나를 얄밉게 할 수 있지? 마치 나에 대해서 다 안다는 듯이 떠들어대고...”
그 빛 속에서 스멀스멀 기어 나오기 시작하는 붉은 색을 자아내는 연기가 공간을 서서히 뒤덮어가기 시작한다.
발치에 내려앉은 그것이 몸을 옭아멜 듯 솟아올랐을 무렵, 시야가 뒤흔들리는 것을 느낀 강수가 자신의 머리를 부여잡은 채 자리에서 비틀거리기 시작했다.
마녀는 그런 나약한 희생양을 보며 작게 조소를 짓기 시작했다.
“그래도 걱정하지는 마. 난 피가 철철 흐르는 ‘더러운 죽음’이 내 앞에서 벌어지는 건 사절이거든. 죽는 그 순간 만큼은 행복하게...그 말은 맹세코 거짓말이 아니야.”
한때 마법사였던 거짓의 마녀가 주력으로 다루는 것은 강력한 힘을 자아내는 마법이 아닌 ‘환술’이다.
거짓을 서슴없이 진실처럼 포장해 말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들리지 않는 것을 들리게, 그러면서도 존재하는 것을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이 공간에 가두어진 그녀는 이 공간에 새겨진 각인의 힘을 빌려 그 모든 것을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다.
설령 환상에 불과할지라도 보는 이에게는 그 무엇보다도 현실적인 감각을 느끼게 만든다. 고되고 힘들기만 한 기억을 쌓아가기보단 일생일대의 행복을 느끼며 모든 것을 끝내는 것이야 말로 모든 생물체가 꿈꾸는 ‘최후’가 아니겠는가?
행복한 최후라는 것이 정말로 존재한다면, 그녀는 분명 죽어가는 자들에게 자애를 내려주는 구원자일 것이다.
“자, 지금의 내가 어떻게 보이지?”
비틀거리는 그가 고개를 세워 마녀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마녀의 겉모습 자체는 이전과 별반 차이가 없지만, 환술이 걸린 이에게는 전혀 다르게 보인다.
술자인 자신을 그 누구보다도 아름다운 존재로써 인식하게 만드는 연기는 ‘매혹의 안개’라는 환술의 일종이었다.
최면으로 인해 반쯤 몽롱해진 정신, 그 과정에서 매력적인 존재가 비춰질 경우 그 존재의 이성은 마비되고 욕망에 충실해지게 된다.
성적인 욕망, 설령 그것이 거짓된 욕구임을 알더라도 환술에 의해 나약해진 정신력을 가진 인간이 그걸 쉽게 버텨낼 수 있을 리 없다.
“그 무엇보다도 너의 취향에 걸맞는 이 내가...이제부터 너에게 가장 행복한 죽음을 선사하러 가는 거야.”
노출된 양 팔의 살결을 쓰다듬으며 천천히 앞으로 걸음을 옮겨간다.
한 발자국씩, 구둣발이 딱딱한 땅바닥을 디디며 또각이는 소리를 연이어 울려 퍼지게 만들었다.
“자, 받아들이렴. 내 눈을 마주보고...방금 전까지 건방지게 떠벌리던 입을 나에게로 향하는 거야.”
끝내 그의 곁으로 다가선 마녀는 초점 없는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남자를 향해 손을 뻗어갔다.
시선은 오직 자신의 육체로 향해져 있다. 손끝은 자신의 육체를 쓰다듬고 탐닉하길 바라며, 자신의 추잡한 욕망이 해소되기를 전력으로 바랄 뿐.
“아무것도 생각하지 마. 오직 나만을 보고...그래야만 속이 타들어가는 고통마저 잊어버릴 테니까.”
감미로운 입술이 벌어지고, 그녀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서서히 그의 턱을 움켜쥐기 위해 뻗어져갔다.
그녀의 숨은 들이마신 이를 즉시 죽음으로 몰아넣을 정도로 강력한 맹독. 입을 맞추는 그 순간 독사과의 과즙처럼 달콤한 액이 내부를 침입해 그의 모든 것을 녹여버릴 것이다.
천천히, 속이 타들어가는 그 감각을 모두 느끼며, 하지만 그 감각을 느끼고 반응할 수 있는 정신은 증발되어 말 없이 받아들일 뿐.
최후의 그 순간까지, 자신에게 심취한 가엾은 존재는 그것이 자신의 수명을 깎아먹는 과정이 되리란 걸 자각하지 못할 것이다.
‘이 건방진 녀석의 혓바닥은 무슨 맛이 날까........’
그의 얼굴을 움켜쥐려는 여인의 머릿속은 자신에게 건방진 소리를 지껄인 남자의 기억을 헤집을 생각으로만 가득 차있었다.
이 어리석은 남자에게 ‘자신의 죄’를 가르쳐준 존재가 누구인지, 그리고 이 남자가 그 이야기의 주인공이 자신임을 어떻게 알아낸 건지.........
-까앙!
...그를 알아보기 위해 뻗었던 손이 경쾌한 금속음과 함께 거두어지고 말았다.
“아그, 아아악!!!!!”
순간을 기점으로 안면에서 느껴지는 충격에 비명을 지르며 다급히 뒷걸음질을 쳤다.
안면에서 느껴지는 격렬한 통증은 이전까지만 해도 우위를 점하고 있다 생각했던 여인의 생각을 집어삼켜 머릿속을 새하얗게 변해버렸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붉은 연기 속에서 희미하게나마 눈에 들어온 것을 떠올려 보았다.
그를 향해 다가서고, 턱을 움켜쥐고 머리를 잡아 당겨 입을 맞추려 했다.
그 순간 남자의 몸이 움직였고, 손에 쥐고 있던 것이 자신의 얼굴을 전력으로 후려쳤다.
이제까지 수많은 몬스터들을 처리했던 단단한 삽의 끝으로........
“정신이 멀쩡하다고는 해도 몬스터인데 고통은 제대로 느끼는구나?”
그 고통스러운 모습을 관람하고 있던 강수가 입에 담배를 물은 채로 호쾌한 웃음을 터트렸다.
“처음 만났을 때엔 그냥 한 방에 처리했으니까 이런 걸 느낄 새가 없었다만, 이렇게 아파하는 걸 보면 몬스터가 아니라 진짜 인간 같다니까. 날 죽이려 든다는 것까지 포함해서.”
“무슨, 소리를...너, 이 자식........”
피가 줄줄 흐르는 안면을 움켜쥔 마녀가 잔뜩 우그린 시선을 강수에게로 향했다.
"어떻게 내 환술에...대체 어떻게......."
영문을 알 수 없다는 듯 쳐다보는 마녀의 감정을 읽어낸 강수가 코웃음을 터트리며 슬쩍 입에서 담배를 떨어트렸다.
“매혹이라...확실히 환술로 정신을 흐릿하게 만든 상태에서 반라나 다름없는 꼴로 나타나는데 안 걸리고 배기겠어? 조금만 더 자극이 심해졌으면 냅다 덮쳤을 지도 몰라.”
“그러면 대체 왜.........”
"그야 당연한 거잖아."
마녀의 의문에 강수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바람피면 내 아내한테 맞아죽을 게 뻔하니까.”
========== 작품 후기 ==========
아내가 더 예뻐서 그런 게 아니라 무서워서 얼굴을 뭉개버린 겁니다.
무서워서.
던부추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