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5화. 구조대 결성 -->
“지섭씨는 왜 던전에 남아계신 건가요?”
“나야 뭐...일상이 지루했으니까.”
다윤의 질문에 지섭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운영하던 도장이 망해버리고, 할 줄 아는 거라곤 검 좀 휘두르는 것 밖에 없는데 이 세상에 검을 필요로 해주는 직업이 뭐가 있겠어? 나이도 나이인지라 어디서 받아줄 곳도 없고...별 다른 인맥도 없어서 그냥 막노동이라도 해볼까 싶어서 구인광고지 찾아보고 있었는데, 그러던 차에 이런 곳에 휩쓸리게 되었지.”
손에 쥐고 있는 도검이 휘리릭, 하고 가볍게 회전을 일으켰다.
“목숨이 위험한 일도 많았고 끔찍한 것도 많이 봤지만...그래도 이곳이라면 바깥에서보다는 제대로 된 걸 추구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거든. 의외로 내 장기를 확실히 사용할 수 있어서 말이야. 별 거 아닌 이유지?”
“아, 아뇨 전혀요.”
말 없이 지섭을 쳐다보던 태산이 다급히 양 손을 저었다.
“오히려, 지금까지 이 던전에서 살아남으신 게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실력이 그만큼 뛰어나신가봐요.”
“운이 좋았지 뭘. 말 들어보니까 각각 랜덤한 위치에 전송된 것 같은데 난 출구 인근에 떨어졌고, 능력 자체도 내 특기랑 잘 맞고, 뭣보다 이런 쓸 만한 검도 얻었으니까.”
모든 방면에서 유리하게 시작한 만큼 그에겐 여유라는 게 있었다. 그것은 겉으로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확실히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다른 일행은 없으신 건가요?”
“아, 일행이야 있긴 있었지. 중간에 몇몇은 죽었고 몇몇은 헤어졌지만.”
숨을 집어삼키는 다윤의 말에 지섭이 안타까운 목소리를 내뱉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 당시엔 모두가 미숙했으니까.”
자신의 앞에서 사람이 죽었다는 기억을 가지고 있음에도 상당히 담담한 표정이었다. 마치 이런 일에 익숙한 것처럼.
그런 그의 굳센 모습을 보고 확신을 얻은 것일까? 태산과 다윤이 서로 눈빛을 교환하며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그럼 지섭 씨는 지금 혼자서만...계신 거죠?”
“어, 그렇지. 아군이라 할 녀석이 없는 만큼 이 근처만 가볍게 돌아보며 간만 보는 정도지만.”
“그럼 저희가 지섭씨와 같이 다닌다면, 좀 더 깊숙한 곳까지 함께 가주실 수 있는 겁니까?”
지섭이 태산과 다윤의 말에 말 없이 턱을 괴기 시작했다.
“소수 쪽이구나? 두 사람.”
이내 감탄을 내뱉듯 손뼉을 치며 태산과 다윤을 쳐다보았다.
“어떤 이유로 들어가려는 거야?”
“위험에 빠진 사람들을 구하고 싶습니다.”
“좋아, 합류하지.”
“....예?”
“그렇게 간단히요?”
놀라움을 토로하는 둘을 보며 지섭이 큭큭 웃음을 터트렸다.
“별로 놀랄 거 없어. 아까 말했잖아? 난 내 특기를 살릴 수 있는 이 곳에 있는 게 바깥에서의 생활보다 훨씬 좋아서 남아있는 거라고. 그런 ‘별 거 아닌 이유’로 누군가를 구하겠다는 정의로운 마음을 가진 젊은이들을 도울 수 있다면, 그보다 좋은 일은 없겠지.”
“정말, 그렇다고 한다면.......”
지섭의 말에 태산과 다윤이 만족스러운 웃음을 그리며 서로를 마주했다.
“좋은 사람이네요.”
“정말 다행이에요.”
정겹게 마주한 채 안도감을 느끼는 두 사람을 보며 지섭이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뭔가 눈을 자주 마주보는데, 진짜 두 사람 사귀는 사이 아니야?”
“아, 아닙니다!”
“지금은 아니에요!”
“......지금은?”
깜짝 놀라며 변명하듯 말하는 태산과 다윤, 그런 두 사람의 말에서 드러난 허점을 감지한 지섭이 음흉한 웃음을 짓기 시작했다.
“오오~ 이것 봐라? 하긴, 이런 어두운 공간 내에 지금껏 둘이 다니는 건데 아무 일도 없을 리는 만무할 테고, 역시........”
“지섭씨가 생각하는 그런 일은 없었습니다!”
“그리고, 처음부터 단 둘이 있던 건 아니었어요. 원래는 일행이 한 분 있었는데........”
“끼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대화를 나누고 있던 세 사람의 귀에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은 통로 쪽. 작지만 들려오는 목소리가 점차 커져가고 있다.
“죽어죽어죽어죽어죽어죽어죽어!! 죽는다 갸아아아아아아아악!”
“좀 닥치라고요!! 왜 그렇게 시끄러워서 안달이 난 건데요!?”
“으어어...내 사랑하는 딸에게 안부를........”
“당신은 좀 움직여 이 돼지야!”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은 통로 쪽. 작지만 들려오는 목소리가 점차 커져가고 있다.
사람의 목소리, 그것도 굉장히 다급함이 서려있다. 그 목소리를 듣고 있던 다윤과 태산의 얼굴이 서서히 경직되어가기 시작했다.
“위험해 보이는데 바로 구하러 가야 하지 않을까요?”
“걱정 마. 여긴 몬스터들이 들어오지 않으니까. 문제가 있다면 저 쪽이 여기까지 올 수 있느냐 없느냐인데.........”
-털썩.
끝내 통로 쪽에서 세 명의 그림자가 뛰쳐나온 것을 본 지섭이 어깨를 으쓱하며 콧방귀를 터트렸다.
“다행히 도착은 한 것 같네. 그것도 목숨은 무사한 채로.”
“...상당히 지쳐 보이는데요.”
지섭의 여유로운 말에 다윤이 걱정스런 표정을 짓기 시작했다. 정작 여기까지 도주하는 것에만 몰두한 세 사람은 심신이 지친 듯 보였지만.
“으헤흐....하아....윽, 더, 더 이상은 못 뛰어...이대로 있으면 내 영혼이 승천해 버려엇........”
멜빵에 체크무늬라는 천진한 느낌의 여성이 눈을 뒤집은 채 바닥에 몸을 고꾸라트렸다.
마호란이라는 이름을 가진 여인은 지금까지의 강행군으로 인해 체력이 반쯤 고갈되어 있는 상태였다.
“부처님...저를 천국으로 데려가 주시옵소서, 할렐루야..어어어.......”
양복을 걸치고 있는 비만의 남성은 땀으로 젖은 몸을 뉘운 채 머리를 양 손으로 포개고 있었다. 서창석이라는 이름을 가진 남자는 던전에서의 기나긴 시간으로 인해 공포를 견디지 못한 채 정신이 피폐해진 상태였다.
“...내 장담하는데, 댁들이 천국에 갈 일은 없을 거야”
그런 공포에 질려있는 남자를 쏘아보는 것은 타원형의 안경을 쓴 고지식한 인상의 여성. 안희선은 유일하게 두 사람과는 달리 무너져가기 직전의 정신과 몸을 다잡아가고 있었다.
희선은 방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뒤로 시선을 주어 자신들이 지나온 길목을 살펴보았다. 칠흑 속에는 그 어떤 괴물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뒤에 쫓아오는 놈들은 따돌렸나. 다행이...으, 젠장!!!”
곧 통로로 시선을 거둔 희선이 방쪽을 쳐다보고는 깜짝 놀라며 숨을 집어 삼켰다. 지섭과 태산, 다윤 일행을 직시하게 된 것이다.
“거기 세 사람! 빨리 여기로 와요! 이 공간에선 4명이 뭉쳐있으면 바로 몬스터들이 몰려오니까 최대한 교환할 것만 하고 빨리 흩어지자고요!”
“...응?"
지섭이 얼떨떨한 표정을 지으며 태산과 다윤을 돌아보았다.
두 사람과 마찬가지로 지섭도 던전에서의 법칙을 알아차린 듯 보였지만, 출구방에서 그런 것을 신경을 쓴다는 건 그로썬 이상하게 받아들여질 일이었다.
모르기 때문에 그런 거겠지. 생각하며 도검을 어깨에 기댄 채 여인을 향해 넌지시 말을 건네었다.
“아가씨, 걱정하지 마. 여기에 몬스터 못 들어오니까.”
“...예?”
그에 의아함을 느끼는 여인을 향해 지섭은 밖으로 나가는 하얀 빛의 통로를 향해 엄지손가락을 슬며시 가리켰다.
“여긴 출구방이라고 하는 곳인데, 유일하게 던전 내에서 몬스터들이 출입할 수 없는 곳이지.”
“출구방...?”
희선이 반쯤 안경이 엇나갔다는 것도 자각하지 못한 채 지섭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바닥에 쓰러져 있던 호란과 창석도 마찬가지.
“축하해 세 사람. 골인점에 도착했구나?”
“골인점...출구.......”
하얀 빛이 새어 나오는 출구를 멍하니 주시하던 호란이 머지않아 입을 크게 벌리며 양 손을 위로 뻗기 시작했다.
“으아아아! 하하하! 살았다! 살았어! 살았다아아아! 출구에 도착했다! 도착, 도차아아악! 도차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데챠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시끄러워요, 좀 조용히 웃어요.”
“출구에 도착했는데 뭐 어때요!!! 이제 살았다! 살았다아아아! 살았다아아아아! 나는 살아있다! 듣고 있냐!? 나는 살아있다고 이 구역질나는 괴물 놈들아!! 끼야아하하하하하하!!!”
“...에휴.”
방금 전까지 지쳐 쓰러져 있던 호란을 보며 희선이 한숨과 함께 얼굴을 움켜쥐었다.
평소라면 주변 몬스터들의 어그로를 끌어 모으니 옆구리라도 걷어차 줬겠지만, 출구를 앞에 둔 상황인 만큼 생존에 대한 기쁨을 막아내고 싶진 않았다.
호란이 자신의 인벤토리에서 기타를 꺼내들기 전까진 그렇게 생각했었다.
“이 기쁜 마음을 담아 마음이 따뜻해지는 노래를 들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띠리링~
감미로운 기타의 선율이 울려퍼지고 곧 호란의 입에서 힘껏 외침이 터져 나왔다.
“월요일 좋아~ 최고로 좋아~ 오 좋아~ 월요일 좋아~ 자 같이 부릅시다 희선씨~!”
-퍼억!
구둣발로 호란의 옆구리를 걷어차 바닥에 쓰러트렸다.
"으, 배...배가...배가...진통이...아기가 나오려 해요........“
“정신도 말짱한 여자가 왜 그런 노래만 부르는 건데!?”
“이 노래가 어때서요! 듣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노래잖아요!!”
“그건 댁 능력 때문이잖아!”
호란의 능력은 자신의 노래를 들은 자의 마음을 안정시켜 정신적인 부담을 줄여주는 능력이다. 아무리 엿 같은 노래를 불러도 능력이 적용되면 강제적으로 기분이 좋아질 수밖에 없다.
“목소리도 좋은 주제에 뭐 그런 이상한 노래만 부르는 거예요? 부를 거면 제대로 된 노래 좀 부르세요. 제발...부탁 할 테니까.”
“네네, 알았어요. 그럼 이번엔 제대로 된 노래를 부를게요. 이번에 부를 노래는 동물원에서 암컷 판다가 새끼를 낳는 것을 보고 있는 옆 우리의 불곰의 시점을 상상하며 만든 저의 자작곡입니다. 제목은 ‘엄마 판다는 새끼가 있데요!’. 자, 하나 둘 셋!”
-철썩.
희선이 전력으로 호란의 뺨을 후려쳤다.
그녀의 폭행이 더욱 격해지는 것을 본 창석이 다급히 두 사람을 말리기 시작했다.
“희, 희선 양. 진정하게...출구도 발견하지 않았나?”
“댁도 잘한 거 하나도 없어! 내가 댁 때문에 지금까지 얼마나 고생했는 줄 알아!? 몸뚱이도 크고 굼뜬 주제에 다치긴 제일 많이 다치고! 내 능력이 치유가 아니었다면 당신 수 백 번은 더 죽었을 걸!?”
“그래요! 희선 씨도 저한테 감사해야 한다고요! 제 능력이 아니었다면 희선 씨도 정신이 나갔을 지도 모르는....갸아아악!! 살려주세여!! 이 마귀가 절 죽이려 들어요!! 갸아아아악!!”
희선에게 잡혀 비명을 질러대는 호란과 그런 두 사람을 어쩔 줄 몰라하며 쳐다보는 창석.
세 사람을 쳐다보고 있던 지섭이 저도 모르게 코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이 던전에서 저렇게 유쾌하게 날뛰는 사람들은 처음 보네. 다들 우중충하거나 비장하거나 겁에 질려있는 게 보통인데.......”
도망만 치던 나약한 생존자...마냥 그렇게만 보았던 세 사람의 모습에서부터 지섭은 정겨움이란 걸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이제껏 긍정적인 마인드로 던전을 돌아다니던 그조차 쉽게 가지지 못했던 감정이었다. 그들로부터 무언가를 깨달은 것일까?
“...사람을 구하고 싶다고 했지?”
슬쩍 지섭이 태산과 다윤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그걸 이루기 위해 필요한 건 힘이나 자원이 아니야. 필요하긴 하겠지만 그 이상으로 갖춰야 할 건 인력이지.”
“인력...이라면, 저희와 같은 생존자들 말인가요?”
“출구에 있는 동안 외지에서 사람들이 들어오는 걸 본 적이 없거든. 아마 내부에서 외부로 들어오는 게 차단되있거나 뭐 그런 거겠지. 바깥으로부터 도움을 요청하는 건 실질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거야."
일방적으로 통행이 금지되어 있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지만, 이미 던전이란 공간에 휩쓸린 상황인 만큼 무슨 일이 일어나도 쉽게 수긍할 수 있었다.
“설마 우리 세 명으로 이 던전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들을 구해내겠다, 그렇게 주장할 생각은 아니겠지? 아무리 나라도 그런 말도 안 되는 이상에 동참해줄 순 없어.”
어깨를 도검의 칼등으로 툭툭 두들기는 지섭이 입가에 씨익 웃음을 그렸다.
“그러니 이곳에서 머무르면서 한 번 이곳을 들리게 되는 모든 사람들에게 제안을 해보자고. 혹시 모르잖아? 이제껏 삶을 갈구하기만 했던 자들이, 어느 한 순간 이 험난한 공간 속에서 우리들의 이상에 동참해주는 조력자가 될 지도....하물며 저런 유쾌한 녀석들이 함께 해준다면 훨씬 더 힘이 되어주겠지.”
지섭의 말은 분명 타당한 것이었다. 이 던전에서 생존해온 긴 시간 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비참한 꼴을 당하고 쓰러졌는지를 봐오지 않았던가?
자신들의 이상에 동참해주고 등을 맡길 수 있는 동료...그들의 수가 많아진다면 분명 이 던전에서의 활동이 더욱 수월해질 것이다.
‘그 사람은 우리들을 도와줄까.’
태산과 다윤은 한때 자신들에게 친절히 도움을 주었던 인물에 대해서 떠올렸다.
한강수, 그가 지니고 있는 힘과 품고 있는 여유는 분명 자신들의 이상에 큰 힘을 심어줄 것이다.
그가 정말로 그들이 지니고 있는 ‘사소한 이상’에 동참해준다면 말이다.
========== 작품 후기 ==========
이 소설은 부모님의 안부 따위 묻지 않는 소설입니다. 물론 월요일이 좋다는 호란양은 맞아도 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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