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화. 지워지지 않는 상처 -->
멀리 있었을 때엔 부각되지 않았던 것들이 가까이서 마주한 순간 선명히 눈에 들어왔다.
짧게 길러진 머리카락에 엮여있던 피들은 세정제에 의해 지워져 특유의 적갈색을 띄고 있다. 감정이 제대로 드러나지 않는 무뚝뚝한 얼굴엔 적잖은 불안함이 깃들어 있었다.
단지 남성의 앞에서 헐벗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니었다.
“제, 몸...어떻게 생각하세요?”
천천히, 자신의 손을 맞대고 있던 부분을 풀어헤쳤다. 가슴을 포개고 있는 브래지어 밑으로 보이는 큼직한 상처 자국이 하나 둘 셋 넷....
그것이 열을 넘어섰다는 것을 자각했을 무렵 강수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배를 가득 채우고 있다시피 한 그것은 그 누구라도 혐오스럽게 여길 만한 장면이었다.
“...흉하죠?”
그녀는 그 자국을 드러낸 채 강수를 향해 말하고 있었다.
떨림을 최대한 억제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감정을 모두 숨기지는 못한다.
소연은 지금 자신의 무언가를 밝힌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사고라도 당한 거야?”
“사람이 저지른 거예요.”
사고라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흉이 사고가 아닌 사람에 의한 것.
“우발적이긴, 했지만...사고는 아니었어요.”
“........”
그 이상 물어보는 것도 가능하지만, 그녀의 표정이 썩 좋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끝내 그녀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왜 이런 걸보여주는 거야?”
“강수 씨에게, 들어야 할 얘기가 있으니까요.”
소연이 다시 강수와 눈을 마주쳐왔다. 당장이라도 돌아갈 것 같지만, 꿋꿋이 고개를 세우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너무나도 위태로워 보였다.
“...비록, 지금은 그걸 들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해도, 그 이야기를 듣게 되었을 때를 대비해 신뢰를 얻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신뢰라는 말에 강수의 눈살이 찌푸러졌다.
그녀가 어째서 이런 말을 해오는지를 깨달은 것이다.
[알고 싶다면 설명해줄 수 있어. 내가 누구고, 이 던전이란 공간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는지, 하나도 빠짐 없이 전부 다........]
[...정말로 알고 싶어?]
“........”
강수의 시선이 잠시 소연의 어깨 부근에서 멈춰졌다.
속옷의 끈이 매어져 있는 그곳엔 아직 지워지지 않은 핏자국이 남아있었다.
“딱히 그런 걸 들으려고 자기 비밀을 밝힐 필요는 없어.”
듣지 않아도 그녀가 어느 정도의 용기를 지닌 채 자신의 앞으로 다가왔는지 정도는 가늠할 수 있었다.
필시 그것은 그녀의 삶에서 가장 치명적으로 다가오는 것 중 하나일 것이다.
“내가 하는 말이 만족스럽지 못하면 비밀을 밝힌 아가씨만 괴로워질 뿐이야. 하물며 내가 들려주는 이야기가 더 해를 끼칠 수도 있고.”
“그래도, 이제까지 절 도와주셨으니까.”
연이어 만류를 가하는 강수의 말이 미처 끝나기 전 소연이 먼저 입을 열었다.
“신뢰할 수 있는 사람과, 같이 다녀야 한다고...그렇게 말씀하셨죠?”
자신이 하는 말을 되내인 소연이 불안을 떨쳐내며 완강한 의지를 표했다.
“저는 강수씨에게, 신뢰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이제까지 도움을 받은 만큼....”
소연의 말을 들은 강수가 곤란하다는 듯 혀를 차며 머리를 움켜쥐었다.
이런 글러먹은 녀석에게서 신뢰를 사고 싶다니, 안일하다 생각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지만 소연의 꿋꿋한 시선은 자신에게서 돌아가지 않은 채 고정되어 있었다.
“손목에 있는 자국은 배에 있는 거랑 관계있는 거야?”
소연이 뭔가를 말하려는 듯 우물쭈물했지만, 끝내 그것은 막혀진 목에 침식되어 안쪽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 감각을 억누르려는 듯 계속해서 입을 여는 소연. 강수는 그런 소연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됐어, 그냥 이 대화는 여기서 끝내자."
"네? 하지만......."
“아가씨가 내 얘기를 들으려는 건 어디까지나 신뢰를 사기 위해서잖아. 그걸 위해서 무리를 하면 도리어 아가씨만 더 힘들어져. 타인에게 신뢰를 사지 못할 지언정 자기 자신에게서 신뢰를 잃어버리면 안 되는 거잖아?”
"........"
“더군다나 지금은 많은 일을 겪어서 혼란스러운 상태잖아. 정신적인 부담이 크게 쌓이게 하면 이후의 여정이 곤란해져. 훗날을 위해 대비하는 건 좋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앞으로의 만전을 기하는 거야.”
“...그렇겠죠.”
석연치 않지만, 끝내 강수의 말을 수긍한 소연이 고개를 숙였다.
“어떻게든, 적응해야 한다고 생각해서...강수 씨의 이야기를...들으려고 하다보니, 조급해지고 말았네요, 미안해요.”
“...이 쪽이야 말로 괜한 소리로 아가씨를 자극해서 미안해.”
“........”
서로간의 주고 받은 사과 끝에도, 그녀는 아직 미련을 져버리지 못한 듯 자신의 양 손을 움켜쥐고 있었다.
“계속 벗고 있으면 곤란하지?”
강수는 바닥에 떨어져 있는 소연의 옷을 주워 건네주고 자신의 인벤토리에서 식료가 들어있는 상자를 꺼내들었다.
“일단 밥부터 먹자. 여기에 들어온 지도 꽤 됐으니까.”
“........”
옷을 받아든 소연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갑작스럽게 벌어진 트러블은 소연이 굳게 머금었던 각오와는 달리 너무나도 조용히 끝이 나고 말았다.
만약 그가 자신의 상처를 보고 당황하는 티를 크게 내었다면 얘기를 좀 더 이끌어갈 수 있었을까?
그렇지 못했다는 것은, 분명 그 역시도 지울 수 없는 기억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자신이 안고 있는 기억보다도 훨씬 더 흉측한 기억을.
*****
시간이 흐르고 흘러, 옷의 수선작업과 몸의 세안을 모두 끝마친 강수는 소연과 함께 상자에서 나온 음식을 이용해 공복을 채웠다.
어디까지나 식수와 통조림 정도에 불과한 식사였지만, 단순히 배만을 채우는 용도로는 부족함이 없었다.
소연 역시도 말 없이 까놓은 통조림의 내용물을 집어 먹을 뿐, 별 다른 대화는 하지 않았다. 이전에 얘기를 신경쓰는 듯 시선을 몇 번 주긴 했지만, 고작 그것으로 그칠 뿐이었다.
끝내 식사를 마쳤지만 수정구슬의 제한시간이 다 되기 까지엔 상당한 시간이 남아있었다. 강수는 그 시간 동안 소연에게 수면을 청하기를 제안했다.
던전 내부에서는 시계를 사용할 수 없고, 천장은 매번 일정한 색을 띄고 있기 때문에 대략적인 시간도 가늠할 수 없었다.
시차 적응이 힘들겠지만, 언제 잠을 잘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만큼 여유가 있을 때에 부족한 수면을 보충하는 편이 좋다.
편하지 않은 잠자리임에도 피로가 쌓였는지, 그녀는 벽이 기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수면상태에 접어들게 되었다.
강수는 그런 소연에게서 멀찍이 떨어진 채 담배를 태웠다.
그의 경우에는 재생력이라는 능력으로 인해 체력이나 정신적인 스트레스의 부담이 덜어지는 편이었다. 생존이라는 이점에선 뛰어나지만, 동행자가 잠을 자고 있으면 그 곁을 지키고 있는 것밖에 할 일이 없었다.
과거로 돌아오기 전에는 고독함이란 익숙한 일이었지만, 지금은 언젠가 자신의 고독함을 깨어줄 동행자가 있었다.
그것이 그에겐 심히 우습게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고독함을 풀어줄 대상이 자신을 죽이려 들었던 숙적이었으니까.
“정말로, 내가 과거로 돌아오긴 했나보네.”
숙적에게 의지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하며 코웃음을 터트렸다.
매 순간마다 지금이 꿈이 아닐까 생각을 하고 있다.
과거로 돌아오다니, 아무리 세상이 격변했다 한들 그런 어처구니 없는 일이 자신에게 일어난다는 것은 실감나지 않는 일이었으니까.
꿈이었다면 차라리 깨지 말아줬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했다. 이 망상으로나마 꿈꾸던 것을 이루고 싶은 마음이 있었으니까.
꿈에서 깨어나봐야, 결국 다시 세상을 멸망시키려드는 스스로만이 보이게 될 것이다.
‘어쩌면 이런 꿈을 꾸는 시점에서 세계가 멸망한 걸지도 모르겠지만.’
이 모든 것이 멸망한 세계에서 죽어가는 자신이 마주하는 환상이라면...그것도 딱히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문득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적어도 죽어가는 순간만큼은 기회를 쫓는 기분을 만끽할 수 있으니까. 설령 그것이 비참한 결과로 다가설지라도.......
“........”
말 없이 시선을 소연에게로 향해졌다.
확실히 몸 만큼은 매력적인 여자이긴 하지만, 무방비하게 잠을 청하고 있다 해도 손을 댈 생각은 전혀 없었다.
이제까지 굴러온 세월이 얼마인데 성욕에 휘둘린단 말인가? 하물며 아내가 살아있는 시간대로 돌아왔는데, 아무리 그녀의 시선이 미치지 않는 곳이라 해도 다른 여자와 몸을 섞는 둥의 배신을 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지금 그가 신경 쓰고 있는 것은 '여성으로써의 매력'이 아닌, 현재 시간대에 그녀가 품고 있는 상처에 관한 것이었다.
‘마냥 순탄한 삶을 살아온 건 아니라는 건가.’
그 역시도 많은 사건을 겪고 견뎌왔지만, 그가 겪은 일이란 어디까지나 재앙이 들이닥치고 난 후에 있었던 이야기다. 소연처럼 재앙이 들이닥치기 전에는 그저 평범한 '불행'정도만을 느끼며 살아왔을 뿐.
상처를 본 것 만으로도, 그녀가 이제까지 겪어온 불행이 가벼운 것이 아니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었다.
그 순간은 분명 괴롭고 무서운 것이었겠지만, 그 위험이 있었기에 그녀가 이런 상황에서 미약하게나마 침착함을 갖출 수 있었언 것일 지도 모른다.
마냥 그것만을 따진다면 상처가 새겨진 것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겠지만...아무리 상처가 경각심을 심어준다 하더라도, 그에 따른 리스크는 존재하기 마련이다.
슬며시 자신의 손에 쥐어진 스마트폰으로 시선을 주었다.
그의 것이 아닌, 소연이 수면상태에 접어들기 전 양해를 구해 잠시 빌려간 물건이었다.
화면으로 살펴보는 것은 그녀의 정보창, 그 중에서도 상태가 표기된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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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태이상: 수면, 정신이상(트라우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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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앞에서 선혈이 퍼져나가는 풍경이 나타났을 때부터 나타나게 된 정신이상 트라우마. 그것이 생겨난 이유는 분명 자신이 저지른 일로 인해 과거에 겪었던 악몽이 떠올랐기 때문일 것이다.
"...역시, 재능이 있다 해도 아직은 애송이인가."
소연의 정보창을 보고 있던 강수의 입에서 희뿌연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지워지지 않는 상처란 위기에 대한 경각심을 심어주는 계기가 되는 반면, 언제 어느 때에 터져도 이상하지 않은 위험을 동반하기 마련이다.
상처가 생겨진 곳에 또 다른 상처가 생길 경우, 그것은 이전에 생겼던 상처보다도 훨씬 더 치명적으로 다가오는 법이니까.
그 상처를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이는 방법이 수많은 상처를 몸에 새겨 익숙해지는 것임을, 강수는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지금은 더 지켜보는 수밖에 없나.”
스마트폰의 정보창에서 시선을 거둔 강수가 다시 소연이 있는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지금은 미숙하지만, 자신이 봐온 미래대로 진행이 된다면 그녀는 필시 그 누구보다도 뛰어난 강자로 성장을 하게 될 테지만, 적어도 이전에 보여주었던 모습에서 차마 그런 미래를 상상할 수 없었다.
아무리 끔찍한 상처를 받더라도 냉정하게 자신을 죽이려고 다가선 괴물같은 존재의 모습이, 지금의 그녀에게선 전혀 연상되지 않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던부추 부탁드려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