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화. 지워지지 않는 상처 -->
“옷, 벗는...건가요?”
“그래야 처리할 수 있으니까.”
피 묻은 옷을 벗자 그의 맨몸이 드러났다.
이제까지의 고된 전투 속에서도 상처 하나 없었지만, 군데군데에 상당한 양의 피가 묻어나 있엇다.
"...웃."
그에게서 다급히 고개를 돌려 자신의 몸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가 뒤를 봐주었기에 전투는 원활히 이어갔지만, 이제까지 적들의 공격을 맞은 적은 거의 없엇던 만큼, 튀어있는 피를 제외하곤 손상된 부분은 그리 많지 않았다.
긴팔에 포개어져 있는 조끼 위로 부각될 정도로 큰 몸. 아무리 경험이 없다 하더라도, 그것이 남자에게 어떤 식으로 보일지는 알고 있다.
그가 자신에게 그런 마음을 품는 것은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애초에 그의 입장에서 따진다면 혼자서 돌아다녀도 되는 걸 성가신 짐을 안고 가는 것이나 다를 바 없으니 언제 이런 제안을 해와도 이상하지 않았다.
“정말로.......”
막 뭐라 말을 하려다 끝내 입이 다물어졌다.
“...알겠, 어요.”
끝내 소연이 낮은 목소리로 대답을 하고, 자신의 옷자락을 향해 천천히 손을 뻗었다.
조끼의 끝을 잡고 있는 손가락이 크게 떨려왔다. 그것을 불안한 눈으로 보고 있던 소연이 끝내 그것을 벗어 바닥에 개어둔 채 조심히 내려놓았다.
다시 강수가 있는 쪽으로 시선을 옮겨 보았다. 그는 소연의 보건 말건 신경 쓰지 않고 바지의 벨트를 풀고 있었다.
한 순간 낯이 간지러워지는 것을 느끼고 얼굴을 돌렸다.
‘정말로, 하는 거지?’
상의를 벗으려는 그녀의 손이 잠시 멈춰졌다.
긴장이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애초에 자신은 경험도 없으니까. 하물며 자신의 몸을 다른 사람에게 보여준다는 것도 좋게만 볼 수는 없었다.
어쩌면 혐오를 느낄 지도 모른다고, 그렇게 생각을 했지만 이런 상황에서 그런 ‘사소한’걸 따지는 것은 무의미할 것이다.
-스르륵.
상의를 벗고, 벗어둔 옷을 조심스레 개어 바닥에 내려두었다. 속옷에 감싸여진 맨살이 드러났을 때 소연은 자신의 몸을 부둥키며 몸을 낮추었다.
다른 사람의 시선이 있는 곳에서 스스로 옷을 벗은 것은 처음이다. 본격적으로 시작하면 지금 느끼고 있는 부담감이 얼마나 더 심해질까?
긴장에 침을 삼키며 다시 강수를 향해 조심스럽게 물었다.
“속옷은...벗어야 하나요?”
“속옷?”
곧 반라상태인 강수가 소연이 있는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갑작스러운 강수의 행동에 놀란 소연이 몸을 크게 떨었다.
몸을 웅크리고 있는 건 실례되는 행동일까, 손을 풀어야 한다고 생각을 함에도 차마 손에 들어간 힘이 풀리지 않고 있었다.
그런 자신의 동요를 아는지 모르는지, 강수는 멀뚱히 소연을 쳐다보고 있을 뿐.
“딱히 안 벗어도 돼. 속옷은.”
끝내 그 말을 내뱉는 걸 마지막으로 강수의 시선이 소연에게서 거두어지고, 자신의 스마트폰에 손가락을 올린 그가 화면에 시선을 집중시켰다.
“......네, 알겠어요.”
강수의 말을 들은 소연이 끝내 고개를 끄덕이며 마저 옷을 벗어갔다. 청바지를 벗고 개어두니 그녀 또한 강수와 마찬가지로 반라의 꼴이 되었다.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은 어두운 공간에 헐벗은 남성과 여성이 존재하고 있다.
그 분위기를 읽고 있자니 몸의 체온이 점차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이제까지 이런 경험이 전무했던 그녀에겐 참을 수 없는 무게감...하지만 이미 시작된 것을 그르칠 수는 없었다.
“저, 경험이 없어서...서툴 지도 몰라요.”
“걱정하지 마. 이 쪽이 알아서 할 테니까.”
그는 무덤덤히 말하며 자신의 인벤토리에서 무언가를 꺼내 바닥에 내려두었다.
“옷만 이 쪽으로 던지고 거기 잠시만 가만히 있어봐.”
“......네?”
강수의 말에 소연이 의아한 숨을 내뱉었다. 그 반응이 오히려 이상하다는 듯 강수가 다시 소연이 있는 쪽으로 고개를 들어올렸다.
그 시선을 느끼고 우물쭈물한 소연이 양 손을 허공에 휘저었다.
“아, 알았어요. 드릴....게요. 던지면...되는 거죠?”
“너무 걱정하지 마. 이쪽으로 건네주면 말끔히 고쳐줄 테니까.”
“....네?”
의아함을 느낀 소연의 시선이 슬며시 그의 주변으로 향해졌다. 그가 상자에서 꺼내어 바닥에 내려놓은 것은 이전에 퀘스트를 완료하고 나타난 은색의 상자에서 나온 물품.
어떤 용도로 쓰는 지 그에게 자세한 설명은 듣지 못했지만, 실뭉치와 바늘이 뭉쳐져 있는 그것은 ‘재봉도구’와 매우 흡사하게 보였다.
“혹시, 제 옷을...고쳐주시려고, 옷을 벗으라 하신 건가요?”
“그거 말고 옷을 벗으라고 하는 이유가 뭐가 있는데?”
당연한 것을 묻냐는 듯 강수가 소연을 향해 말했다.
한 순간 몸에서 느껴지는 떨림이 멎어버리고, 긴장으로 인해 몸 곳곳에 들어간 힘이 빠져버렸다.
머릿속에 냉정이 찾아왔을 무렵 소연의 얼굴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아가씨 어디 아파? 포션이라도........”
“괘, 괜찮아요...!”
소연이 당황하며 그에게 옷을 던져준 후 다급히 자리에 주저앉아 몸을 웅크렸다.
옷을 벗으라는 것은 그저 자신의 손상되고 더럽혀진 옷을 수선해주기 위함.
그 선의를 왜곡시켜 받아 들이는 한심한 짓을 했다는 걸 뒤늦게 자각하고 말았다.
‘오해, 해버렸구나. 나........’
슬며시 팔에 파묻은 얼굴을 들어올려 강수가 있는 쪽으로 눈을 향했다. 강수는 자신에게 신경도 쓰지 않고, 자신의 찢어진 옷에 수선도구를 가져다 대며 옷을 고치고 있었다.
바늘과 실이라는 형태를 지니고 있지만, 직접적으로 옷을 고치는 것 따윈 하지 않았다. 이전에 붕대가 감기고 증발하듯 사라졌을 때처럼, 실을 매달은 바늘을 옷에 찌르는 것만으로 찢어진 부분이 회복되어갔다.
피가 묻은 곳도 손에 쥐고 있는 비누 비슷한 걸로 슥 문지르는 것만으로 말끔히 사라져갔다.
그것을 멍하니 지켜보고 있던 것도 잠시.
“내가 이상한 짓이라도 저지를까 생각했던 거야?”
강수의 이어지는 말에 소연이 화들짝 놀라며 둥그렇게 뜨여진 눈으로 강수를 쳐다보았다.
“그, 그게........”
“...과묵하긴 해도 아가씨도 여자였지.”
대답하려는 소연을 보고는 강수가 쓴웃음을 지었다. 마치 잊고 있었던 것을 상기한 듯 한 표정이었다.
“미안하게 됐어, 남이랑 같이 다녀본 경험이 얼마 없다보니까 배려를 못 했네.”
슬며시 수선해둔 그녀의 옷과, 세정제 하나를 바닥에 내려둔 후 강수가 천천히 자리에서 거리를 벌렸다.
“여기 옷이랑 세정제 둘 테니까, 이 쪽으로 와서 몸 씻고 옷 입어둬.”
“정말로, 괜찮은 건가요?”
“내가 그렇게 못 미더워 보였나, 딱히 불결한 시선으로 아가씨를 쳐다본 기억은 없는데.”
강수의 말에 소연이 몸을 움츠렸지만, 머지않아 그런 의도로 내뱉은 말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이런 상황이라도 외도를 저지르는 건 내 아내에 대한 배반이니까. 정말로 어쩔 수 없는 때를 제외하면 이성이랑 몸을 섞고 싶진 않아.”
강수가 조용히 입에 담배를 물었다.
“그리고 충고를 좀 하자면...던전에선 가급적 믿을 수 있는 녀석을 제외하곤 신뢰를 가지는 건 삼가는 게 좋을 거야. 여긴 경찰도, 군대도 간섭할 수 없는 곳이고, 증거라고 남을 것도 전혀 없으니까. 여자의 몸이라면 특히 위험해질 수밖에 없지. 내가 그런다는 건 아니지만.”
담배 끝에 불을 붙기 전, 그녀에게서 등을 돌린 강수가 벗어두었던 옷을 하나씩 걸쳐갔다.
등을 돌린 채 있는 것은 분명 자신을 배려하기에 그런 것이리라.
‘믿을 수 있는 사람........’
단호한 의지와 함께 이어지는 충고를 들은 소연이 끝내 천천히 자신의 옷이 있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전과 달리 말끔히 정리된 옷은 처음 던전에 들어왔을 때와 별반 차이가 없어 보였다.
그 속에 존재하는 것은 이전에 옷에 묻어있던 얼룩들을 닦아내었을 때 사용했던 비누. 크기가 좀 줄어들은 것은 그가 이전이 이것을 통해 자신의 몸에 묻어난 피를 지웠기 때문일 것이다.
비누를 움켜쥐고 그가 했던 것처럼 피묻은 부분에 쓸어 넘기는 것도 잠시. 소연은 곧 자신의 손목 부근에 시선을 주고 비누를 쥐고 있는 손을 허공에 멈춰버렸다.
'...아직 눈치 못 챘겠지.'
손목 부근에 묻어난 피를 슬며시 비누로 닦아낸 소연이 다시 강수가 있는 쪽을 힐끔 쳐다보았다.
비록 만난 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이런 상황인 만큼 자신을 데리고 다녀주는 그에게 소연은 적잖은 감사를 느끼고 있었다.
아직 많은 것을 알지 못하지만 적어도 그가 자신에게 피해가 될 만한 짓을 저지르지 않으리란 것도.
‘하지만 앞으로는...?’
자신의 몸에 묻어난 피를 세정제를 통해 씻어낸 그녀의 손끝이 어깨 뒷부분에서 멈춰졌다.
그가 어떤 과거를 지니고 있는지 전혀 모른다. 어째서 이 던전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지, 아무리 미쳐있다 하더라도 사람을 죽이면서도 그렇게 덤덤히 있을 수 있었던 것인지.......
이제까지의 얼버무림에서도 적잖은 이상은 감지했지만, 그는 자신에게 사실을 가르쳐주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그에게 그것을 물으려 하지 않는 것이다.
[정말로 알고 싶어?]
그때 자신을 향해 내뱉었던 그 말의 무게를 감당할 자신이 없었으니까.
얼마나 이곳에 더 있어야 할까? 중간에 그와 헤어질지 몰라도, 적어도 이 던전 내에 있는 동안은 그와 붙어다니고 싶은 마음이 있는 소연이었다.
그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분명 그에 대한 존재도 마냥 가벼이 여기진 못할 것이다.
하지만 정작 그에 대해서 알지 못한다면, 분명 자신이 그에게 지니고 있는 신뢰는 ‘불안정한 상태’를 계속 유지할 것이다.
그 신뢰를 굳히고자 한다면 그에게서 얘기를 들어야 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했을 때, 소연은 처음으로 그에게 ‘자신에 대한 얘기’를 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강수 씨, 저...부탁이 하나 있어요.”
“뭔데?”
강수가 등을 돌린 채 소연의 말에 대답했다. 자신이 흑심을 품고 있지 않다는 것을 고수하려는 듯 그의 시선은 일절 소연에게로 향해지지 않았다.
그 시선이 돌아간 것은 소연의 입에서 어처구니 없는 말이 내뱉어졌을 때였다.
“제 몸...봐주실 수 있나요?”
“.......”
아직 반도 태워지지 않은 담배가 그의 입에서 떨어져 바닥으로 추락했다.
바닥에 떨어진 담배를 보고 혀를 차는 것도 잠시. 곧 강수는 뒤에서부터 자신의 몸을 포개어오는 그녀의 손을 직시하며 몸을 움츠렸다.
뒤에서 그녀가 끌어안아온 것이었다. 옷을 입고 있었지만, 몸의 밀착된 부위에서 느껴지는 감촉은 선명히 전해져오고 있었다.
“잠깐이면 되요. 아주 잠깐만........”
“........”
나지막한 목소리와 함께 강수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확실히 자신이 오해의 소지가 있는 발언을 했지만, 이런 식으로 그녀가 적극적으로 다가오리라곤 생각지 못했다.
단순히 몸을 맞대자는 의미일지도 모르지만, 목소리의 떨림은 예사롭지 않은 것이었다.
"대체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놓아주지 않겠어?”
강수가 자신의 몸을 끌어안고 있는 소연의 손을 조심스레 움켜쥐었다.
그에 손끝이 움찔, 하고 떨려왔지만, 끝내 소연은 강수의 몸을 끌어안고 있던 손을 풀고 자신에게로 등을 돌리는 강수를 대면했다.
머지않아 눈에 들어온 것은 속옷차림으로 자신을 마주하고 있는 소연의 모습.
“...뭐야, 그 몸은.”
소연을 마주한 그의 입에서 굳어진 목소리가 내뱉어졌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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