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화. 절망의 사도 -->
귀신, 괴물, 사신, 마귀.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기묘한 존재였다.
그 자는 허공에 갑작스럽게 나타나 그곳에 모여 있는 모든 이들을 비웃으며 속삭이길 반복했다.
-내가 절망의 사도라고 소개를 하긴 했다만, 솔직히 마음에 드는 별명은 아니야. 다른 녀석들도 ‘사도’라는 호칭은 쓰지 않거든. 하지만 그런 건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지. 중요한 건...이곳에 들어선 자네들이 앞으로 하게 될 일이 무엇인가에 관한 것이니까 말이야.
음침한 웃음소리와 함께 그들을 주시하고 있는 붉은 눈동자가 얇게 변해갔다. 마치 눈웃음을 짓는 것처럼 보였다.
-이곳은 던전이라고 부르는 공간. 이제부터 자네들은 탐사자가 되어 이 던전을 활보하고 다녀야 한다네. 그 과정에서 어떤 일이 벌어져도 상관은 없어. 누군가가 죽든, 누군가를 죽이던, 버리던 말이야. 하하하!
그를 주시하고 있던 이들의 몸이 형용할 수 없는 공포감에 몸서리를 치기 시작했지만 그것은 머지않아 이어지는 외침에 잠시 끊어지고 말았다.
“거 바쁜 사람 붙잡고 이런 식으로 굴지 맙시다!”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누군가의 고함소리가 울려 퍼졌다.
모든 이들의 시선이 소리를 지른 쪽으로 향해졌다.
양복을 걸치고 있는 중년의 회사원, 그는 손에 쥐고 있는 서류가방조차도 놓아버린 채 그림자를 향해 삿대질을 가하고 있엇다.
“시내에서 뭐 이벤트 같은 걸 하느라고 이런 식으로 CG인가 뭔가 보내는 거 같은데, 그런 짓은 사전에 알리고 하는 게 예의 아니여!?”
마치 지금의 상황에 대해서 전혀 파악을 하지 못한 것처럼, 그는 정체불명의 괴인을 향해 윽박을 지르고 있었다.
여유를 가지고 있는 처지라면 비현실적인 상황조차도 CG 등의 연출로 받아들이며 분위기에 녹아들었겠지만, 시내에 모여있는 모든 사람들은 바쁜 일상을 보내는 학생이자 일반인들이었다.
하물며 이런 ‘비현실적인 상황’은 바쁜 현대인들에게 있어서 신기함이 아닌, 자신들의 일을 방해하는 짜증을 느낄 것이다.
“그래 맞아! 아무리 깜짝 이벤트라도 그렇지!”
“이런 건 너무한 거 아니야!?”
끝내 비현실적인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한 그들의 입에서 아우성이 터져 나왔다. 중년 회사원을 시작으로 이 상황이 그럴싸하게 꾸며진 이벤트성 연출이라는 생각이 굳어져간 것이다.
그런 ‘가벼운 마음’이 후에 어떤 일을 초래하게 될 지를 알지 못한 채.
-어느 세계를 가더라도 이렇게 갑작스럽게 초대하면 이런 반응이 나오길 마련이지.
검은 그림자가 자신을 보며 아우성치는 이들을 향해 한탄을 내뱉었고.
-복잡하게 설명을 할 필요는 없지. 본보기로 한 녀석을 처리한다면 보통 고분고분 얘기를 들어주거든.
머지않아 그의 붉은 눈이 향해진 곳의 바닥에 붉은 원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그곳은 이전에 그에게 가장 먼저 소리를 지른 중년 남자의 발밑이었다.
“뭐야 이번엔 또.......우악!!”
붉은 원을 내려다보며 의아함을 내뱉는 그의 입에서 머지않아 비명이 새어 나왔고, 그 직후 무언가가 붉은 원에서 튀어나와 그가 있던 곳을 사정없이 헤집어버렸다.
원에서부터 튀어나온 것은 낡아빠진 쇳조각들이었다. 겉보기는 더럽고 녹슬었지만, 온갖 부분이 날카롭게 변해있어 살짝만 맞닿아도 살가죽을 단숨에 걸레짝으로 만들어버릴 것이다.
“히익...!?”
중년의 남자는 그것이 자신의 몸을 갈라내려 했다는 걸 뒤늦게 자각하고 비명을 질렀지만, 머지않아 그의 앞으로 나서는 누군가의 말에 감정의 표현이 굳어지고 말았다.
“이런 상황에서 객기 부리면 괜히 댁 명줄만 줄어드니 얌전히 있으시지.”
뒷덜미를 끌어 잡은 남자가 혀를 차며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적응하지 못한 중년의 남자가 그를 향해 발끈 화를 토해냈다.
“뭐, 뭔가 자네는!”
“누구긴, 도축업자한테 본보기로 도축되려는 돼지를 구해준 돼지지.”
뒷덜미를 잡고 있는 손을 격하게 내리치자, 중년 남자의 몸이 바닥에 처박혔다. 그에 열을 터트리려는 것도 잠시. 곧 그는 자신이 방금 전까지 서있던 곳에 위치한 가시로 시선을 주며 안색을 창백하게 바꾸었다.
솟아오른 가시들에 의해 자신의 서류가방이 갈기갈기 찢겨있었다. 안에 들어있는 다량의 서류들은 단숨에 조각나 바닥에 흩뿌려져 있었다.
“힘들게 한 업무까지 날려먹은 건 안타까운 이야기지만, 저걸 보고도 CG네 뭐네 떠들어댈 생각이라면 관두는 게 좋을 거야. 지랄맞은 이벤트라도 쓰이는 소품들은 다 진짜거든.”
그의 말을 듣던 중년 남자가 곧 자신의 앞에 내던져진 서류가방을 내려다보며 침을 집어 삼켰다. 방금 전까지 멀쩡하던 서류가방이 완전히 헤쳐있다. 그것이 단순한 환각이나 홀로그램 따위가 아니라는 것은 직접 만져보는 것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만약 남자가 빼내주지 않았다면 갈기갈기 찢기는 것은 서류가방이 아닌 자신이었을 것이다.
“뭐, 뭐야...이벤트 아니었어?”
“저거 서류가방...히익!”
“뭐야,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거냐고!”
주변에 있던 이들이 상황을 파악하고 당혹을 터트리기 시작했다.
누군가의 죽음이 되었을지도 몰랐던 사건은 그곳에 모여 있는 모든 이들에게 상황을 파악하게 만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흐음, 예상은 벗어났지만, 일단 모두가 상황을 파악하게 된 듯 하군.
수면위에 떨어진 물방울처럼 그들의 절망이 사방으로 뻗어나가 전염되는 것을 직시한 검은 형상이 뼈로 이루어진 손으로 턱을 쓰다듬으며 신음을 내뱉었다.
-그래, 이것은 꿈도, 시시한 광대들의 공연도 아니다. 모든 것이 생생한 현실. 이 자리에 초대된 너희들은 이제부터 이 공간을 돌아다니며 목숨을 건 생존을 이어가야 할 운명이다.
아직도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이들도 많았지만, 더 이상 그가 내뱉는 말이 이벤트성 대사나 헛소리가 아니라는 것 정도는 숙지할 수 있었다.
이 비현실적인 공간 속에서 자신들이 어떤 위험에 휘말릴지에 대한 것도.
-캬하하하하하하하하하!!!
하지만 그들이 표하는 감정은 머지않아 고에르의 입에서 뿜어져 나오는 광기어린 웃음에 집어 삼켜지고 말았다.
애초에 그에게 있어서 그들이 느끼고 있는 불안감이란 안중에도 없는 것이었다. 남아있는 것이라고는 이후에 벌어지게 될 일에 대한 기대 뿐.
-원래라면 이해하지 못하는 너희들을 위해 본보기로 몇몇을 제물로 바쳤겠지만, 아쉽게도 그럴 필요가 없어지고 말았으니...그냥 바로 본론으로 넘어가도록 해볼까?
낮은 목소리가 울리며 공간의 체온이 싸늘하게 변해갔다.
-너희들이 존재하는 이곳은 아까도 말했다시피 ‘던전(지하감옥)’이라고 부르는 공간. 다른 차원에서 유폐된 죄인들이 자리잡은 곳이다. 그들은 강하고, 미쳐있으며, 피를 탐하지. 그들은 이곳 어딘가에서 너희들이 오기를 기다리고, 또 누군가는 가만히 안주하지 못해 너희들을 직접 찾아다닌다. 너희들이 이해하기 쉽게 비유를 하자면...극악무도한 범죄자들이 앞으로 너희들이 향하게 되는 곳에 수 없이 존재한다는 뜻이다.
“버, 범죄자........”
한 순간 인파에 동요가 일었지만, 그들을 주시하는 괴인의 두 눈은 담담하기 그지없었다.
-그런 습격자들에게 맨몸으로 싸우라고 하는 것은 분명 가혹한 짓이겠지. 걱정하지 말거라, 던전의 출몰과 함께 일어난 기묘한 힘이 이 공간 곳곳에 수많은 ‘구호품’을 만들어내었으니 말이다.
앙상하게 마른 그의 손이 허공으로 향해지며 검은 불꽃이 피어오르고, 머지않아 그 불꽃 속에서 모든 이들의 눈에 선명히 보일 정도의 투박한 상자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돌아다니다보면 이런 상자들을 수 없이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때로는 그저 방치되어 있을 수도 있고, 때로는 죄인들이 소유하고 있을 수도 있다. 어떤 때에는 조건을 충족시킬 경우 얻을 수도 있지.
그의 말이 이어지던 중 상자가 멋대로 열리며 찬란한 금빛이 일어나는 검과 낡아빠진 도끼를 그들의 앞에 내세웠다.
-상자에서 나오는 물품들이 모두 같지는 않다. 각기 다양한 물품에 다양한 능력을 갖춘 장비, 그리고 모든 장비들의 급은 다르지. 당연한 것이지만 운이 나쁘면 나쁠수록 질 낮은 장비를 얻게 될테니, 생존에 불이익이 가해질 수밖에 없을 테지?
화르륵.
머지않아 상자에서 튀어나온 두 개의 무기가 검은 불꽃에 휩쓸려 증발해버렸다.
-물론 장비가 모든 것의 성패를 결정하진 못하지. 적응하지 못하면 결국 방금 전 너희들의 사이에서 소리를 질렀던 저 어리석은 자처럼 비참히 죽게 될 뿐이지만.
그의 손가락이 바닥에 주저앉아있는 중년 남자에게로 향해졌다. 창백한 얼굴로 바닥을 내려다보고 있는 중년 남자는 자신이 지목되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몸을 화들짝 떨었다.
-뭐, 죽지는 않았지만 말이야. 캬하하.
예정이 비틀렸음에도 그는 개의치 않고 넌지시 웃음을 터트리며 다시 시선을 옮겼다.
입에 담배를 물고 있는 한 남자, 그는 이곳에 모여있는 수많은 이들 중 유일하게 냉정을 유지하고 있는 자였다.
-저 어리석은 자를 구한 자네는 지극히 냉정하군. 혹시 이런 일에 익숙한 것인가?
고에르의 질문에 라이터의 불을 지피려던 그의 손짓이 잠시 멈춰졌다.
“굳이 따지자면 익숙한 쪽이겠지.”
-그렇군.
위압감에도 개의치 않고 대답하는 그의 반응에 고에르가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나는 자네같은 자들을 참으로 좋아한다네. 어떤 일이 있더라도 동요하지 않는 냉정함은 ‘생존’에 있어서 가장 큰 자원이라고 할 수 있으니 말이야.
그를 주시하고 있는 눈이 서서히 가늘어져갔다.
-이곳을 배회하다보면 많은 일을 맞닥트리게 될 거다. 망자들에게 먹혀 죽을 위험도, 고독하게 홀로 돌아다니는 위험도, 함정에 빠져 허우적대는 일도, 망자들의 속삭임에 미쳐버리는 일도....그 모든 위험을 냉정히 견뎌내고 살고, 살고, 살다보면 이곳 어딘가에 존재하는 출구를 찾아목숨을 부지할 수 있을 테지.
“추, 출구!?”
그의 말을 듣고 있던 몇몇 이들이 탄성을 내뱉었다. 죽을 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출구’라는 말은 한시라도 이곳을 벗어나고픈 자들에겐 한줄기의 빛과도 같았으니까.
하지만 정작 그를 대면하고 있는 남자는 출구 따위엔 아무런 관심도 주지 않고 있었다.
강수는 모든 이들이 두려워 마지 못하는 그 존재와 버젓이 눈을 맞대며 말했다.
“난 나가는 것보다 그 쪽 숨통을 끊어내는 쪽에 더 관심이 깊은데 말이야.”
“뭣!?”
그의 말을 듣고 있던 이들의 입에서 경악이 터져 나왔다.
그들과는 달리 비정상적으로 냉정하게 상황을 받아들이고 있긴 하지만, 눈앞에 있는 존재는 ‘초자연적인 존재’이다.
인간의 힘으로 어찌 할 수 없는 괴물일지도 모르는 존재를 죽인다니, 그 누구라도 헛소리라 생각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눈앞에 있는 괴물조차도 말이다.
-.나를 죽여?
그 말을 들은 고에르의 붉은 두 눈이 둥그렇게 변해갔다. 마치 이해하지 못할 말을 들은 사람처럼.
그 당혹 끝에 이어지는 것은 오만한 인간에게 벌이는 심판인가.
모든 이들이 조마조마하며 보고 있는 때, 고에르는 자신의 붉은 두 눈을 감으며 그를 향해 속삭이듯 말했다.
-그랬으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군.
이제까지의 광기마저도 접혀진 인자한 목소리가 주변의 동요를 한 순간 가라앉혔다.
========== 작품 후기 ==========
6월 26일 수정 완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