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장
신입생 환영회(2)
“수석으로 들어왔다더니, 머리가 좋은 모양이지? 어쨌든 한국대에 들어온 것을 축하한다. 그런 의미에서 한 잔 따라 봐.”
“그러죠.”
다른 테이블에선 선배가 후배에게 먼저 술을 따라 주는 분위기였지만, 술잔을 거만하게 내민 한지수를 향해 단한이 상큼하게 웃어 보이며 술을 따라 주었다.
그렇게 따라 준 술을 단번에 마신 그녀가 이번엔 단한의 잔에 술을 채워 주었다.
“술 마실 줄 알지?”
“그럼요.”
“마셔.”
“네.”
한지수는 뭔가 독특한 성격으로 여겨졌다.
한지수의 힘이 들어간 눈빛으로 보아 단한이 수석으로 들어온 것을 알고서 사전에 기를 꺾을 요량으로 일부러 거만하게 나오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렇게 선후배 간의 대면식이 끝나자 사회자가 다시 실내의 분위기를 띄우듯 나섰다.
“대면식은 잘 치르셨습니까?”
“네!”
“선배님들은 어떻게, 후배님들이 마음에 드십니까?”
“네!”
“아주 마음에 듭니다! 하하!”
“그럼 후배님들은 어떻습니까? 선배님들이 마음에 드신다면 한쪽 신발을 벗어서 머리에 올려 주세요.”
“와하하하!”
사회자의 말에 신입생들이 커다랗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술자리의 분위기를 화기애애하게 만든 사회자가 다시금 멘트를 이어 나갔다.
“이런, 선배님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군요. 역시 그럴 줄 알았습니다. 그게 우리 법대의 전통이거든요.”
“와하하하!”
생각보다 신입생 환영회의 분위기가 무겁지는 않았다.
후배들을 따뜻하게 격려하는 분위기에 가까웠다.
하지만 사회자의 다음 멘트가 이어지자 그것이 착각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분위기를 띄웠으니, 이제 슬슬 본격적으로 시작해 보죠. 신입생 여러분의 입학을 축하하기 위해 지금부터 선배님들이 술을 먹음직하게 제조할 것입니다. 만드는 방법은 직접 보시면 알 겁니다. 비위가 약해 토하는 분들이 올해는 없기를 바랍니다. 여자 후배라고 봐주지 않습니다. 공동체 의식을 함양하기 위한 것이니 전원 참석해야 합니다. 양동이의 술이 모두 떨어질 때까지 계속 이어질 겁니다.”
그렇게 사회자의 멘트가 끝난 순간이었다.
환영회에 참석한 순간부터 연신 단한이 자리한 곳을 뜨거운 눈길로 주시하던 강혁이 손을 번쩍 들었다.
“질문 있습니다. 저는 강혁이라고 합니다. 전통을 지키는 것도 의미가 있겠지만, 올해는 조금 다른 방법으로 술을 마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흐음, 역시 이의를 제기하는 후배님이 있군요. 다른 방법이라면 무엇을 말하는 거죠?”
강혁은 선배들의 시선에도 기죽지 않고 자신의 주장을 밝혔다.
“이번에 수석으로 들어온 대단한과 제가 신입생 대표로 술 내기를 하는 겁니다. 물론 술의 제조는 선배님들 마음대로 하시고요.”
“그러니까 단둘이서 배틀을 뜨겠다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제 조건을 받아 주신다면 감사의 뜻으로 오늘 환영회에 들어가는 모든 비용은 제가 처리토록 하겠습니다.”
“오호? 상당히 돈이 많은 모양이군요.”
“이번에 한국대 입학 선물로 용돈을 제법 두둑하게 받았거든요.”
강혁의 말에 선배들이 관심을 보였다.
안 그래도 법학과 수석으로 들어온 단한을 어떻게 하나 단단히 벼르고 있던 터였다.
그런데 이번에 차석으로 들어온 강혁이 알아서 단한에게 술 내기를 제안한 것이다.
“그거 재미있겠는데?”
“맞아, 전통은 깨라고 있는 것이니.”
“강혁 저놈, 이번에 차석으로 들어온 놈 아냐?”
“아마도 술로 수석을 차지한 대단한을 눌러 보겠다는 심산 같은데?”
“하긴 꼴등보다 서러운 것이 바로 2등이지. 저놈의 심정이 이해된다. 내가 고등학교 다닐 때 그랬걸랑.”
“그나저나 대단한이 술 내기를 하려고 할까?”
웅성웅성.
술렁이는 실내의 분위기에 단한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강혁이 분위기를 주도하긴 했지만, 차라리 잘되었다는 생각도 없지 않았다.
‘이번 기회에 저놈을 확실하게 눌러 버려야겠군. 다시는 시비를 걸지 못하도록 말이지.’
단한은 자신을 질시하는 강혁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무시하려고 했다.
하지만 앞으로 이런 식으로 번번이 걸고넘어진다면 그것도 곤란했다.
“좋습니다. 강혁과 술 내기를 한번 해 보죠.”
단한이 강혁의 내기를 받아들이자 분위기가 더욱 고조되었다.
특히 술을 잘 마시지 못하는 신입생들은 모두 두 손 들고 환영하는 분위기였다.
또한 선배들도 신입생 환영회에 들어가는 비용이 굳으니 나쁠 이유가 없었다.
돈을 떠나서 자못 흥미로운 내기였다.
사회자가 상황을 정리하듯 나섰다.
“그럼 신입생을 대표하여 이번에 수석을 차지한 대단한과 차석인 강혁의 술 내기가 있겠습니다. 둘이 마실 술의 제조는 고 학번 선배님들께 맡기도록 하죠.”
이어 테이블에 커다란 양동이와 술이 박스째로 등장했다. 선배들 다섯이 술을 제조하기 위해 나왔다.
그중 단한과 인사를 나눴던 한지수도 있었다.
남자 선배가 넷, 여자 선배로는 한지수가 유일하게 끼어 있었다.
법학과에서 그녀의 입지가 제법 상당한 모양이었다.
그때 서연이 다가와 단한의 귀에 속삭이듯 말했다.
“강혁 쟤, 완전 웃기네? 왜 너를 걸고넘어져?”
“안 그래도 신경 쓰였는데 차라리 잘되었지, 뭐.”
“맞아, 확실하게 눌러 버려. 다시는 까불지 못하게.”
“알았어. 걱정하지 말고 들어가서 구경이나 해.”
단한의 말에 서연이 다시 자기의 자리로 돌아갔다.
드디어 선배들의 술 제조가 시작되었다.
주루룩! 콸콸콸!
일단 양동이에 소주와 맥주를 무분별하게 마구 들이부었다.
커다란 양동이가 술로 가득 차자 이번엔 남자 선배 하나가 신고 있던 양말을 벗어 양동이에 집어넣고는 휙휙 휘저어 댔다.
“으윽! 뭐, 뭐야?”
“저걸 어떻게 마시라고?”
지켜보고 있던 신입생들의 표정이 허옇게 굳어졌다.
하지만 그건 양반이었다.
이번에 다른 선배 하나가 술을 채운 양동이에 얼굴을 가져다 대더니 머리카락을 탈탈 털듯이 흔들어 댔다.
척 보기에도 며칠 머리를 감지 않은 듯, 선배의 머리는 지저분했다.
허연 비듬이 양동이 속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렇게 술의 제조를 마친 순간이었다.
한지수가 선배들을 대표해 맥주잔에 술을 가득 채우더니 그걸 그대로 원샷했다.
‘정말 독특한 선배다.’
술렁이던 신입생들의 분위기가 잠잠해졌다.
그렇게 분위기를 잡자 선배들이 일제히 짜기라도 한 듯 테이블을 박자를 맞추듯 손바닥으로 탕탕! 치며 대단한과 강혁의 이름을 외쳐 댔다.
“그럼 오늘의 하이라이트! 대단한과 강혁의 술 배틀이 있겠습니다! 게임은 둘 중 하나가 고꾸라질 때까지 진행될 것입니다!”
“와아아아!”
게임의 시작을 알리자 자리를 박찬 선배들과 신입생들이 양동이가 놓인 테이블로 우르르 몰려들었다.
앞쪽을 차지하지 못한 사람들은 의자를 놓고 서서 구경하기까지 했다.
단한이 옆의 강혁을 쳐다봤다.
술의 제조를 직접 보았음에도 각오한 듯 표정이 자못 결연해 보였다.
그때 선배들을 대표로 술을 원샷했던 한지수가 둘에게 술을 한 잔씩 떠서 넘겨주자, 사회자가 중계에 나섰다.
“그럼 첫 잔 시작하겠습니다.”
비위가 약한 사람이라면 결코 술을 넘기지 못할 터.
결연한 표정을 짓고 있던 강혁이 먼저 술잔을 입에 가져가더니 벌컥벌컥 단숨에 들이켰다.
이어 단한도 피식 웃고는 술잔을 단숨에 비웠다.
비록 선배들이 술에 이상한 짓거리를 했어도 수력이 6성에 이른 그였다.
아무리 더러운 술을 마셔도 얼마든지 정화가 가능했다.
하지만 강혁은 그러지 못할 터였다.
그럼에도 용기 있게 술잔을 비운 강혁의 모습에 내심 놀라운 마음도 들었다.
그리고 어느덧 열 잔째에 이르렀다.
자연스럽게 실내는 두 패로 나뉘어졌다.
단한을 응원하는 자들과 강혁을 응원하는 자들로.
“대단한! 대단한!”
“강혁! 강혁!”
응원 소리에 강혁이 다시금 열한 번째 술잔을 들어 입으로 가져갔다.
빈 잔을 내려놓은 강혁의 얼굴은 시뻘겋게 달아오른 상태였지만, 단한에게 질 수 없다는 생각 때문인지 눈빛은 여전히 이글거렸다.
강혁에 비해 단한의 얼굴색은 비교적 정상에 가까웠다.
술을 마셔도 자동적으로 정화가 되어 취기가 돌지 않은 것이다.
그랬기에 애초부터 둘은 상대가 되지 않았지만, 그걸 강혁이 알 리 없었다.
시간이 흘러갔다.
“스무 번째 잔입니다!”
강혁의 초점이 흐려진 듯했다.
그럼에도 버티고자 안간힘을 썼다. 제법 정신력이 강한 놈임은 분명했다.
하지만 술이 채워진 잔이 강혁에게 건네진 순간이었다.
쿠당탕!
강혁이 그만 테이블에 고꾸라지고 말았다.
여기까지 온 것만 해도 대단했다.
“와아아! 대단한의 승리다!”
“박빙이었는데, 아쉽군.”
“저놈은 성적도 수석인데, 술까지 톱이야.”
“확실히 난놈이네.”
단한을 응원하던 사람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즐거워했고, 강혁을 응원하던 이들은 아쉬운 듯 쓰러진 강혁을 쳐다봤다.
그렇게 신입생 환영회는 단한과 강혁의 술 내기를 끝으로 막을 내렸다.
그런데 이곳의 비용을 처리하겠다고 한 강혁이 저렇게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단한이 한지수에게 카드를 건넸다.
“이걸로 여기 계산해 주세요.”
“네가 왜?”
“제가 이겼잖아요. 저놈, 진 것도 서러운데 돈까지 내려면 억울할 테니까요.”
“비용이 꽤 많이 나올 텐데, 괜찮겠어?”
“네. 계산하고 카드나 가져다주세요.”
한지수가 단한의 얼굴을 물끄러미 주시했다.
술을 그렇게 마시고도 멀쩡한 단한이 신기하게 여겨진 것이다.
새내기인 그의 기를 술로 꺾어 보려 했던 그녀는 기분이 씁쓸했다.
게다가 이곳의 비용을 계산까지 하다니.
그렇게 그곳의 계산까지 말끔하게 처리한 단한이 서연과 함께 호프집을 나왔다.
한편으론 법학과에 새로운 전설이 생긴 셈이었다.
술을 잘 마시면 공부도 잘한다.
과연 정말로 그럴까?
다음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