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새로운 인연(2)
“둘 다 인물들이 아주 반듯하군요.”
하긴 교내에서 최고의 꽃미남과 꽃미녀로 명성이 자자한 단한과 서연이긴 했다.
중년 사내의 말에 교장이 코를 실룩거리며 더욱 열을 올려 입을 열었다.
“인물도 그렇지만, 아주 품행이 바르고, 학교생활도 성실히 하는 학생들입니다. 게다가 이번 기말고사에서 대단한 학생이 전교 1등을 차지했고, 서연 학생은 전교 2등을 했습니다. 저희 학교의 수재들이죠.”
교장의 말을 들은 중년 사내가 진심으로 감탄하듯 둘을 쳐다봤다.
“정말로 훌륭한 학생들이로군요.”
“제가 생각하기에도 그렇습니다.”
단한과 서연을 중년 사내에게 자랑하듯 소개한 교장의 얼굴은 매우 뿌듯해 보였다.
둘 다 공부도 잘하는 데다 외모까지 출중했다.
어디에 내놔도 빠지지 않는 둘이었기에 절로 자부심이 느껴진 것이다.
‘왜 낯이 익은 느낌이지?’
교장이 둘을 소개하는 동안 단한은 이상하게도 중년 사내의 얼굴이 익숙하다고 느꼈다.
어디서 보았는지 기억을 떠올리던 순간이었다.
‘가만, 이 아저씨는…….’
얼마 전 한강 고수부지에 놀러 갔다가 풀밭에 쓰러져 있던 중년 사내를 구한 적이 있었다.
그때는 중년 사내가 눈을 감고 쓰러진 상태였기에 지금과는 분위기가 달라 보였지만 그 사내가 분명했다.
역시 옷차림새가 예사롭지 않더니, 보통 사람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이상하게도 그의 얼굴이 익숙하게 느껴진 게 의문이었지만.
‘그나저나 국회의원씩이나 되는 이가 왜 강변에 혼자 쓰러져 있었던 거지?’
지금은 밖에 경호원까지 서 있는 상황이었다.
그때 중년 사내에게 둘을 소개했던 교장이 만면에 미소를 띠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저는 잠시 나가 있겠습니다. 천천히 두 학생과 얘기를 나누시지요.”
“이거, 불편하게 해 드려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이렇게 저희 학교를 방문해 주신 것만으로도 영광입니다. 허허.”
교장이 밖으로 나가자 중년 사내가 빙그레 웃으며 소파를 가리켰다.
“좀 앉게나.”
“네.”
“예.”
서연도 중년 사내가 누구인지 기억이 났는지 단한을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쳐다보다가 소파에 앉았다.
‘우리를 용케 찾아냈군.’
연락처를 알려 주지 않은 상황임에도 결국 둘을 찾아 학교를 방문한 사내였다.
하긴 국회의원이나 되는 자였으니 둘을 찾고자 한다면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을 터였다.
그렇게 두 사람이 맞은편에 자리하자 사내가 묻듯이 입을 열었다.
“두 학생은 내가 누구인지 기억나나?”
“일전에 강변에서 보았던 분과 비슷하네요.”
국회의원을 살려 낸 셈이었지만, 단한은 사내에게 아부를 떨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반듯하게 눈을 맞추고 허리를 꼿꼿하게 편 단한의 모습에 사내의 눈빛이 ‘요놈 봐라?’ 하는 이채를 발했다.
하지만 정치가여서인지 그런 감정을 순식간에 지우곤 이내 웃는 낯으로 입을 열었다.
“나를 몰라볼 줄 알았더니 제대로 알아보는군. 맞네, 내가 바로 그 사람이라네.”
“건강은 괜찮으신가요?”
단한이 그리 말하면서 슬쩍 투시력을 시전했다.
사내의 심장의 박동은 활기찼다.
그리고 머리 쪽도 미세한 혈흔이 남아 있을 뿐 비교적 양호한 상태였다.
혈흔은 약물로도 능히 치료가 될 터였기에 의사도 사내가 돌아다니는 것을 허락했을 것이라 생각했다.
“학생 덕분에 이렇게 건강을 찾았다네. 의사 양반의 얘기론, 그때 학생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나는 죽은 목숨이었을 거라고 하더군.”
단한은 건강해진 사내를 대하니 기분이 좋기는 했지만, 혹시나 머릿속의 혈관을 복구한 것을 눈치챘을까 우려되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때 제가 한 일은 그리 없습니다. 그저 심폐 소생술을 알고 있었기에 조치를 취했을 뿐입니다.”
사내는 단한을 대하면 대할수록 기분이 자못 묘했다.
고등학생임에도 마치 거목처럼 위압감이 느껴졌던 것이다.
“심폐 소생술을 알고 있다고 해도 실제 상황에서 처치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네. 게다가 그때 다른 사람들은 모두 나를 방관하듯 방치한 상태였을 거라네. 정말이지 학생의 조치가 아니었다면 아주 위험했을 게 분명하네.”
보아하니 사내는 단한이 머리를 치유한 일은 모르고, 심폐 소생술로만 도움을 주었다고 알고 있는 듯했다.
‘하긴 병원에서도 뭔가 이상하다 의혹은 일겠지만, 내가 머릿속을 치유한 것을 알아내긴 무리일 거야.’
생사금침을 이용하여 사내를 치료한 사실이 알려지면 오히려 곤란했기에 한편으론 다행이었다.
“국회의원님이라고 들었습니다.”
“맞네.”
“이상하군요. 그런 분이 왜 강변에서 그런 봉변을 당하신 건가요? 밖에 보니 경호원들도 있던데요.”
단한의 말에 사내가 멋쩍게 웃어 보였다.
사실 그때 사내가 실려 간 병원이 발칵 뒤집혔다. 사내의 신분이 드러난 탓이다.
사내의 비서가 병원에 단단히 입단속을 시킨 덕에 다행히 소문이 세간에는 퍼지지 않았다.
그때의 일을 회상하며 사내가 씁쓸한 표정으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어쩌다 강변을 지나치게 되었다네. 좀 걷고 싶다는 생각에 경호원들을 차 안에 있도록 하고, 한강 고부수지를 천천히 산책하게 되었지. 노을도 아름답고, 불어오는 바람도 상쾌하기에 그만 치기가 일었네. 편의점에서 캔 맥주라는 것을 사서 풀밭에 앉았지. 마치 젊은 시절로 돌아간 듯이 여겨져 즐거웠다네. 한데 차가운 맥주를 들이켜던 순간, 갑자기 머리가 지끈거리더니 앞이 깜깜해지더군. 그러곤 그 뒤로 기억이 없다네.”
사내의 얘기를 듣고 나자 사내가 그곳에 혼자 쓰러져 있었던 것이 이해가 되었다.
만일 그때 단한과 서연이 그 길을 지나치지 않았더라면 사내를 이렇게 마주하게 되는 일도 없었을 터였다.
사람의 인연이라는 것이 참으로 묘했다.
“그렇게 쓰러진 나의 모습을 사람들은 술에 취해 풀밭에서 잠든 것으로 오인했을 것이네.”
“실은 처음에 저희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나의 상태가 이상하다고 여긴 건가? 다른 사람들은 다들 모른 척 그냥 지나갔을 텐데.”
궁금해하는 사내의 모습에 단한이 침착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공치사를 하는 것은 내키지 않았지만, 상황에 대한 설명은 필요하리라 여겼다.
“일단 쓰러진 분의 안색이 몹시 창백해 보인 것이 신경이 쓰였습니다. 그리고 주위에 맥주 캔이 하나라는 것도 뭔가 이상하게 여겨졌습니다. 맥주를 다 마신 상태도 아닌 듯 보였고요. 그런 상태에서 술에 취해 잠든 것이라 하기엔 뭔가 아닌 듯싶었습니다. 저희가 근처에서 얘기를 나눔에도 전혀 뒤척이는 기색도 없어 보였고요. 그래서 맥을 짚어 문제가 있음을 발견했고, 119에 구급 요청을 했습니다. 그런데 갈수록 사지가 뻣뻣하게 굳더니 코끝에서 숨 쉬는 기척이 사라졌습니다. 그래서 제가 알고 있던 심폐 소생술을 시도하게 되었던 겁니다.”
“그렇게 된 거였군.”
사내가 단한의 말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쓰러진 상태였으나 그때의 상황이 눈에 훤히 그려진 것이다.
참으로 침착한 학생임이 분명했다.
게다가 보면 볼수록 묘하게 사람을 끌어당기는 매력을 갖고 있었다.
사람을 만나 이런 기분을 느낀 적은 아주 적었다.
인재가 절실한 사내로선 인연을 이어 나가고 싶은 존재이기도 했다.
그렇게 생각한 사내가 속으로 피식 실소를 흘렸다.
사실 자신을 살려 준 대가로 고마움을 표시하고자 품 안에 돈 봉투를 준비해 왔다.
그것이 왠지 부끄럽게 여겨진 것이다.
장차 위대한 인물이 될지도 모르는 이런 아이를 돈으로 처리하려고 했다니.
사내가 이번엔 서연을 웃는 낯으로 쳐다봤다.
“학생이 119에 전화를 걸어 주었다고 들었네.”
“그렇습니다.”
“덕분에 병원에 빠르게 도착하여 제대로 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네. 나에게 둘은 은인이나 마찬가지네.”
“아닙니다. 할 도리를 했을 뿐입니다.”
서연의 공손한 말에 사내는 흐뭇해 보였다.
남학생 못지않게 여학생도 매력이 넘쳤다.
둘이 강변에 함께 있었던 것으로 보아 사귀는 사이가 아닐까 싶었다.
하여간 사내는 둘과의 만남에 기분이 좋았다.
이제까지 만나 본 사람들은 열이면 열 자신의 앞에서 잔뜩 위축되었다. 사실 이 학교의 교장만 해도 그렇지 않았던가.
하지만 눈앞의 둘은 자신을 대함에 있어서 전혀 위축되지 않았고, 태도도 반듯했다.
어린 나이임에도 둘에게서는 귀하디귀한 명품 도자기처럼 은근히 기품마저 느껴졌다.
사내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돈 봉투로 둘을 대하려던 마음이 싹 달아났다.
사내는 진심을 담아 둘을 향해 정중히 고개를 숙여 고마움을 표시했다.
때론 물질보다 마음이 더욱 소중한 법이었기에.
“고맙네.”
사내의 인사치레에 단한과 서연도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마주 인사를 해 보였다.
“정정하신 모습을 보니, 저희도 기쁘답니다.”
단한은 사내의 인사에서 진심을 느꼈다.
국회의원이라고 거들먹거리며 돈 봉투나 건넬 수도 있었지만 사내는 그러지 않았다.
그렇게 인사치레를 한 사내가 다음엔 품 안에서 명함을 꺼내어 둘에게 건넸다.
“이건 내 명함일세.”
“……?”
단한은 그가 갑작스레 명함을 건네 다소 뜬금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내의 말이 다시 이어졌다.
“대외적으로 사용하는 명함이 아니라, 소중한 사람들에게만 돌리고자 특별히 만든 거라네.”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단한은 사내에게 받은 명함을 살피듯 바라봤다.
제법 신경 써서 만든 듯 질감이 좋은 명함이었지만, 의외로 명함에 적힌 내용은 간략했다.
달랑 사내의 이름과 휴대폰 번호만이 인쇄되어 있을 뿐이었다.
주소 같은 것은 전혀 없었다.
사내의 이름을 가만히 내려다보던 단한의 눈빛이 짐짓 굳어졌다.
‘가만있자… 권순후라면?’
몇 번 보지도 않았음에도 사내의 얼굴이 어딘가 익숙했던 것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훗날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될 존재였던 것이다.
예전과 똑같이 미래가 흘러간다면 눈앞의 이 사내가 대한민국 공직에서 최고로 높은 사람이 될 터였다.
하지만 서연은 명함을 받아 들고는 흔들림 없이 그저 사내의 말을 경청했다.
‘하긴 연이에게 이자에 대한 기억이 남아 있을 리가 없지.’
사내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여겼다.
자신이 미래에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되리라곤 꿈에도 생각지 못하고 있을지도.
“공부도 잘하고, 인물도 출중한 두 사람이니 굳이 나의 도움이 없어도 크게 성공하리라 믿네. 하나 혹시라도 살면서 나의 도움이 필요한 일이 있으면 주저하지 말고 언제든지 그 명함에 적힌 번호로 연락을 하게. 내 살아 있는 한 최선을 다해 도움을 줄 수 있도록 할 것이네.”
“신경 써 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나중에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래, 반드시 연락을 주게나.”
뜻하지 않게 거물급 인사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
세상이 크게 달라지지 않는 한 사내의 앞날은 탄탄대로일 터였다.
그랬기에 어찌 보면 단한에게는 조력 가문 못지않게 도움이 되어 줄 인연이기도 했다.
다음화에 계속…